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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사도행전의 말씀 3,13-15.17-19>
그 무렵 베드로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3 “여러분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고, 그분을 놓아주기로 결정한 빌라도 앞에서 그분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이사악의 하느님과 야곱의 하느님, 곧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14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15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17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
19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 제2독서
“그리스도는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요한 1서의 말씀 2,1-5ㄱ>
1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3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4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5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 복음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24,35-48>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35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돌판에 새겨 기억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마음보다 훨씬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아니 그 허물과 잘못을 없애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크신 사랑을 가슴에 담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옛말에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두지 말고 혹 새기려면 모래에 새기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돌판에 새겨 잊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빨리 잊고, 잊어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되씹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잊을 것은 빨리 잊어야 합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최선을 다해 더 많이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당신을 내맡기신 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구세주라고 생각했건만 어찌 힘없이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가?
그를 피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언제 어느 때 그 불똥이 튈지를 모르는 상황인 만큼 제자들도 도망가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과거의 허물을 묻지 않으시고 두려움을 넘는 평화를 주셨습니다.
오히려 다시 살아난 당신을 유령을 보는 줄로 알고 놀라며 믿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손과 발을 만져 보라 하시고, 음식을 잡수시며 무뎌진 마음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기까지 그분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알아 뵙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제자들이 왜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봤을까요?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무엇으로 마음이 단단히 굳어져 있으면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 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유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예수님을 못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만 크게 되면 아는 것이 힘이요, 능력이 되어야 하는데 아는 것이 오히려 병입니다.
내가 아는 게 다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허물은 기억하지 않으시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변함없는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
(이사 43,25)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이사 55,8.9)
이사야 예언자 말씀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 우리를 평화와 사랑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베푼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여 돌판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그분이 행한 방법으로 자비와 사랑을 베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되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사랑은 평화를 얻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하고 이르셨습니다.
과거가 문제가 아니라 오늘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하고 또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지금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회개는 허물을 기억하지 않는 “‘한없이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다시 발견하는 데서 얻어지는 결실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십자가 옆의 두 도둑 중 하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고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루카 23,42)
그래서 그는 죽음의 십자가 위에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주님의 응답을 얻었습니다.
옛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께로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허물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요!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제발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기억하고 남의 허물은 잊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동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의학, 신학, 법학, 수학, 천문학 등 다양하게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가 성직자로서 죽음을 앞에 두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유언을 따라 그의 묘지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졌습니다.
“나는 바오로가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오른쪽 강도에게 주신 용서(구원)를 원할 뿐입니다.”
우리가 용서받고 산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주님 앞에서의 용서는 구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을 위한 용서를 얻어야 하고 또 그 전에 용서해야 합니다.
누구의 허물을 기억하기 전에 주님 앞에 나 자신의 흠 없는 삶을 봉헌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으로 두려움을 몰아내고 평화를 찾기 바랍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필리 4,6-7)
저놈은 나를 배신한 놈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데, 손해를 끼친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하며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아픔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주님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루카 24,47)고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큰 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체벌을 하면 안 되는 이유: 자녀는 어차피 부모를 닮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부활을 믿게 하십니다.
당신이 영적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부활하셨음을 믿게 하시기 위해 생선토막을 먹어 보이십니다.
그리고 성경을 설명해주시며 구약의 모든 예언이 당신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신약에서 완성되는 그리스도의 구원이 구약에 모두 예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듯 당신의 삶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삶’이었음을 밝히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사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내용이 다 이것이라 굳이 예를 들 필요는 없겠지만, 아담과 요나의 예언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빼내어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원하신다는 것을 아셨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깨어난 것처럼 당신도 부활하실 것임을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요나 예언자가 니네베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머물러야 했듯이 예수님께서도 세상을 회개시키기 위해 땅속에 그렇게 묻혀 계셨어야 했습니다.
결말은 니네베의 회개였습니다.
니네베가 교회라고 본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회개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으로 나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결정됩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구약을 성취하기 위해 사셨다면, 우리는 신약을 성취하려는 마음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구약은 예수님을 향한 아버지의 뜻이었고, 신약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매를 아끼면 자녀를 망친다는 말이 많은 나라의 속담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매를 때린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매를 때리지 않으면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매를 때린다는 말은 “넌 나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란 말이 들어 있고, 그렇게 체벌을 많이 당한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됩니다.
이렇게 자존감이 떨어지는 존재는 스스로 자신의 고귀함을 채우려 하는데 이것이 자존심입니다.
이 자존심은 돈이나 쾌락, 명예로 채워집니다.
유대인 600만 명,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를 내게 만든 전쟁을 일으킨 히틀러는 어떤 부모에게서 자랐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와 순종적이기만 한 어머니에게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사회적인 면에, 어머니는 가정적인 면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니 히틀러는 사회적으로는 폭력적으로, 대내적으로는 순종적으로 사람들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열등감을 극복하려 한 것입니다.
체벌은 절대로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자녀는 부모를 닮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닮으려는 것은 ‘본능’입니다.
생존본능입니다.
만약 전갈이 개구리나 인간을 닮으려 한다면 어떨까요?
어디에서나 소외당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사랑을 받지 못하면 죽고 싶은 마음만 생길 것입니다.
따라서 무리 생활이 필요한 어떤 동물이건 자신의 부모를 찾아서 닮고자 하는 것은 생존본능입니다.
그러니 자녀가 말을 안 들으면 부모 자신이 모범을 보이는지 살펴야지 자녀 탓을 할 것은 아닙니다.
임영웅의 큰아버지는 2020년 3월 12일, 미스터 트롯 결승전에서 임영웅이 어떤 노래를 부를지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1995년 3월 12일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니 아버지의 애창곡인 ‘배신자’를 부를 것을 예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임영웅은 아버지가 5살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애창곡을 부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아버지가 옳았음을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본능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춘기 전까지만 해당합니다.
이후에는 자녀들이 더는 부모를 닮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신들의 참 창조자가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때 기필코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게 해야 합니다.
요즘 박수홍 씨 이야기가 뉴스에 많이 올라옵니다.
그는 결혼할 여자를 어머니께 데려갔는데 어머니가 반대를 하여 여자와 헤어졌습니다.
지인들에 의하면 둘이 잘 맞았고 헤어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아직 육적인 부모에게 독립하지 못한 자녀는 결국 자신에게도 가족에게도 커다란 슬픔을 안겨줄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에게 주님이 참 부모임을 믿게 하지 못한다면 부모에게도 결국 손해란 뜻입니다.
예수님도 ‘구약’, 즉 아버지의 말씀을 성취하며 사셨습니다.
우리가 성취하며 살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삶, 즉 신약입니다.
이 모범을 찾지 못한 사람은 부모 없이 늑대에게 길러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디팩 쵸프라는 자녀에게 어떤 예언을 주었을까요?
그는 아들 둘에게 사람들을 위해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을까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다 잘 될 것이라 믿게 한 것입니다.
희생을 통한 사랑만이 죄를 없앱니다.
큰아들은 학교도 제대로 안 가고 사람들을 도와주었고, 작은아들은 꼴찌하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렇게 두 아들은 성장하여, 큰아들은 큰 사업가가 되었고 작은아들은 아버지처럼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자녀는 어쩔 수 없이 부모의 예언이 옳음을 증명하며 살기 때문에 항상 내가 이웃 사랑만이 유일한 진리로 가르치며 살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 중심, 회당 중심, 랍비 중심’으로 삽니다.
자신들은 하느님 백성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회당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고 모든 대소사를 랍비와 상의합니다.
우리 부모들도 자녀들을 하느님 예언을 실현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면 하느님을 아버지라 인정하게 하고, 이를 위해 성당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며, 사제들에게 하느님 뜻을 먼저 묻는 신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는 부모를 통해 자연적으로 참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고 분명 십자가를 거치겠지만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우선 먹고살아야 했으므로, 다시금 전에 종사하던 생업으로 복귀했습니다.
한바탕 꿈이었나 생각하며 다시금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고기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강렬했던 예수님과의 만남, 그분과 동고동락했던 공생활 기간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작업이 끝나면 제자들은 호숫가에 둘러앉아 생선을 구워 먹으며 스승님에 대한 걱정, 죄책감, 송구함을 주제로 두런두런 대화를 이어갔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전해집니다.
엠마오 길에서 그분을 만난 두 제자는 신명이 난 나머지, 목소리를 높여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었습니다.
다들 엠마오 제자들의 목격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 때, 누군가가 슬그머니 제자들 등 뒤에 나타났습니다.
돌아보던 제자들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세상에!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온화한 표정의 예수님께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며 더 가까이 다가서십니다.
의혹으로 가득한 제자들과 직접 접촉하십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그래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청하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제자들이 그분께 큼지막한 생선 소금구이 한 토막을 건네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맛있게 잡수셨습니다.
참으로 자상하고 친절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하느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실 부활 예수님께서, 한 인간이 건네시는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셨습니다.
아직도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전하기 위해, 한 인간과 마주앉아 인간의 음식을 드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이요 크나큰 자기 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부활 이전의 예수님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시고, 육의 세계를 넘어서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 신앙의 깊이가 얕은 제자들을 영적 동반하시기 위해 또다시 자신을 낮추십니다.
인간들 사이로 육화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인간들과 친히 접촉하시고 소통하십니다.
그들이 건네는 하찮은 물고기 한 토막을 맛있게 받아 드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 인간 존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고 지극정성으로 사랑하십니다.
또 다시 우리를 당신 구원 사업의 파트너로 선택하십니다.
그런 그분의 뜨거운 사랑은 불신과 의혹투성이인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들의 나약함을 강건함으로 바꾸십니다.
마침내 그들을 주님 부활의 당당한 증인으로 서게 하십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날 때 더이상 우리 안에 어둠이 머물 수 없습니다.
더이상 낙담하거나 슬퍼하지 않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활기찬 사랑에 힘입어 담대해지고 당당해집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고 뜨거운 마음으로 예수님 부활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 모든 변화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에 끼어드실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될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 살레시오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깨닫게 하시는 주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루카 24,45)
오늘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백성들에게 설교하는 내용인데, 그는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라고 전혀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백성들에게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는 베드로가 사실은 이 백성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곧 마찬가지로 무지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도망쳤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니 이 말은 나는 잘못이 없는데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는 남탓이 아니라 자기도 같은 사람이라는 공동 죄 인식에서 한 얘기이고, 그래서 베드로는 백성들을 "형제 여러분"이라고 부릅니다.
마태오 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는 제자들 중 예수님의 정체를 제대로 안 유일한 존재였고, 그래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에 예수님으로부터 그것은 인간 누구가 알려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것이라는 칭찬도 받고 베드로를 반석 삼아 당신 교회를 세우겠다는 약속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그럴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가 '너는 사탄'이라는 호된 질책을 받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까지는 알았지만 그 그리스도가 힘 없이 그리고 비참하게 죽을 운명이라는 것까지는 몰랐고 그래서 예수께서 맥없이 죽게 되셨을 때 배반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배반하고 죄책감과 절망감에 빠져있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당신이 죽은 그 예수이고 그러나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갖은 애를 쓰시는, 곧 당신의 손발을 보여주시고 빵도 같이 잡수시는 내용이 오늘 복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은 제자들이 깨닫게 하시려고 갖은 애를 쓰시고, 이런 내용의 복음을 우리가 지나쳐 읽지 않고 찬찬히 읽는다면 깨닫게 하려고 애쓰시고 공들이시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깨닫게 하시려고 애쓰시는 주님 사랑에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응답은 우리의 마음을 열고 깨닫는 것이고,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생명의 영도자를 다시 죽이는 일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베드로가 무지하여 주님을 죽였다고 나무라는 예루살렘 백성들처럼 우리도 생명의 영도자를 죽일 수 있습니다.
물론 알고서 원수 죽이듯 죽이지는 않을 것이지만, 깨닫게 하시려고 그리도 애쓰시는 주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것이 또다시 죽이는 것임을 모르고 그럴 수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깨닫게 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에 우리의 마음을 열 것이고, 수난과 부활의 주님 사랑을 느낄 것이며,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는 오늘 주님의 마지막 말씀처럼 주님 사랑의 증인, 수난과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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