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에서 내봉촌으로
이월 하순 넷째 토요일은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몇몇 지기에게 전하는 아침 시조는 ‘보름날 저잣거리’로 보냈다. 전날 마산역 광장 노점을 지나다 봤던 묵나물과 잡곡과 보름으로 쓰일 호도와 땅콩 사진을 곁들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이른 시간 아침밥을 먹었다. 어릴 적 형제와 둥근상에서 오곡밥을 묵나물과 아주까리 잎에 싸 먹고 귀밝이술을 한 모금 입에 댄 기억을 떠올려봤다.
아침 식후 산책을 나서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101번 시내버스로 동마산병원 앞으로 나가 함안 칠서로 가는 농어촌버스로 갈아탔다. 주말이라 그런지 근교로 출근하는 회사원이 없어 차내는 한산했다. 칠원 읍내에서 칠서 공단을 거쳐 간 계내삼거리에서 할머니 두 분과 같이 내렸다. 계내삼거리를 내내(柰內)촌이라고도 하는데 지명과 연관된 역사 자료를 모은다는 펼침막이 눈길을 끌었다.
내내에서 남지철교로 가는 용머리터널을 지나자 수녀원이 나오고 곧이어 용화산이 낙동강과 접한 벼랑에 능가사였다. 아까 나와 같이 내린 두 할머니는 능가사로 향했는데 정초 불공을 나선 걸음인 듯했다. 나는 남향을 바라보는 돌부처에 두 손을 모은 뒤 용화산 공원으로 올라섰다. 절에서 멀지 않은 비탈에 고증이 다소 미흡하지만 흥미로운 무덤 한 기가 있어 찾아가는 길이다.
산기슭 재령 이씨 산소 아래 노아 무덤으로 갔다. 조선 중기 함안 군수 정구가 펴낸 함주지에 기록된 ‘함안차사(差使)와 연관된 인물이 노아다. 노아는 기생으로 아버지가 무슨 죄를 지어 문초하기 위해 한양에서 내려오는 관리를 영포역에서 미인계로 단죄하지 못하도록 수작을 부렸다. 천 리 먼 길 왔던 관리가 공무를 수행 못하고 쩔쩔매고 떠나게 했다는 주인공 무덤으로 전해왔다.
함주지는 함안의 연혁과 인문 행정이 수록된 임진왜란 이전 편찬된 조선시대 최초 읍지다. 노아 무덤은 사실 여부를 떠나 조선을 개국했던 이성계와 얽힌 함흥차사와는 결이 다는 얘깃거리가 흥미를 끌 만했다. 노아 무덤에서 언덕을 더 올라가 벼랑길에서 낙동강 강심으로 걸쳐진 구 남지철교와 곁에 나란히 놓인 철교를 바라봤다. 구 남지철교는 국가 지정 문화재로 등록 보존한다.
벼랑의 난간을 따라 능가사로 내려가 구 남지철교를 걸어서 건넜다. 일제 강점기 마산 기점으로 한반도 내륙을 종단해 압록강 중강진에 이르는 5호선 국도에서 낙동강에 놓인 다리가 남지철교다. 한국전쟁 때 트러스트 교량 일부가 피폭되어 부서져 복원시켜도 차량은 못 다녀도 보행은 가능했다. 철교가 끝난 넓은 둔치는 겨울을 난 유채밭으로 주말임에도 인부들이 김을 매고 있었다.
유채밭 둔치에서 둑으로 올라 남지읍 시가지와 강물을 바라보며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우회 국도 교량을 거쳐 도천 방면으로 걸었다. 들녘은 특용작물 비닐하우스였고 계성천이 흘러온 샛강에는 갯버들은 수액이 오르는 기미가 보였고 태공이 낚싯대를 드리워 있었다. 쇠나루에는 느티나무가 우뚝했고 삼거리를 지나다가 돼지국밥으로 점심을 요기하고 강둑을 따라 우강리로 내려갔다.
우강리를 지나다가 영산천이 흘러온 배수장 근처 망우정으로 향해 정자와 곽재우 장군 유허비 빗돌을 둘러봤다. 의령 유곡 세간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장군은 만년을 망우정에 머물다 생을 마치고 인근 현풍 구지 선영에 잠들었다. 우강리에서 옮겨진 국도 5호선이 낙동강을 건너 창녕으로 뻗쳤고 강둑 지방도 갓길을 따라 길곡 오호리에서 창녕함안보를 건넜다.
공도교 남단에서 광심정을 돌아가 북향 비탈 단감과수원을 지났다. 산마루를 넘다가 뒤돌아보니 창녕함안보와 낙동강 물길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칠북면에서 산간 오지인 내봉촌 논바닥에 달집을 지어 놓고 제상엔 돼지머리가 얹혀 있었다. 촌로들이 수육 안주를 권했으나 사양하고 풍년과 마을의 태평을 염원하는 축문이 펄럭이는 달집을 사진으로 남기고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24.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