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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능력으로 모든 이를 기쁘게 하고 만족시키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때문에 ‘누구를 기쁘게 할 것인가’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위대한 정치가는 국민을 기쁘게 합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는 링컨 대통령의 슬로건이 그토록 열렬한 환영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부모를 기쁘게 하는 사람을 효자라고 합니다. 스승을 기쁘게 하는 이는 참된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바른 그리스도 인임에 분명합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 11:6)라고 말합니다. 그 분을 구세주로, 주인으로, 사랑스런 아버지로, 그리고 좋으신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서는 빛이 난다고 한다. 당신의 얼굴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빛으로 빛나고 있는가? 고후 5: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 카페지기의 거리에서 찬양하며 영혼을 구원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잘 감당할 수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리며 사역을 위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길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제목 :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본문 : 히브리서 11:7-12 '교회 밖에서 만나는 재미있는 교회이야기'라고 하는 긴 이름의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20장에 마틴 루터의 스캔들이라고 하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요새 많은 스캔들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만은 500년 전 마틴 루터의 스캔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한번쯤 재미있게 읽어 볼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1525년 6월 13일 수녀, 카톨릭 수녀 출신의 카타리나 본보라와 화촉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결혼입니다만은 500년 전 당시로 돌아가 볼 때에는 교회에서는 이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당시의 교회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이것은 스캔들이 틀림이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왜냐 하면은 카톨릭 수녀와 카톨릭 수도사가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에 있던 사람이 뛰쳐나왔고 수녀원에서 한평생을 살다 죽어갈 사람이 거기서 탈출해 나와 가지고 결혼을 했기 때문에 이것은 세계적인 스캔들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카톨릭적 개념으로 볼 때에는 수도사와 수녀, 그것은 분명히 이것은 간음입니다. 이 결혼은 간음이요, 마틴 루터는 타락한 성직자라고 하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을 하고 있는 동료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습니다. 하필이면 농민들이 자유를 위하여 이렇게 싸우다가 실패해서 좌절과 패배를 겪고 있는 이 비참한 현실, 지금과 같은 때에 하필이면 결혼을, 자기 자신의 행복만 추구하고, 결혼을 해서 교회를 어지럽히느냐 하는 거죠. 종교개혁을 했다는 것만 가지고도 큰 사건인데 하필이면 안 해도 될 걸, 결혼까지 해 가지고 왜 이렇게 시끄럽게 만드느냐 이거죠. 다시 말해서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분들에게까지도 이 사건은 아주 골치 아픈 사건이요, 스캔들이 아닐 수 없는, 유감스러운 사건으로 그렇게 인정된 것입니다. 자 이제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같은 사람은 아주 빈정대는 조소 조의 글을 썼습니다. '장엄한 비극으로 등장한 종교개혁이 코메디로 막을 내렸다.' 이렇게 비웃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면 믿음으로 행해야 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복을 따른다면 사람이 날더러 뭐라고 하던 말던,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정하느냐, 어떻게 의롭게 여기느냐 그것만이 그의 관심이었습니다. 루터는 이 모든 비난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럴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당하게 떳떳하게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또 다른 얘기가 있습니다. 1520년 초반부터 마틴 루터의 이 종교개혁사상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되 특별히 루터 자신이 수도원에 있다가 뛰쳐나온 사람이기 때문에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들에게 종교개혁사상이 깊이 파급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수도사들이 수도원에서 뛰쳐나왔고, 또 카톨릭 수녀원에서 수녀들도 탈출해 나오게 됩니다. 아홉 명의 수녀가 나왔는데 이 사람들은 자생할 능력이 없습니다. 수도원에만 있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일 할 줄을 모른단 말입니다. 또 무얼 먹고 살겠습니까! 수도원에서 나오고 나면 말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부득불 저들에게 직장을 얻어주기도 하고 또 서로서로 짝을 맞추어 결혼을 시켰습니다. 수도사들과 수녀들과…… 이런 일들을 다 해서 그 루터만을 쳐다보고 수도원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의 생애를,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겁니다. 그런데 아홉 명중의 여덟 사람이, 그 처녀들이 다 이렇게 저렇게 결혼을 했는데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그게 카타리나입니다. 아무도 이 사람하고는 결혼은 안 하겠다는 거예요. 길다란 얼굴에 툭 튀어나온 이마, 또 볼품없이 길쭉한 코, 그리고 불쑥 튀어나온 광대뼈, 아주 고집스럽게 생긴, 못생긴 얼굴이었답니다. 아무도 이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아서 이 마지막 여자는, 이 카타리나는 시집을 못 가게 되는데, 마틴 루터가 그러면 '내가 데리고 살지.' 그래서 결혼을 했답니다. 이렇게 해서 카타리나와 결혼을 한 건데 이 세상은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비난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이 카타리나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아주 현명한 부인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지성의 사람이요, 화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하게 루터를 내조해서 종교개혁을 성공하게 했다는 겁니다. 마틴 루터는 너무나 엄청난 사건을 이렇게 맡아 가지고 종교개혁을 할 때에 사방에서 루터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 죽음의 공포 속에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가운데서 살아갔기 때문에 그는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는 겁니다. 언젠가는 큰 소리로 이렇게 소리를 지르더라고 합니다. "마귀야! 나 좀 잠 좀 자게 내버려둬라. 내가 내 죄를 많이 지은 죄인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이제 그만 좀 해라" 무슨 말이겠습니까? 종교개혁을 하는 이 엄청난 사건을 놓고 밀고 나갈 때에 자기의 죄가 자꾸 생각이 나요. 과거의 죄, 현재의 죄, 잘못한 것. 마귀가 계속 공격을 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죄인이다.' 루터가 중얼거리기를 '마귀야! 나 잠 좀 자자. 이제 그만해 둬라. 내가 죄인이거 나 잘 알고 있는데 그만 좀 해라.' 그러더라는 겁니다. 이렇게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에 유명한 에피소드가 전해집니다. 어느 날 밖에서 돌아오니까 마틴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가 상복을 입고 울고 있더랍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서 누가 죽었느냐, 왜 울고 있느냐 했더니 그 부인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돌아가셔서 상복을 입었습니다." 루터가 펄쩍 뛰면서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무슨 불경한 말이냐!"고 벌컥 화는 내니까 그 부인이 조용히 하는 말이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어째서 당신이 낙심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면서 왜 피곤해 하는 겁니까?" 여기서 용기를 얻어서 종교개혁을 완성했다는 게 아닙니까! 카타리나의 공이 큽니다. 여러분, 루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신득의(以身得義)의 교리를 들고 오직 믿음으로 그 신앙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합니다. 그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신학화 했습니다. 성경적 진리에 의해서 설명하고 철학적 진리에 의해서 변경했습니다. 루터 나름의 종교개혁적 개혁신학을 이루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가 믿는 대로 살았습니다. 믿음을 생활화했습니다. 신앙에 가장 무서운 함정이 있습니다. 그 하나가 주관적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신앙이 아니고, 내 마음대로 믿음을 스스로 자기가 자기 생각을 믿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병 나을 줄 믿습니다, 복 받을 줄 믿습니다, 아들 날 줄 믿습니다 주여, 뭐 이런 거 그건 자기 마음 대지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까지는 그거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저 내 나름대로 믿습니다 한다고 해서, 김치 국부터 먼저 마신다고 믿음이 되는 게 아니에요. 이런 주관적 신앙, 주관화 참 무서운 것입니다. 두 번째 잘못된 것이 바로 추상화입니다. 지식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깨닫고 많이 기억하면 이게 마치 믿음인 줄 압니다. 그리고 성경진리에 감격하면 이게 무슨 믿음인 줄 아는데,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그건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합리적 이해가 절대로 신앙이 아닙니다. 그건 지식일 따름입니다. 우스운 얘기입니다만은 제가 어느 교회에 한번 저녁에 설교하러 갔을 때에 그 교회에서 성경암송대회를 하더만요. 성경 잘 외우는 사람을 이렇게 심사해 가지고 그 중에도 최고로 잘 외우는 사람 몇 사람을 데려다 놓고 성경을 외우게 하는데요, 깜짝 놀랐습니다. 좌우간 빌립보서를 외우는데 그 넉장을 숨도 안 쉬고 외어요. 눈 질끈 감고 쫘악…… 하나도 안 틀려요. 제가 심사를 했는데 하나도 안 틀려요. 이렇게 해서 1등 상을 받는데 상을 줄 때에 이상하게도 온 교인이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아요. 2등 탄 사람은 박수 쳐요. 3등 탄 사람 박수 더 많이 쳐요. 1등을 받았는데 박수를 안 쳐요. 이것 참 이상하다 했더니요, 그 다음에 얘기 들어보니까 그 사람이 성경은 잘 외우는데 시어머니하고 싸우는데 아주 용감하답니다 아주 그냥. 아주 유명한 악처랍니다. 남편에게나 아이들에게 할 것 없이. 그런데 머리는 좋아 가지고 성경은 잘 외우는 거야. 이게 믿음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성경 66권을 다 외우면 어떻다는 얘기요! 이것을 믿음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이게 추상적 신앙이요. 문제는 신앙이 생활화되어 돼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히브리서 11장은 여러분이 잘 아는 믿음 장입니다. 첫 절부터 말합니다. '믿음을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라. 이것이 믿음이라.' 그래요. 그리고 역사 속에서 실제 사건들 속에서 생활 속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는지 그 살아간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을 여기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Case Study 입니다. 슈프링거라고 하는 학자의 말속에는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 혹은 그들의 기본 생활 철학에는 여섯 가지 유형이 있답니다. 어떤 사람은 경제형, 만사에 돈만 생각하는 거예요. 타산적이요. 또 이론형, 자기 논리에 맞아야만 받아들이려고 하는 지식적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심미형. 이 사람은 항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런 감상에 젖은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권력형이요. 꼭 남을 지배해야만 되지 그 외에는 행복이 없어요. 또한 어떤 사람은 사회형, 많은 사람과 더불어 사귀고 친교하는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종교형, 항상 하나님을 생각해요.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요. 식사를 하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잠자리에 들 때도 할렐루야예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이 종교형이다 이말 이예요. 믿음이라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을 삽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학화합니다. 의롭다 하심에 얻은 그 놀라운 진리 안에 살아갑니다. 여러분 이 믿음은 하나님의 의를 수용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비유를 통해서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한평생 생각해도 무궁무진한 진리가 그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탕자 비유입니다. 탕자는 분명히 불효자입니다. 탕자가 분명히 탕자입니다. 집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한가닥 믿음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아버지는 기뻐합니다. '돈 얼마 남겼느냐' 묻지도 않고 '그러기에 집을 나가지 말라고 하지 않더냐' 과거를 묻지도 않았습니다.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노라' 너무너무 좋아서 잔치를 합니다. 아들은 말합니다. "나는 아들 중의 하나가 될 수가 없기 때문에 머슴꾼의 하나로 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지만은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안 합니다. 그리고 잔치를 합니다. 이때에 말입니다, 이 아들이 "이러지 마세요. 이렇게 하면 제가 더 비참해 집니다."라고 말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건 율법주의자입니다. "정 이렇게 대하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니까 나는 집을 나가고 말겠습니다" 했다면 그 사람은 영영 구제불능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돌아보면 무자격합니다.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이 그러하니 아버지가 너는 내 아들이다 하니까 아들이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러면 내가 사랑 받는 아들이지.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좀 그처럼 체면이 없는 겁니다. 염치가 없어요. 염치가 없는데 그걸 극복하는 것이 믿음이요. 이렇게 받아들이고 그 잔치에서 이 아들이 아들 노릇을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믿음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십자가를 통하여 확증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의인이 된다는 말이 아니요, 죄인은 여전히 죄인이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 사랑으로 덮어서 "너는 내 아들이다 나는 너를 위하여 이 같은 십자가를 지노라" 할 때에 그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이것이 믿음이요, 이것이 종교개혁적 신앙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율법에 매일 필요도 없고, 과거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그 사랑 그 안에 살아가는 것이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의 삶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역사적인 예를 듭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뭐냐! 보세요. 노아는 어쨌습니까? 온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다 멸망될 때 어쩌면 노아도 그랬던 것 같아요. 노아도 신통치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120년 후에 홍수로 멸하리라." 이건 꼭 노아만 들어야 될 말은 아니에요. 누구든지 이 메시지를 받고 120년 후에 망한다고 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면 노아와 같이 방주를 짓는 거예요. 그것도 산꼭대기에다, 바닷가에다 짓는 게 아니고 산 위에다가 120년에 걸쳐서 그 많은 날, 많은 비난을 받으면서 정신 나간 할아버지라는 말도 들었겠지요. 미친 짓이라는 말도 들었겠지요. 그러나 저만은 저 120년 후에 있을 홍수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생각하면서 방주를 예비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산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오늘 나의 생활을 지배했단 말이올시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전 어느 목사님의 딸 하나를 아는데요, 그 목사님에게 오남매의 자녀가 있었는데 아들 둘 딸 셋, 목사님의 평생 소원은 '아들 둘 중에 하나라도 좋으니까 목사가 돼 줬으면……' 목사님들의 일관적인 소원입니다. 잘 크고 대학 마치고 좋은 아들들인데 제발 이중에 내 뒤를 이어서 목사가 돼 줬으면 했는데 목사가 안돼는 거예요. 딸들도 다 제멋대로 갔어요. 마지막에 막내딸 하나가 아버지의 그 간절한 소원을 알고 나는 목사는 못 되도 목사 부인이 되겠다고 그래서 목사를 내조해서 훌륭한 목사 되게 하련다하고,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이대 1학년 때부터 제가 아는데 각 교회 돌아다니면서 주보를 다 모으고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를 연구하고 목회를 연구하고 또 설교에 도움이 될만한 자료를 그냥 이렇게 스크랩해서 모아놓는 거예요. 아 그 신통하더라고요. 꾸준하게 이렇게 하더니 대학 졸업반 때 농촌봉사 나갔다가 눈 맞아 가지고 목사하고 결혼하더라고요. 아 그 서울 안에 있는 목사님 사모님이에요. 내가 왜 이 말을 하는고 하니 목사 사모가 되겠다고 생각했으면 그것이 그의 믿음이라면 오늘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것이 노아가 보여주는 믿음입니다. 또한 아브라함,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고향을 떠나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납니다. 지시할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그리고 자녀를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공간과 시간적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듭니다. 그 땅을 지키지 못하고 애굽으로 피난을 갑니다.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한 10년 기다려 보고 아내가 단산하고 뭐 이렇게 저렇게 되니까 아마 이게 뭐 내가 하나님 말씀을 잘 못 들었나 첩을 얻어 가지고 떡 아들을 봅니다. 하나님은 그게 아닙니다. '너는 내 앞에서 온전하라. 왜 휘청거리느냐!'고 책망하십니다.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제 25년 후에 아내는 단산한지 오래됐습니다. 그때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년에 아들을 주마!" 25년 전에 듣던 말씀이에요.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그러나 그 기다림에서 그는 온전하지 못했어요. 그 믿음을 똑바로 지키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자책이 많아요. 부끄러움도 많고 하나님 말씀을 다시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자격이 없어요. 무자격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여! 말씀하십니까.' 그리고 받아요. 믿어요. 하나님이 그 믿음을 의롭다 하세요.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사하시고 자식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믿는 사람이에요. 그 약속을 믿음에 내 부족한 허물을 다 그 약속 속에서 다 소화해 버려요. 약속만을 받아들입니다. 이게 아브라함의 믿음이에요. 또 오늘 본문에 강조된 것은 사라입니다. 사라는 죽은 자와 방불한 가운데 나이 90세요, 단산한지 이미 오래 됐어요. 그러나 내년에 아들을 주마 할 때에 다시 용기를 냅니다. 저는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리적으로 생각하고 싶어요. 아브라함이 90세가 된 할머니를 언제 만났던지 몰라요. 아마 별방한 지가 오래됐어요. 거들떠보지 않은지가 오래 됐는데 하나님 다시 말씀하십니다. "네 아내, 저 할망구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이거예요. 이 엄청난 말씀을 믿고 다시 합방을 합니다.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여기서 이삭을 낳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사도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이걸 부활의 교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얘기예요. 다 죽은 것과 같아요. 인간적으로는 다 벌써 단산한 지가 언젠데 다 끝난 사람인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용기를 냅니다. 그리하여 약속의 자녀를 얻었다. 이것은 자기 약점과 인간적인 모든 부족한 것을 믿음으로 다 극복한 것이에요. 한계를 넘어서는 위대한 믿음이올시다. 여러분, 종교개혁이란 믿음이 세속화 된 것을 다시 재정비하는 것이에요. 종교개혁이라는 것은 복음진리 그 진수가 무엇이냐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요. 복음에 대한 재해석이요. 그리고 종교개혁이란 믿음을 구체화하는 것이올시다. 우리의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머리 속에 있던 신앙이 아닙니다. 생활 속에서 실제의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자의 마음이요, 순교자의 마음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약속의 엄청난 축복을 더하실 것입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샬롬~!!~ㅎㅎㅇㅇ
오늘도 주안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승리하는 하루되길 기도합니다 샬롬
오늘도 진보하는 믿음안에서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함께해 주신 평안 장로님, 예수 사랑 목사님, 만경강 목사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