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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론지노' 영세 축하한다."
대부(代父)를 선 친구 '남궁 알로이시오'은 교복 윗주머니에 꽃을 꽂아주며 악수를 청했다.
"론지노? 좀 어색한데..후후"
"너는 이제 론지노로 새롭게 태어난거야.
이제까지의 모든 죄를 씻고 가장 깨끗해진 순간이지, 처음영성체로 예수님을 모신상태에서
하느님께 기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신대 하느님의 자녀로써 첫청원이니까."
1967년 부활절, 고등학교 3학년에 론지노는 그렇게 탄생했다.
2,
대입을 앞두고 영세를 받는다는 것은 시간낭비일 수도 있었다.
교리공부도 해야하고 미사참례도 해야했으니..
그러나 지노는 공업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관계로 대학간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졸업하고나면 그저 직장생활하면서 단란한 가정꾸미고 사는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꿈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해 여름 2학기무렵, 공고에서는 현장실습이라는 것이 있었다.
시커먼 기계들이 굉음을 내며 돌아가고있는 공장으로 실습을 나간 지노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체질에 맞질않았다. 노동력이 너무들고 기대에 비해 실망스러운 공장의 분위기와
중산층으로의 상승기회가 어려운 장래의 불확실성때문에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생산 현장의 단순노동은 내체질이 아냐. 화이트칼라 그 게 맞아.
그러려면 한국실정에선 대학을 가야만 해.' 졸업후의 목표를 취업에서 대입으로 방향을 급선회하였다.
3,
지노는 2학기에 부랴부랴 대입준비에 들어갔지만 짧은 기간에 시험대비를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당연히 대입에 실패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지노는 재수생이 되었다.
고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자유라는 것이 주어졌다.
담배,술,영화등 미성년자 때는 접근이 어려웠던 것들에 쉽게 접근할 수있게 됐지만,
지노는 그런 것들에 눈길을 돌릴 경제적 여유도 없었지만 흥미도 없었다.
그런 것은 돈많고 타락한 아이들이나 접하는 걸로 알았다. 나이트가 뭔지 술,담배가 뭔지 몰랐다.
지노의 일과는 그저 평일엔 학원, 주일엔 성당을 가는 것이 전부였다.
2.
1.
여느 주일과 마찬가지로 지노는 주일미사를 마치고 성당계단을 내려오고있었다.
"저--- '레지오 마리아'에 가입좀 하시죠."
비슷한 또래의 청년이 지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지노는 쉽게 사람을 사귀는 성격이 아니었다.
반면 쉽게 남의 청을 뿌리치지도 못하는 성격이었다. 바로 내성적인 성격의 전형이었다.
하긴 18년을 살아오며 학교와 집이라는 울타리안을 떠나보지 못하고
친구들과 어울려다니며 놀아본 경험도 없는 18살 소년이 무슨 사교성이 그리 있겠는가 !
그 청년의 청을 뿌리치지 못한채 반은 억지로 '레지오 마리에'라는 봉사단체에 가입했다.
2,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묵주의 기도로 시작하는 회합은 지루하기 이를데 없었다.
팔팔한 청년이 미동도 못한채 수십분을 서서 기도만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물론 수양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겠지만,
신자가 된지 일년도 안된 지노는 좀 쑤셔하면서도 그럭저럭 참아냈다.
봉사활동은 병자, 냉담자(불성실한 신자)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기도해주고
위로해주는 정신적인 활동만 하는 것이었다.
물질적 도움은 배제했는데, 이는 그들에게 의타심을 심어주거나
신앙이 아닌 물질을 위해 머리를 숙이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뜻이었고,
물질적 도움을 주는 봉사활동은 다른 단체에서 하고있었지만 그활동은 미미했다.
3,
지노가 처음으로 활동을 나간 대상은 산동네 움막에 사는 어느 모녀의 집이였다.
모녀가 사는 곳은 집이라할 수도 없는 움막이었다.
판자로 삼각형 형태로 기대놓고 위에 비닐을 씌워놓은 좁은 공간에 불과한 곳이었다.
어머닌 병들어있고 딸하나가 고교를 다니며 어머니수발을 들고 있었다.
(그 딸은 나중에 다른 신자분이 취직자리를 알선 해주셨다.)
그 집에을 방문한 지노는 레지오단원 몇명과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있었다.
기도중에 유난히 지노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무릎위에 모아쥔 자신의 손목위에,
그 당시에 유행하던 금도금으로 유난히 번쩍거리는 손목시계였다.
이렇게 가난한 집에 번쩍거리는 시계를 드러내놓고 기도한다는 것이 무척 마음에 걸렸다.
지노는 시계를 숨기려 감싸기도 해보았지만 그움직임은 오히려 돌출행동이되어 더 어색해지는 것이었다.
기도는 하는둥 마는둥 길게만 느껴진 그시간이 끝나고
그집을 나선 지노는 일행과 헤어진후 어디론가를 향해 잰걸음질을 쳤다.
4,
더 어릴적, 론지노어머니가 갖고있는 패물이라고는 쪽진 머리에 늘 끼우던 은비녀가 유일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 은비녀를 가끔 소금으로 문질러 닦으며 애지중지했다.
어린 론지노도 장난감이라고는 그 비녀가 유일한 것이었다.
가끔 반짓고리에 빼놓은 그비녀는 어린 론지노에게 비행기도 되어주고 자동차도 되어주면서
오랫동안 요긴한 장난감역활을 해주었던 것이다.
한 날, 어린 론지노는 어머니를 따라 전당포에 갔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전당포 철창안에는 웃음끼라곤 전혀없는 전당포아저씨가 돗수높은 안경너머로
모자(母子)를 무표정하게 넘겨다 보고있었고,
치맛속 쌈지속에서 소중하게 꺼내든 그은비녀를 어머니는 손으로 한번 닦고는
치마춤에 한번 더 쓱 문지른 후 아쉬운듯 머뭇머뭇 전당포 철창안으로 밀어넣었다.
무표정한 전당포아저씨의 돌덩어리같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여 보려는듯
어머니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많이... 좀 쳐주세요.."하며 사정조로 말을 건네었다.
어찌보면 비굴해 보이기도 한 어머니의 모습이 어린 론지노의 눈에는 선명하게 각인되어 들어왔다.
지전 몇장을 받아쥔 어머니는 찾을 가능성이 거의없는 은비녀에 대한 서운함보다
당장 끼니를 해결해 줄 몇장의 지전이 더 반가우셨던 모양이다.
어린 론지노 눈에 보인 커다란 종이 봉투에 가득 담긴 밀가루를 두팔로 감싸안고 돌아오는 길의
어머니 표정은 밝아보였다.
그날 저녁 론지노는 칼국수로 오랫만에 배를 싫것 불릴 수있었다.
5,
전당포 주인의 표정은 어디에서나 어느때나 무표정한 모습은 그대로였다.
지노는 철창안으로 번쩍거리는 금도금시계를 밀어 넣었다.
그의 어머니처럼 지노는 많이 쳐달라는 말은 하지않았다.
그저 전당포 아저씨가 내미는 돈을 아무 말 없이 받아쥐었다.
얼마간의 돈을 받아쥔 지노는 라면,계란 몇줄,연탄등을 사서 그움막을 찿았다.
'그래 정신도 좋고 기도도 좋지만 그 집이 가장 필요로하는 것은
당장 먹을거리 땔거리야.' 이런생각은 그집을 방문한 순간부터 내내 지노를 압박해 왔던 상념이었다.
병석에서 비스듬히 일어나 앉은 그 움막집의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 것은 레지오에서 드리는 게 아닙니다.
제가 개인 자격으로 온겁니다.'' 이렇게 강변을 했지만, 어디 어떻구 저떻구가 그분 귀에 들어 오겠나.
지노의 돌아서는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그 모녀를 더이상 도와줄 경제력이 없다는 것과,
또한 레지오의 규칙을 어긴 것같아 마음 한구석은 무거웠다.
3.
1.
그렇게 저렇게, 한달정도가 지난 1968년 초봄.
"론지노형제님 이번주에는 정마리아씨 댁을 방문해주세요."
레지오 회합에서 단장은 몇몇사람과 지노를 지목했다.
" 정마리아씨는 결핵환자예요." 회원중 한사람이 나즈막히 알려주었다.
2,
시장길을 지나 좁은 골목길, 지노일행은 한옥기와집 문을 들어서자 60 대의 부부가 반갑게 방문일행을 맞았다.
노부부와 인사를 나눈 일행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여인이 소파에 다소곳히 앉아 미소를 띄며 목례를 했다.
그녀는 '정마리아'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한쪽벽에는 산소통이 세워져있고 그곳에 연결된 호스는 물이 담긴 유리병에 연결돼있어
산소는 물을 통과하며 뽀르륵 뽀르륵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시 물병에서 나온 호스는 그녀의 코에 연결되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습기를 머금은 산소로 호흡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가쁜숨을 쉬면서도 표정은 밝았고 미소를 잃지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지노는 그녀가 애처롭다기보다는 그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계란형의 얼굴과 가지런한 눈섭, 잔잔한 눈동자, 균형이룬 코와 조화로운 입술,갸녀린 목.
특히 폐결핵이 주는 창백함이 그녀에겐 오히려 하얀우유빛 얼굴로 빛나고 있었다.
누군가 그랬다 그녀를, 그림 같다고...
지노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림 같다고...
3,
그녀의 이야기는 이랬다.
지노보다는 8살이나 많았고,
명문여대 2학년때 감기증상이 있었으나 그냥 택시를 타고 학교를 다녔다.
(그당시에 택시를 타고다니는 것은 호사였다)
그 후 폐결핵으로 밝혀져 병원 치료를 받았고, 언젠부턴가 의사가 왕진을 다녔는데,
그 의사가 놔주는 주사를 맞기만하면 그렇게 호전이 되더란다.
그런데 어느날 그 의사 자신도 그주사를 자기팔뚝에 놓는 것을 보고
깜짝놀라 알아보니 그주사는 마약이었던 것이다.
결국 치료시기를 놓치고 회생불능의 상태까지 온 것이었다.
이야기내내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그 의사를 이미 용서했고 이제 남은 생을 의미있게 살고 싶다고했다.
4,
골목길을 돌아나오며, 지노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녀를 위해 해줄 수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전당포를 또 간다고 해결 될 일도 아니고...
하느님? 기도?
글쎄....
지노는 자신이 할 수있는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음을 잘알고 있었다.
기적~!
기적이외엔 방법이 없잖아. 기적이란 정말있는 것일까?
기적 말고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없을까?
그날부터 지노의 마음 한구석엔 그녀의 모습이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4.
1.
지노는 학원수업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집을 향하고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놀라며 멈칫했다.
'내가 왜 거길 가고있지? 가서 뭘 어쩌자고?'
지노는 여자를 방문한다는 자체가 가슴을 두근거리 게하는 일이었을 뿐만아니라, 생전 여자와는 말 한마디
나눠본 적이 없는 그는 어떻게 처신을 하고 무슨 말을하고 어떻게 얼굴을 쳐다봐야하는지
생각할 수록 막막하기만 하였다.
어떻게 그녀를 마주할 것인가. 말이나 제대로 할 수있을까?
얼굴이나 바로 쳐다 볼 수있을까? 도저히 용기가 날 것같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내가 왜 그곳에 가지?
왜? 이유나 명분도 없었다. 이 비명분이 그를 더욱 망서리게하였다.
2,
''웬일로 오셨죠?'' ''용건이 뭐예요?''
''그만 가보시죠.'' ''공부나 열심히 하세요.'' ''웃기는 놈이네.''등등..
그녀와 그녀의 부모가 비웃으며 쏟아내는 말들을 상상해 보니 지노의 등엔 식은땀만 흐르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집을 그냥 지나쳐 골목길을 돌기만했다.
'뭐라고하지?' 지노는 할말을 생각해내질 못했다.
사회생활 경험도없고, 학교이야기도 별로고 집안이야기는 더더욱, 그렇다고 문학? 철학? 종교?
이런건 또 밑천이 딸리고...
3,
그녀의 집주변을 몇바퀴나 돌았을까.
한참만에 지노는 자신도 모르게 열려진 그녀의 집 문안으로 무작정 들어서고 있었다.
이건 용기도 아니고 오기도 아니고 그저 무의식이었다. 무언가 안가면 안돼는 것처럼
의무처럼 지노는 자신을 발가는대로 맡기고있었다. 그때가서 보자, 닥치고보자.
어떻게 되겠지... 하며 아무 생각없이 발길을 들여놓고 있었던 것이다.
4,
누구더라 하는듯 쳐다보던 그녀의 부모는 이내 반색을 하며 그녀의 방을 향하여
"마리아야, 성당에서 오셨다"고 소리 쳤다. 나중에 추측한 일이지만,
누워있거나 매무새가 흩트러져 있으면 일어나 가다듬으라는 일종의 신호였으리라.
지노가 방에 들어서자, 그녀는 머리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미소를 띄었다.
그미소 하나로 그토록 주저하고 망서렸던 방문에대한 고민이 눈녹듯 사라졌다.
지노는 그녀앞에 앉으며, "안녕하세요?"라고 했지만 이런인사 자체가 어색했다.
아픈사람에게 안녕하냐고 묻다니...
다시 말을 이었다. "좀 어떠세요?"
5,
지노는 겸연쩍었다. 별로 할말이 없었다. 멀뚱멀뚱 있기도 멋적었다. 머리를 짜낸끝에,
고작 한다는 말이,
"어떤색을 좋아하세요?"였으니, 이 얼마나 '유치찬란'하고 '치사발랄'한 이야기란 말인가!
그러나 뜻밖에도, 그녀는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다.
"저는 요, 하늘색을 좋아해요, 짙은 파란색말고 옅은 구름너머에있는 여~언한 하늘색 있죠?"
그녀의 배려는 컸던 것일까? 진지하게 대답해줌으로써 지노의 유치한 질문을 덮어주었던 것이다.
"아~ 그런 색 알겠어요. 저도 그런 색이 좋아요."
갈수록 태산이라했던가! "음악은 뭘 좋아하세요?"
그러나 역시 그녀는 계속 진지하게 대답해주었다.
" '애니 론리'도 좋구요,
'빙크로스비'가 부른 '트루러브'(True Love)도 좋아요.
'그레이스켈리'가 나왔던 '상류사회'라는 영화에 나오는 곡이죠. "
그녀는 숨차하며 노래를 약간 읊조렸다.
" '투루 러브, 투르 러브....'이렇게 나가는 곡있잖아요."
" 아~ 그곡 알아요. 저도 그곡 좋아해요."
그날 지노의 유치찬란함은 그렇게 계속 됐다.
5.
그날도 지노는 늘 들르던 꽃집을 찾았다. 꽃집아줌마는 지노를 반겨맞았다.
주인이 손님을 반기는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항상 검게 물들인 군 야전잠바만을 입고 꽃을 살만큼
여유 있어 보이지않는 학생같은 청년이 자주들러 꽃을 사가는 것이 예사롭게 느껴지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 아줌마는 어려운듯 주저하며 물었다.
" 학생, 학생은 왜 자주 꽃을 사가죠?"
"........"
지노는 웃기만했다.
어떻게 무슨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우선 그녀를 표현할 방법이 어려웠다.
연상의 여인?, 애인?, 누나?, 친구?, 그냥 아는사람?, 환자? 모두 아니었다.
그에게 그녀는 통속적인 뜻의 '연상의 여인'으로 여기고 싶진 않았다.
또한 애인도 아니다. 그럼 누나? 누나동생으로써 정립되는 것도 싫었다.
친구? 그 것도 아니다. 그냥 아는사람? '그냥'이라는 무의미한 존재로 여기는 것도 싫었다.
환자? 그녀는 객관적, 사회적으로 환자일지 모른다.
그러나 지노에게는 환자가 아니었다. 하여튼 지노는 그녀를 막연하게나마 그 무엇의 존재,
보여지는 현상, 평범보다는 그이상의 존재로 여기고 싶었다.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결국 웃음으로 답하고 지노는 꽃집을 나섰다.
꽃집아줌마 역시 웃기만 할뿐 더 묻지 않았다.
2,
"어머~ 아름다워요." 정마리아씨의 얼굴엔 환한 웃음이 퍼졌다.
"......"
"그런데, 론지노씨 이제부터 꽃 사오지 마세요."
" 네? "
"학생인데.... 이렇게 꽃을 사올때마다 부담스러워요"
지노는 매번 쪼들리는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꽃을 사온 것을 틀킨듯 당황해하며 한편 서운했다.
당연한 말이라 여기면서도 이렇게 직선적으로 얘기할 줄은 몰랐다.
더욱 서운한 것은, 둘의 사이가 아직 정의내릴 수없는 사이지만,
이런 현실적 문제, 특히 돈문제가 둘사이에 장애가 되어 거론되는 것이
무슨 커다란 때가 묻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세상 잡동사니는 둘사이에서 빼고, 이상을 얘기하고, 꿈만 꾸고, 꽃만 보고, 이슬만 마시는,
둘은 그런 존재이고 싶었다.
지노는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럴 수있으리라 생각했다.
현실의 피할 수없는 잡다한 일들은 돌아서서 각자 겪고 둘은 꿈처럼 만나고 싶었다.
3,
지노는 화제를 돌렸다.
"마리아씨,꽃집에서요.. 꽃은 홀수로 사야한데요."
" 그래요? 그럼 남은 꽃송이는 외롭잖아요."
" 글쎄 말예요. 불쌍하죠?"
" 그럼요, 전 짝수가 좋아요."
" 맞아요, 고정관념은 타파해야 해요. 앞으로 꽃을 살땐 짝수로 사야겠어요. 참, 무슨꽃을 좋아하세요?"
" 꽃중의 꽃이라는 장미가 좋죠, 백합도 좋구요. 무덤위를 휘덮은 넝쿨장미도 좋잖아요? "
지노는 " 네~ 멋있어요."라 답하면서도
'무덤 위를 덮은 장미'라는 말에서 어떤 예감을 감지하며 서글픈마음이 들었다.
4,
지노는 골목길을 걸어나오며 속으로 외웠다.
" 정마리아씨가 좋아하는 꽃은 장미와 백합, 장미,백합...... 조화로 쓰이는 국화는 사지말 것..."
6.
" 론지노형제님은 왜 안오지? " 레지오 단장이 채근을 했다.
항상 성당일이라면 일찌감치 나타나던 지노가 오늘따라 보이질 않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준비로 한창 일손이 필요한 시점에서 그가 안보이자 발을 동동 구른거였다.
옆에있던 '루까'가 대답했다.
" 틀림없이 정마리아씨댁에 갔을 거예요.
아직 시간도 있으니 우리도가서 조촐하게 크리스마스 파티라도 해줍시다."
2,
지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금차금,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한결 상쾌했다.
부스슥 부스슥 눈밟히는 소리를 발로 느끼며 짐짓 미끄럼질도 해본다.
손엔 작은 케잌과 꽃다발이 들려있고. 발걸음은 이미 그녀의 집골목으로 들어서고있었다.
병이 오래된 병이라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숫자는 날이 갈수록 점점 줄어들어
이제는 지노가 유일한 방문객이 되어있었다.
지노는 그래서 더 즐거운지 몰랐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않아서 좋았고,
혼자 그녀를 독차지(?)한다는 듯한 착각이 좋았던 것이다.
3,
" 마리아씨 성탄 축하합니다. 파티하려고 왔어요." 지노는 케잌에 촛불을 켜고 화병에 꽃을 꽂았다.
" 고마워요." 미소로 답해주는 그녀를 지노는 잠시 넋놓고 바라보았다.
언제나 아름다운 그녀였지만, 특히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은 지노에게 편안함과 평화로움을 주고있었다.
일상적인 말 몇마디가 오고가고 지난 크리스마스이야기를 주고받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루까가 앞장선채 성당팀들이 들어왔다.
" 봐. 틀림없지 여기 있잖아." 일행은 한편에 우루루 자리를 잡았고, 그녀는 북적거리는 사람들로인해 즐거워했다.
인사말이 오고가고나서 루까가 말을 이었다.
" 지금부터 즐거운 크리스마스파티를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론지노의 축하노래로 막을 올리겠습니다." 하며 넉살을 떨었다.
지노는 당황했다. 대중앞에서 노래를 해본 적이 없었고 그런 숫기도 없었다.
4,
고등학교시절, 지노는 음악 특히 팝송에 심취했다.
그 중에서 유난히 한노래를 좋아했는데
사람은 무었이든 좋아하는 한계를 넘어서면 아끼는 단계에 이르게된다.
노래를 아낀다는 것이 모호한 일이지만 지노는 그 노래를 들을때는 진지함을 넘어 경건해 하기까지 했다.
가사와 멜로듸를 음미하며 곡속에 빠져들었다가 곡이 끝나가면 아쉬워할 정도로 그곡을 아꼈다.
그곡이 바로 '라이쳐스 브라더스(Righteous Brothers)'가 부른 '언체인드 멜로듸 (Unchained Melody)"였다.
그곡은 이십몇년뒤에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에 씌여지면서 많은사람으로부터 사랑받게된 곡이다.
그렇게 아끼던 그 곡을, 같은 반 아이가 쉬는시간에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그 아이는 공부는 별로 잘하지 못하던 아이였다.
지노는 자기보다 열등한 아이가, 자기가 부르지못하는 그노래를 부른다는 것에서
어린마음에 자존심이 상했고 그음악이 오염되는듯한 기분을 느끼기까지 했다.
지노는 그날 당장 가사부터 외우고 그 곡을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다.
마치 그아이에게 복수를하고 그곡의 명예회복이라도 시키려는듯이...
그런이유로 지노는 그때부터 부를 수있는 유일한 곡으로 그곡을 하나 갖고 있었다.
5,
지노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좁은 방안에서 무릎을 꿇은채로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르는 노래라 지노의 음성은 떨리고있었다.
떨며 부르는데 멜로듸까지 애처러워 모두들 숨을 죽이고 있었다.
[.....I need your love,
I need your love,
God speed your love to me.....
......당신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신은 당신의 사랑을 내게 불러 일으켜 줄것입니다....]
지노의 심정인양 크라이막스의 높은 음정은 마치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그녀의 표정은 알 수없었다. 감동을 할 수도 무표정할 수도 없는 듯 천정을 쳐다보기도 했다.
지노가 노래를 부르며 울기라도 할까봐 걱정스럽고 애처롭기도 한듯 불안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사람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지노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주위의 반응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시원하게 마음을 풀어 놓은 듯, 그는 자신의 심정을 고백이라도한 듯
그녀의 마음속에 그노래의 가사와 자신의 감정이 전달되기만을 기대했다.
6,
잠시 정적이 흐르고나서 박수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순서에 의해 그녀는 재촉에 못이겨 힘겹게 입을 열었다.
쉬엄쉬엄 부르는 그녀의 힘겹고 숨찬 노래소리였지만 음성또한 모습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아~임... 드리밍....어브...어....화잍........"
후렴부분에서 누군가 조용히 따라 읊조리자 약속이라도한 듯 다같이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굵은 남성들의 화음이 모처럼 그녀의 방에 울려 퍼졌다.
"...유어~ 크리스~마시스~~ 비~~ 화이~~~ㅌ~~~"
7.
어느 무리(群)가 이렇게 조용할까?
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소리는 요란한데,
눈은, 움직임은 요란하나 소리는 고요하다.
지노의 마음에도 그녀에대한 상념의 눈보라가 소리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2,
그녀는 지노를 사랑하고 있을까? 아니 사랑이 아니라면 좋아하기만 이라도하고 있을까?
아니 지노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지노는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병때문에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그녀는 지노보다 나이가 많았다.
1~2살도 아니고 8 년 연상이라는 것은 한국의 실정에선 무리가 많이 따르는 상황이었다.
또한 외모도 그녀가 월등했다. 19세 청년의 소박한 생각엔 그런 것도 문제가 됐다.
그리고 학력과 지적수준 집안의 경제력등도 나았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볼때
지노는 그녀의 사랑을 바라는 것이 무모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3,
모든조건을 뛰어넘어 서로 사랑하는 것이 확인된다면 지노에겐 그녀의 병은
문제가 되지않는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 사랑에 장애란 없다.
현실문제들로 인해 사랑이 불가능하다면 '플라토닉러브'라는 것도 있지않는가.
그녀도 언젠가 플라토닉러브의 가능성을 인정했었다.
지노는 설혹 그녀가 일찍 세상을 떠나 존재치않더라도 사랑이라는 마음 하나만 전해준다면
그'플라토닉러브'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살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종류의 사랑이라도 사랑이라는 그단어 하나만으로도 지노는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사랑의 흔적이 그녀에게선 보이질 않았다.
4,
" 지난번 내가 산소물통을 넘어트려 물이 그녀의 콧속에 넘쳤을때,
그녀의 얼굴엔 고통스러운 빛이 스쳤어 그러나 곧 활짝 웃었잖아.
그런걸 보면 그녀는 날 사랑하고 있는거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어떻게 그럴수 있겠어?
아냐 그녀의 착한심성이라면 누구한테라도 그랬을거야. 그건 사랑의 표시라 할 수없어.
어느가을 그녀가 친구들과 갈대를 머리에 꽂고
찍은 사진들을 보며 가장 환한 사진한장을 지목하며 내가 달라고했지, 그때 그녀는 거절을 했잖아,
자기는 괜찮지만 그친구들에게는 예의가 아니라며.
당사자의 허락없이 얼굴을 유출 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초상권을 얘기하는 것인데
그때 나는 서운했어. 그런 걸 보면 그녀는 나를 사랑하는 게아냐. 사랑한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지노씨 우리 좀 떨어져 앉아요. 우린 지성인이잖아요'
그녀는 전염을 염려해서 그랬지. 조금 떨어져 앉는 시늉을 했지만
그런 것을 문제삼는 것이나 멀리 떨어지라는 것이나 다 서운했어.
그녀의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좋을 것이라 생각했지.
아니 나쁜 것은 둘사이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어.
아니 비록 나쁜 것일지라도 둘사이에서는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리라 생각했지.
그런데도 그런 염려를 하는 걸보면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거야."
지노의 상념은 그녀의 사랑과 무정(無情)의 사이를 혼란스럽게 왔다갔다했다.
5,
지노는 그녀의 행동과 이야기 하나하나에서 사랑의 의미나 흔적을 찿으려했다.
그녀가 하늘을 이야기하면 지노는 사전에서 '하늘'을 찿았고,
그녀가 웃으면 지노는 사전에서 '웃음'을 찿았다.
그러나 그단어 어느구석에서도 사랑이나 사랑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없었다.
지노는 사막의 모래밭 붉은기운에서 보이지않는 장미를 찿으려했고,
차가운 눈밭 흰빛에서 찿을 수없는 백합을 찿으려했다.
사랑이 불가능한 메마르고 차가운 그자리에서......
8.
1.
어쩌면 12월 26일이라는 날짜는 배반의 날짜인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다음의 트리는 쓸쓸하고
거리마다 방송마다 넘치던 캐롤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공허함만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흥겹던 거리는 폭풍이 지나간 후처럼 어수선하고 파티가 끝난뒤의 허전함이 감도는 분위기였다.
사람이란 이렇게 냉정한 것일까? 망각의 동물이라 그런 것일까?
2,
"기억에 남는 영화있으세요?"
예의 그 유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질문이었다.
"네, '애수'보셨어요? '로버트 테일러'하고 '비비안 리'가 주연했던..."
그녀는 위를 향해 가늘게 눈을 뜨고 영화장면을 되뇌이며 말을 이었다.
"거기서 왜 송년파티장면 있잖아요, 연주자들이 '올드랭 싸인'을 연주하면서 촛불을 하나씩 끄면서
자기악기연주를 그치고 한사람씩 퇴장하는 장면요.
그 속에서 두사람은 얼굴을 마주보며 춤을 추고. 그렇게 하나하나 주자들이 물러가고
제일 마지막 남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그 '올드랭 싸인'을 혼자 마지막까지 연주하다가
결국엔 마지막 촛불마져 끄고 화면은 모든게 사라지죠.
그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그녀는 미소를 띄었다.
" 네, 멋있어요." 지노는 웃으며 동조했지만 조금씩 꺼져가는 그녀의 생명의 불을 떠올렸다.
마치 자신의 운명과 같은 이야기를 그렇게 웃으며 하다니...
3,
지노는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이 있었다. 꽃을 살때는 국화를 기피했고.
함께 기도할때는 촛불을 켜지않았다.
죽음과 연관된 상징물이 그녀의 눈에 띄지않게하려는 배려였던 것이다.
그리곤 늘 스스로 다짐했다. 그녀는 완쾌할 것이라고.
그녀가 건강해지면 그녀에겐 보잘 것없는 나같은 건 상대가 안된다.
집안좋고 학벌좋은 부잣집 아들들이 줄을 설텐데.... 그럴땐 깨끗히 나는 물러나는 거야.
그래 그렇게하기 위해서 나는 그녀를 사랑해선 안돼.
그녀의 마음에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터서는 안되고.
그런 바램속에서도 지노는 늘 그녀를 찿아갔다. 마치 그바램이 역설적으로 일어나길 바라는듯이....
4,
"지노야, 어디 갔다오니? 또 거기 갔었지?"
힐책하듯 고함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지노를 '레지오'입회권유를 했던 그청년 '루까'였다.
지노의 집에갔다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오다가 골목어귀에서 지노를 만난 것이다.
" 야 임마, 그병은 낫지않아, 기대하지마."
지노는 친했던 그가 그런말하는 순간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 아니야, 꼭 나을....." 지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길에 선채 울고 말았다.
루까는 흔들리는 지노의 어깨를 두드렸다. " 야, 술이나 한잔하러 가자."
먹지도 못하는 술잔을 앞에놓고 앉은 지노의 귓가엔 낮에 그녀와 나누었던 음악
'올드 랭 사인'이 어렴풋이 울리고있었다.
그렇게 그녀를 만난 그해는 그녀의 생명처럼 져물어가고 있었다
9.
이유없이 분주했고 마음이 헝클어지고 얽히고 무거워진 채로 한해를 보낸 지노는
어떤 변화, 그것도 그녀의 병이 호전되어 같이 나들이라도 나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그저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새해를 맞았다.
그런 탓인지, 작년에도 종종 그랬지만
지노는 미사시간동안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신의 영광을 찬미하고, 신의 자비를 구하고,
신의 구원에 감사하고... 이런 드높은 뜻들은 기적소리를 남기고 멀리 사라져버리는 기차처럼
가물가물 지노의 뇌리에 맴도는듯하다 어렴풋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 자리엔 대신 그녀에대한 상념이 뚜렷히 차지하고 있었다. 기운없이 웃는 모습,
가끔 허공을 응시하며 이야기하는 모습들을 그려보며 지노는 혼자 씁쓸하고 허탈한 웃음을 짓곤했다.
2,
미사가 끝나고 텅빈 성당에 지노는 무릎을 꿇었다.
어떻게 기도를 해야 좋을지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하느님이 잘 들어주실지 몰랐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구사할 줄도 몰랐다.
그냥 이렇게 반복할 뿐이었다.
" 주님, 그녀의 병을 낫게 해주세요."
희망이 강하면 믿음이 되는 걸까? 믿음이 반복되면 확신이 되는 걸까?
지노는 그녀의 완쾌를 확신하기로 했다.
그것이 신의 뜻이 아니라도 지노는 일방적으로 믿기로했다.
윗사람에게 말대답 한번 한적없고 싫어도 순종만하던 내성적인 자신이 하느님께 대항이라도 하는듯
일방적으로 마음을 정하며 과감해진 것에 그자신도 놀랐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녀를 낫게 해주신다구요?"
3,
일방적이지만, 지노는 자신의 기도 아니 요구,강요,애걸에대한 하느님의 반응이 있길 바랐다.
지노는 정면에 걸려있는 십자가 고상(苦像)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혹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내게 약속이라도 할지 누가알아?'
'아냐 그게 무리라면 살짝 웃어주시기라도 했으면..'
'그 것도 아니라면 그저 손가락이라도 까딱해 주시든지.'
'하다못해 머리카락 한올이라도 흔들려 주시든지..'
지노는 억지로 억지로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자체가 기적이라는 것을 지노는 잘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일어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희망이 쌓이고 쌓여 믿음이 되고 있었다.
한참이나 그렇게 응시를 하고 있었으나 십자가상에는 미동도 일어나지 않았고
주변엔 그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가끔 할머니들이 묵주기도를 끝내고 힘겹게 일어날때 나는 잡음만 들릴 뿐이었다.
'기적이 일어날 리가 없지.'
믿음이 지쳐 희망이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지노의 강한응시의 눈빛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힘없이 바라보는 십자가상 양옆에는 창이 나 있었고 그곳에는
오후햇살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위해 두껍고 붉은 커텐이 드리워져 있었다.
5,
그렇게 희망을 한올 한올 접어갈 때,
갑자기 양쪽 커텐에 햇빛이 강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기우는 오후햇빛이 단순히 커텐에 비쳐진 것에 불과했지만
그로인해 십자가상 양옆에는 붉은 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광경은 환상적이었다.
십자고상 양옆에서 뻗어나온 붉은 빛은 성당안을 붉게 물들이며
지노의 얼굴과 머리위로 쏟아졌다. 눈부심을 잊은채 지노는 그빛줄기 하나라도 놓칠새라
열심히 열심히 눈에 다 담으려는 듯 미동도 하지않고 무릎을 꿇은채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지노는 빛이 사라진 후에도 십자고상을 바라본 채 움직일 줄 몰랐다.
10.
1.
" 이건 기적이야, 기적." 지노의 머리속엔 온갖 생각이 난무했다.
" 기적이라구? 웃기고 있네, 임마 이런게 기적이라면 이세상에 기적아닌 게 없겠다."
" 그래 이세상 모든게 기적이지, 투박한 흙속에서 여리고 색상고운 풀잎들이 솟아나고,
거칠고 딱딱한 나무껍질에서 새싹이 움트고 꽃피고, 그 생물들 속에서 사람들 살며 사랑하고....
그래 다 기적이지..."
지노는 비아냥거리듯 속으로 외치며 성당을 뛰쳐나왔다.
' 탄생? 기적. 삶? 그래 기적. 병? 기적이다. 죽음? 그래! 그래 축복받은 기적이다 !'
2,
지노는 달리 갈 곳이 없었다.
몇번을 돌았을까. 그녀의 집주위를 돌다가 무의식적 습관적으로 그녀를 방문했다.
그녀에게 이사실을 이야기해주고싶었다. 그러나 지노는 망설였다.자신이 없었다.
기적도 아닌일을 기적인양 얘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할까 말까 갈등을 하다,
'맞아,
병의 완쾌에 도움이 된다면 선의의 거짓말도 할 수있는건데.
이건 거짓은 아니잖아! 나혼자 간직해서 좋을게 뭐야?
그녀에게 이야기해서 희망을 주는게 낫지.' 지노는 그렇게 합리화를 했다.
3,
"마리아씨, 저 오늘 마리아씨의 병을 낫게해준다는 하느님의 징표를 봤어요."
그녀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 어떤 징표였어요?"
여기서 지노는 더이상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기적을 원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십자가에서 붉은 빛이 솟아났다고 여기고 싶지만,
객관적인 입장에서보면 단순히 오후햇살이 창문에 비친 것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순간의 현상과 느낌을 지노는 의미있게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그녀가 객관적 입장에서 듣는다면 단순한 자연현상에 얼마나 실망을 하겠나,하는
염려도 일어났기때문에 차마 그이야기는 할 수가 없었다.
4,
" 이야기는 하지 않을께요."
그녀가 다시 물어보면 지노는 사실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녀가 궁금해하는 것에 지노는 냉정할 수가 없었을테니까.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말에 처음으로 거절을 하는 지노에게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을 잠시지었지만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
지노는 그녀의 완쾌를 확신한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4,
지노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그 것이 기적이든 아니든 그녀에게 희망을 줄 근거가됐다는 것에만 자기합리화 자기위안을 삼았다.
그러나 한편 지노는 '하느님은 그녀를 낫게해주시는데 나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서 되겠나?'하는 생각을 했다.
'나도 무언가 내가 할 수있는 일을 해야돼, 그래야 그녀는 보장을 확실히 받을 수있어.'
쌍방의 행위로인해 상대방의 코를 꿰어놓자는 계산이 깔려있는 생각이었다.
웃으운 얘기지만 하느님의 코를 꿰고싶었던 것이다.
지노는 자신이 할 수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여러가지로 생각을 해 보았지만 막연했다.
물론 방법이 있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지만 돈도 힘도 아무런 능력도 없었다.
그녀를 위해서, 그리고 신을 위해서, 할 수있는 것이라곤 매일 미사를 드리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신이 원하는 것인지 신과 지노와 쌍방간에 이루어진 약속인지 분명치는 않았지만,
지노는 달리 선택할 길도 없었고 이렇게라도 자신의 성의를 표하고싶었다.
'내가 이렇게하니 하느님도 이렇게해 주세요'라고하는
일방적이고도 억지스러운 약속아닌 약속을하고 있었던 것이다.
11.
규모가 작은 서대문성당엔 미사가 하루에 한번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늘 새벽에 있었다.
겨울 새벽공기는 숨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차가왔다.
새벽에 성당을 몇일 왔다갔다 하던 지노는 힘들었다.
인근의 다른성당은 규모가 좀 크기때문에 저녁에도 미사가 있었다.
궁리끝에 그는 힘든 새벽을 피해 그인근 성당으로 매일 저녁미사를 다니며 그 겨울을 나고있었다.
늘 그래왔지만
지노는 미사중에 그녀에대한 상념을 잊은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죽음과 연관시켜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그녀에게선 병의 징후를 볼 수가 없었다. 가래는 물론 기침조차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늘 환한미소를 띄고있었고 늘 즐거운듯 이야기를 하고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 모른다.
다만 병때문에 외출을 못하는 것뿐이라고 생각을 했다.
2,
년초엔 항상 대학입시로 어수선했다. 지노도 그대열의 한사람으로 끼어있었으나,
당연하다 할까 불운이라할까 1차 대입에 낙방을 하고 2차 이류대학에 합격을 하게됐다.
지난 일년여동안의 대입시생으로의 소홀한 준비과정으로볼 때 그만한 것도 다행이었다.
3,
봄기운이 살곰살곰 기어오는 즈음이었다. 그녀는 산소호스를 떼었다.
지노의 정성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갑자기 좋아지면 불길하다는 병의 징조였을까?
이렇게 저렇게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나타난 현상이 좋으면 좋을 뿐이었다.
그녀와 부모님 그리고 지노는 기뻐했다.
" 이제 완쾌되면 우리 택시타고 드라이브가요."
" 그래요, 어디로 갈까요? "
" 희망의 일출이 좋을까요, 해변의 아름다운 석양이 좋을까요?"
그들은 희망에 부풀기 시작했다.
4,
지노는 그녀의 집을 나서기전에 늘 기도를 같이 하곤했다.
특별히 하는 기도는 아니었고 '주의 기도와 성모경'을 드리는 정도였지만,
기도할때면 늘 그녀는 두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채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기도를 했다.
지노는 슬쩍슬쩍 눈을 뜨고는 그런 그녀의 아름다움을 훔쳐보며
자신의 성실치 못한 기도자세를 부끄러워 하기도했다.
그날도 역시 그렇게 그녀는 아름답고 경건하게 두손을 모으고 있었다.
지노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그녀의 모으고 있는 손을 잡아야 한다는 절실한 감정이 일어났다.
순간 갈등을했다. ' 불순하게 그런짓을..' ' 뺨이라도 한대 맞으면 어떻게 해..'
' 응큼한 놈같으니..' ' 아냐, 순수한 마음이야..'
지노는 무릎걸음으로 눈감고있는 그녀 앞으로 바싹 기어갔다.
그리곤 그녀의 모으고있는 두손을 지노는 자신의 두손으로 살포시 감쌌다.
그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않고 눈을 감은채로 가만히 있었다.
지노는 일단 안심을하며 두손을 감싸모은채 기도를 드렸다.
생전처음 여인의 손을 잡아본 지노는 아찔하고 가슴뛰는 바람에
기도에는 정신이 없고 그져 그녀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손의 감촉에 정신이 더팔려 있었다.
5,
' 누군가 말했지, 부드럽기는 비단같으나 비단보다 매끄럽고 매끄럽기는 옥같으나 옥보다 부드럽다'고
그랬다, 그녀의 손은 옥이며 비단이었다. 그러나 거기엔 따스함이 더해진 그녀만의 아름다운 손이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여인의 손을 잡아보는 설레임에 지노는
기도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모른채 오직 그녀의 손감촉에만 신경을 쓰고있었다.
기도가 끝나자 그녀는 눈을 뜨고 살며시 웃어주었다.
지노가 무안해하거나 당황해 할까봐 그녀는 웃음으로 편안하게 해주었던 것이리라.
지노는 그녀의 웃음에 내심 기뻐했다.
' 내마음을 받아줬어, 그녀는 나를 각별히 생각하고 있는거야.'
지노는 용기가 생겼다. 내친김이라 생각하고 지노는 그녀의 어깨를 두손으로 잡았다.
순간 지노는 흠칫했다. 지노의 손에 전해져오는 그녀의 어깨감촉은 앙상하기만 한 것이었다.
평소 옷에 가려져있어 몰랐는데 실제로 만져보니 앙상한 뼈만 만져지는 것에 지노는 놀란 것이다.
' 차마 이 정도일 줄은.....'
잠시 기뻤던 지노의 마음은 이내 비감한 안타까움으로 바뀌었다. 지노는 맥없이 손을 놓고 말았다.
지노는 그녀 손의 감촉과 어깨의 앙상함만을 손에, 그리고 가슴에 고이 간직한 채 돌아섰다.
12.
1.
살곰거리던 봄이 성큼성큼 사방을 돌아다니며 꽃망울을 터트려 놓기 시작한 즈음인 그해 4 월 22 일.
해는 서산에 지고, 석양은 산자락을 잡고 아쉬움에 머뭇거리는데,
빛의 위세를 제압한 어둠은 애처로이 남은 갸날픈 빛마져 뒤덮으려는 늦은저녁 무렵이었다.
2,
지노는 그녀의 방에 들어서며 처음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같은 방에 있는걸 목격했다.
그녀의 목은 소파에 힘없이 기대어져 있고 눈동자는 흐려져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연신 그녀의 입에 휴지를 대며 가래를 받아내고 있었다.
지노를 본 그녀는 고개를 겨우 가누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지노는 그녀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지노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몰랐다. 잠시 서있던 지노는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어머니가 하던 일을 대신 맡으려 그녀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그녀어머니는 무슨생각을 했는지 사양도 하지않고 즉시 일어나 자리를 비켜줬다.
3,
철없는 지노였을까? 그녀를 위해 가시적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있다는 것에 순간이나마 가슴 벅차했다.
기꺼이 그녀의 입술사이로 내밷어지는 가래를 지노는 정성드려 받아내며 입술을 닦아주고
바짝 타들어가는 그녀의 입술을 물수건으로 적셔주었다.
그렇게 반복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지노는 그녀와 죽음을 결부시켜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 그런 생각은 피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저 힘이 없을 뿐이고 가래가 나올 뿐이라고 생각했다.
4,
그러기를 얼마가 흘렀을까. 그녀가 무언가 말을 하려는듯 힘겹게 고개를 가누고 지노를 쳐다봤다.
" ... .. ..요"
그녀의 말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 네? 뭐라구요?" 지노는 가슴이 뛰었다.
'아, 그동안 내게 품었던 사랑의 감정을 이제야 고백하는구나. 그래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어.'
지노는 그렇게 기대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힘겹고 가느다랗게 말했다.
"론...지..노..씨,...., 미....안..해...요."
'무엇이라고 미안하다고? 아니 '사랑한다'가 아니고 미안 이라고?'
지노는 그 말을 듣고 서운해했다.
그녀는 다시 말을하려 했다. 지노는 다시 기대를하며 '그래 사랑이란 말이 아니라도 좋아요,
좋아한다는 말이라도 해주세요.' 지노는 속으로 외칠 뿐이었다.
5,
그녀는, 그녀의 사랑이란 말한마디가 그의 발엔 족쇄가 되고 그의 어깨엔 멍에가 되고
그의 가슴엔 상처가 되어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속박하리라고 생각한 것일까?
사랑이 아니고 호감을 가졌다는 속내를 조금이라도 비쳐도 그런 멍에가 된다고 생각을 했을까?
그래서 그녀는 사랑이란 말대신 미안이라는 말을 썼을까?
그러나 지노는, 그녀의 사랑이라는 말 한마디면그의 발은 홀가분하게 자유롭고
그의 어깨엔 그녀의 따듯함이 늘 감돌고 그의 가슴은 늘 뿌듯해서 어려울 땐 용기를 얻으며
늘 그녀의 숨결을 느끼며 평생 행복한 마음으로 살 수있을 거라 생각했다.
6,
그러나 힘겹게 숨을쉬던 그녀는 한참 뒤에 귀를 가까이댄 지노에게,
기대와는 달리 다시한번 " 미..안..해..요..."라고만 속삭이듯 말하곤,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다.
피우지 못한 꽃, 봉오리인 채 시들어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7,
지노는 그녀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느낌이 오질 않았다. 그냥 잠자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는듯한 그녀를 바라본 채 지노는 오래도록 그렇게 앉아있었다.
1969년 4월, 그녀의 나이는 28세 였고 지노는 20세였다.
.
.
머뭇거리던 석양은 사라지고,
세상엔 이미 별무늬 박힌 어둠의 커튼만이 내려져 있었다. .......
--- 終 ----
Letter To Chopin(쇼팽에게 편지를)
노래 / Anna German (1936~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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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조각 한조각 써놓았던 고백같은 글들 모았습니다.
정리해서 보관하는 뜻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