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부여간첩 만난 허인회, 우상호, 함운경, 이인영 정치권 진입
남민전 핵심 김남주, “혁명완수 위해 200만 반동세력 철저히 죽여 없애야”
거물간첩 송두율의 실체가 드러남에 따라 지식인 사회 등 각계각층에 침투한 간첩들과 그 동조세력의 암약상이 주목되고 있다. 한국지식인간첩사에서 가장 충격적 사건은 저명한 통일운동가로 활동해온 김낙중(金洛中)이 사상 최대의 공작금을 받아 대남공작을 벌여 온 간첩임이 드러난 ‘조선노동당’사건이었다.
특히 김낙중은 1955년 월북 후 남파, 36년간이나 고정간첩으로 암약하며 북한에서 총 210만 달러(한화 16억 원 상당)의 공작금을 받아왔는데 이중 쓰고 남은 1백만 달러는 권총(拳銃), 독총(毒銃) 등 공작장비와 함께 그의 집 장독대 밑에서 발견돼 충격을 더해줬다.
1.1992년 ‘조선노동당’ 사건
최고위급 간첩 이선실, 김낙중 등 직접 지휘
1992년 10월 6일 국가안전기획부는 수사결과발표를 통해 “북한은 노동당 서열 22위인 간첩 이선실을 남파, 김낙중 등과 함께‘조선노동당’을 구축해왔으며 95년에 공산화 통일을 이룬다는 전략 아래 입체적인 대남공작을 수행해왔음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선실은 80년 3월쯤부터 90년 10월까지 10여 년간이나 남북한 및 일본을 왕래하며 북한에서 직파된 공작원 10여 명과 함께 대남공작을 총 지휘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선실은 한편 90년대 초부터 김낙중과 함께 민중당 창당을 주도하며 민중당 내 핵심당원들을 포섭해왔는데, 창당발기준비대회 때는 단상에 올라가 민중당기를 이우재(李佑宰) 당시 대표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이선실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한 재야인사로 활약하면서 구속자 가족모임인 ‘민가협’을 수시로 출입, 장기표(張琪杓)의 처 조무하(趙珷厦), 황인오(黃仁五)의 모 전재순(全在順) 등과 긴밀히 접촉해왔다.
김낙중 집에서 공작금100만 달러 발견
92년 당시 파악된 남한 조선노동당은 크게 △김낙중 전 민중당 공동대표 계열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총책 황인오 계열 △‘민중당내 지하지도부’ 지도책 손병선 계열로 구분된다.
김낙중은 이 공작금을 통해 이우재, 장기표 등 14대 총선 때 민중당 후보로 출마한 18명에게 모두 7,900만 원을 선거자금으로 제공한 것을 비롯, 북한의 지령에 따라 남한 내 합법적 친북전위정당 건설을 기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낙중은 대남공작의 업적을 인정받아 북한으로부터 91년 10월 ‘김일성 공로훈장’ 91년 12월 ‘민족통일상’을 받았고, 김일성이 특별히 보낸 산삼과 녹용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황인오, 북한 오가며 간첩교육
중부지역당은 92년 파악된 남한 조선노동당의 하부조직으로서 황인오 등에 의해 관리돼온 남한 중부지역관리조직이었다.
당총책 황인오는 이선실에게 포섭돼 1990년 10월 17일 월북, 노동당에 가입하고 간첩교육을 받은 뒤 같은 달 23일 남한으로 돌아왔다.
이후 황인오는 동생 황인욱(黃仁郁·25) 등 핵심 주사파 12명을 북한 노동당에 가입시키고 91년 7월말 경 강원·충북·충남 3개 도당을 관할하는‘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을 결성했다.
이때 황인오 등은‘주체사상을 유일한 지도이념으로 한다’는 내용의 노동당 규약과 김일성에 충성을 다짐하는 맹세문을 채택했다.
황인욱 지령문 KBS사장 정연주 거명
한편 ‘남한 조선노동당’사건의 핵심인물로서 10년刑을 구형받고 수감 중이던 황인욱은 93년 5월 13일 교도소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풀려나는 고한석(高漢碩)을 통해 비밀지령문을 몰래 반출하려다 적발돼 충격을 줬다.
고한석은 석방 시 신체검사를 받던 도중 1cm크기의 녹색캡슐 2개가 교도관들에게 발각됐는데 이 캡슐 안에는 7~8명의 이름 등 돋보기가 없으면 읽을 수 없을 정도의 깨알처럼 쓴 글씨가 적힌 메모지가 들어 있었다.
교도관들의 추궁에 고한석은 이 메모가 4월 중순 황인욱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임을 자백했다. 황인욱은 이 문건에“안기부가 내사 중이니 행동에 조심하라”는 경고와 함께 안기부 수사과정에서 알게 된 간첩수사방법 등 메모지에 적힌 7~8명의 조직원들에 대한 구체적 지령을 적어 놓았다.
한편 한나라당 이원창(李元昌)의원은 지난 2일 국회 문화관광위
의 KBS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이 문건에 거명된 실명 중 세 번째에 현 KBS사장 정연주 씨가 들어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해 충격을 주고 있다.
이 의원은 정 사장의 남조선노동당 연루의혹을 지적하면서 “모든 사건 관계자들은 정 사장의 관련 내용에 대해 증언했으며 정 사장이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의 황인욱과 같은 노선을 걷고 있는 사람으로 추정이 가능하도록 돼 있다”고 밝혔었다.
실제로 당시 황인오 등과 함께 주사파 운동을 함께 했던 J 씨는 “당시 리스트에는 정 씨 이외에 강철서신으로 유명한 김영환 등 북한노동당원으로 입당한 인물들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안다”며 “이러한 사실은 황인오 씨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정사장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정 사장은 당시 미국영주권자인데다 인지도가 낮은 인물이라 수사자체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DJ, 김낙중 등 관련자 全員사면
김대중 정부 들어 공안사범에 대한 사면이 연속되면서 92년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의 김낙중, 황인오·인욱 형제, 손병선은 물론 남파간첩 등 공안사범 103명이 ‘양심수’라는 이름으로 석방됐다.
석방 후 4일 만에 기자회견을 열어‘모든 양심수(?)의 석방’을 주장하기도 했던 김낙중은 현재도 통일운동가라는 직함 아래 소위 진보진영의 주요 인사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2001년 12월 ‘디지털 말’지에 실린 ‘겨레의 평화로운 삶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김낙중은 ‘북한이 남침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비합리적 생각이며, 오히려 한·미·일 공조체제의 이름으로 북한을 목 조르는 정책은 평화적 통일을 방해하는 위험천만한 발상’이라는 요지의 글을 싣기도 했다.
고영구 씨, 김낙중을 평화주의자 미화
한편 고영구(高泳耉) 현 국가정보원장은 변호사 시절 김낙중을 평화주의자로 미화하며 석방운동을 벌여와 국정원장 임명 당시 적격성 논란이 일기도 했다.
지난 98년 4월에는 고영구, 강만길(姜萬吉·현 상지대 총장), 김진균(金晋均·현 서울대 명예교수) 윤성식(尹成植·전 사월혁명연구소장) 리영희(李泳禧·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대우교수) 홍근수(洪根洙·전 향린교회 목사) 이창복(李昌馥. 현 국민참여통합신당 국회의원) 강정구(姜楨求·현 동국대 교수) 이장희(李長熙·현 한국외대교수) 김금수(金錦守·노사정위 위원장 ) 박순경(朴淳敬·자주민족화해 자주평화통일 상임고문) 박형규(朴炯圭·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이효재(李效再·경신사회복지연구소 소장) 박용길(朴鏞吉·한빛교회장로·배우 문성근 모친) 지선(知詵·대한불교 조계종 고불총림 백양사 주지) 등 32명이 발기하여 ‘평화주의자 김낙중 석방대책위원회’를 결성, “김낙중은 민족화해와 평화적 민족통일의 기수이므로 그를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중부지역당사건에 관련됐던 장기표 현 사회민주당 대표는 지난 5일 “송두율사건을 두고 일부에서 색깔론 운운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고 송 씨를 감싸는 사이비진보세력들이 진정한 민주화운동과 진보세력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며 “송 씨를 초청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즉각 해체해야 한다”고 말해 친북과는 단절된 이념관을 보여주기도 했다.
“땅콩뿌리 같은 좌익조직”
92년 남한 노동당 중부지역당 결성이 발각됨에 따라 여타 지역당 결성여부와 정치인 관련여부 등 논란이 일었지만 대통령선거 등 어수선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수사는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었다. 이는 교도소 안팎에서 이뤄지는 공안사범들의 지령전달에서 보이듯 좌익조직의 철저한 위장전술이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1982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검거돼 광주 교도소에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관련사범 등 공안사범들과 수년간 접촉해 온 김정익 씨는 자신의 책 ‘수인(囚人)번호 3179’에서 “좌익사범들은 성경이나 사전 등에 바늘구멍을 내거나 물에 적셔야 글이 나타나는 글을 통해 교도소 내외의 지령을 주고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김 씨는 또 “이러한 철저한 경계를 통해 좌익조직은 수사당국에서 조직원을 검거하면 나머지는 땅 속 깊이 숨어서 보이지 않고 잡힌 한사람만 뽑히는 땅콩뿌리의 양상을 취하고 있다”며 “이를 통해 고도의 세밀한 조직구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2.95년 부여간첩 김동식 사건
허인회 등 신고도 안 해
1995년 10월 충남 부여군에 출현한 무장간첩 박광남(31)과 김동식(33)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해졌다.
권총과 독총 등을 소지한 이들 무장간첩은 그해 8월 남파간첩을 대동 월북하라는 임무를 띠고 강화도를 통해 침투했는데 검거 후 김동식은 지난 90년 거물간첩 이선실과 남한조선노동당 구축공작을 벌인 사실을 시인했다.
또한 김동식은 “90년 당시 황인오, 손병선을 포섭할 때도 ‘북에서 온 노동당 연락원’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접근, 포섭에 성공했다”며 “이번에도 재야인사들이 우리를 신고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 신분을 밝히고 접근했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이들 무장간첩들은 95년 남파 당시 국내 운동권에 신분을 밝히고 접근, 포섭을 시도했고 이들과 접촉했던 운동권인사들은 이러한 사실을 당국에 신고조차 하지 않았었다.
김동식 등은 새정치국민회의 당무위원 허인회(許仁會·31·전 고려대 총학생회장. 현 새천년민주당 동대문을 지구당위원장) 미 문화원사건의 함운경(咸雲炅·32·현 개혁신당추진 연대회의 공동대표) 전대협동우회 회장 이인영(李仁榮·31·전 고려대 총학생회장·현 새천년민주당 구로갑 위원장) 청년정보문화센터 소장 우상호(禹相虎·33·전 연세대 총학생회장. 현 새천년민주당 서대문갑 지구당위원장) 시인 고은(高銀·62) 정동년(鄭東年·52·전국연합 광주전남 의장) 황광우(37·전 민중당원) 씨와 접촉한 후 “통일운동을 같이하자”며 권유한 바 있으나 허인회, 함운경, 이인영, 우상호 씨 등은 이러한 사실을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함운경, 이인영, 우상호 씨는 ‘김동식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해 신고하지 않았다’고 주장해 처벌을 피해갔고 김동식과 만난 사실 자체를 부인한 허인회 씨만 검찰에 기소됐다. 허 씨는 1998년 2월 27일 대법원 형사2부(주심 김형선)에서 유죄가 인정,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3.1979년 남민전사건
홍세화, 남민전사건으로 프랑스 도주
1979년 11월 적발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은 1960년대 인혁당, 통혁당사건 관련자들이 출감 후 노동자·농민·청년학생 등 각계각층을 규합, 북한과의 연계 속에 결성한 지하공산혁명조직이다.
이 사건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간첩사건으로 관련자만 해도 100여 명이 넘었다. 남민전은 안용웅(安龍雄·38) 등이 월북, 김일성에게 사업보고서를 제출하는 등 북한으로부터 구체적 통제를 받아왔고, 남한 내에서 북한이 요구하는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할 경우 게양할 붉은 별이 그려진 대형 ‘전선기(戰線旗)’까지 만들어 놓았다.
심지어 이들은 공작금을 마련하기 위해 혜성대(彗星隊)라는 조직을 만들어 재벌집 강도 등을 예비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작가 홍세화(洪世和·30)는 79년 당시 남민전 사건으로 프랑스에 망명, 공소시효가 만료된 이후인 99년 한국에 돌아와 현재 한겨레신문편집국 부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이들 남민전은 검거 이후 교도소 내에서 오히려 조직을 강화시켜 80년대 이후 국내 자생적 간첩세력의 토대가 된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익 씨는 자신의 책 ‘수인(囚人)번호 3179’에서 “남민전 조직원들은 교도관연락책까지 동원, 교도소 내외에 비밀지령을 주고받으며 조직을 강화시킬 정도로 치밀했다”고 적고 있다.
김 씨는 남민전 핵심관련자인 시인 김남주(金南柱·33)로부터 공산주의사상교육을 받은 내용을 같은 책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김남주가 반복해 말했던 내용 중 한 가지는 아래와 같다.
“계급적인 적들을 증오하라. 철저히 증오하라. 남조선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면 최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은 이 사회의 민족반동세력을 철저하게 죽여 없애야 한다. 그 숫자는 2백만 정도는 될 것이다. 그래야만 혁명을 완전하게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4.1979년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
- 단순 반공법 위반
한명숙 환경부장관, 신인령 이대총장,
김세균 서울대 교수 등 검거
1979년 4월 밝혀진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은 간첩사건은 아니었으나 일단의 지식인들에 의한 체제변혁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1979년 4월 16일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은 “이우재(李佑宰·43·전 민중당 상임대표) 등 크리스찬아카데미 간사들을 중심으로 아카데미 내 불법지하용공서클을 구성, 아카데미에 입교하는 농민, 근로자, 청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중간집단이론강의를 교육하여 대한민국의 헌법질서를 부정하고 이를 변혁함으로써 사회주의 실현을 획책했다”고 발표했다.
이와 관련, 검찰은 크리스찬 아카데미 간사 이우재, 한명숙(韓明淑·36), 김세균(金世均·32) 신인령(辛仁羚·36) 황한식(黃漢植·31), 장상환(蔣尙煥·28) 등 6명과 한양대 정창렬(鄭昌烈·42) 교수를 반공법위반혐의로 구속기소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당시 구속됐던 관련자들은 현재 각 분야의 주요인사가 됐다. 5년형을 살았던 이우재 씨는 현재 국민참여통합신당 국회의원이 됐고, 통혁당 주역 박성준의 아내이기도 했던 한명숙 씨는 2년6개월의 형을 살고 나온 뒤 여성부장관을 거쳐 현재는 환경부장관이 됐다. 2년형을 살고나온 장상환 씨는 현재 경상대 교수로, 징역2년에 집행유예3년을 선고받았던 신인령 씨는 지난해 8월 이화여대 총장이 됐다. 김세균 씨는 선고유예판결을 받은 서울대교수로 재직 중인데 송두율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다. 황한식 씨는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7개월 후 남민전사건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5.1968년 통혁당 사건
김종태 등 노동당 입당 후 간첩활동
통일혁명당, 일명 통혁당 사건은 지난 1968년 대학출신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한 간첩단 사건이었다. 통혁당은 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검거될 당시까지 학사주점 등을 아지트로 활용, 북한으로부터 지속적인 지령을 받으며 동학란식 민중봉기를 획책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통혁당 주동자였던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는 모두 월북해 북한노동당에 입당한 노동당원들이었으며 특히 김종태에게는 사형집행을 받은 후 김일성으로부터 영웅칭호가 내려졌다.
통혁당 사건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김질락(金瓆洛) 이문규(李文奎) 이재학(李在學) 오병철(吳炳哲) 박성준(朴聖焌) 신영복(申榮福)등 상당수가 서울대 출신이었고 신영복 당시 육군 중위 등 4명의 현직 군장교도 포함돼 있었다는 점이었다.
통혁당 장기수 신영복,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 포진
통혁당 사건의 주역 중 한명인 신영복은 68년 당시 사형이 선고됐으나 이후 감형, 20년의 형기를 살다 1988년 석방됐고 현재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경제학과 교수이자 성공회대 민주사회교육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한편 자신의 처 한명숙(韓明淑) 등을 포섭한 혐의 등이 적용돼 15년형이 선고됐던 박성준은 현재 성공회대 민주사회교육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성준은 민중신학자 안병무(安炳茂) 교수(작고)가 설립했던 신학연구소의 운영책임을 맡았으며 최근 종교공동체연대 등의 설립에 참여, 소위 반전평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6.1967년 동백림 사건
윤이상, 오길남 입북권유,
이종수 현 KBS이사장 조사받기도
1967년 7월 8일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작곡가 윤이상(尹伊桑) 등 서독에서 유학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194명이 관련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적발, 이를 수사 중”이라고 발표했다. ‘동백림(동베를린)사건’은 이렇게 막을 열었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사건전모를 밝힌 발표문에 따르면 이 간첩단은 58년 9월부터 67년 5월까지 동독주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북한으로부터 20여 차례에 걸쳐 10여만 달러의 공작금을 받아 북한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공작을 벌여온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범인인도조약이 체결되지 않았던 서독에서 관련자들을 데려오는 과정에서 서독과 외교적 마찰이 빚어졌고 결국 관련자들은 刑집행 도중 특별사면 등의 형태로 석방되기에 이른다.
이후 윤이상 등은 동백림사건이 공화당 집권연장을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며 명예회복을 주장해왔지만 그가 오길남(吳吉南) 박사와 같은 재독유학생들의 입북 등 명백한 반국가행위를 벌여왔음이 사실로 입증됐다.
한편 최근 송두율의 입국과정에서 헌신적 노력을 기울여 온 이종수(李鍾秀) 현 KBS이사장은 당시 동백림사건 수사과정에서 공안당국에 의해 관련여부를 조사받기도 했다.
7.기타 지식인 간첩사건
고영복, 36년간 보수 우익교수 위장
위에서 열거한 지식인들의 주요 간첩사건 이외에도 건국 이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간첩사건들이 공안당국에 의해 적발됐는데 90년대 이후 교수 등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주요 간첩사건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94년 6월 14일 전 경희대 강사 안재구사건
△95년 4월 26일 전 외국어대 교수 박창희사건
△96년 7월 3일 전 단국대 교수 정수일(鄭守一·일명 깐수) 사건
△97년 11월 20일 서울대 교수 고영복(高永復)사건
특히 97년 검거된 저명한 사회학자 고영복(高永復) 씨는 36년간 고정간첩으로 암약해온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더해줬다.
그러나 96년 검거된 정수일(鄭守一) 전 단국대 교수, 97년 검거된 고영복 전 서울대 교수 역시 99년 대통령 특사로 풀려나 현재 연구소등을 개설해 활동하고 있다.
김성욱 기자 gurkhan@
첫댓글 인터넷이 빨갱이들한테 날개를달아줬구나..조용히 박쥐같이 움직이든 놈들이.무현이랑.인터넷이.날개로다..
이런...짐작은했건만..이건수체..빨갱이좌익놈들세상이네..3년후!대중이부터..확실하게.,.뿌리뽑아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