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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유언비어 어느측이 뿌렸나? 답
5.18 광주에서 민중이 일어나도록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유언비어다. 임신부 배를 게엄군이 칼로 찔렀다. 여학생 유방을 도려냈다 등등 실상과 전혀 다른 유언비어만 아니었어도, 광주시민이 격분해 일어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첫 사망자들 ]
광주사태 후, 미 헤리티지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사망자는 첫 이틀동안 두명의 폭도였다 라고 되어 있다.
" 다음날 (19일)격렬함은 상승되었다. 데모대들이 경찰소유물을 파괴했고 2 개 방송국을 공격했고 다량의 차량에 불을 붙였다. 말썽의 첫단계는 맨손과 맨손으로 싸우는 경찰과 군부대와 시위대 간에 형성되었다. 많은 데모대들이 돌과 쇠파이프로 무장했으며 극도로 적대적이고 침략적이었다. 다수 관찰자들은 경찰과 군이 과도한 야만성을 가졌다고 했지만, 또 다른 관찰자들은 증언하기를 " 많은 부분, 군은 폭도들과 터놓고 싸우기를 회피하고 있다. .."라고 했다.양측에 많은 부상이 났지만, 단 2 명의 폭도만 첫 2 일의 대치동안 죽었다. 폭동 첫날, 경상도 군대가 전라도민을 학살하러 왔다는 루머가 퍼졌다. 그리고 40명 이상이 충돌 첫날 살해되었다는 전단이 나왔다. 하지만 실제는 살해된 사람은 없었다. 몇몇 거주자들은 김대중이 처형되었다고 말하고 다녔다. "
20일 이미 폭란화한 현장에서 경찰측이 시민의 버스돌진으로 4명이나 사망했는데도, 이틀간 단 2명 폭도만 사망했다는 것은 경찰과 군이 대단히 자제했음을 보여준다.
조갑제기자는 광주사태 때 마침 광주에 있었다. 그가 쓴 기록에 의하면 4일후 광주를 빠져나왔는데 그 4일동안 그가 확인한 시신수는 105구 라고 한다. 이 증언은 헤리티지 보고와 비교하면, 시민들이 무장화한후 5월21일(** 광주시민군 지휘관 박남선 글에 의하면 21일 무장필요성절감하고 아세아자동차를 탈취했고 박노해 글에 의하면 탈취물 중엔 장갑차2 대와 무기들이 있었다. ) 부터 사망자가 더 크게 나왔음을 알게 한다.
“1980년 5월 4일간 광주에 체류하면서 내가 확인한 사망자의 시신은 105구였다. 내가 빠져나온 후 다시 계엄군이 들어가 유혈사태를 빚으며 시위를 종식시켰으니 그때 또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광주사태가 끝난 후 정부는 2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내가 추정한 수치와 비슷하다. 그러나 1985년 각 월간지가 광주사태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했을 때 많은 국민은 광주사태 사망자가 2000여 명이라는 항간의 이야기를 믿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는 사상자가 200여 명이라는 주장을 고수했다."[조갑제, 월간조선]
민주화위가 게시한 신동아 기자 윤재걸 보도에 의하면 5월18일 저녁 학생들의 시위수는 천오백명으로 "늘어나" 있었으며 그들은 충장로 동명파출소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경찰 40명을 "포로"로 만들었다. 그의 글에 의하면, 또 다른 시위대 (시민?) 수는 5백명 선이었다.
"거의 1천5백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광주천변을 지나면서 공원부근에 집결해 있던 5백여 명의 또 다른 시위대와 맞딱 뜨렸다. 환호성이 터져 올랐다. 이들은 합세해서 광주천변을 도로를 따라 황금동 입구의 구시청부근으로 나아가 충장로 입구와 도청 앞으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나 경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 시위대는 도교육위 쪽으로 방향을 선회, 돌을 던졌으며, 인근의 호화주택(화천기공사 사장 저택으로서, 개인집으로는 가장 호화주택으로 알려져 있다.)에도 돌을 던졌다. 시위대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곳은 동명파출소였다. 파출소는 이내 폐허로 변해버렸다. 정부 주요인사의 사진을 비롯 집기 대부분이 밖에 내던져지고 불길에 휩싸였다. 경찰용 오토바이 2대와 자전거 2대, 그리고 전화를 비롯한 기물과 서류 일체가 도로 한가운데서 불타기 시작했다. 시위대가 40여 명의 경찰을 포로로 잡아 동명로 입구 청산학원 부근에 이르렀을 때, 3백여 명의 경찰 저지병력과 부딪쳤다. 시위대와 경찰은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소득은 없었다.
5월18일의 이 시위에 전남대 학생회장은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도피하고 있었다.
"원한의 5월 18일 시내상황은 시시각각으로 급변했다. 학생회 집행부였던 우리들은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피신 할 것인가로 2시간 가까이 토론을 벌였다. 어찌됐든 남아서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쪽과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으니 일단 피했다가 훗날을 기약하자는 측이 서로 피 튀기듯 갈등을 겪다가 피해상황을 지켜보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낮에 (박)관현이가 먼저 빠져나가고 나는 남아서 상황을 지켜보다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제일 견디기 힘든 건 헬리콥터 소리였다. 계속되는 헬리콥터 소리는 총소리와도 흡사했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처럼 들려 괴롭기 짝없었다. 애인 집에서 은신하였는데 그 부모님께서 시내상황을 계속 보고 오시면서 광주를 빠져나가라고 했다. 그리고 교수님이나 선배들도 피신할 것을 권했다. 상원이 형이 전화로 화염병 제조방법을 이야기하면서 신나에 모래를 섞으면 폭발성이 더 강하다고 전해 주었다. 전화를 받고 집에 있는데 전화가 도청되었다면 내 거처가 드러났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다시 옮겨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 양강섭 증언, 학생회장 박관현과 같이 도피다닌 친구]
동아 윤기자의 글에 의하면 공수부대원이 투입된 시각은 5월18일 오후4시40분경이다. 하지만, 그는 4시30분 있은 충돌 때 2명이 사망했다라고 썼다.
" 이날 오후 4시30분쯤 벌어진 동명로 입구 청산학원 앞에서의 격돌로 인해 5천여 명의 시민·학생시위대중 살상이 난 것으로 광주시민들은 알고 있다. 시체 2구가 다음날(19일)아침 공용터미널 변소에서 발견되기도 했다는 것."
그러나 바로 같은 윤기자의 같은 글에서, 그는 4시30분 직전, 경찰은 40명이나 시위대에 포로로 잡혀 있었고 동명파출소는 "폐허"가 되었다 라고 하였다.그리고 학생들과 경찰은 "협상"을 벌였다.
"시위대가 40여 명의 경찰을 포로로 잡아 동명로 입구 청산학원 부근에 이르렀을 때, 3백여 명의 경찰 저지병력과 부딪쳤다. 시위대와 경찰은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소득은 없었다."
협상 중인 경찰이 시위대를 죽일 수 있을까? 그러므로 시체2구는 누구 손에 죽은 것인지 윤기자의 글 전후로 판단할 때, 정체불상자의 손에 죽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 이 글 말미에 나오지만, 첫 사망자 중 일명은 탱크에서 지면으로 쏜 총알이 튀어서 맞고 죽은 김영환이다.)
헤리티지와 광주민주화위의 자료는 첫 사망자 숫자에서 일치한다. 그러므로 윤기자의 글은 적어도 최소한의 사실에 근접해 있다. 바로 그 윤기자의 글, 그리고 광주민주위의 글에 의거해 파악해보더라도, 첫 사망자는 경찰이나 계엄군 손이 아닌, 시민들 속에 섞인 정체불상의 손에 의해 사망하였고 혹은 지면에서 튄 유탄에 맞은 일명 등 이명이 다다.
윤기자 뿐 아니라 광주민주위가 밝힌 5.18 타임테이블에서도 5월18일 오후4시 시위대가 "파출소 파괴등 적극공세로 시위양상 전환 :동명동.지산동.산수동 파출소 파괴."하였다고 적시되어 나온다. 다만 신동아 윤기자의 보도와 다른 것은 공수부대 투입시간이다. 타임테이블에는 공수부대 진압작전이 금남로 일대에서 2시42분부터 그리고 충장로에서 진압은 오후3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앞당겨 놓았다. 그러나 윤기자 글에 의하면, 오후3시에도 학생들은 오히려 충장로에서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정보를 선취한 경찰이 대기 중에 있어 학생들은 주로 충장로 5가 부근의 파출소와 태평극장 사이로 몰려들었다. 오후 3시. 학생들은 5백여 명으로 불어났다."라고 했으므로, 민주화위 타임테이블상의 공수부대 진압시각과 장소가 틀리게 작성되었거나 윤기자의 보도가 잘못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공수부대가 3시부터 충장로 일대를 대검을 "휘두르며" 진압시작하고 있었다면, 학생들이 오후4시30분 경찰포로를 40명이나 데리고 300명의 경찰들과 협상하고 있었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성립되기 힘든 사안이다. 그러므로 본 필자의 판단에는, 공수부대의 진압시각은 윤기자 보도문안에 나온 18일 오후 4시40분경, 학생과 경찰의 협상이 실패하자 개입시작되었다고 봐야 맞다는 것이다.
[ 유언비어 ]
광주 민주위에 게시된 자료들, 특히 시민군 측의 중심인물에 의해 쓰여지거나 중심인물을 떠받들기 위해 쓰여진 자료들에는 5.18광주의 성격을 규명해줄 중요 단서들이 나온다.
거기에 의하면 유언비어를 뿌리기 시작한 측은 최소한 들불야학이다. 들불야학의 자료로써 확인하면, 그들은 최소한 5월18일 (전남대와 계엄군이 충돌한 당일) 저녁부터 유인물을 복사, 유포한 것으로 보인다. 5월19일 0시부터 인쇄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조선일보 5월19일자에는 광주 유언비어 내용이 보도 되어 있다.
또 광주민주위 타임테이블에도, 5월18일 오후6시부터 "김태종,전용호,김선출 등 광주 문화운동팀 무등영아원에서 유인물 제작 시작."하였다고 나와있다.
박노해가 쓴 "윤상원 열사평전"에 의하면, 윤상원은 전남대학생회장 박관현의 정신적 멘토이자 "프롤레타리아 전위"였으며, 5월18일부터 공수부대의 "화려한 휴가"가 시작되었으며, 그날 밤 윤상원이 "민중시민일동"이란 제목의 "투쟁속보"를 인쇄, 다음날 새벽부터 뿌려나갔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투쟁속보"라는 그 말에서, 이미 윤상원 측은 "투쟁속보" 앞의 일차 유인물을 이미 인쇄, 돌렸다는 것이 유추해석된다. 박노해 글에 의하면, 5월18일 계엄내린 밤거리로 "종이"를 뿌리기 위해 학생들이 들고 나갔다고 하였으므로, 정확히는 5월18일 밤부터 광주시내에 유인물은 뿌려졌다. 통금이 저녁8시부터였다면, 8시후부터인 것이고 통금이 밤10시부터이면 그 후가 될 것이다.
"(윤)상원은 민중들의 자발적인 무장 투쟁을 고조,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정학한 전황 파악에 기초한 구체적 투쟁 지침이 무엇보다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선전, 선동의 역할을 들불 팀이 맡기로 하고 상원은 각자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들불의 불빛이 밤새 광천동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상원과 전용호는 오늘의 상황을 정리하여 다음 싸움의 지침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종이 보급을 맡은 서대석과 김정국은 이미 통행금지가 내린 밤거리로 나갔다."
그리고 그 목표는 "민중의 자발적 무장 투쟁"이었다.
윤상원이 이 유인물 작성과 배포의 총책임자였다. 그는 산발적으로 작성되던 유인물들까지 전부 총취합했다.
"그들은 유인물의 이름을 「투사 회보」로 정하고 봉기 기간 내내 선전 작업에 몰두했다. 나중에 '대학의 소리', 극단 '광대'등 몇 군데서 나오던 지하 유인물은 도청을 장악한22일부터 상원의 지도하에 장소를 YMCA로 옮겨 하나로 통합하여 발행되었다. 고속 등사기로 하루에 2만장씩 찍어 뿌려진 투사 회보는 일체의 소식이 단절된 광주 시민에게 유일한 언론이자 행동 지침서눼?"
광주민주위에 의하면, 유인물을 뿌린 이유가 계엄군측의 유언비어를 막기 위해서라고 하였지만, 이 말은 틀리다. 이유는, 계엄군의 광주사태 발표는 계엄군사령관 이희성 이름으로 5월22일경에야 나왔기 때문이다.
박노해의 글에는 임신부 살해 등 터무니없는 유언비어 책임이 어디 있는지 중요한 단서가 더 들어있다.
"두 명의 공수에게 끌려온 여인은 만삭이 가까운 임산부였다. 여자가 반항할 틈도 없이 옷을 한 나꿔채 듯이 대검으로 여자의 배를 푹질렀다. 단 한번도 햇빛을 보지 못한 희끄무레한 창자가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다시 여자의 아랫배를 가르고 손을 쑥 집어넣더니 피에 싸인 태아를 끄집어내어서 아직까지 숨을 헐떡거리는 여자에게 집어던졌다. 눈을 부릅뜬 채 여자의 경련이 멎자 공수는 시체를 가마니에 집어넣고 쓰레기차에 던졌다. "아이구, 하느님 !" 골목에 숨은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에 푸들푸들 떨고만 있었다. 아! 저 살인마들이 같은 동포인가! 저 공수들이 국민의 군대인가!"
그러나 광주에서 배를 갈리워 살해된 임신부는 없었다. 수차례와 수십년간의 사망자 접수, 신고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날조다.
박노해의 글에 의하면, 윤상원은 MBC를 접수하기 전 날 공수부대원을 살해했다라고 나온다.
""때르르릉―" 상집은 얼른 수화기를 집어들었다."나다 !""아, 형이요?""거기 어떠냐?"공용 터미날 지하도에서 수 십 명이나 죽었 다요. 들었소?""개새씨들!""형은 괜찮소?""나 골목길에서 공수 한 놈 해치웠다.""예? 어떻 게요? 형은 다친 데 없소?"상집은 깜짝 놀라 물었다."응 , 송곳으로 봐 버렸다."
MBC 접수일자는 민주위 타임테이블에 의하면 5월20일이다. "20:00 시위대 MBC방송국 점령 체포된 시위대 도청으로 연행"
박노해의 글과 민주위 타임테이블을 비교하면, 윤상원이 공수부대원을 해치운 시각은 5월19일 "19:20 시외버스공용터미널 2,000시위대 해산됨" 그 이전으로 판단된다.
박노해 글에 의하면, 날조된 유언비어는 더 있다.
"여학생의 젖가슴을 도려내는 놈들! 운전 기사의 두 손목을 잘라 내는 놈들! 공용 터미날 바닥에 굴러다니던 임자 잃은 귓바퀴들, 어제의 그 처참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사망자들 중 아무도 젖가슴이 도려진 여학생은 없었으며 사망자나 실종자에도 나오지 않았다. 이것에 대해 민주화위 타임테이블은 "** '여대생의 젖가슴을 칼로 도려냈다'는 말은 5월 19일 친구 병문안 간다고 집을 나갔던 손옥례양(당시, 19세)이 좌유방부자창·우측흉부 관통상으로 죽은 모습을 목격한 시민들의 입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또한 당시 전남대 병원에 근무하다가 부상자들을 치료했던 의사도 대검에 의해 여대생의 젖가슴이 패여 져 있었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 "라고 밝히고 있다.
관통상을 젖가슴 도려냈다라고 퍼뜨렸던 것이다. 또 공용터미널에서 수십명이나 죽었다는 윤상원 평전 글과 달리, 민주화위 타임테이블에는 "5월20일 18:00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주차장에 시체 7∼8구 목격됨"이라고 해놓았다.
공용터미널 지하에서 수십명이 죽었다는 윤상원과 상집의 대화는 MBC 탈취 전일인 19일 벌어진 대화다. 임신부 배가르기, 여학생 유방도려내기도 마찬가지다. 헤리티지 보도에는 19일까지 사망자는 두명의 폭도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들불야학에선 윤상원 주도로 밤을 새어 유인물 인쇄 및 배포를 시작한 것이 5월18일 밤 부터다. 광주민주위 타임테이블로도 유인물 작성시작일시는 5월18일오후6시부터였다.
그리고 5월18일 광주에서 회수된 유인물에는 譴?이런 내용이 다 들어 있었다.
"5.18.: ① 경상도 출신 군인만 모집, 광주에 투입시켜 시민을 모두 죽이려 한다. ② 시위 주동자 학생들을 연행, 사살했다. ③ 계엄군이 광주시민 씨를 말린다고 임신부를 해부해서 창자를 끌고 다닌다. ④ 여학생의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내 총 끝에 매달고 다닌다. ⑤ 광주시민은 이제 다 죽고 만다. 죽기 전에 끝까지 궐기하자"
이런 내용들은 다 광주에 떠돌던 유언비어와 유인물들 속에 나왔을 뿐이다. 그리고 박노해의 '윤상원 열사'글속에 등장한다. 이 사실로 보아, 광주시민을 격분시켰던 괴유언비어 작성자는 누구인지 응당 짐작가지 않는가 ?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5.18 보고서에 의하면, 5월1일부터, 광주에 이미 "경상도 군대가 전라도민을 학살하러 왔다는 루머가 퍼졌다."라고 되어 있다.
"폭동 첫날, 경상도 군대가 전라도민을 학살하러 왔다는 루머가 퍼졌다. 그리고 40명 이상이 충돌 첫날 살해되었다는 전단이 나왔다. 하지만 실제는 살해된 사람은 없었다. 몇몇 거주자들은 김대중이 처형되었다고 말하고 다녔다. 가장 괴기한 루머, 군중을 격렬하게 만든, 는 군부대가 수일간 굶주렸으며 광주에 오기전 마약을 했다는 낭설이었다.
광주시민을 거리로 나오게 한 그 유언비어들 - 너무나 터무니없던 - 이 몇일부터 퍼졌으며 누가 주로 유인물을 작성하고 퍼뜨렸는가 라는 면으로 볼 때, 그리고 박관현(전남대학생회장)이 그 기간, 줄곧 북한방송에 의존 청취했다는 사실로 볼 때 - 박관현이 그랬으니 박관현의 정신적 멘토나 같았던 윤상원은 더욱 그랬을 측면이 높다. - , 광주사태는 민주화운동이 아닌, 프롤레타리아 봉기에 더 가깝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헤리티지 보고에는 계엄첫날 5월18일, 계엄군은 학생.시민들과 부딪히기 꺼리고 있었다고 하였다. 첫총기 사상자는 5월19일 장갑차에서 지면향해 쏜 총탄이 반사되어 맞은 김영찬이었다. "말썽의 첫단계"에서 경찰은 맨손이었고 시위대는 쇠파이프와 돌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 첫단계에 불을 지른 것은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유인물, 유언비어였다. 그리고 윤상원은 5월19일 공수부대원을 "해치웠다"라고 박노해는 설명해놓았다.
5월19일 나온 구호는 이랬다. ① 위대한 민족의 횃불 金大中 선생을 구하자. ② 광주시민을 주축으로 위대한 全南國을 만들자. ③ 現 정부는 미국의 앞잡이다. 위정자는 떠나라"
"위대한 전남국"을 만들자고 한 구호의 뜻은 명백한 "해방구"의미 아닌가?
유언비어에 의해 "5월20일까지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폭도들은 시청과 방송국 하나에 불질렀다. 강제징집된 버스와 택시들이 거리에 넓게 퍼져 나왔다. 정부청사건물에는 4 명의 경찰관이 경찰 바리케이드를 들이박은 차량에 의해 살해되었다. 상황은 급하게 공권력의 제어를 벗어났[해리티지재단보고서]" 던 것이다.
광주에 퍼지던 "루머"[해리티지]와 윤상원, 상집간 전화통화내용[박노해, 윤상원열사평전]은 일자와 내용이 일치한다. "민중의 자발적 무장투쟁" 즉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혁명을 위해 괴유언비어를 확산시킬 필요가 적극적으로 있었다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2009.9.11. 파아란 한은경.
*** 본인의 카페에 5.18을 밝혀줄 민주화위 자료들이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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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당히 정확한데 큰 실수가 있군요. <총알이 튀어서 맞고 죽은 김영환이다.> 아닙니다. 김영환은 지금 살아 있습니다. 5월 19일 김영환은 어떤 청년이 고장난 장갑차 안의 광주 군인들(광주향토사단 병력)을 불에 태워 죽이랜다고 장갑차 안으로 불을 던져 넣었습니다. 장갑차 한대가 광주에 막 도착한 11공수 장교를 태우고 달리다 변을 당한 것인데요. 그래서 군인들을 살리기 위해 한 장교가 공포탄을 쏜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김영찬은 또 하나의 총, 즉 무성총을 다리에 맞고 부상을 입었습니다. 저는 그 무성총은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영환 군에게 군인 9명을 불에 태워 죽이라고 시켰던 북한군이 발사한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총상을 보면 도저히 장갑차 안에서 하늘을 향하여 쏜 공포탄에 맞은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김영환 군에게 군인들을 불에태워 죽이라고 시킨 청년이 북한군이었다는 것은 저의 추정이며, 아직 그의 총상 원인을 확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영환은 사망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5.18논객들이 가끔하는 실수가 김영환이 사망했다는 주장인데요. 파아란이 여기서 실수로 5.18논객들 주장을 인용한 것 같습니다. 빨리 파아란에게 김영환은 생존해 있다고 알려주셔야겠네요.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1001.html 에 가시면 김영찬군이 1988년에 쓴 증언이 있습니다. 이 링크를 어서 파아란님에게 가져다 주세요. 5.18측 논객들이 이 증언조차 안 보고 김영찬이 죽었느니 등의 주장을 하는데, 그것은 오류입니다. 5.18측 논객들 주장 중에는 이런 오류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김영찬군이 첫 사망자라는 주장은 완전 잘못된 주장이므로 우파 논객들은 그 잘못을 지적해 주어야 합니다. 파아란님에게 빨리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1001.html 링크를 가져다 주시며 김영찬군은 광주사태 사망자가 아니라고 알려 드리세요.
아, 파아란이 사망자라 하지 않고 사상자라고 했군요. <첫총기 사상자는 5월19일 장갑차에서 지면향해 쏜 총탄이 반사되어 맞은 김영찬이었다.> 그렇다면 파아란이 큰 오류를 범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첫총기 부상자"라는 표현을 썼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 김영찬이 종종 첫 사망자로 혼동되고 있기에 이왕이면 사상자라는 표현보다는 부상자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