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허브가 죽었어요. 바쁜 일이 생겨서 챙겨주지 못했는데 그만.... 불쌍한 허브. 있을 때 잘 해줄걸...."(날다람쥐)
"내 사랑. 잘 갔니? 더 넓은 대지로 보내주지 못해 미안하구나."(루팡3세)
한 인터넷 사이트에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 700여 건 올라와 있다. 죽음을 알리는 글마다 답글도 7~8건씩 달린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함께 슬퍼하고 명복을 비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혹시 애완견? 그도 아니다. 놀랍게도 그 대상은 식물이다.
어린이에게 생명에 관심 높일 수 있어
벌레잡이식물(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식충식물은 일본식 표기이다)이 애완식물로 각광받고 있다. 앞에 소개한 '벌레잡이식물원'(www.kcps.net) 사이트의 경우 생긴 지 2년 만에 회원 수가 9,500여 명에 이른다. 유치원생부터 목수-카피라이터-의사-판검사 등 회원 면면이 다양하다.
이들이 벌레잡이식물을 키우는 까닭은 "일반 식물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감동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벌레까지 잡아먹으며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는 식물의 모습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다는 것이다.
주부 최은주씨(38)는 "네펜데스를 키우는데 정말 신기한 일이 많다"며 "집에 개미가 많은데 네펜데스 주머니로 개미가 일렬로 쭉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고 전한다. 그는 "벌레잡이식물은 잘해주면 금방 주머니를 만들지만 조금만 소홀히 하면 시들해져버린다"며 "특히 어린이에게 다른 식물보다 생명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식물 키우는 재미도 있고 벌레도 사라지니 일석이조라는 말이다.
벌레잡이식물원 사이트 지킴이 이화진씨(38-한국식충식물연구회장)는 서울 강동구 길동에 100평을 임대해 실제로 벌레잡이식물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는 100여 종의 벌레잡이식물이 있다. 벌레잡이식물 100여 종을 한꺼번에 관찰할 수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는 게 이씨의 말이다.
가격은 1만∼5만원, 평생 AS 해줘
지난해 12월 출간된 국내 최초의 벌레잡이식물도감 격인 〈식충식물의 세계〉(도요새)의 저자 전이식 한국식물연구회장도 벌레잡이식물원의 최고령 회원이다. 그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일본-보르네오-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미국-뉴질랜드-남아프리카 등 세계의 벌레잡이식물 자생지를 탐사하고 돌아와 오프라인 벌레잡이식물원에서 한 말이 "여기에 있는 벌레잡이식물이 외국 돌아다니며 본 것보다 더 많다"였다.
벌레잡이말과 백두산벌레잡이제비꽃 등 2종은 30~40년간 우리나에서 발견된 예가 없는 희귀종이다. 물 속에서 사는 벌레잡이말은 체코에서 구했고 백두산벌레잡이제비꽃은 유럽에서 이씨가 직접 구입했다. 이들을 키우기 위해 그는 여름에는 파리-모기-바퀴벌레 등을, 겨울에는 구더기를 구해서 먹였다. 벌레잡이식물 때문에 인근의 벌레가 모두 사라지자 개를 기르면서 개똥으로 벌레를 끌어모아 식물의 먹이로 주기도 했다.
이 식물원에서 함께 근무하고 있는 양규석씨(38)는 원래 게임기 사업가다. 그는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식물은 '변화도 없고 움직임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벌레잡이식물과 만나면서 그의 생각은 180도 변했다. 부족한 영양분을 채우기 위해 온몸을 쪼그라뜨리고 있다가 먹이를 먹고 나면 눈에 보일 만큼 빠르게 자라는 '식물전사'의 역동성에 매료된 것이다. 그는 지금 본업을 뒷전으로 물려놓고 매일 벌레잡이식물원에서 살고 있다. 그는 "한 번 이 식물과 만나면 누구나 마니아가 된다"고 말한다.
이씨는 벌레잡이식물 회원을 상대로 판매도 하고 있다. 가격은 1만원에서 5만원 수준이다. 대부분 동호회원이 구입하지만 간혹 소문듣고 찾아온 일반인도 있다. 한번 구입하면 평생 A/S를 하고 입원 치료도 해준다. 이들은 한 달에 한두 번 오프라인 모임을 갖고 키우는 법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한다.
이씨는 "멸종 혹은 멸종 위기에 처한 벌레잡이식물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과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며 "시나 구의 지원을 받아 좀더 근사한 식물원을 만들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벌레잡이 식물이란
광합성하지만 곤충 잡아 영양분 보충
식물은 자연 생태계의 먹이사슬에서 맨 밑에 자리하고 있다. 자연을 유지하는 밑거름이자 기초 생산자인 식물은 동물이나 곤충으로부터 수난을 당하는 것이 운명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도 별종이 있듯이 자연 질서에도 예외는 있다. 곤충을 잡아먹는 벌레잡이식물이 그렇다.
생태계의 질서를 거역하는 벌레잡이식물이 탄생한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을 법하다. 식물학자 전이식 한국식물연구회 회장은 "습지대나 수렁, 산비탈처럼 생존 조건이 가혹한 지역에 서식하기 때문에 동물을 통해 질소를 공급받도록 진화한 까닭"이라고 말한다.
늪이나 습지의 토양은 일반 토양에 비해 산소가 부족하고 공기의 유통이 잘 되지 않는다. 유기물의 유입은 많지만 유기물을 분해하는 호기성 미생물, 즉 산소 호흡을 하는 미생물의 활동은 저조해 유기물이 잘 썩지 않는다. 유기물이 썩어 분해돼야 식물은 필수 영양분인 질소를 공급받을 수 있는데 늪지는 그렇지 못하니 그런 영양소를 가진 생물을 직접 잡아먹는 삶의 방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도 식물이어서 잎을 통해 광합성 작용을 하기는 한다. 하지만 대부분 영양분을 곤충에게서 보충한다. 놀라운 것은 이들 식물이 먹이와 먹이가 아닌 것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으며 먹이를 잡기 위해 동물보다도 빠른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들은 배가 부르면 향기를 뿜어 벌레들의 접근을 차단하기도 한다.
이화진 벌레잡이식물원장은 "사는 방식은 인간이 봐도 혀를 내두를 정도"라며 "자기 삶을 개척하고자 하는 방식이 놀랍다"고 말한다. 그는 "벌레잡이식물은 자기 표현이 강해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살까지 한다"고 주장한다. 자라는 환경이 모두 다른데 한꺼번에 죽는 경우가 있어 이를 자살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식물이면서 너무 동물적인 것이 벌레잡이 식물"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벌레잡이 식물의 종류
덫식-샘털 끈끈이 등 포획방법 제각각
벌레잡이 식물은 세계적으로 11과 21속 563종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2과 4속 16종이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펜데스 같은 식물은 '개미 사냥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무척 '대식가'다. 하지만 배가 부르면 벌레먹이말처럼 향기를 내어 곤충을 쫓아낸다. 물론 곤충을 유혹할 때도 향기를 뿜어 끌어들인다. 같은 대식가이면서도 먹다가 죽는 종류도 있다. 사라세이나는 너무 많이 먹어 소화 능력을 잃으면서도 먹는 것을 포기하지 않아 결국 썩어 죽는다.
이들의 벌레를 잡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 〈식충식물의 세계〉에 따르면 새나 쥐를 잡는 덫처럼 조개 모양의 포충잎을 양쪽으로 벌리고 있다가 벌레가 들어오면 잽싸게 덮쳐서 잡아먹는 덫식이 있다. 파리지옥이나 벌레먹이말이 여기에 속한다. 잎이 주머니 모양으로 변하여 다가오는 벌레를 빨아들이는 것도 있다. 통발이나 땅귀개, 이삭귀개가 이같은 방식으로 먹고 산다.
끈끈이주걱이나 끈끈이귀이개는 벌레가 날아오면 일단 끈끈이로 붙인 다음 샘털과 잎몸을 움직여 먹이를 포위해서 소화-흡수한다.
끈끈이주걱이나 끈끈이귀이개의 샘털 근처에 실제로 손을 대 보면 끈끈한 느낌을 받는다. 파리나 곤충은 이 끈끈한 성질에 이끌려 잎몸에 달라붙는다. 그러나 긴잎끈끈이주걱이나 벌레잡이제비꽃은 샘털을 움직이지 않고 잎몸에 앉은 곤충만 감아서 잡아먹는다.
이에 반해 코브라풀이나 사라세니아 같은 종류는 통 모양의 포충잎을 만들고 잎 안에 털을 거꾸로 나게 해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도록 한다. 벌레잡이통풀은 주둥이를 미끄럽게 만들어 빠지면 못나오게 해 잡아먹기도 한다.
혹 사람도 잡아먹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식물은 없다. 열대지방에 사는 벌레잡이통풀은 곤충을 잡는 통의 길이가 60㎝에 이르고 주둥이 지름이 18㎝나 돼 거미-달팽이-지네뿐 아니라 쥐 같은 작은 짐승까지도 잡아먹는다. 이화진 벌레잡이식물원장은 "열대어를 먹이로 줘봤더니 뼈까지 사라지는 데 한 달이 걸렸다"며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것은 신화에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벌레잡이식물 기르기
식충식물에게 물은 매우 중요하다. 자생지가 주로 늪지나 습지이기 때문이다. 문헌에 의하면 아예 정수기로 거른 물을 주도록 권장하고 있다. 물은 언제나 풍부하게 준다. 수돗물은 24시간 이상 햇볕에 놓아둔 물을 사용하자.
저면관수란 물을 담은 그릇에 화분이 3분의 1 정도 잠기도록 해서 식물을 키우는 방식을 말한다. 이때 주의할 사항은 물이 부패하지 않도록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은 완전히 갈아주는 것이다. 일반 식물과 달리 비를 맞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