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나는 온몸이 묶여있는 듯 움직일 수 없다. 팔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도 않는다. 눈에 보이는 주변은 온통 어둡고 칙칙해 무엇 하나 보이지 않는다. 나는 곧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리고 어둠 속 저 멀리서 무언가 번쩍인다. 무언가의 눈동자인 것 같다. 사람은 결코 아니다. 가늘게 찢어진 눈은 루비가 박힌 듯 붉게 빛난다. 그리고 그것이 서서히 커진다.
나에게 다가오는 그 어둠의 존재로 인해 나는 덜컥 겁이 난다. 다가오지 마.
도망치고 싶은데 도망 칠 수 없다. 허공에 떠 있는 내 발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붉은 눈빛의 그것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용이다. 거대한 몸집의 검은 용. 그것의 모습은 웅장하고 위압적이다. 나는 숨이 막혀오지만 간신히 입을 연다.
“넌...뭐야.”
나는 용기를 낸다. 그리고 그 용이 사방에 울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대답한다.
“난 가난이다.”
응? 뭐라고?
그리고 갑자기 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용의 거대한 꼬리에 깔린다. 다행히 죽진 않는다.
하지만 너무나도 갑갑하다. 꼬리에 짓눌러진 그 느낌이 온 몸에 전해진다. 몸을 일으킬 수도 없다. 그저 눌려진 그대로이다.
시원하게 숨 쉬고 싶다. 아무나 날 좀 꺼내줘. 제발.
그런데 그 때 저 멀리 한 줄기 빛이 비치더니 백마를 탄 남자가 나타난다. 누가 봐도 잘생긴 왕자가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온다. 그런데 이상한 건 말의 엉덩이에 팔십이라는 숫자가 스프레이로 칠한 것처럼 적혀있다.
아무렴 어때. 나는 그를 향해 소리친다.
“저 좀 살려주세요. 왕자님.”
그런데 왕자는 듣는 척도 하지 않는다. 그저 말 위에서 나를 빤히 내려다볼 뿐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외친다.
“저 좀 구해주세요. 왕자님.”
그 순간 나는 깨닫는다. 나의 입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나를 보는 왕자의 눈빛이 차갑다. 그리고 왕자는 그대로 말을 몰아 어디론가 사라진다. 나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외쳤다.
“왕자님! 왕자님!”
그는 점점 작아지고 희미해진다.
“왕자님.....”
답답함이 목 끝까지 차오른다.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 이제는 점이 되어버린 왕자에게 외친다.
“왕자.....야이 왕자새끼야!”
나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무슨 꿈이 이래. 자세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분명 기분 더러운 꿈이었다.
그리고 가슴과 배로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강한 묵직함이 느껴졌다. 무언가 나를 짓누르는 느낌. 뭐지 이 느낌은.
그 이상한 느낌의 원인을 찾기 위해 아래쪽을 살폈다. 거기에 있는 건 이상한 로봇 양말을 신은 발이었다.
또 왔구만. 고갤 들어 다시 내 침대를 살펴보니 조카 녀석들이 내 배 위에 다리를 떡하니 올려놓고 아무렇게나 뻗어 있는 것이 보였다. 냅다 이불을 걷어치운 나는 잠에서 덜 깬 조카들을 방 밖으로 밀어 내쫓았다.
“야, 이것들아. 이모가 잠을 자는데 누가 이모 배 위에 다리 올리래, 죽을래?”
그러자 부엌에 있던 언니가 나와서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누가 이 시간에 자래? 지금 밖을 봐. 해 넘어가고 있어!”
김이 풀풀 나는 주걱을 들이밀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언니는 마치 불을 내뿜는 용처럼 보였다. 언니의 괴성에 기겁한 나는 방문 뒤로 뒷걸음질 쳤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나는 머쓱해져서 해가 넘어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낮잠을 좀 잔다는 게 이렇게 되어버렸네.
동화를 넘기고 난 뒤라 한가해진 나는 이렇게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잠을 자는 생활패턴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래도 간만에 쉬는 건데 너무하시네. 내가 지난 몇 주 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뻔히 알면서.
나란히 하품을 하는 두 조카 녀석들은 어느새 제 엄마에게로 가 엉겨 붙으며 배고프다고 징징거렸다. 그리고 내 배에서도 영양보충을 외치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언니에게 달려가 배에 팔을 두르며 징징거렸다.
“나 배고팡. 언니. 저녁 뭐양?”
“아주 팔자 좋다. 개 팔자가 상팔자라던데, 너 개 같아.”
개 같다니. 지난번에 곰, 이번엔 개냐. 난데없는 개 취급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돈 없고 요리 못하는 게 서럽고 분했다. 하지만 저녁 식사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언니에게 함부로 대들 수는 없어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굶고 싶진 않으니까.
“무슨 개? 시츄? 치와와?”
14.
언니가 차려준 밥을 모두 먹어치우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싱크대로 향했다. 여럿이서 먹으면 이게 문제야. 설거지를 하기위해 고무장갑을 끼면서 밥 먹기 전의 감사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같이 밥 먹고 티비에서 하는 만화를 보러 내뺀 두 조카 녀석들이 짜증스러웠다. 초등학생이면 설거지시켜도 되는데.
나는 입이 튀어나와 투덜거리며 그릇들을 거품 낸 수세미로 문질렀다. 식탁에 앉아 녹차를 마시던 언니가 그런 나를 보더니 말을 걸어왔다.
“너, 그 남자 만난 건 언니한테 보고 안 해?”
안 하긴, 당연히 해야지. 내가 얼마나 대단한 남자를 만났는지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거렸는데 당연히 해야지. 아마 말해주면 뒤로 자빠질 거다.
나는 씻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고 뒤돌아 언니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내 말 너무 놀라지 말고 들어. 심장 안 좋잖아, 특히.”
“뭔데 심장까지 나와?”
잔뜩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하는 내 말에도 언니는 또 시작이네 이런 표정이었다. 보고하라 해놓고 저 태도는 뭐래. 약간 말하기 싫어졌다. 그래도 언니가 깜짝 놀라는 모습이 보고 싶어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남자, 뭐하는 사람인 줄 알아?”
“뭐 하는 사람인데?”
“....무직이야.”
그리고 언니는 들고 있던 잔을 나에게 던지는 척하며 인상을 썼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나의 눈과 몸이 움찔거리며 막는 시늉을 했다.
“무직? 그것 때문에 나보고 심장 조심하라고 한 거야? 너 죽을래?”
“아니,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봐. 진짜 중요한 건 그 무직 남자...재산이 얼마인 줄 알아?”
재산 얘기가 나오자 그제야 언니의 얼굴에도 조금 호기심이 나타났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누가 내 언니 아니랄까봐 돈 얘기에 눈이 번쩍하는구만.
“얼...얼만데?”
언니의 진심어린 물음에 더 신이 난 나는 고무장갑을 낀 채로 언니에게 다가갔다.
“글쎄....자그마치..팔십억.”
나는 손가락 여덟 개를 언니의 눈앞에 펼치며 팔십억을 강조했다. 자, 이제 놀라 자빠져라 이 언니야. 하지만 언니는 자빠지지 않았다. 단지 언니의 입이 억 모양으로 벌어졌을 뿐이었다.
“뭐? 팔십억?”
“그래. 팔십억.”
놀랍지? 놀라울 거다. 나도 얼마나 놀랬는데. 나는 내 재산이 팔십억이라도 된 것 마냥 팔짱을 낀 채 의기양양하게 언니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던 언니는 문득 이상하단 얼굴로 날 올려다봤다.
“아니, 무직인데 그런 돈이 어디 있어?”
“주, 식. 주식 투자로 엄청 벌었데.”
나는 주식에 포인트를 주어 힘 있게 말했다. 내 말에 언니는 다시 납득이 간다는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봤다.
그래, 저런 반응이 나와 줘야지.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났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남자를 만났다 이거야.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언니가 허를 찔러왔다.
“근데...그 남자랑 너 사겨?”
너무나도 예리한 언니의 말에 나는 웃음이 싹 사라지고 팔짱 낀 손을 즉시 내렸다.
사귀냐고? 그렇게 물어보면 할 말은 없었다.
사귀는 건 아니지. 우린 그냥 물건 되찾아주고 보답하고 조카랑 셋이서 점심 먹고 뭐 그런 사이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진짜 별게 없었다.
그렇게 뭐가 없었나. 우리 둘 사이에.
“뭐..사귀는 건 아닌데..근데 그건 아직 모르는 거지. 안 그래?”
진짜 모르겠다. 나 혼자 김칫국 마시고 있는 건 아닌지.
언제 생겼는지 모를 자신감이 풍선에 바람 빠지듯 사라졌다. 그리고 언니 역시 평소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네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
“뭐야. 그럼 그 남자 재산이 팔십억이건 팔백억이건 너랑 무슨 상관이야.”
“...근데 가능성이 아주 많아. 그 남자 조카가 날 되게 좋아해. 진짜.”
“아 그래? 좋겠네. 참 가능성이 무한해 보인다.”
언니의 비아냥거림에 나는 굉장히 분했다. 또 다시 나를 한심하다는 듯 보며 웃음 짓는 언니가 얄미웠다. 그러다 진짜 내가 그 남자랑 잘 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저러는 거야.
물론 건형씨와 나, 아무 사이도 아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 그렇다는 얘기잖아. 앞으로 또 만나기로 했고 그렇다는 건 얼마든지 가까워 질 수 있다는 거라구.
나는 다시 싱크대로 돌아가 냄비를 있는 힘껏 박박 문질렀다. 분노를 가득 실은 설거지. 언니가 두 번 다시 나를 무시하지 않게 꼭 그 남자랑 잘 되고 말겠어. 나는 사방팔방 거품을 튀기며 그릇들을 신경질적으로 문질러댔다.
“어휴...설거지 좀 제대로 해!”
언니가 그 모습을 보며 한 소리 했지만 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설거지만 끝나고 바로 연락해야지. 다시 집에 놀러가겠다고.
15
언니와 조카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남은 나는 그에게 할 통화멘트들을 정리했다. 거절당하지 않게 잘 말해야 해. 너무 속 보이지 않게. 절대 돈 많은 그를 어떻게 해보려는 게 아니라 단순히 수빈이란 아이가 보고 싶어서 집에 들르고 싶다는 뉘앙스를 풍겨야만 돼.
그리고 나는 폰을 들고 존잘남을 검색해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가 곧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에요. 진수영.”
“네. 수영씨, 잘 지내셨어요. 그 때 잘 들어가셨냐고 문자 보내는 걸 깜빡했네요.”
“잘 들어갔어요. 잘 지내고 있구요. 아, 참 수빈이는요? 잘 있죠?”
“네. 요즘 수영씨가 준 책에 푹 빠져있어요. 저한테도 읽어보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래 수빈아. 너도 나를 돕는구나.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기쁨의 깨방정을 떨었다.
“수빈이가 좋아한다니 저도 너무 좋네요. 그날 집에 간 이후로 이상하게 자꾸 수빈이가 보고 싶은 거 있죠?”
이 남자는 조카바보야 그걸 공략하자. 성공확률 백퍼센트.
나는 좀 더 수빈이를 들먹이며 집으로 다시 찾아갈 기회를 엿보았다.
“수빈이도 수영씨 언제 오냐고 묻더라구요.”
“정말요? 그랬구나. 근데 저도 가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제가 자꾸 집으로 찾아 뵈도 되나 싶어서요. 너무 실례 같아서.”
집만 한 곳이 없지. 이리저리 나다니는 것도 귀찮고 다른 곳은 필요 없어. 그의 집에서 모든 걸 끝내. 어서 날 다시 초대해.
나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조용히 침을 삼켰다.
“아니에요. 저랑 수빈이는 언제든 좋죠.”
“그럼 내일은 어떠세요? 제가 요즘은 쉬는 중이라 시간이 좀 있거든요. 가서 수빈이랑 놀기도 하구 건형씨랑 셋이서 맛있는 것도 먹고 그럼 너무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내가 예상했던 대로 그는 좋다는 반응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한 번이 어렵지 이렇게 말문을 트면 다음은 더 쉬울 것이다.
매번 수빈이란 그 애와 함께 보내야 한다는 게 좀 걸리긴 하지만 일단 그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도 나쁘진 않지. 데이트 같은 건 사귀자는 말을 들은 다음에 천천히 해도 상관없으니까.
전화를 끊은 나는 방으로 가 옷장을 열고 내일 입을 옷을 골랐다. 늘 드는 생각이지만 마땅히 입을만한 게 없네. 한참을 뒤적거려 겨우겨우 참하고 세련되며 너무 불편하지도 너무 편하지도 않은 복장을 완성하여 세팅했다.
내일은 뭘 좀 사가지고 갈까. 맨손으로 가긴 그렇고 근데 지금 돈이 쪼들리는데. 돈 안 들면서 괜찮은 거 없나. 침대에 몸을 던져 누우며 나는 내일을 계획했다.
그래, 이렇게 슬금슬금 그의 마음에 침투하는 거야. 시작은 조카를 좋아해주던 여자지만 어느 새 자신도 좋아져 버린 거지. 그래.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