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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꿈을 꿔서 영업 시간에 마실을 나왔어요. 고구마 피자 한 판은 테이크 아웃, 설렁탕도 한 그릇 때리고 고홈했더니 한결 머리가 가벼워졌어요. 모기 때문에 룸에서 잠깐 눈을 붙였는데 확실히 나는 봉창 없는 공간이 쥐약입니다. 이번 사건에서 다시 한 번 깨달은 것은 먹방-섹스-공부는 내게 있어 생성이며, 부활(창조)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어제의 나를 넘어설 가능성을 열어 주기 때문입니다. 나는 발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앗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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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은 남들과 다르게 태어난 인간이 '사랑'과 '상실'을 경험하면서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되는가?입니다. '빨강'은 에스더, 괴물은 악동으로 연결하면서 동질감이 배가 되었습니다. "괴물(악동)에게도 자서전은 있다" "타자의 사랑에서 자기 존재로!" 역설의 철학 멋지지 않습니까? 세상은 언제나 영웅의 이야기를 먼저 기록하지만, 영웅의 위대함보다 괴물의 상처가 중요하다고 본 앤 더슨은 헤라클레스 대신 상처 받은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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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예공! <빨강의 자서전>은 <악동의 자선전>과 라임까지 딱 맞지 뭐냐! 아비는 여기서 세상이 무너져 내릴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봤어. 악동은 사진을 찍고 여행을 하면서 자신이 타인의 사랑으로만 규정되는 존재가 아님을 발견하더구나. 존재의 가치는 타인의 인정에 의해 결정되는가? 아니면 타인의 인정과 무관하게 자신만의 존재 방식을 창조할 수 있는가? 니체 버전으로는 위버맨시가 아닐까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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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온의 날개는 처음에는 감추어야 할 결함이었는데 마지막에는 그를 날게 하는 가능성이 되거든. 결국 변한 것은 날개가 아니라 날개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고, 상처의 소멸이 아니라 상처를 지닌 채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이야. 나(괴물)는 인간이 되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괴물인 채로도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 했어. 사랑받기 위해 자신의 날개를 숨겼던 존재가 마침내 그 날개로 날아오르는 이야기 <빨강의 자선전> 리스펙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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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왜 남들과 다른가? 타자는 나와 같아져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차이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2. 사랑은 왜 고통스러운가? 게리온은 헤라클레스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메우려 합니다. 그러나 타인은 나의 결핍을 완전히 채워 줄 수 없습니다.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나의 존재까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3. 괴물은 어떻게 예술가가 되는가? 타인의 시선으로 규정되던 존재가 스스로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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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누가 역사를 서술하는가? 원래 신화의 중심은 영웅 헤라클레스입니다. 게리온은 영웅에게 죽임당하는 괴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앤 카슨은 괴물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영웅을 사랑에 무책임한 인물로 재해석합니다. 이것은 기존의 영웅 중심 서사를 해체하고 주변부에 있던 존재에게 목소리를 돌려주는 포스트모던적 관점입니다. 나는 왜 아직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존재의 가치를 확인받으려 하는가? 타인의 인정에서 벗어난 자기 사랑은 가능한가? 후, 인정 욕구를 극복한다는 것이 또 다른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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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꿈을 꾸고 영업 시간에 마실을 나왔다. 고구마 피자 한 판을 포장하고 설렁탕도 한 그릇 때린 뒤 고홈했더니 머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모기를 피해 창문 없는 룸에서 잠깐 눈을 붙였는데, 역시 나는 봉창 없는 공간에는 쥐약이다. 이번 사건에서 다시 한번 깨달았다. 먹방과 섹스와 공부는 내게 단순한 쾌락이나 취미가 아니라 생성이며 부활이다. 어제의 나를 넘어설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나는 발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앗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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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은 남들과 다르게 태어난 존재가 사랑과 상실을 통과하면서 어떻게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가를 묻는 작품이다. 세상은 언제나 영웅의 승리를 먼저 기록하지만, 카슨은 영웅에게 죽임당했던 괴물 게리온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쓸 권리를 돌려준다. 괴물에게도 자서전은 있다. 영웅의 위대함보다 괴물의 상처에 주목하는 이 서사적 전복이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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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예공! 여기서 아비는 세상이 무너져 내릴 때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았어. 게리온은 헤라클레스에게 사랑받지만 상처받고, 버림받지만 소멸하지 않는다. 사진을 찍고 여행하며 세계를 자기 방식으로 기록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에 갇혀 있던 존재가 마침내 자신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게리온의 날개는 처음부터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남들과 다르다는 수치심의 표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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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날개가 새롭게 생겼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신의 다름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다만 작품의 결말을 완성된 자기 구원이나 실제 비행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다. 날개와 비행의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 카슨의 문학적 성취는 상처를 제거하는 데 있지 않고 상처를 지닌 존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하는 데 있다. 여기서 헤겔의 인정투쟁과 라캉의 욕망 이론이 만난다. 헤겔에게 자의식은 타자의 인정을 통해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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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홀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다. 반면 라캉에게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과 얽혀 있으며, 타자의 사랑으로 자신의 결핍을 완전히 메우려는 시도는 끝내 좌절된다. 그렇다면 인정 욕구 자체가 문제인가? 아니다. 문제는 타인의 인정에 자신의 존재 전체를 저당 잡히는 것이다. 사랑받고 싶은 욕망은 인간적이지만, 사랑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규정하는 순간 타자는 내 존재의 주인이 된다.그렇다고 나르시시즘이 대안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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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은 타인의 인정에서 벗어난 자유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이상화된 이미지 속에 가두는 또 다른 예속일 수 있다. 타인의 사랑에 매달리는 사람과 자기 모습에 도취한 사람은 서로 반대편에 있는 듯하지만, 모두 하나의 완전한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결핍을 지우려 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게리온이 보여주는 제3의 길은 자기 도취가 아니라 자기 창조다. 타인의 인정도 필요하고 사랑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나의 존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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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니체의 자기극복이자 들뢰즈의 생성과도 연결된다. 인간은 완성된 정체성을 발견하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와 사건을 통과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존재 방식을 만들어 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빨강의 자서전』은 괴물이 인간으로 변신하여 구원받는 이야기가 아니다. 괴물이라는 이름으로 배제되었던 존재가 그 이름의 의미를 다시 쓰는 이야기다. 영웅이 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고, 타인에게 선택받지 않아도 자신의 삶을 창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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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야! 사랑이 끝났다고 존재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실은 타인의 눈으로만 자신을 바라보던 습관에서 벗어날 기회가 될 수 있다. 물론 상처가 반드시 성장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상처를 어떻게 해석하고, 그 이후의 삶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있다. 나는 발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이 명제에도 비판은 필요하다. 발전하지 못하는 날에도 나는 여전히 존재하며 존중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발전이 존재의 조건이 되는 순간, 자기극복마저 또 하나의 강박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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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고쳐 쓰고 싶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아직 달라질 수 있다. 괴물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은 결함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그리고 그 날개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라 괴물 자신이 결정한다. 이것이 앤 카슨이 게리온에게 돌려준 가장 근본적인 자유가 아닐까? 이번 글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적 질문은 '인정 욕구를 버리면 자유로워지는가?'입니다. 인정 욕구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헤겔의 상호인정 개념과도 충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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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인정의 폐지가 아니라 인정 관계의 변화입니다. 반대로 나르시시즘은 자기 사랑처럼 보이지만, 라캉의 관점에서는 이상화된 자기 이미지에 대한 집착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사랑과 나르시시즘을 구별하는 기준은 명확합니다. 자기 사랑은 나의 불완전함과 타인의 독립성을 함께 인정하지만, 나르시시즘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견디지 못해 자신이나 타인을 이상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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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의 자서전』의 게리온은 이 둘 사이에서 제3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타자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그 사랑의 유무에 자기 존재의 운명을 맡기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존재에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인정받는 주체에서 자기 삶을 서술하는 주체로 이동하는 것. 이것이 이번 서평의 철학적 핵심입니다.
2026.10.13.tue.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