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군 최초무장시점의 주제와 직접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데아님의 반론에서 인용해 주신 시민군 김수영의 증언을 여기 재인용합니다:
<<당시 공수부대가 도청 안에 있었는데, 시민들이 계속 밀고 들어와 나와 삼촌은 떼밀리다시피 해 도청 앞까지 가게 됐다.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
"공포다."
누군가 외쳤다. 까닭을 모르는 뒷시위대열은 자꾸만 앞으로 밀려왔다. 삼촌과 나는 앞사람을 꼭 붙잡고 미문화원 쪽으로 빠지는데 뒤에 따라오던 청년 한 명이 소리쳤다.
"아저씨 아저씨, 나 총 맞았어요."
그러나 곧바로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대열에서 빠져나오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근처 병원으로 옮겼다. 그곳에서는 소독만 해주고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현장 목격자 김수영에 따르면 당시 공수부대는 도청 안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총소리가 났을 때 그 총소리는 시민군 총성이었습니다.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최초의 총성은 칼빈 총성이었다고 말하고, 김영택 기자도 시민군 편에서 먼저 총성이 들렸다고 증언하니까요.
시민군 김수영은 미문화원 쪽으로 빠지고 있었습니다. 도청 안에서 쏜 총은 90도 좌측으로 한참 떨어진 미문화원쪽으로 도저히 발사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김수영 군 뒤의 청년은 정면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은 것이 아닙니다. 탈북군인들은 시민군으로 위장한 북한군이 시민군 등 뒤에서 쏘았다고 합니다. 김수영군 뒤에서 따라오던 청년은 분명히 등 뒤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맞았습니다.
자, 그러면 저의 이전 글의 질문 중 세번 째 질문에 대한 님의 답변을 여기 인용합니다:
<<세번째 질문, 시위대 혹은 시민군이 무기를 탈취하여 도청 광장으로 돌아오는데 몇시간 걸렸나요?
<- 위와 같이 1시경의 도청 앞 집단발포 직후부터 계산해보아도, 계엄군과 총격전을 시작한 3시경까지는 넉넉히 2시간은 되는군요.
또한, 모든 증거들이 시위대의 무장시점을 1시 30분경으로 증거하고 있으니, 이때부터만 계산해보아도 총격전이 시작된 3시경까지는 1시간 30분이라는 여유있는 시간이 남는군요.>>
드디어 시민군 최초무장시점을 21일 오후 3시로 앞당겨주셨군요. 그러나, 명확하게 오후 1시 30분 이전이었습니다. 시민군은 오후 1시 30분 이전에 이미 총기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데아님이 21일 11:00 - 12:00 동별로 시위대에게 음식 제공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시민군 이용일의 아래의 증언의 사실성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아마 점심때가 좀 지나서 일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지하상가 쪽에서 누가 총을 싣고 와 박스채 차에서 내렸다. 모두들 몰려가서 너나할것없이 총을 들었다. 그 때 갑자기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바로 내 옆사람이 총알에 맞아 쓰러졌다. 사람들은 충장로파출소와 현대예식장 쪽으로 나뉘어 모두 흩어졌다.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은 아예 밟혀버렸다. 잠시 후 사람들은 다시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또 어떤 사람이 장갑차를 타고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러닝셔츠만 입고 머리에는 흰 띠를 두르고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그는 장갑차의 뚜껑을 열고 상체를 위로 내놓고 서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총을 한 자루 던져주었는데 그는 필요없다며 받지 않았다. 그 장갑차는 얼마쯤 앞으로 나가는 듯싶었다. 그러나 도청 쪽에서 저격병이 쏜 총에 목을 맞고 쓰러졌다.
그외에도 몇 대의 차가 도청을 향해서 나가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 차 뒤에는 몇몇 사람들이 낮은 포복자세로 따라갔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총을 배급받은 사람들은 총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들었다. 한편 사람들은 낮게 떠다니는 헬기를 맞추겠다고 하늘을 향해서 공포를 쏘기도 했다. 나도 총을 받았다. 비록 그 이전에는 쏘아본 적도 없고 만져본 적도 없지만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이 가르쳐 준 대로 폼을 잡고 가톨릭센타 옥상을 향해서 쏘았다. >>
이 증언은 http://altair.chonnam.ac.kr/~cnu518/zb41pl7/bbs/view.php?id=ja_03&page=10&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21 에서 자세히 보살 수 있습니다. "아마 점심때가 좀 지나서 일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지하상가 쪽에서 누가 총을 싣고 와 박스채 차에서 내렸다. 모두들 몰려가서 너나할것없이 총을 들었다." 바로 이 장면이 아래의 힌츠페터 영상물 중 21일 장면에서 보여지는 장면입니다. 사건 전개 순서를 보세요. 시민군 총기무장시점이 먼저이고, 시민군 장갑차 사고가 나중입니다.
위의 시민군 증언 사이트로 들어가시면 오전 9시에 시위대가 군용차량을 탈취하는 사건 증언이 있습니다.
<<"불질러 버리기 전에 열어!"
곧 문이 열렸다. 조금이라도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내려서 차를 한 대씩 끌고 나왔다. 어떤 사람이 8톤 트럭을 조립이 덜 된 상태에서 끌고 나오려고 하자 그곳 직원이 차를 가로막으며 못 갖고 나가게 했다. 제발 검사인이라도 받고 나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검사를 맡은 차량들은 시내로 나가기 시작했다.>>
KBS 대본에서 힌츠페터는 21일 오전의 그 사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22“ 나는 사람들이 건설장비를 몰고 나오는 모습을 촬영했다.
군대와 직접 대결을 할 모양이었다.
시위대들이 급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시민군 이용일의 증언이 이어집니다.
<아마 점심때가 좀 지나서 일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지하상가 쪽에서 누가 총을 싣고 와 박스채 차에서 내렸다. 모두들 몰려가서 너나할것없이 총을 들었다.>
힌츠페터의 보도가 이어집니다.
<36“ 시민들은 어디에선가 총과 실탄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이를 서로 나누어 가졌다.
이때 사람들의 구호는 ‘우리를 죽여라’ ‘싸우다 모두 죽자’였던 것으로 기 억된다.
정말 그들은 죽을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일이었다.
나는 남은 필름을 모두 사용해 이 상황을 촬영했다.>
힌츠페터가 그 영상물을 촬영한 시점이 21일 오전이었음을 명백히 입증하는 증거물이 바로 아래의 삐라입니다.
21일 오전 10시에 이미 금남로 일대에 운집한 시위대 수가 십 만명이었다고 하는데요. 그 시민군을 향하여 살포된 삐라가 바로 이 삐라입니다. 광주사태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때 가장 대표적인 광주민주화운동 문서로 등재될 문서입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17.html 에서 그 전문을 보실 수 있는 이 삐라는 5.18단체들이 몹시 소중하게 여기는 삐라입니다.
KBS 대본에서 ‘우리를 죽여라’ ‘싸우다 모두 죽자’ 란 구호는 한국어가 영어로, 영어가 독어로, 독어가 다시 한국어로 번역된 구호이며 실제 구호는 “최후의 1인까지 투쟁하라!”였습니다. 이 구호 삐라가 금남로에 운집한 시민군 및 시위대에게 살포된 시각은 정확하게 5월 21일 오전 10시였습니다.
보세요.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군용 차량들을 탈취한 시각이 오전 9시였으며, 그 군용차량들을 탄 시위대가 금남로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0시였습니다. 시민군이 군용차량을 타고 달리는 장면이 힌츠페터 영상물에 나오쟎아요.
<나는 사람들이 건설장비를 몰고 나오는 모습을 촬영했다.
군대와 직접 대결을 할 모양이었다.
시위대들이 급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따라서 힌츠페터가 시미군 차량이 달리는 장면을 촬영한 시간은 오전 10시경이었습니다. "우리는 피의 투쟁을 계속한다!"라는 제목의 위의 삐라가 금남로에서 살포되어 전 시민군/시위대에게 배포된 시간도 오전 10시였습니다. 오후가 아니었습니다. 시민군/시위대가 "우리는 피의 투쟁을 계속한다!"라는 제목의 위의 삐라를 손에 들고 금남로에서 점심 식사를 한 때도, “최후의 1인까지 투쟁하라!”의 구호를 외친 때도 21일 오전이었습니다.
이상으로 시민군이 5월 21일 오후 1시 반 이전, 즉 시민군 장갑차 사고 이전에 이미 총기 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확하게 입증되었습니다.
첫댓글 저의 답변 완성되었습니다.
<글등록 완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