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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사도행전의 말씀 8,1ㄴ-8>
1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2 독실한 사람 몇이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그를 생각하며 크게 통곡하였다.
3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
4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5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6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7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8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 복음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6,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35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결국 성체 안에 끝까지 남는 자: 두려움 속으로 한 발을 내어 디딜 용기가 있는 자>
오늘 복음도 성체성사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오늘 내용은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누구도 아드님께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빵의 기적을 체험한 이들은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할 때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정상적으로 보지 않고 떠나갑니다.
그들은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신 이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라고 하시며,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결국 예수님을 떠나간 이들은 어째서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신 이들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분이 나의 왕이 되십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은 자녀들은 어떻게 될까요?
부모의 종이 됩니다.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찾아온 이들은 아직은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지, 자신의 주인이요 왕으로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모시겠다고 결심한 이들은 나를 포기하는 표를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한 것과 같습니다.
자기를 봉헌할 마음이 없는 이들은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이끌어 주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결국 아드님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챙기려 할 것인데, 아드님을 그렇게 이용당하게 두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로 살기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로 살기를 원하는 이들만이 성령의 이끄심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도움의 은총이라 합니다.
몽고에서 선교하던 이용규 선교사에게 인도네시아에서 교육사업을 하라는 하느님의 뜻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일가족이 인도네시아에 정착하여 대학을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대학을 시작하려고 할 때 아주 많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슬람국가여서 그랬을 것입니다.
‘이제 여기선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 때 비자에 어려움이 생겨 갑작스럽게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언제 돌아오게 될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좌절감이 몰려왔습니다.
아이들은 울면서 “아빠, 그러면 우리 몇 달 동안 학교 못 가는 거예요?”라고 물었고, 이용규 선교사는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 땅의 젊은 영혼들의 교육을 맡기겠다면서요.
그런데 저는 정작 제 아들과 딸의 교육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하느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니?
너는 왜 네 일이 아닌 걸 걱정하니?”
생각해보니 그건 자신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깨달음이 왔습니다.
“
제가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하느님께 다시 맡겨 드립니다.”
그렇게 하고 나자 비워진 이용규 선교사의 손에 새로운 그림을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 자녀들의 교육 문제에 대한 아픔을 주셨기에 그래서 대학을 세우기 전에 초,중,고등학교를 세우게 됐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그리스도교 학교로 정부 인가를 내주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기적적으로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고 첫 사례로 그리스도교 학교로 올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출처: ‘너는 왜 네 일이 아닌 걸 걱정하니?’, 이용규 선교사, 유튜브 채널, ‘CGNTV SOON’]
이용규 선교사는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내려놓음』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내려놓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려놓음’은 어떤 ‘완성형’이 아니고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그리고 내려놓음의 핵심은 결국 하느님과의 관계 가운데 나의 주도권을 이양하는 것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 가운데 상대방이 중심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어떠한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맡겨드리는 것.
그리고 내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공급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걸어가는 삶.
이것이 바로 내려놓음의 삶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결국 예수님을 떠나게 될 이들은 이 내려놓음이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빵을 주셨다는 말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걱정은 필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걱정을 채워줄 대상으로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내려놓으면 걱정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나로 살아가는 것, 나의 주도권을 내려놓지 않는 삶이 아직 더 낫다고 여기는 이들이었습니다.
영화 ‘마인’(Mine)은 사막 임무에서 실패한 두 병사가 사막을 건너다 지뢰를 밟게 되며 벌이지는 일을 그렸습니다.
둘 다 지뢰를 밟았고 주인공은 발을 떼지 않았지만 다른 군인은 발이 절단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게 됩니다.
주인공은 무려 70시간을 추위와 더위, 동물의 공격과 모래 폭풍을 이겨내며 견딥니다.
더는 희망이 없다고 느낀 그때 한 발짝을 옮깁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뢰가 아닌 하나의 깡통이었습니다.
동료의 고통을 보며 발을 뗄 수 없어 고생한 그 70시간은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버리지 못했던 그 자아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같습니다.
그에게 끊임없이 한 발을 내디디라고 말했던 원주민은 자아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알기에 그렇게 말했던 것인데 두려움이 그 발을 떼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아를 밟고 움직일 용기가 없는 사람을 이끌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신념을 가진 이는 도와주십니다.
나를 내려놓을 수 없으면 다른 나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는 나다.”이십니다.
나로 살아가는 것에 지쳐 누군가에게 나의 주도권을 맡기고 싶다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내 일로 걱정하고 싶지 않아 모든 일을 주님 것으로 맡겨드리고 싶다면 동방박사를 이끌었던 별을 아버지께서 나에게도 다시 보여주실 것입니다.
자아를 떠나는 한 걸음의 용기만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참 자유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주십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삶은 결국 죽음에서 나옵니다>
청년 시절, 시골 본당 연령회장님을 따라 입관예절을 도와드리러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신자들이 임종하면 본당 연령회에서 염습이며, 입관이며, 장례 절차 일체를 주관했습니다.
염습을 하기 위해 시신을 안치실에서 작업실로 옮겨 눕혔는데, 돌아가신 분이 대형 교통 사고를 당한 분이어서 그런지 몰골이 참혹했습니다.
눈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연령회장님께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묵묵히, 그리고 척척 염습을 해나가셨는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그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러웠습니다.
저는 그저 필요한 물건을 달라고 하면 집어드리고, 시신을 옮길 때 들어드리고 그랬습니다.
아직 젊은 분이었고 타지에서 오신 관광객이었는데, 야간에 낯선 길을 운전하다가 참사를 당했다고 전해들었습니다.
회장님께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염습하는 사이, 저는 개인적으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 목숨 참으로 별것 아니로구나, 숨 한번 끊어지면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지극정성으로 동반해드리는 일이 무척 힘겨운 일이지만, 참으로 중요한 일이로구나, 하는 생각.
어제에 이어 오늘 첫 번째 독서인 사도행전은 스테파노의 순교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받은 혹독한 박해를 묘사하고 있는데, 참혹한 동시에 감동적입니다.
독실한 사람 몇이 돌에 맞아 순교한 스테파노 부제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젊은 나이에 무죄한 죽임을 당한 스테파노, 주님과 교회에 충실했던 스테파노의 시신을 수습하던 사람들의 슬픔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그래서 장례 절차 내내 대성통곡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스테파노가 악한들로부터 맞은 돌의 크기는 공기놀이하는 정도의 잔돌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야구공 크기 정도, 아니면 큼지막한 사과 크기였습니다.
그들이 스테파노를 둘러싸서 던진 돌은 한두 개가 아니라 수백 개였습니다.
스테파노는 빗발처럼 날아오는 돌들을 피하지도 않고 고스란히 다 맞았습니다.
어떤 돌은 머리를 정통으로 가격했습니다.
어떤 돌은 얼굴에, 어떤 돌은 가슴에, 허리에 옆구리에...온 몸은 상처투성이요 피범벅이 되었습니다.
임종한 스테파노의 시신을 수습하던 사람들은 시신의 상태를 보고 크게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는 무지막지하고 거대한 악 앞에 그저 체념하고 포기하는 약함의 표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승리의 표지였습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는 성령에 대한 경외심과 하느님 현존에 대한 강한 믿음의 표현, 그 결과였습니다.
결국 참다운 순교는 십자가상 예수님 죽음의 가장 깊은 동기를 파악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 현장에 사울이 함께 하고 있었다는 것,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유다 풍습에 따르면 최고의회 앞에 피고를 고발했던 증인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에게 첫 번째 돌을 던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스테파노에게 첫 번째 돌을 던진 증인들이 벗어둔 겉옷은 사울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만틈 회심 이전의 사울은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는 데 최일선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
(사도행전 8장 3절)
따지고 보니 하느님 참 묘하십니다.
그토록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사울이었는데, 하느님께서는 박해자 사울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당신의 사도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이나 생각만으로 하느님의 크신 계획이나 섭리를 종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를 통해 우리는 교회에 대한 박해가 교회의 성장과 강화와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기 교회는 스테파노의 피와 죽음으로부터 역동적인 성장을 위한 힘과 생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는 그리스도교 교회사 안에서 의미있는 전진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딛게 했습니다.
삶은 결국 죽음에서 나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청하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5)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곧 “나는 ~이다”(εγω ειμι)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 선언문입니다.
곧 당신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 신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당신 생명의 신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말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것은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빵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은 한참 뒤에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빵”은 그분의 신성을 가리킵니다.
‘성찬의 빵’이 거기에 강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빵이 되듯,ㅠ이 신성은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육체의 고통을 없애줄뿐인 육체의 양식이 아니라, 삶 전체를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놓을 빵이라는 뜻입니다.
본디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 이제 죽음을 이기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육체를 썩지 않게 보존해 주십니다.
곧 당신이 ‘참 생명이요 참 양식’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이 빵을 먹는 일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곧 예수님께 와서 믿고 받아먹는 이 안에서 실현되는 생명의 빵입니다.
그리하여 이 빵은 믿는 이의 생명을 참된 생명에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요한 6,39-40)
아버지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아들은 그 뜻을 실현하는 데 전념합니다.
곧 당신께 와서 보고 믿는 이들을 살리십니다.
이렇게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보고”(Θεωρεω)라는 동사는 단순한 시각작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참되게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십자가 아래서 “이 일들을 보고”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 27,54)라고 고백할 사용된 동사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아들을 보면서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를 보는 것’(요한 12,45)과 같은 그런 봄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진정 우리의 내적인 눈이 열려야 할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열리는 눈입니다.
믿음으로 보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는다.”
(요한 6,37)
주님!
아래로 흐를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받아 흐르는 큰 강물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아래에 머물러 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끌어안은 큰 바다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믿어주지 않아도 믿어 주고,
사랑해주지 않아도 사랑해 주며
물리치기보다 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제 형제를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은총 - 온전한 치유와 구원>
파스카의 은총 선물이 늘 새롭고 놀랍고 아름답습니다.
저절로 찬미와 감사, 기쁨이 샘솟습니다.
도대체 모두가 은총이요 선물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캔터베리의 성 안셀모 주교학자 역시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신 참 좋은 선물입니다.
특히 오늘 분도회는 분도회 수도자였던 성 안셀모의 의무 축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11세기 만76세를 사셨으니 당시로는 장수했던 성인입니다.
성인 축일 때마다 생몰(生沒)연대를 통해 제 나이를 비교해 보는 일도 저에겐 신선한 자극이 됩니다.
단테의 신곡의 천국편에도 등장하는 안셀모 성인은 영국 국왕을 상대로 하여 교회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면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서, 당시 그는 위대한 신학자요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란 칭호를 얻었습니다.
성인의 모토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즉 신앙은 그저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함께 생각하며 이해할 수 있는 데까지 이해하면서 믿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 그대로 ‘공부하는 신앙’이요 이런 신앙을 통해 영적 이해 지평도 끝없이 확장되니 이 또한 파스카의 은총입니다.
성인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도리도네오 성인의 말입니다.
“그의 신앙은 극히 깊었고 예지는 뛰어나고 그의 행위는 거룩하고 마음은 경건했으며, 그의 웅변은 유창했고 생활은 타인의 모범으로서 충분했다.
그는 전력을 기울여 사업을 행하고 끊임없이 성서를 묵상하고 모든 덕에 있어서 출중했다.”
정말 만능의 성인입니다.
기념하고 기억할뿐 아니라 우리 모두 각자 파스카의 예수님을 닮아 고유의 성인이 되라고 있는 성인 축일입니다.
어제에 이어 반복되는 복음 서두의 예수님 말씀이 참 은혜롭습니다.
이 또한 파스카의 은총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허기를 채워주는 파스카의 선물, 생명의 빵 예수님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근본적 처방 역시 생명의 빵, 파스카 예수님 뿐임을 깨닫습니다.
엊그제와 어제의 좋은 깨우침이 됐던 본기도 말씀도 다시 나눕니다.
“파스카의 영약(靈藥)으로 저희의 본성을 새롭게 하셨으니,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하느님의 종들에게, 하늘 나라의 문을 열어주셨으니---”
본성을 새롭게 하는,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하늘 나라의 문을 열어주는 파스카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부활 감사송 2번째 양식은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 그 일부를 소개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빛의 자녀들이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났고, 믿는 이들에게 하늘 나라의 문이 열렸나이다.
주님의 죽음으로써 저희가 죽음에서 구원받았고, 주님의 부활로써 모든 이가 새 새명으로 부활하였나이다.”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생명을, 하늘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요즘 신록의 기쁨 가득한 참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집무실의 입구 문을 열 때마다 한눈 가득 들어오는 아름다운 자연이 흡사 하늘 나라 문이 열렸을 때의 놀랍고 새롭고 아름다운 세계를 상징하는 듯 하니 이 또한 일종의 신비체험입니다.
지상 세계가 이렇게 아름답다면 하늘 나라의 현실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울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앞당겨 맛보는 하늘 나라 체험입니다.
저절로 샘솟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또 놀라운 것은 우리 하나하나가 파스카의 은총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은혜로운 신원이 잘 드러나는 오늘 복음입니다.
통째로 그대로 인용합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우리 하나하나가 아버지께서 파스카 예수님께 보내주신 ‘아버지의 선물’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새삼 우리의 평생과제는 파스카의 예수님을 보고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임을 배웁니다.
예닮의 여정중에 날로 ‘새롭게’ 예수님을 만나면서 날로 ‘깊이’ 영원한 생명을 체험하는 우리들이요,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 은총이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란 말이 그대로 확증되는 사도행전의 현실입니다.
바로 스테파노의 순교로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한 복음 선포의 현실이요, 그대로 파스카의 은총이자 기적입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어둠을 빛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파스카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의 표현이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파스카 은총의 결정적 표현이자 열매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마리아 고을의 복음 선포자 필리포스입니다.
필리포스를 통해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의 활동이 눈부십니다.
그가 사마리아 고을에 그리스도를 선포하자 일어난 파스카의 기적입니다.
‘군중은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그대로 이 거룩한 파스카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신바람 나는 치유와 구원의 하늘 나라 현실을 보여줍니다.
새삼 영육의 온전한 치유와 구원의 처방에는 생명의 빵인 파스카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근원적 허기를 해결해 주실 분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지와 허무, 절망의 마음 병을 치유해 주실 분도 생명의 빵, 파스카의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생명의 빵 파스카의 예수님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의 은총이 우리 모두 날마다 새롭고, 놀랍고, 아름다운 하늘 나라를 살게 하시니 저절로 찬미와 감사의 응답입니다.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그 이름, 그 영광을 노래하여라.
영광과 찬양을 드려라.”
(시편 66,1-2)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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