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씨의 시조 6 강릉윤씨(江陵尹氏) 강릉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830가구 2,45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미상이다.
경주윤씨(慶州尹氏) 경주윤씨 시조는 미상이다. 인물로 조선 태종조에 문과에 급제한 윤통(尹統)이 호조참판을 지냈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43가구 1,68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은 미상이다.
남원윤씨(南原尹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남원 윤씨(南原尹氏)의 시조(始祖) 윤 위(尹 威)는 윤신달(尹莘達:파평 윤씨의 시조)의 8세손으로, 1176년(고려 명종 6)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국자박사(國子博士)를 거쳐 기거랑(起居郞)․이부 낭중(吏部郎中)․예빈소경(禮賓少卿) 등을 지냈고, 1200년(신종 3)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호남(湖南)에 갔을 때 남원(南原)에서 복기남(卜奇男)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군수(郡守)가 제압치 못하고 안렴사인 위(威)에게 고(告)하자 단기(單騎)로 적도(賊徒)를 해산 시키고 난을 평정(平定)하여 그 공(功)으로 남원백(南原伯)에 봉해졌고 남원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그 곳에서 살면서 파평 윤씨(坡平尹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남원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그러나 백운거사(白雲居士)로 필명(筆名)이 높았던 이규보(李奎報)가 쓴 <국자사업윤공애사(國子司業尹公哀辭>에 의하면, 윤 위(尹 威)는 문하시중(門下侍中) 윤 관(尹 瓘)의 후손으로 덕(德)과 인품(人品)과 문장(文章)을 갖추었으며, 술을 몇 말씩 먹는 호주가인데도 허튼 소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경 유수(西京留守)로 있다가 죽었는데 남원 사람들이 그의 공을 생각하여 장례비를 모아 남원 땅에 묻히게 하여 후손들이 남원에 살면서 시적(始籍)하게 되었다고 한다. 남원(南原)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고룡군(古龍郡)인데 후에 대방군(帶方郡)으로 고쳤고, 신라(新羅) 신문왕(神文王) 때 소경(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때 남원소경(南原小京)으로 개칭하였다. 고려(高麗) 태조조(太祖朝)에 남원부로 삼았다가 다시 대방군으로 하였으며, 후에 남원군으로 고치고 1360(공민왕 9) 부(府)로 승격, 1739(영조 15) 일신현(一新縣)으로 하였고 다시 부로 복구, 1895년(고종 32) 남원군이 되었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맥(人脈)으로는, 아성(牙城)의 전란에 순절한 극민(克敏 : 시조 위의 아들)과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함안백(咸安伯)에 봉해진 돈(敦)의 부자가 유명했으며, 시조의 현손으로 평리(評理)를 지낸 수균(守均)의 아들 황(璜)은 고려 말에 전서(典書)를 지냈으나 조선 개국(開國)에 두문불사(杜門不仕)하여 충절을 지켰다. 현령(縣令) 신을(莘乙)의 현손(玄孫)인 효손(孝孫)은 어릴 때부터 효행(孝行)이 뛰어나 그의 할아버지가 효손(孝孫)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처관(處寬)이 의정부 녹사(議政府錄事)가 되어 이른 새벽에 정승집의 문 앞에 가서 명함(名啣)을 드리니 문지기가 정 승이 주무신다는 핑계로 명함을 들여보내지 않았다. 날이 저물도록 기다렸다가 시장하고 피곤하여 할 수 없이 돌아와 아들 효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재주가 없는 탓으로 이런 욕을 당하니 너는 마땅히 학업에 근실하여 네 아버지처럼 되지 말라”하였다. 효손이 그 명함 끝에 글을 쓰기를 <정승이 해가 높도록 단잠 자는데, 대문 앞 명함 꼭지에는 털이 났도다. 꿈 속에서 주공(周公)을 만나 보거든, 그때에 토악(吐握)하던 수고를 물어 보소서> 하였다. 이튿날 아침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그 명함 끝에 글을 쓴 것도 모르고 다시 찾아가 명함을 드렸다. 정승이 그 시를 보고는 즉시 불러 들여 묻기를 “이것은 네가 쓴 것이냐”하자 처관은 놀라고 두려워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글자의 획을 살펴보니 바로 그의 아들이 쓴 것임을 알고 마침내 사실대로 말하니 정승은 효손을 불렀다. 효손을 본 정승은 총명하기가 보통 아이와 다르므로 매우 칭찬하였다. 이때 정승은 사위감을 고르고 있던 터라 들어가서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좋은 사윗감을 얻었소”하며 그 사실을 말하자, 부인은 “안됩니다. 우리 딸을 어찌 녹사(錄事)의 아들과 혼인시키겠습니까” 하였다. 정승은 부인의 반대를 듣지 않고 마침내 효손을 사위로 삼았다. 「명신록(名臣錄)」에 의하면, 박원형(朴元亨 : 영의정)이 효손의 명성을 듣고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정승은 바로 박원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효손은 영의정의 사위로 문과중시(文科重試)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고, 슬하에 7남 1녀를 두었다. 특히 그는 당세에 뛰어난 효자(孝子)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아버지가 죽자 여막(廬幕)을 짓고 살면서 시묘(侍墓) 하였고, 묘가 10여 리나 떨어져 있어도 매일 아침마다 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는 반드시 걸어서 돌아와 어머니를 뵈었다. 후에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가, 그의 어머니에게 드리는 음식은 반드시 그의 정성을 드린다 하여 관아에 작은 부엌을 만들어 아내와 함께 손수 음식을 만들었다. 그는 몸소 사냥을 해서 손수 음식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드리고 명절날이면 술상을 올리면서 스스로 아래와 같은 곡조(曲調)를 지어 불렀다. <북쪽에는 둔산령(屯山嶺)이 있고, 남쪽에는 지리산(智異山)이 있으니, 이 두 산의 수(壽)를 빌려다가 만년토록 어머니를 받들리라> 하였다. 노래를 부르고는 일어나 춤을 추어 어머니를 즐겁게 하는 일이라면 아이같은 행동이라도 서슴치 않았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영찬(英贊)의 8세손 결(潔 : 정랑 시걸의 아들)은 중종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주서(注書)가 되어「유구풍속기(瑜球風俗記)」를 저술했다. 뒤에 부수찬(副修撰)이 되어「시정기(時政記)」필화 사건으로 참형된 안명세(安名世)를 위해 변명 하다가 진복창(陳復昌)의 무고로 죽음을 당했다. 특히 그는 시문(詩文)에 능하여 유배지(流配地)에서 뿐만아니라 죽음에 임해서도 태연히 하고 싶은 말을 시(詩) 속에 담아 읊었다. 임진왜란 때 상주성(尙州城)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순절한 섬(暹)은 광국이등공신(光國二等功臣)으로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추봉 되었고, 그의 손자 계(棨)․집(集)․유(柔) 3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했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계(棨)는 인조 때 남양 부사(南陽府使)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만언소(萬言疏)를 올리고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려다가 포로가 되었는데, 꿇어 않히려는 적 앞에 목이 끊겨도 되놈 앞에서 무릎을 못 꿇겠다고 버티다가 발이 잘리었다. 그는 발이 없는 것과 꿇는 것과는 다르다고 굴복하지 않다가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계(棨)의 아우 집(集)은 병자호란 때 화의를 극력 반대했다가 척화론자(斥和論者)로 몰려 청(淸)나라에 잡혀가서 갖은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다가 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심양(瀋陽)의 서문(西門) 밖에서 죽음을 당하여 척화 <삼학사(三學士)>로 불리웠으며, 그의 아우 유(柔)도 두 형의 죽음에 뜻을 세워 청나라 입김이 스며든 조정에 불사(不仕)하고 효도(孝道)와 문행(文行)으로 여생을 마쳐 가장 강력한 척화가문(斥和家門)으로 절의(節義)를 세웠다. 그밖의 인물로는 송시열(宋時烈)의 고제(高弟)로 숙종 때 사화(士禍)에 절의를 지켜 <금세지이련(今世之二連)>으로 송시열의 극찬을 받았던 이건(以健 : 유의 아들)과 이성(以性)이 유명했고, 기(祈)는 임진왜란 때 도망치는 감사(監司)를 욕하고 성(城)을 사수하여, 병자호란에 순절한 형지(衡之)와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척화로 절의(節義)를 세운 형준(衡俊)과 함께 남원 윤씨의 절맥(絶脈)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원 윤씨(南原尹氏)는 남한(南韓)에 총 8,767가구, 37,8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평윤씨(南平尹氏) 남평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38가구 1,07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미상이다.
무송윤씨(茂松尹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무송 윤씨(茂松尹氏)의 선대는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미상(未詳)하다가 고려(高麗) 예종(睿宗) 때 윤양비(尹良疪)가 보승낭장(保勝郎將)을 역임하여 무장현호장(茂長縣戶長)의 택호를 받게 되자 양비를 시조(始祖)로 하고 무송(茂松)을 관향(貫鄕)으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양비(良疪)의 증손(曾孫)인 문정공(文貞公) 택(澤)이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역임하였으며, 택(澤)의 손자 소종(紹宗)은 이 색(李 穡)의 문인으로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장원(壯元)한 뒤 조선(朝鮮)에서 병조 전서(兵曹典書)를 지낼 때「고려사(高麗史)」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회군삼등공신(回軍三等功臣)에 올랐고 수문전 학사(修文殿學士)․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등을 겸직했다. 또한 성리학(性理學)과 경사(經史)에 밝고 문명(文名)이 있었다. 소종(紹宗)의 아들인 회(淮)는 태종(太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세종(世宗) 때 맹사성(孟思誠)․신장(申檣)과 함께「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를 편찬하였으며 병조 판서(兵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특히 술을 좋아하여 주호(酒豪)로 이름이 났었다. 회(淮)의 손자(孫子) 자운(子雲)은 병조와 형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했으며, 우의정(右議政)을 걸쳐 성종(成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내고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에 봉해졌다. 또한 자운(子雲)의 5세곤 형(泂)은 선조(宣祖) 때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이등공신(光國二等功臣)에 책록되어 호조판서(戶曹判書)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이외에도 근대(近代)에 와서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앞장선 세복(世福)․세주(世冑)․호(皓) 등이 무송 윤씨(茂松尹氏)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무송 윤씨(茂松尹氏)는 남한(南韓)에 총 2,470가구, 10,32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윤씨(文化尹氏) 문화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91가구 1,19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미상이다.
밀양윤씨(密陽尹氏) 밀양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55가구 1,06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미상이다.
예천윤씨(醴泉尹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예천 윤씨(醴泉尹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에서 추밀부사(樞密府使)를 지내고 예빈시 소윤(禮賓寺小尹)에 추증(追贈)된 윤 충(尹 忠)이다. 그후 후손(後孫)들이 누대(累代)에 걸쳐 예천(禮泉)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면서 예천(醴泉)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충(忠)의 아들 신서(臣瑞)는 조선(朝鮮)에서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하였으며, 충의 손자 상(祥)이 태조(太祖)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郞)․사예(司藝)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 그밖에 군기감정(軍器監正)을 지낸 창문(昌文),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한 이흥(以興)․참판(參判)을 역임하였던 계후(繼후)의 가문(家門)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예천 윤씨(醴泉尹氏)는 남한(南韓)에 총 443가구 1,96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주윤씨(全州尹氏) 전주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17가구 1,04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미상이다.
칠원윤씨(漆原尹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칠원 윤씨(漆原尹氏)는 신라(新羅) 무열왕(武烈王) 때 태자 태사(太子太師)를 지낸 윤시영(尹始榮)을 시조(始祖)로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영(始榮)의 아들 황(璜) 이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高麗)에서 호장(戶長)을 지낸 거부(鋸富)를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17세손 길보(吉甫)가 삼중대광 첨의찬성사(三重大匡僉議贊成事)를 역임하였고 귀성군(龜城郡)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칠원(漆原)에 정착 세거하면서 본관(本貫)을 칠원(漆原)으로 하였다. 정경공(貞景公) 저(抵)는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으며 제 2차 왕자의 난(王子의 亂) 때 태종(太宗)을 도와 좌명삼등공신(佐命三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찬성사(贊成事)에 올라 칠원군(漆原君)에 봉(封)해졌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한 석보(碩輔)는 호당(浩當)에 뽑혔고 관찰사(觀察使)․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현령(縣令) 이(伊)의 아들 탁연(卓然)은 명종(明宗) 때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형조․이조 판서(刑曹․吏曹判書)를 거쳐 종계변무(宗系辨誣)하여 광국삼등공신으로 칠원군(漆原君)에 봉해졌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났다. 이외에도 임창(任敞)․이의연(李義淵)과 함께 신임(辛任)이 삼포의(三布衣)로 이름난 지술(志述)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좌찬성(左贊成)을 거쳐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른 사국(師國), 효자(孝子)로 향민(鄕民)의 칭송을 받은 형은(衡殷)․치민(致珉) 등은 칠원 윤씨(漆原尹氏)의 가문을 유명하게 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칠원 윤씨(漆原尹氏)는 남한(南韓)에 총 10,815가구 , 44,8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태평윤씨(太平尹氏) 태평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647가구 5,06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미상이다.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파평 윤씨(坡平尹氏)의 시조(始祖) 윤신달(尹辛達)은 신라(新羅)의 천년사직(千年社稷)이 기울고 후삼국(後三國)의 격동기에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창업에 훈고을 세운 명신(名臣)이다.「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용연보감(龍淵寶鑑) 」 등의 문헌에 의하면 시조 신달은 경기도 파주 파평산(坡平山) 기슭에 있는〈용연지(龍淵池)〉라고 못 가운데 있던 옥함(玉函)속에서 출생했다고 하며, 그가 옥함(玉函)에서 나올때 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고 발(足)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고, 손바닥에는 윤(尹)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성(姓)을 윤(尹)으로 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특히 시조 신달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현신(賢臣)으로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기까지 항상 곁에서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충간(忠諫)했으며,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벽상삼한익찬 2등공신(璧上三韓翊贊二等功臣)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의 관작을 받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파평(坡平)으로 삼아 명문세도(名門勢道)의 가문으로 기틀을 다져왔다. 그후 신달의 현손(玄孫) 관(瓘)이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종(宣宗) 때 합문지후(閤門祗候)와 좌사낭중(左司郎中)을 지내고, 1107년(예종 2) 여진정벌(女眞征伐)에 원수(元帥)가 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전, 함주(咸州)와 영주(英州)등 9지구에 성(城)을 쌓아 참범하는 여진을 평정(平定)하고 개선했으며, 뒤에 벼슬이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이르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승례(承禮)의 아들 번(璠) 세조(世祖)의 국구(國舅)가 되어 대사헌(大司憲)․우참찬(右參贊) 등을 거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 파평 부원군(坡平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번(璠)의 아들 삼형제(三兄第)중 맏아들 사분(士昐)이 우의정(右議政)을 지내고 영동령부사(領敦寧府事)에, 둘째 아들 사윤(士昀)은 예조 판서(禮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영평군에. 셋째 사흔(士昕)을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우의정(右議政)에 오름으로써 형제 정승(政丞)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사분(社昐)과 사흔(士昕)의 두 집안에서 같은 시기에 왕비(王妃)가 배출되니, 왕실을 배경으로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으로 갈라져 정치적(政治的) 대결을 벌이게 되는 불운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승순(承順)의 아들 곤(坤)은 정종조(定宗朝)의 동지총제(同知摠制)로서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파령군(坡平君)에 봉해졌으며 1408년(태종 8) 사은사(謝恩使)로 명(明) 나라에 다녀온 후 세종(世宗) 때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올랐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삼산(三山)의 아들 호(壕 : 곤의 손자)는 성종비(成宗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아버지로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해진 뒤 영돈령부사(寧敦寧府事)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한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다. 성종(成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던 필상(弼商)은 세조(世祖) 때의 총신(寵臣)으로 도승지(都承旨)를 지낼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우참찬(右參贊)에 특진(特進)되고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다. 이어 좌의정(左議政)으로 서정도원수(西征都元帥)를 겸하여 건주위(建州衛) 토벌에 공을 세워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앞서 성종조(成宗朝)에 연산군(燕山君)의 생모 윤씨(尹氏)으 폐위를 막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진도(珍島)에 유배된 후 사약(賜藥)을 받았다. 필상(弼商) 증손(曾孫) 현(鉉)은 1537녀(중종 3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종중실록(中宗實錄)」편찬에 참여한 뒤 호조 판서(戶曹判書)․돈령부사(敦寧府事)에 이르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어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난「국간집(菊磵集)」을 저술했다. 목사(牧使) 은(垠)의 아들로 세종(世宗) 때 좌찬성(左贊成)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사로(師路)는 정현옹주(貞顯翁主)와 결혼하여 영천군(鈴川君)에 봉해졌으며 세조(世祖)때 좌익공익(左翼功臣)에 책록되었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택(澤)의 아들 헌주(憲注)는 숙종(肅宗) 때 문과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한 후, 호조 판서(戶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파령 윤씨(坡平尹氏)는 이조 판서(吏曹判書) 지내고 기로소(妓老所)에 들어간 강(絳)과 그의 다섯 아들 지미(趾美)․지선(趾善)․지완(趾完)․지경(趾慶)․지인(趾仁) 형제가 크게 현달(賢達 )하여 명성을 날렸으며, 그 중에서 현종(顯宗) 때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병․이․공조 판서(兵․吏․工曹判書) 등을 지내고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지선(趾善)과 숙종(肅宗)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내고 파령군(坡平 君) 에 봉해진 비경(飛卿)과 그의 손자로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른 봉구(鳳九)는 학행(學行) 뛰어난〈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사람으로 추앙받았고, 봉오(鳳五)는 영조(英祖) 때 대사헌(大司憲)과 우참찬(右參贊)을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이른 봉조와 함꼐 명성을 떨쳤다. 당대의 덕망높은 학자였던 심형(心衡)은 비경(飛卿)의 증손으로 영조(英祖) 때 부제학(副提學)․예조 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하였고, 속종(肅宗) 때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난 증(拯)은 수차에 걸쳐 대사헌(大司憲)과 이조 판서(吏曹判書)․우의정(右議政) 등에 임명되었으나 불취(不就)하고, 당시 격렬한 사색 당쟁(四色黨爭)에 깊숙이 가담하여 소론(少論)의 영수(領袖)로서 송시열(宋時烈) 중심의 노론(老論)에 대항하며 이산(尼山)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밖의 인물로는 인종(仁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고 위사일등공신(衛社一等功臣)에 오른 인경(仁鏡)과 영조(英祖) 때 대사간(大司諫).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이른 동도(東度)가 뛰어났으며, 학자(學者)로 명망(名望) 높은 정(鼎)과 경남(景男). 낙(洛)등은 학문으로 가통(家統)을 이었다. 한말에 와서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이름난 준희(俊熙)와 창석(昌錫)․기섭(기燮)․해(海)․애경(愛卿)․석구(錫求)․현진(顯振) 등이 구국(救國)의 신념(信念)으로 항일 투쟁에 앞장섰으며,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소속으로 일본군(日本軍)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 대장 등을 폭사(暴死)시킨 의사(義士) 봉길(奉吉)은 학문(學問)고 충절의 전통 가문인 파평 윤씨의 전통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평 윤씨(坡平尹氏) 남한(南韓)에 총 154,496 가구, 646,63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안윤씨(咸安尹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함안 윤씨(咸安尹氏)는 태사공(太師公) 윤신달(尹辛達)의 8세곤으로 남원백(南原伯)에 봉해진 윤 위(尹威)의 손자(孫子)인 윤희보(尹希輔)를 시조로 받든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고려(高麗) 대 흥위위주부(興威衛主簿)를 지내고 함안(咸安)에 정착 세거하면서 관향(貫鄕)을 함안으로 하게 되었다. 그후 희보의 아들 기(頎)가 의랑(議郞)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로 제학(提學)을 지낸 희(禧)와 상시(常侍)를 역임한 당(당) 형제가 가문을 중흥시켰다. 희(禧)의 증손(曾孫)인 기견(起견)은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문종(文宗) 대 집현전 부교리(集賢殿副校理)로서 기주관(記注官)이 되어 「세종실록(世宗實錄)」편찬에 참여했으며 연산군 때 부원군(府院君)에 추봉(追封)되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각(慤)은 진사(進士) 익상(翊商)의 아들로 숙종(肅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함경도 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로서 청(淸)나라 사신(使臣)과 함께 백두산(白頭山)의 경계를 사정(査定)하고, 삼국 수군통제사(三軍水軍統制使)를 거쳐 총융사(摠戎使)를 지냈다. 그외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지낸 의검(義儉)과 태연(泰淵) 등이 명망높은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안 윤씨(咸安尹氏)는 남한(南韓)에 총 1,388가구, 6,10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평윤씨(咸平尹氏) 함평윤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369가구 4,49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미상이다.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동향인 다경윤씨(多慶尹氏)와의 관계도 미상이다. .
해남윤씨(海南尹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해남 윤씨(海南尹氏)의 시조(始祖) 윤존부(尹存富)는 고려(高麗) 중기 때 사람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출생과 상계(上系)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하게 상고(祥考)할 수 없다. 그후 7세손까지의 소목(昭穆)도 미상(未詳)하여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사온직장(司醞直長)을 지내다가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아들 단봉(丹鳳)․단학(丹鶴) 형제를 데리고 해남(海南)으로 은둔(隱遁)하여 그 곳에 정착세거(定着世居) 한 8세손 광전(光전)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해남(海南)으로 삼게 되었다. 일찍이 호남지방(湖南地方)에 자리를 잡고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혀온 해남 윤씨는 생원(生員) 효정(孝貞)의 아들 대(代)에 와서 크게 가세(家勢)가 융성하여 가문의 기반이 다져졌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던 구(衢 : 효정의 맏아들)는 1516년(중종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뒤 호당(湖當)에 뽑히고 주서(注書)에 어어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삭직당해 영암(靈岩)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복관(復官)되었고, 문장(文章)에 능하여 윤선도(尹善道)․류희춘(柳希春)․최 부(崔溥)․임억령(林億齡) 등과 더불어 〈해남 오현(海南五賢)〉으로 일컬어졌다. 그의 아들 의중(毅中)도 명종조(明宗朝)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직제학(直提學)과 예조 참의(禮曹參議)․승지(承旨)․대사성(大司成) 등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동지 춘추관사(冬至春秋館事)를 겸직했고, 「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1572년(선조 5) 평안도 관찰사와 이듬해 병조 참판(兵曹參判)․대사헌(大司憲)․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후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가 동인(東人)으로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삭출되었다. 부정(副正) 유심(惟深)의 아들로 관찰사 유기(惟機)에게 입양했던 고산(孤山) 선도(善道)는 혼조의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유배지와 은거지에서 생활하며 시가(詩歌)의 미답지를 개척하고 우리말의 새로운 뜻을 창조 하여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그의 시조(時調)는 정 철(鄭 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 시가에서 쌍벽을 이루었고 우리나라 국문학사(國文學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1616년(광해군 8) 서른 살 때 일개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으로서 북인(北人)의 권신 이이첨(李爾瞻)과 영의정(領議政) 박승종(朴承宗)의 전횡을 고발하는 항소(抗疏)를 올려 지루한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특히 그는 시(詩)를 읊기를 좋아했으나 쓰기를 싫어했다고 하며 일생을 경륜(經倫)과 절의(節義)로 살았으며, 울분은 문학으로 발산했다. 문학과 함께 인품으로도 명망을 받았던 고산은 그를 못살게 하였던 정적(政敵) 원두표(元斗杓)가 앓아 누웠을 때 갖가지 비약(秘藥)을 써서 낫게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효종(孝宗)의 스승이기에 임금은 항상 고산을 가까이 두고 싶었으나, 당시 성세(盛勢)하였던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逡吉) 등 집권자들에 의하여 가혹한 정치적인 보복을 받았다. 고산은 74세때 최악의 유배지라는 삼수(三水 : 함경남도 벽지)에 귀양갔다가 81세에 풀려나서 해남의 연동(蓮洞)에서 생을 마쳤다. 효종(孝宗)이 세자(世子)였을 때 수원(水原)에 살면서 고산을 항상 곁에 두고 싶어 집을 지어 주었는데, 효종이 작고한 뒤에 그 집을 뜯어 배로 고향인 해남 연동에 옮겨 지금도 남아 있다. 그밖에 해남 윤씨를 빛낸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형인 륜(綸)을 비롯, 아들․조카와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신(神)이 정유재란(丁酉再亂)에 다시 전장에 나가 용감하게 싸우다가 순절하여 화암사(花巖祠)에 제향되었으며, 치경(致敬)과 동철(東喆)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백의(白衣)로 창의(倡義)하여 함께 순절하였다. 그외 많은 인물들이 국난극복에 신명을 바쳐 앞장섰으며, 고산의 증손(曾孫) 두서(斗緖)는 시문(詩文)과 그림에 능통하여 현 재(玄齋) 심사정(沈師正)․겸 재(謙 齋) 정 선(鄭 歚) 등과 더불어 〈삼재(三齋)〉로 불리웠고, 그의 아들 덕희(德熙)도 맹영광(孟永光)의 영향을 받아 말(馬)과 신선(神仙)을 잘그려 아버지인 두서(斗緖)과 함께 <쌍절>로 일컬어졌다. 구한말에 와서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정기(廷琦)가 경사(經史)와 문장에 정통했으며 송(宋)나라 미불(米芾)의 서체(書體)를 터득한 글씨를 필명을 떨쳤다. 주찬(柱瓚)은 고종(高宗) 때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내다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항일운동(抗日運動)에 앞장섰다. 1907년에는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과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암살을 위해 결사대를 편성하는 등 항일투쟁에 공헌하여 의절(義節)과 학문(學問)의 전통가문인 해남 윤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남 윤씨(海南尹氏)는 남한(南韓)에 총 11,518가구, 48,78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평윤씨(海平尹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해평 윤씨(海平尹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수사공(守司空)․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판공부사(判工部事) 등을 역임한 윤군정(尹君正)이다. 군정(君正)의 아들 만비(萬庇)가 충렬왕(忠烈王) 때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와 상호군(上護軍)을 지냈고 후에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손자(孫子) 석(碩)은 충숙왕(忠肅王) 때 충근절의동덕찬화보정공신(忠勤節義同德贊化保定功臣)으로 우정승(右政丞)․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등을 지내고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군되어 원(元)나라로부터 진국상장군(鎭國上將軍)․고려도원수(高麗都元帥)의 직위(職位)를 받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해평(海平)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충혜왕(忠惠王) 때 좌정승(左政丞)을 지낸 석(碩)의 아들 지표(之彪)가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어 원(元)나라에 다녀와 해평군(海平君)에 봉해졌으며, 아들 진(珍)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해평군(海平君)에 봉군되어 가문을 빛냈다. 대호군(大護軍) 보(寶)의 아들 가관(可觀)은 우왕(禑王) 때 경상도부원수(慶尙道부元帥)로 함양(咸陽)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여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올라,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낸 창(彰)과 함께 현달하여 이름을 떨쳤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첨정(僉正)을 지낸 훤(萱)의 아들 은보(殷輔)가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교검(校檢)으로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을 겸직,「성종실록(成宗實錄)」편찬에 참여하고 중종(中宗) 때 좌찬성(左贊成)․우의정(右議政) 등을 거쳐 1537년(성종 32)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대사성(大司成) 은필(殷弼)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오른 두수(斗壽)는 1590년(선조 23) 종계변무(宗系辯誣)의 공(功)으로 광국이등공신(光國二等功臣)에 책록되어 대사헌(大司憲)․호조 판서(戶曹判書) 등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특히 두수(斗壽)는 문장(文章)과 글씨에 뛰어나 문징명 체(文徵明體)에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며, 슬하의 다섯 아들이 모두 급제하고 벼슬에 올라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아우 근수(根壽)와 함께 명성을 날려 명문(名門)의 대(代)를 이었다. 그중에서도 맏아들 방(昉)이 인조(仁祖)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부자영상(父子領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둘째 흔(昕)은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고, 셋째 휘(暉)가 우찬성(右贊成)과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냈고, 넷째 훤(暄)은 병조 판서(兵曹判書), 막내인 우(旴)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이르러 훌륭한 가문임을 널리 알렸다. 방(昉)의 아들 이지(履之)는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역임하였고, 신지(新之)는 선조(宣祖)의 부마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소모대장(召募大將)으로 공을 세웠으며, 또한 순지(順之)는 훤(暄)의 아들로 예조판서(禮曹判書)․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며, 그의 증손(曾孫)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유(游)와 이조 참판(吏曹參判) 및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하고 이어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오른 순(淳)이 당대의 명필(名筆)로 이름을 떨쳤다.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급(汲)은 글씨가 뛰어나 윤상서체(尹尙書體)란 독특한 서체(書體)를 이루었으며, 정조(正祖) 때 여러 판서(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른 기동(耆東)은 가문(家門)을 한층 빛낸 인물이다. 명문(名文)과 명필(名筆)로 명성을 얻은 근수(根壽)는 성리학에 능하였고「사서토석(四書吐釋)」․「월정집(月汀集)」등의 저서(著書)를 남겼으며 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성(大司成) 등을 지내고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明)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辯誣)를 하고 돌아와 대사헌(大司憲)․형조 판서(刑曹判書)․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등에 올랐다. 이 황(李 滉)․조 식(曹 植) 등과 학문을 토론하였고, 성 혼(成渾)․이 이(李 珥)와도 친분을 두터이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다. 그 밖에 은보(殷輔)는 성종(成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성종실록(成宗實錄)」․「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승길(承吉)은 찬성(贊成)에 올라 해선군(海善君)에 봉해졌으며, 승훈(承勳)은 승길(承吉)의 아우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여 덕망높은 가문을 유명하게 하였다. 근대 인물(人物)로는 택영(澤榮)의 딸인 윤비(尹妃)가 방(昉)의 후손이고, 구한말(舊韓末) 개화당(開化黨) 내각(內閣)에서 군부 대신(軍部大臣)을 지낸 웅렬(雄烈)과 그의 아들 치호(致昊) 등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평윤씨(海平尹氏)는 남한(南韓)에 총 5,489가구, 22,75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부은씨(高阜殷氏) 고부은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34가구 1,73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는 동향의 우일은씨(雨日殷氏)와의 관계도 미상이다.
달성은씨(達城殷氏) 달성은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34가구 1,11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는 동향(同鄕)의 대구은씨(大邱殷氏)와의 관계도 미상이다.
행주은씨(幸州殷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행주 은씨(幸州殷氏)의 시조(始祖) 은홍열(殷洪悅)은 신라왕조에서 벼슬이 태자태사(太子太師)․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이르렀고 덕양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행주(幸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은씨의 본관(本貫)은「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태인(泰仁)․명곡(椧谷)․행주(幸州) 등 9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現存)하는 본관(本貫)은 행주 은씨(幸州殷氏) 단본(單本)으로 알려진다. 역사상 대표적인 인물을 보면 정(鼎)이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시중(侍中)을 역임하고 학문(學問)이 뛰어나 사숙(私塾)을 열어 많은 후진을 길러냈으며, 조선조(朝鮮朝)에서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한 장손(長孫)의 아들인 여림(汝霖)은 1396년(태조 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우헌납(右獻納)․경력(經歷) 등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라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통헌대부(通憲大夫)에 오른 현(顯)과 해주 판관을 지낸 보(輔) 형제가 가문을 중흥시켰고, 그외 현종(顯宗)과 숙종대(肅宗代)의 학자(學者)로 이름난 정화(鼎和)는 최서림(崔瑞琳)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닦아 일명「상계선생(相溪先生)」으로 불리워졌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행주 은씨(幸州殷氏)는 남한(南韓)에 총 2,975가구, 12,13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괴산음씨(槐山陰氏) 괴산음씨는 서리(胥吏)의 성이었으나 고려 문종조에 음정(陰鼎)이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40가구 2,08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죽산음씨(竹山陰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음씨(陰氏)는 본래 중국(中國) 시평(始平)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다.「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음씨(陰氏)의 본관(本貫)은 죽산(竹山)․괴산(槐山)․경주(慶州)․여주(驪州)․충주(忠州)․음성(陰城) 등을 비롯하여 24본(本)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죽산 음씨(竹山陰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죽산 음씨(竹山陰氏)의 시조(始祖) 음 준(陰 俊)은 원(元)나라 예부 시랑(禮部侍郞)으로 공민왕비(恭愍王妃)인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종(陪從)하고 고려(高麗)에들어와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으므로 이때부터 우리나라 음씨(陰氏)의 연원(淵源)을 이루었으며, 후손들이 죽산(竹山)에 세거(世居)하면서 관향(貫鄕)을 죽산(竹山)으로 삼게 되었다고 「죽산음씨족보(竹山陰氏族譜)」에 기록되어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시조(始祖)인 준(俊)의 아들 철(澈)이 조선(朝鮮)의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문절(文節)이란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철(澈)의 아들로 소경(少卿)을 지낸 곤(崑)과 판사(判事)를 역임한 윤(崙)의 대(代)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외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기남(起南)과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된 희철(希哲)이 유명했으며, 부호군(副護軍) 도광(道光)은 공조참의(工曹參議) 성석(聖惜), 참봉(參奉) 인수(仁洙)․인성(仁星)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죽산 음씨(竹山陰氏)는 남한(南韓)에 총 706가구, 2,94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각성씨의 시조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