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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존자 하나님을 노래함
삼하 22:47-51
47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48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하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하시며
49 나를 원수들에게서 이끌어 내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높이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50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51 여호와께서 그의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하도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
삼하 22:47 / 여호와께서 살아 계시오니 나는 주님만 찬양하겠습니다. 나의 반석, 나의 피난처이신 주님만 찬양하겠습니다. 48) 주께서 내 원수를 모두 갚아주셨고 세계 만민도 내 발밑에 굴복시켜 주셨습니다. 49) 아무리 많은 원수들이 사방에서 일어날지라도 주께서 나를 언제나 건져내 주셨고 포악한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오히려 나를 그들보다 더 높은 곳에 앉혀 주셨습니다. 50) 그러므로 여호와여, 나는 원수들 속에서도 주님만 찬양하며 세계 만민 속에서도 주님의 위대하심만 이렇게 영영 노래하겠습니다. 51) 주께서 나를 왕으로 세우시고 언제나 내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주께서 내게 기름부어 선택된 자로 세우시고 언제나 내게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오고 또 오는 앞날에도 주님은 다윗과 그의 모든 후손에게 그토록 큰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그의 삶에서 직접 경험한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를 주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다윗(47-49) 다윗은 성부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 드립니다(47). 하나님은 생존하시고 찬양을 받으실 만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만유보다 뛰어나신 바위요, 구원의 바위입니다. 다윗은 성부 하나님께서 원수들로부터 구원을 베푸신 축복을 감사하고 있습니다(48-49).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여실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반석 되심, 그리고 그 능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때 진정한 찬양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행하심을 알 때 그 찬양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께 감사하는 다윗(50-51) 마지막으로 다윗은 영원한 나라를 즐거워하고 있는데 이 시는 다윗이 열국을 다스릴 것이라는 말로 끝납니다(50-51). 이 시편의 대부분은 다윗의 삶의 모든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역사하심과 다시 오심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난 인생은 비참하고 종국에 정죄의 심판을 면할 수 없으며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입 맞추고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복종하던 자들은 그 날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되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토록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선명하게 이런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주님이 오시기 1000년 전 다윗을 통해 주시는 예언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삶의 모든 경험에서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하며 그리스도를 즐거워하였던 것과 같이, 우리도 인생에서 겪는 모든 경험에서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그리스도를 더 알아 가는 복된 은혜를 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적 용 : 최근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한 경험이 있을 겁니다. 어떤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은혜를 경험했는지 나누어 봅시다.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오직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성경에서 신약, 구약 “약”자가 약속을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주시고 그것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은혜의 언약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깰 수 없고, 아무도 막을 수 없고,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내셔서 죄와 교만에 물든 사람에게 “나는 너와 언약을 맺고 싶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호크마 주석
=====22:47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 이 구절로부터 마지막 절(51절)까지는 이 시의 종결 부분으로,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승리의 영광을 모두 살아계셔서 자신에게 힘과 용기와 도움을 주셨던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그 중 일부분인 이 구절은 하나님의 속성인 자존성(自存性)을 찬양하는 말이다. 즉,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진리를 생생히 깨닫고, 여기서 '여호와는 살아계시도다!'라고 확신있게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딤전 6:16). 이처럼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하는 자는 그 마지막에 '하나님은 살아계시도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혹자들은 이 말을 일종의 기원 형식으로 보고, 곧 '여호와는 길이 사시옵소서'란 뜻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만세수'(16:16;삼상 10:24;왕상 1:25, 39;왕하 11:12)는 유한성(有限性)을 지닌 인간에게나 필요한 것일 뿐, 영원토록 스스로 살아계시는(출 3:14)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전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이 말이 죽은 우상들과 비교해서 사용된 말이라고 볼 수도 없다. 다만 여기서 다윗은 역사의 현장에서, 특히 생과 사(死)가 교차되는 전쟁터에서 친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섭리의 역사를 장중한 감탄조로 '여호와는 살아 계시돠!'라고 찬양했던 것이다(F.R.Fay).
나의 바위...내 구원의 바위이신 하나님 - 여기서 '바위'(* , 추르)는 3절, 32절의 바위와 같은 단어이다. 3절 주석을 참조하라.
=====22:48,49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진리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들이다. 그 증거란 바로 하나님께서 미천한 다윗을 들어 온 민족들의 머리로 삼으신 것과 다윗을 대적으로부터 보호하신 사실이었다. 그러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서 거듭되는 다섯 개의 동사(보수하시고, 복종케 하시며, 나오게 하시며, 드시고, 건지시는도다)로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종들을 높이시고 그들이 위급할 때 강림하셔서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다윗은 여기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들 - 여기서 민족들은 복수형이므로, 이스라엘 주변에 있던 모든 이방 족속들을 의미한다. 나를 원수들에게서...
건지시는도다 - 다윗은 48절에서 모든 이방민족 가운데 자신을 높이 드사 으뜸이 되게하신 하나님을 찬송했다면, 49절에서 다윗은 모든 대적의 위협과 핍박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여기서 다윗은 대적의 핍박을 연상할 때 사울의 끈질긴 추격과 박해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본 구절은 다윗이 사울의 핍박에서 간신히 벗어나는 상황과 일치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요, 또한 본 시의 표제어에서 '모든 대적'에 이어 '사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1절). 그러나 여기서 원수와 대적하는 자와 강포한 자가 모두 복수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은 '사울'을 비롯한 '모든 대적들'을 가리키고 있음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Lange, Pulpit Commentary).
=====22:50
이러므로 - 이는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찬양과 감사가 결코 근거없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앞에서 다윗이 생생하게 증거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마음의 보답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이처럼 성도의 찬양과 감사는 맹목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마땅한 응답으로서 이루어져야 한다.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 다윗이 그의 찬양의 무대를 밝히고 있다. 그 무대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의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방 민족들 가운데도 생생히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즉, 다윗에게 정복된 이방 민족들은 다윗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이방 민족들에게도 하나님의 행사가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이제 찬양이 이스라엘의 전유물일 수 없었고 온 민족가운데 선포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다윗의 노래 속에서, 하나님은 온 민족 세계 열방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이런 맥락에서 후일 사도 바울은 구원의 보편성(민족과 혈통을 초월한다는 의미에서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본 구절을 인용하였다(롭 15:9).
감사하며...찬양하리이다 - 다윗은 이미 자신의 찬양의 근거가 '생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밝혔다(47절). 사실 그분의 살아계심은 생명력 넘치는 그분의 속성을 반영한 것으로서, 아무런 희망이 없던 존재들에게 새 힘과 삶의 의미를 제공하기에 충분하다(딤전 6:16). 그러므로 '생존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생활하는 자에게는 결코 낙심이나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마 28:5, 6;행 17:31). 즉 그분의 살아계심은 곧 성도의 안전과 생명과 기쁨을 의미한다. 그런 측면에서 영존하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의 입에서는 영원토록 감사와 찬양이 끊어질 수 없다(롬 11:13-24;계 1:4, 8, 18).
=====22:51
여호와께서...큰 구원을 주시며 - 여기서 '큰 구원을 주시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믹딜 예슈오트'(* )를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큰 구원들'이다. 즉, 이 말은 여호와께서 다윗 왕에게 '큰 구원들'이 되셨다는 말이다. 여기서 '구원'의 복수 형태는 (1) 여호와께서 다윗 왕에게 베푸신 여러 번의 구원의 역사와 (2)그 구원의 풍성함을 의미하는 말이다(Smith, Lange). 한편, 케리(Keri)를 근거로 '막딜'(* )을 '망대', '탑'등으로 해서하자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여러 고대 역본들을 고려해 볼 때 옳지 않다.
기름 부음 받은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 여기서 '인자'(* , 헤세드)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당신과 맺으신 언약에 근거하여 각종 호의와 친절과 선과 자비등을 상대방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은혜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이러한 '은혜'가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 곧 신정(神政) 국가의 왕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 , 마쉬아흐) 다윗에게 1차적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언약의 본질이자 핵(核)인 '메시야'(Messiah)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나고 완성된 모든 인장의 전조(前兆)였다. 이렇게 볼 때 결국 다윗의 찬양의 지향점은 오실 메시야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롬 1:3;15:12). 이것은 (1) 모든 구원과 인자의 완성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번 뿐이시며(행 4:12;15:11), (2) 우리의 찬양의 대상 역시 구원자 예수와 그분을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이어야 함을 시사해 준다(고후 1:3).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 다윗왕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 자역사는 다윗 상대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밝히 알았다. 즉, 다윗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자식을 세워 다윗의 나라를 견코케 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다윗 언약'(7:12-16)을 약속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후손'(* ,제라-'씨'란 뜻)은 (1) 일차적으로는 다윗의 후계자 '솔로몬'을 가리키나 (2) 궁극적으로는 다윗 언약의 모든 것을 최종 이루시게 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결국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여 이와 같은 구원과 감사의 찬송을 힘차게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Keil). 특히 이 찬송의 노래 중 '영원토록'이란 말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들인 우리들에게도 지금 구원의 역사를 베풀고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실로 당신의 언약을 신실히 이행하시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분이시다(히 13:8).
< 설 교 >
다윗과 그리스도
삼하 22:44-51
어느 사람이든 자기 미래에 대해 궁금증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의 미래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어느덧 2005년 한 해도 두 주간 밖에 남지 않았는데 해마다 새로운 해가 가까워지면 토정비결을 보는 곳이 바빠지는 것도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왜 이처럼 미래를 알고 싶어 할까요? 그것은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에 의한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면 미래에서라도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미리 내다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세상의 누가 인생의 앞날에 대해 미리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인생의 앞날은 운수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인데, 누가 과연 하나님의 일하심을 미리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미래를 알고 싶어 하지만 알 수 없고 불확실하다고 느껴질 때 사람은 자연 자신의 미래를 위해 기도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미래를 두고 기도하는 것 역시 불확실한 미래가 자기를 중심으로 펼쳐지기를 꿈꾸는 욕망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간섭하시는 것이라면, 미래 즉 인생의 앞날을 알고자 하는 것은 불신앙의 산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앞날에 대해 알 필요가 없고, 알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 인생에 대해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 인생이기에 분명 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생이 참된 미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내 인생이 멸망으로 끝나느냐 영생으로 계속되느냐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일의 경제 문제나, 주식 동향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내일은 사는 것이 좀 더 나아질 것인가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앞날에 대한 관심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미래를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지난날을 돌아보며 무엇을 기도하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현재가 과거가 없이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기에, 즉 하나님께서 지난 인생을 이끌어 주셨기에 지금 현재에 이른 것이기에 때문에 현재를 바라보며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에 감사하지 않고 만족하지 않는다면 과거를 두고 기도하지도 감사하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미래만을 생각하며 미래를 위해 기도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는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이끌고 계시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인생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이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의 의도에 따라주기를 고집하는 것일 뿐입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으로 흘러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즉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흘러가는 세상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내가 원하는 다른 현실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세계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는 신자는 자신이 잘되고 못되는 것으로 기뻐하고 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울고, 기뻐하는 세상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가 중심된 미래를 꿈꾸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미래를 소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노래에서 바로 그러한 믿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44-45절에서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존하사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이방인들이 내게 굴복함이여 저희가 내 풍성을 듣고 곧 순복하리로다”고 노래합니다.
다윗의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는 것이지만 이 노래에서는 현재 주어진 구원을 감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미래에 주어질 구원을 미리 내다보며 감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44절에서 다윗이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존하사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 백성들이 자신을 반역한 일, 즉 압살롬이 반역한 때나 세바가 반역을 했을 때 백성들이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반역자의 편을 들었던 일을 두고 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구원에 대한 다윗의 노래는 하나님이 이미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라는 말을 보면 다윗언약 안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을 미리 내다보는 노래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란 이방인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이 하나님이 열방의 으뜸으로 삼으신 다윗에게 나아와 다윗에게 굴복하고 다윗을 섬긴다는 뜻인데 이것은 다윗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일을 미리 내다보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언약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다윗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중심으로 흘러가는 세상이었습니다. 언약에 의해서 세상이 어떻게 되어질 것인가를 미리 내다보며 그 구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내다보는 세상은 언약의 성취가 함께 한 세상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메시야가 세상에 오심으로 주어질 구원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하여 왕으로 세우신 다윗에게 순종치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유익을 앞세워 배척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그런 이스라엘에게서 건지시고 열방의 으뜸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다윗 앞에 나아와 다윗에게 굴복하고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즉 구원이 이스라엘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옮겨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누구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다윗의 노래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바라보는 자의 노래인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성취되어질 구원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사 55:4-5절을 보면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는 말을 하는데, 이사야 선지자의 이 말과 다윗의 노래가 같은 맥락의 내용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사야나 다윗이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성취될 메시야 구원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45절의 내용으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풍성’이란 소문을 뜻하는 말인데, 곧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아의 소문을 듣고 나아와 순복한다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구원의 노래는 다윗 개인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로 인한 구원을 바라보는 노래인 것입니다. 즉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메시아로 인한 구원을 바라보기에 47절에서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바위를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바위이신 하나님을 높일찌로다”라고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메시아를 보내심으로 성취될 구원을 내다보고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구원이기에 하나님을 ‘내 구원의 바위’라고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다윗의 노래를 대하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과 아주 다른 노래를 부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내다보는 것은 기껏해야 세상에 생존할 동안에 주어질 나의 미래일 뿐인데, 다윗은 세상 안에서의 자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되어질 일을 내다보며 구원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 노래는 우리에게는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다윗은 메시아의 구원을 내다보고 있고, 메시아가 오심으로 되어 질 일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것이지만, 오늘 우리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되어 진 일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래 구원과 상관이 없는 이방인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섬기겠다면 이렇게 나온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다윗은 메시아의 구원을 바라보고 노래하지만, 오늘날 신자는 메시아로 성취된 구원을 기뻐하며 노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구원을 내다보며 기뻐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51절)는 노래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다윗과 그 후손이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큰 구원과 인자하심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가 큰 구원에 참여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복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생이야 말로 참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이 인자하심이 함께 하는 인생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잊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 망하는 길로 달려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신자는 그리스도안의 세계를 내다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안의 세계를 내다볼 때 눈에 보이는 현실이 결국은 헛된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절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그 미래가 아무리 잘되고 풍족하면 뭐합니까? 그리스도안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고 그 세계만이 영원하며 그리스도 밖의 세상은 사라지는 것이 현실이라면 세상에서 아무리 잘돼봐야 결국 헛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현실을 내다보며 살아가십니까? 아무리 예수님을 말한다고 해도 바라보는 현실이 그리스도안의 세계가 아니라 이 세상이라면 그는 믿음으로 사는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사라질 현실과 함께 어둠에 영원히 묻힐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가 잘된다는 것, 아무런 의미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 인생이 잘된다는 것, 역시 아무런 의미 없습니다. 그리스도안의 세계는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는 세계이지 교회가 잘되고 내 인생이 잘되는 것으로 기뻐하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윗의 노래를 통해서 ‘나는 무엇을 내다보며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내다보며 무엇으로 기뻐하고 무엇으로 울며 살아가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신자가 바라봐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십니다.
삼하 22:47-51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찬양 시 마지막 부분입니다.
1. 먼저, 47절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그가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구원하심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실해서 그 은혜를 자기 마음에만 담아 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리 높여 자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이러한 마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과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이 있음에도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잊고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할 때마다 실수를 하고 넘어지고 분쟁을 일으킵니다. 그로 인해 주어진 고난 앞에 절망하고 넘어집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들에게 외면당하고 더 큰 절망에 빠집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가 응답될 리 만무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도에는 응답의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본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셔도 그 응답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어려움을 당할 때, 가장 먼저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청해야 할 대상이 누구여야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그의 부모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한 부모를 둔 자녀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부모를 찾지 않고 다른 사람을 의지한다면 그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자녀가 그렇게 한다면 부모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것만큼 부모를 무시하는 불효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것을 의지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입으로는 ‘주여주여’ 하면서 주의 뜻대로 행하기는커녕 주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행위를 따른다면 그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위급할 때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른 무언가를 의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고 사탄의 달콤한 미혹을 따른다면 그것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도움을 구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실 뿐 아니라 자상한 분이시며, 항상 우리의 삶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무언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아뢰시고 도움을 간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다윗의 고백을 소유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오늘 말씀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며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노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48-49절 함께 읽습니다.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하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하시며 나를 원수들에게서 이끌어 내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높이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능력을 부어주셔서 신이 직접 원수에게 보복을 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보복해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결과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듯이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감사할 일이나 억울한 일이나 고난의 일이나 복수해야 하는 일이나 다른 나라를 정복해야 하는 일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스스로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박해하던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마치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인 것 같은 때가 두 번이나 주어졌음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사울을 자기 손으로 해치지 않았습니다(삼상 24:6, 26:23). 그뿐만 아니라, 다윗에게 보상을 기대하고 사울의 죽음을 알렸던 아말렉 사람을 처형한 사건과 다윗의 정적이었던 이스보셋을 죽여서 보상을 받으려고 했던 레갑과 바아나를 처형한 사건에서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한 다윗의 신앙을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1:1-16, 4:8-12).
여러분, 하나님의 권능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자신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묻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부지중에 임한 고난의 일에서까지 하나님의 이끌어 주심과 건져 주심이 임합니다. 특히, 49절의 ‘이끌어 내시며, 건지시며’라는 표현은 창세기 19장에 소돔이 멸망할 때 하나님께서 롯과 그의 가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천사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이끌어 내시고 건져 주신 것과 같은 의미의 표현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렇게 이끌어 내시고 건져주신 처럼 우리들도 이끌어 주시고 건져 주실 것임을 다윗이 이 찬양 시를 통하여 간증하며 교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이 얼마나 큰지 분명하고 똑똑한 어조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러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무언가를 의지한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자신의 신앙을 다시 돌아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50-51절 읽습니다.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하도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
이 부분은 찬양 시 전체의 결론입니다. 그는 모든 승리의 감격과 영광을 자기에게 두지 않고 하나님께 두고 있으며, 그 택하신 은혜와 인자하심이 영원히 지속될 것을 소망하며 찬양 시를 마치고 있습니다.
특히,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하되 ‘모든 민족 중에서’ 감사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이스라엘 안에서만 고백하지 않고 모든 민족 중에서 고백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다윗이 이러한 의지를 표명하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섭리로 주변 모든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세상 모든 민족까지도 다스리시는 온 세상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이러한 고백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과도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구원을 이루시고 하나님 나라로 승천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우리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민족에게 고백되어 질 수 있도록 힘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를 위해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18-20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지상 至上’이란 ‘더할 수 없이 가장 높은 곳, 최상’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사명을 주신 것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최후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생이냐 멸망이냐 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하신 예수님의 뜻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러한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때에 따라서 은사와 은혜를 부어주시고 복을 내려주십니다. 지금 우리가 이곳에 모여 새벽기도회를 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를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잘 감당하기 위해 나의 삶의 자리를 점검하고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시 되짚어 보며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마음의 다짐과 지혜와 능력을 하나님께 구하기 위해 이 자리로 나아왔습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이러한 사명에 대하여 깊이 돌아보며,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하나님께 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다윗과 같은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위급할 때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른 무언가를 의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 됨을 고백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아뢰고 도우심을 간구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다윗처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삼하 22:47-51 / admin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사무엘하 22장의 말씀은 다윗이 모든 어려움을 다 이겨낸 후에 다윗의 마지막 때에 그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인도해 주셨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와 함께 하셨는가를 회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찬양을 하는 그런 시편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그 믿음의 고백들이 사무엘하 22장의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살펴보면, 거기에 아주 진하게 국물이, 진국이 우려 나오듯이 거기에 다 함축되어서 시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골을 우려내듯이 다윗의 인생의 그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 경험했던 그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나와 어떻게 함께 하셨는가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정말 진국과 같은 그 고백들이 이 사무엘하 22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사셨다.”라고 하는 고백을 하는 거죠.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헨델의 메시아 가운데 있는 나와 있는 여러 곡들 가운데, 오늘 우리가 불렀던 찬송가 170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주는 살아계시고.” 이 그 찬양, 주님께서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과거에는 있었지만 지금에는 사라져 버리고 흔적도 없어져 버리고 죽어버린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시구나.”라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의 찬양이 “주는 살아계신다.”라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의 찬양입니다.
우리가 함께 부른 이 찬송가 170장은 원래 욥기에 기록되어 있는, 그러니까 욥의 고백으로 나와 있는 내용으로 근거한 찬양입니다. 욥기 19장 25절의 말씀에,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과정 가운데 있는 욥이 나에게 아무런 소망도 없고, 아무런 빠져나갈 구멍도 없고, 완전히 절망해 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있었지만, 그러나 그 순간에 욥의 고백이 무엇이냐면, “내 대속자가 살아계신다. 나를 구원해 주실 분이 살아계신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하는 욥기 19장의 말씀으로 지은 찬송입니다.
온갖 고난을 당하고 있던 욥은 친구들이 찾아와서 하는 말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받습니다. 한마디 한마디 하는 그 말속에 가시가 숨어 있고, 정말 아픈 곳을 푹푹 찔러버리는 그런 친구들의 말 가운데서, 고통을 겪었던 그 욥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구원자가 살아계시고, 나를 건지시고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 가운데 했던 그 고백이 바로 욥기 19장 29절에 고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내 모습만 보면 절망스러운 일뿐이고, 주변을 살펴보면 한탄할 일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 하나님이 나의 구원자, 나의 대속자가 된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믿음으로 견뎌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하 22장의 말씀에서도, 다윗은 욥이 고백했던 것 같은 그런 고백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겁니다. 다윗의 입에서 나온 고백이 무엇이냐 하면,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서, 내가 나의 반석을 찬송하겠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찬양한다고 하는 그런 고백을 다윗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다윗이 경험해 왔던 그런 삶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그 사실을 매 순간순간마다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홍안의 소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그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서 기름을 붓던 그 감격스러운 장면에서부터 시작해서, 골리앗을 무찔렀던 그 이야기, 그리고 사울의 창을 피하여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만 했었던 그런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광야에서 산적 두목과 같은 신세로 살아가면서 언제 그 삶이 끝나게 되나? 언제 이런 산적과 같은 삶이 끝날 수 있으련가? 기약도 없는 그 삶을 살아야 했던 그 시절을 지내야만 했었고, 때로는 미치광이 행세를 하면서 겨우겨우 연명해야만 했었던 그 다윗이 결국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시는 그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일어난 압살롬의 반역과 세바의 반역으로 인해서, 목숨이 위협받는 그런 정말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지냈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편에 계셨고, 다윗을 회복시켜주시고 그래서 결국 그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그런 경험을 했었기 때문에, 그 순간에 다윗의 고백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내가 나의 반석이 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그런 고백이 나오게 된 줄로 믿습니다.
아마도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모든 과정을 다 통과한 후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공치사하면서,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고, 그러한 고난의 과정 가운데서 내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자랑하고 떠벌릴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참 자수성가한 사람, 무엇인가 큰 어려움을 극복해낼 수 있었던 사람들의 들려주는 그 화려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되겠는데요. 사람들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성공하게 될 때, 결국 그 모든 것들을 다 승리한 다음에는 너무나도 교만해져서 자기 자신을 자랑하게 되는 그런 경우들을 너무나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자신이 얼마나 수고했는지, 내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는지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자꾸만 자기가 한 일을 떠벌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을 했지만, 그런데 결국 그 일을 한 다음에는 자기를 자랑하고, 내가 이만큼 수고하고 이만큼 헌신하고 이만큼 노력했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얄팍한 마음이죠. 그게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얄팍한 마음입니다.
그런 교만한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수고했는가를 드러내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의 노력들을 보면서, 참 측은한 마음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참 수고는 많이 했는데, 자기를 공치사하면서 드러내는 것으로 다 깎아 먹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을 가리켜서 PR의 시대라고 하는데요.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선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니까, 그래서 자꾸만 나 자신을 알려야만 하고, 내가 얼마나 수고했는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이것을 다 이야기해 주고 나의 무용담을 이야기해 주고, 내가 어떻게 골리앗을 쓰러뜨렸고, 내가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들을 다 극복해 올 수 있었는지, 그러한 모든 것들을 다 이야기해야만, 그래야만 사람들이 나를 존경해 줄 줄 알고, 그 앞에서 자랑을 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속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한다면, 그렇게 자랑해야만 되고, 알려주어야만 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결국에는 모든 수고와 노력들을 알아주시는 하나님, 눈물을 아시고, 우리의 수고와 헌신을 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교만하거나 자신을 드러내거나 사람들로부터 박수받기 위해서 나 자신을 자꾸만 드러내는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하여,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그렇게 신앙생활하다가 하늘에서 아무런 상급도 없는 그런 허망한 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을 바라며 묵묵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승리하는 그런 삶의 결과를 보면서, 내가 잘했다고 하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아계셨고 그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자칫 교만해질 수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다윗은 오히려 겸손해졌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믿음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많은 것들을 베풀어주셨는데, 그러한 것들을 경험하면서, “아,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해야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그 하나님의 지문을 우리 주변에 많이 뿌려놓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난 주일날 설교를 하면서, 우리가 사람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요. 사실은 그 하나님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그 사람만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의 것들만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가 없는 것이 오히려 이 세상의 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되냐면, 이 선물을 주신 그 선물을 전해주신 주님을 바라봐야 되는, 선물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선물이 주어졌다고 한다면, 그 선물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이 선물을 누가 줬지?”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고 얻는 그 모든 것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걸 통해서 나를 사랑하고 계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손가락을 볼 것이 아니라, 달을 보아야 한다고 하는 말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모든 것들은 사실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그걸 통해서 하나님이 가려져 버리고 이 세상의 것들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그런 결과가 나타날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넘어서서 그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겸손하게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치 학교에 갔다가 돌아온 아이가 집에 아무도 없지만, 그러나 엄마가 집을 나가면서 아이에게 학교 다녀오면 먹으라고 만들어 놓은 맛있는 음식을 보면, “엄마가 나를 사랑해서 이런 음식을 만들어 놓았구나.”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사랑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면, 다윗은 여러 가지 의로운 길을 가기도 했었지만, 사실은 다윗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밧세바와의 범죄 사건일 것입니다. 밧세바와의 범죄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고,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인생이었지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선언해 주셨고, 마땅히 큰 심판을 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솜방망이 처벌을 해하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너무나도 느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행한 것보다도 더 크게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더 크게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 48절 49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하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하시며, 나를 원수들에게서 이끌어내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높이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어떻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는가를 생각하면서, 노래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50절 말씀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다.” 다윗의 결론이 무엇이냐면 감사와 찬양이 그의 결론이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는 감사하는 것이 당연해요. 왜냐하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면,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한번 되돌아봐야 될 텐데요. 우리들의 입술에서 감사가 나오는지, 불평이 많이 나오는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돌이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우리들의 입술에서 늘 불평과 불만과 원망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면, “아이고 내 신세야.”라고 하는 그런 한탄이 자꾸만 나오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한다면 감사할 수가 있는 것이죠. 특별히 우리가 해결이 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거라고 생각한다고 하면, 절대로 불평과 원망이 나올 수 없고 감사와 찬송이 나오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내가 지금 감사를 많이 하고 있는가? 아니면 신세 한탄과 원망과 불평을 많이 하고 있는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서, 만일 불평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저의 눈을 밝게 하셔서 이 세상의 것들만 바라보다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갖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 내 눈앞에 펼쳐진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낙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내 눈앞에 보이는 것 때문에 낙망하지 말게 하시고, 그 뒤에서 역사하고 계시고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가야 되는 것이에요.
불평으로 삶을 사는 것이 왜 불신앙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교회에는 나오고 예배에는 나오고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하는데, 만약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불평과 원망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면,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고, 찬양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되는데요. 야고보서 3장 10절에서부터 12절의 말씀 가운데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가가 감남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매 순간순간마다 그 옛날 다윗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살아계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나의 반석을 찬송하고 나의 구원자 되신 그 주님을 찬양하며 나아갔듯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늘 감사와 찬송으로 하루 종일 내내 살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다윗을 구원하셨던 그 하나님의 사랑은 다윗 시절에만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윗 시대에만 하나님이 살아계셨었고 지금은 하나님께서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의 역사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옛날 아담과 하와 시절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랑을 멈춘 적이 없어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인이 젖 먹는 자녀에, 그 자식에 대한, 자식을 잊지 못하는 것을 예로 들면서, 그 어미가 자식을 잃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아니하겠다고 말씀해 주셨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고, 그리고 그 사랑의 절정은 바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오셔서, 십자가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피를 흘리시는, 그 엄청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다윗과 같은 믿음의 고백들이 늘 입술에서 펼쳐 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주님. 믿음의 고백이 나오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늘 감사와 찬송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날마다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께 감사합시다
삼하 22:47-51 / 강성찬목사
천원군에 살던 머슴 이씨는 가난한 중에도 열심을 다하는 주님의 성도였습니다. 교회 예배에 열심히 참예하면서 주의 일을 잘 받들었는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게 되면서 원하는 대로 교회 일을 하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기게 되었습니다. 머슴살이 첫 해 맥추 감사절이 되었는데 교회 예배에도 참예치 못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그 날 밤은 한잠도 못 자고 머슴방에서 울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주일도, 절기도 제대로 지킬 수 있게 도와주소서.”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주인에게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해가 되었습니다. 여름 보리 추수 후에 교회에서 지키는 맥추 감사절에 참예하고 싶다고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거절당했는데 몇 번 부탁한 후에 허락을 받았습니다. 다음은 예물을 드려야 되겠는데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서 다시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마침내 보리 한 가마를 주어서 그것을 져다가 예물로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일 그 교회에서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주인과 머슴이 같이 절기를 지키는 주일이 되었고, 머슴 이씨에게는 적은 것으로 바쳤는데, 큰 복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 주일이었습니다. 그 후에 이씨 머슴은 주인집을 다 구원했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해져 교회를 잘 받들었습니다.(21세기예화- 주인을 전도한 머슴의 믿음)
다윗은 자신의 승리의 영광을 모두 살아계셔서 자신에게 힘과 용기와 도움을 주셨던 하나님께 돌리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감사는 결코 근거없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마음의 보답이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증거합니다.
나아가 다윗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겠다고 고백함으로 감사의 무대를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의 모든 민족들임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방 민족들 가운데도 생생히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정복된 이방 민족들은 다윗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놀라며,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감사와 찬양이 이스라엘의 전유물일 수 없고 온 민족가운데 선포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후일 사도 바울은 구원이 민족과 혈통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강조하며 본 구절을 인용하였습니다.
(롬 15:9)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맥추감사 주일을 맞으며 우리도 주께 감사합시다.
생존하시니
(삼하 22:47)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합니다. 생존은 살아계신다는 뜻으로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진리를 생생히 깨닫고, '여호와는 살아계시도다!'라고 확신있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하는 자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도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생명력 넘치는 속성을 나타낸 것으로서, 아무런 희망이 없던 존재들에게 새 힘과 삶의 의미를 주시기에 충분합니다.
(딤전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그러므로 '생존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생활하는 자에게는 결코 낙심이나 두려움이 없습니다.
(마 28:5-6)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은 곧 성도의 안전과 생명과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영존하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입에서는 감사와 찬양이 영원토록 계속됩니다.
(롬 11:33-3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계 1:17-19)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하나님은 영원토록 스스로 살아계십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만유인력을 발견한 과학자 뉴턴에 얽힌 일화입니다. 뉴턴이 숙련된 기계공에게 태양계의 모형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각각의 혹성이 움직이도록 아주 정교하게 설계하였습니다. 어느 날 무신론자이면서 과학자인 한 친구가 그 태양계 모형을 보고는 거기에 있는 크랭크를 서서히 돌렸습니다. 그랬더니 모형에 달린 각각의 혹성들이 다양한 속도로 태양 주위를 회전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 친구는 자못 놀란 표정으로 '야, 정말 훌륭한 모형이군. 도대체 누가 만들었나?' 그러자 뉴턴은 '아무도 아닐세'라 무심히 말했습니다. '이봐, 이 모형을 누가 만들었냔 말이야?' 그러자 뉴턴은 '이건 누가 만든 게 아니고 여러 가지 물건들이 모아져서 우연히 이런 형태가 된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은근히 화가 난 친구는 '자네는 나를 완전히 바보취급하고 있군. 이렇게 정교하고 훌륭한 모형이 저절로 만들어진다는 거!'하고 소리쳤습니다. 뉴턴은 친구 어깨에 손을 얹고는 '이건 엄청나게 큰 우주계의 작은 모형에 불과해. 이렇게 간단한 장난감도 설계자나 제작자 없이 만들어질 수 없다고 자네가 주장하고 있는데, 하물며 이것의 근본이 되는 태양계가 설계자나 제작자 없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는 무어라 설명하겠나?' 친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습니다. 뉴턴은 그의 책 '프린키피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태양 혹성 혜성으로부터 생기는 매우 아름다운 천체는 지성을 갖춘 강력한 실력자의 의도와 통일적인 제어가 있기에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다...하나님은 영원무궁하신 분이시다.'
구원의 바위시니
(삼하22:47) 나의 바위를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바위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하나님께서 미천한 다윗을 들어 온 민족들의 머리로 삼으신 것과 다윗을 대적으로부터 보호하신 사실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보수하시고입니다. 하나님이 보수하심을 믿었기에 사울왕에게 복수 할 기회가 있었으나 자기 손으로 해하자 않았습니다.
(삼상 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삼상 24: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복종케 하시며입니다. 이방 민족들로 다윗의 발아래로 내려가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나오게 하시며입니다. 원수에 의한 멸망에서 다윗을 이끌어 내신 하나님입니다.
드시고입니다. 모든 이방민족 가운데 다윗을 높이 드사 으뜸이 되게하신 하나님입니다.
건지시는도다입니다. 모든 대적의 위협과 핍박에서 다윗을 건져주신 하나님입니다.
큰 구원이라고 합니다. '큰 구원'(믹딜 예슈오트)은 '큰 구원들'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다윗 왕에게 베푸신 여러 번의 구원의 역사와 그 구원의 풍성함을 의미합니다(Smith, Lange). 여호와께서 다윗 왕에게 '큰 구원들'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학가다는 유대인의 민족 문학서 또는 민족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문서라 합니다. 이 문서에는 유대인들이 최대 축제인 유월절에 대한 언급이 있다합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노예로 잡혀 있다가 탈출하여 유대로 귀환한 때를 기념하는 출제일입니다. 학가다에서 그 때의 해방의 환희와 소중함을 언급하고 있다합니다. 그 이야기는 이런 구절로 시작된다합니다. '우리는 이집트에서 바로의 노예였다.' 세계의 어느 민족사에서 이와 같이 굴욕적인 패배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예가 있을까요? 더욱이 제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한 것이 아니라 '해방되었다'라고 수동형으로 기록하고 있다합니다. 해방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나타냅니다.
(삼상 2:6-8)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
(삼하 22:51) 기름 부음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
'인자'(헤세드)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맺으신 언약에 근거하여 각종 호의와 친절과 선과 자비등을 아낌없이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언약의 본질이자 핵인 '메시야'(Messiah)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나고 완성된 모든 일의 전조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 곧 신정국가의 왕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마쉬아흐) 다윗에게 1차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다윗의 감사와 찬양은 메시야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롬 1:3-4)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15:12)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모든 구원과 인자의 완성자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 15: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그러므로 감사의 대상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 입니다.
(고후 1:3-4)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다윗 왕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다윗을 상대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밝히 알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자식을 세워 다윗의 나라를 견코케 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언약을 약속받았기 때문입니다.
(삼하 7:16-17)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나단이 이 모든 말씀과 이 모든 묵시대로 다윗에게 고하니라
그런데 후손'(제라-'씨'란 뜻)은 일차적으로는 다윗의 후계자 '솔로몬'을 가리키나 궁극적으로는 다윗 언약의 모든 것을 최종 이루시게 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결국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여 이와 같은 구원의 은총에 감사의 찬송을 힘차게 노래합니다(Keil).
특히 '영원토록'이란 말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들인 우리들에게도 지금 구원의 역사를 베풀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십니다.
실로 언약을 신실히 이행하시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때 더욱 헌신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죄짐을 지시는 사랑입니다.
어느 사람이 세계의 존경을 받던 그렌펠 선교사에게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처럼 헌신적인 생애를 살도록 영향을 주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합니다. 어느 날 밤, 그가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는 병원에 불에 몸을 몹시 데인 여인이 응급환자로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몸을 너무 많이 데었기 때문에 살 수가 없다는 것이 곧 밝혀졌습니다. 그 여인은 술을 많이 먹고 집에 들어온 남편이 파라핀 등불을 던져서 그렇게 치명적인 화상을 입었습니다. 술이 반쯤 깬 남편을 경찰이 연행하여 병실로 끌고 들어왔을 때, 책임 담당관은 그 여인의 목숨이 얼마 안 남은 것을 알고, 어떻게 그런 화상을 당하게 되었는지 경찰에 그대로 말해주기를 재촉하였습니다. 그 불쌍한 여인은 자기 침대의 곁으로 끌려온 남편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립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의 시선이 남편의 그 억센 손에 닿게 되었습니다. 여인의 기운 없는 시선은 남편의 팔을 따라서 어깨, 그리고 드디어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고통 중에 있는 여인의 얼굴이 잠시 고결해지는 것 같았다합니다. 그는 책임 담당관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습니다. “그것은 그냥 불의의 사고였습니다.” 그런 뒤 베개에 머리를 묻고 곧 사망했다고 합니다. 윌프레드 그렌펠은 이 이야기를 하고 다음과 같이 맺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사랑과 똑같았습니다.”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