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는 동안 사람들은 주술에 걸린 듯 조금 다정해지고 다락방 불빛처럼 따뜻해져서 가까워진다
그림은 거기에 멈춰 있다
그림은 그림이 아닌 공간으로 달리고 그림이 아닌 공간은 그림 속으로 달려왔다
불빛이 꺼진 거리처럼 모르는 사람의 발걸음만 겹겹이 서성이고 나는 중언부언 말을 건네려는 듯 그림 앞에 서 있다
이것이 최선이었을까 어떤 후회들이 마음 밖으로 달려나가고 나는 마음도 없이 어떻게 서 있는 것일까 마음과 마음 잠시 그 사이에서 어떤 그림 속을 걷는다 말도 없이 관람자가 되어 이 세계를 곧 떠날 사람처럼
등 뒤로 눈이 내린다 나를 재촉하는 세계 작별의 글이라도 한 줄 적어보고 싶어서 나는 한 발자국 뒤로한 채로
오래 서 있었다
오로라를 찾아서
여전히 기다림의 시간이 흘러간다 여러 가지 색깔의 그러데이션을 이루는 하늘과 구름 사이의 비명처럼 보아줄 사람은 많은데 나타나지 않는 오로라처럼 밤이 몰려온다 밤이 빛날수록 빛도 빛난다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감미로운 실크의 펄럭임 속에 온몸이 휘감기는 날 빛을 사냥하는 꿈을 꾼다 그것은 나의 나라에 갇혀 있는 보라색 고래 내가 갖게 된 상처 검은 어둠의 바다를 홀로 헤엄치는 사람 따라가고 싶었다
산책하는 별을 지나 그 별에 꽃을 건네는 다정으로 휘청이듯 걸어가는 눈보라 혹은 녹색의 잎을 걸어가는 달팽이처럼
두 손을 주었다 보이지 않아도 빛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 내가 놓친 모든 것들이 커튼처럼 펄럭이는 밤의 바다에 나는 입체적으로 숨어든다
하늘 속으로 천천히 떼를 지어 흘러가는 보라색 고래 떼
차갑고 뜨겁다
아직은 살아있다는 말이 슬픈 것이다
―시집 『아직은 살아있다는 말이 슬픈 것이다』 2023.07 ------------------- 이태숙 / 충남 아산 출생. 경기대 예술대학원 독서지도학과 졸업. 2016년 《열린시학》 등단. 2020년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당선. 시집 『아직은 살아있다는 말이 슬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