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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선-집-중', 굳이 메들로 퐁티의 <감시와 처벌>을 논하지 않더라도 감시하고 감시받고 산 지 솔 차니 됐습니다. 게임장 할 때 CC TV는 필수입니다. 20년 전에 카메라를 처음 접했고 송우리 시절부터 2026년 현재까지 카메라와 동고동락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CCTV 보급률 글로벌 넘버 1이라는 걸 아십니까? 인간은 판옵티콘의 체제 속에 살고 있는 한, 권력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현대사회에서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은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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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권력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이 있긴 한가? 카메라 보느라고 눈에서는 지진이 났고, 모기 잡느라고 모가지가 미켈란젤로 형님처럼 돼버렸어요. 응시-주시-감시의 차이를 아시나요? 나는 여태껏 트럼프(80)만 한 사이즈를 못 봤습니다. 나이 팔십에 지금도 싸움박질을 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시라! 나도 트럼프 나이에 수틀리면 선방을 날릴 수 있는 기세를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르긴 해도 지구촌에서 트럼프를 상대할 만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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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살아 있는 한 지구촌의 전쟁은 계속될 것 같습니다. 전쟁 유발자는 악인일까? 주병진 vs 이경규가 36년 만에 예능에 나와 썰을 푸는데 왜 내가 괜히 서글퍼지고 우두망찰해지는지 아시나요? 대부 소리 듣는 이경규(1960)가 주병진(1958)이 형에게 잔뜩 쫄아 있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을 다시 보게 됐어요.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고 내일모레 칠순 잔치할 퇴역 선배의 존재감을 이렇듯 팍팍 살려주는 이경규를 리스펙트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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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진이 형님도 내가 아는 어느 위인보다 포커페이스를 잘하더이다. 추석부터 한글날까지 긴긴 연휴(15일)가 끝났고 새로운 시작입니다. 모기와의 전쟁 덕분에 아지트가 많이 정돈된 느낌입니다. 소탕과 간 동안 간첩 30-40 마리를 사살했고 창가 쪽 환경을 개선하느라 화분도 하나 갖다 놓았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은행에 입금될 돈-컨디션-딸내미 정도를 생각하는데, 모기 때문에 사고의 루틴이 흐트러져 버렸습니다. 즉자 대자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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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 까먹었어요. 나이 탓일까요? 용량 미달일까요? 내가 아는 현상학자들은 후설-하이데거-퐁트-샤르트르-가다머-레비나스 정도입니다. 에예공! 현상학도 인식론의 분과로 보고 접근하거라. 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를 즉자적 존재 (en-soi)와 대자적 존재 (pour-soi) 로 나눈다. 대자연 같은 사물은 <즉자>이고 인간처럼 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대자>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néant)란 무엇인가? 무는 단순한 '없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세계를 부정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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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식이 선입견을 멈춘 상태로의 인간은 본질이 정해지지 않은 존재 (무의 존재)로 태어났으니 자유 의지로 자신의 본질을 선택하고 창조할 책임이 있다. 이제부터 모든 선택은 자기 정의이며, “우리는 선택하지 않을 자유조차 선택해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야. 여기까지는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야. 희한하게 인간은 자유의지를 꼭 선악과를 따 먹는 '자기 기만'에 사용한다. 자유롭지만 그 자유가 동시에 불안과 책임을 수반하기에 인간은 종종 스스로를 속이기도 하지(자기 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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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카페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나는 단지 종업일 뿐이야 하고 믿는 건 사실 스스로를 그 역할에 가두며 자유를 부정하려는 것이다. 내가 대자적(의식하는) 존재인데, '자기 기만'은 자신을 즉자적 존재(사물)처럼 여기며 의식할 자유를 회피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나를 객체로 전락 시키는 거야. 베드로가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 유대인을 의식해 할례를 이행하는 장면을 기억하니? 내가 혼자 있을 땐 자유롭지만, 누군가 보고 있다고 느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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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이는 나/보여지는 나"가 될 때가 종종 있다는 뜻이야. 이때 자아는 타인의 의식 속에서 고정되며 대상화되는 게지. 그래서 부끄러울 때 그 부끄러움은 나 자신이 타자의 대상이 되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에공! <구토>가 네 책꽂이에 꽂혀진 것을 보고 아비가 얼마나 고맙고 대견했는지 아냐? 에예공! 인간은 본질 없는 존재로 태어나 스스로의 본질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 자유는 피할 수 없으며, 책임도 회피할 수 없다(“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 선입견 없이 바라본다는 건 과연 가능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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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나를 ‘즉자’처럼 살아가고 있는가, ‘대자’처럼 살아가고 있는가? 사르트르식 자유란 결국 무책임이 아닌 책임의 극한에서 드러나는 게 아닐까? 선택하지 않을 자유마저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자유는 왜 늘 불편하고, 책임은 왜 늘 타인 탓이 될까? 인간이란 존재는 왜 스스로 자유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를 속이게 되는가? 부끄러움이란 건 결국, 내가 나 자신을 타인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뜻일까? 나는 지금 누구의 시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2.
인간은 타인의 시선과 권력의 감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자유를 선고받은 인간은 왜 스스로를 속이며 책임을 회피하는가? 나는 지금 누구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가? '시선 집중!' 굳이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감시하고 감시받으며 살아온 세월이 솔찬하다. 게임장을 운영하던 시절부터 CCTV는 필수품이었다. 20년 전 처음 카메라를 접한 이후 진접을 거쳐 2026년 현재까지 카메라와 동고동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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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CCTV 보급률 세계 1위인지는 확인이 필요하지만, 감시가 일상적인 생활환경이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기 어렵다. 카메라를 들여다보느라 눈에서는 지진이 나고, 모기를 잡느라 목은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처럼 굳어버렸다. 모기와의 전쟁에서 30\~40마리를 소탕하고 아지트까지 정돈했으니 전쟁의 순기능도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창가에는 화분 하나를 들여놓았다. 그러나 모기보다 더 끈질긴 존재가 있다. 바로 인간을 따라다니는 타인의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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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근대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길들이는지 분석한다. 벤담의 판옵티콘은 감시자가 실제로 보고 있는지 알 수 없게 설계된 원형 감옥이다. 죄수는 감시자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스스로 행동을 통제한다. 권력이 더 이상 직접 명령하지 않아도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감시하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감시사회'에서 자유는 불가능한가? 푸코의 권력은 단순히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정체성을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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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자유란 권력 바깥으로 완전히 탈출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지배하는 규범을 비판하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실천에 가깝다.여기서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등장한다. 에예공! 즉자와 대자를 다시 공부해 보자꾸나. 사르트르는 존재를 즉자존재와 대자존재로 구분한다. 즉자는 사물처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대자는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현재의 상태를 넘어설 수 있는 인간의 의식이다.
그렇다면 무(無)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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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에게 무는 단순한 공백이 아니다. 의식이 주어진 현실에 거리를 두고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르게 존재할 수 있다'고 부정할 때 드러나는 가능성의 조건이다. 인간은 이미 정해진 본질에 갇혀 있지 않기에 자신의 선택을 통해 삶을 형성해야 한다. 문제는 자유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지만 그 자유에는 불안과 책임이 따른다. 그래서 종종 자신의 자유를 부정하는 자기기만에 빠진다. 사르트르가 설명한 카페 종업원은 자신의 역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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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완벽하게 연기함으로써 마치 그 역할이 자기 존재의 전부인 것처럼 행동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사물처럼 고정하려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 역시 인간을 객체로 만든다. 혼자 있을 때는 자유롭게 행동하다가 누군가 자신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타인의 세계 속에 등장하는 대상이 된다. 사르트르가 말한 부끄러움은 바로 이러한 대상화를 자각하는 경험이다. 성경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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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에서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식사하다가 할례파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물러난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행동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행동을 선택했다. 신념과 실천이 분리되는 순간이다. 다만 이것은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 할례를 시행한 사건이 아니라, 안디옥에서 식탁 교제를 중단한 사건이다. 공주야! 아비가 네 책꽂이에서 사르트르의 『구토』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대견했는지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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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의 삶을 미리 정해진 본질에 맞추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선택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만들어 가는 존재다. 그러나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책임져야 하지만, 바로 그 책임이 두려워 자유를 포기하려 한다. 때로는 제도 탓을 하고, 환경 탓을 하고,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맡긴다. 선택하지 않는 것조차 하나의 선택이라는 사르트르의 통찰은 그래서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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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트럼프의 강한 기세와 주병진·이경규의 오랜 선후배 관계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도 시선과 인정의 문제로 연결된다. 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과 자유로운 주체로 살아가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타인을 압도하는 능력이 곧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능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후배가 선배의 존재감을 인정해 주는 장면은 타인의 시선이 언제나 억압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선은 인간을 위축시키기도 하지만 존중과 인정의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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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진정한 자유는 타인의 시선을 제거하는 데 있는가? 아니다. 타인의 시선이 나를 규정하려 할 때 그 규정을 무조건 자신의 본질로 받아들이지 않는 데 있다. 여기서 푸코와 사르트르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만난다. 푸코는 인간의 주체성이 권력과 제도 속에서 형성된다고 말하고, 사르트르는 그러한 조건 속에서도 인간이 자신의 선택에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사르트르의 자유가 사회적 제약을 충분히 설명하는지는 여전히 비판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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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면 은행에 입금될 돈과 몸의 컨디션, 딸내미들의 안부를 생각한다. 모기 때문에 그 익숙한 사고의 루틴이 흐트러졌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일상의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볼 기회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누구의 시선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돈의 시선인가, 사회적 성공의 시선인가, 가족의 시선인가,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과거의 이미지인가? 결국 자유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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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선택을 타인의 판단에 전적으로 맡기지 않는 것이다. 감시받지 않는 인간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감시와 시선 속에서도 자신을 성찰하고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 자유롭다. 나는 오늘도 카메라를 바라본다. 그러나 카메라가 나를 대신하여 살아 주지는 않는다. 나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화면 속 타인의 움직임이 아니라, 그 화면을 바라보는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책임지는가에 달려 있다. 에예공! 아비는 오늘도 자유를 공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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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 기억이 흐릿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잊어버린 개념을 다시 불러내어 삶에 연결하는 일은 여전히 즐겁다.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다. 그러나 자유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매일 새롭게 감당해야 하는 과제다. 이번 글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푸코의 '감시'와 사르트르의 '시선'을 연결한 시도입니다. 다만 두 철학자의 문제의식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푸코는 사회적 제도가 인간을 어떻게 규율하고 주체로 만들어 내는지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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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내가 어떻게 객체가 되고, 그 상황에서 어떻게 자유를 감당할 것인지 묻습니다. 또한 현상학은 단순히 인식론의 한 분과라기보다 의식과 세계가 경험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탐구하는 철학적 방법이자 전통입니다. 후설의 판단중지와 사르트르의 무 개념 역시 구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즉자인가, 대자인가?'라는 질문은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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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에게 인간은 단순한 대자만이 아니라 자신의 사실적 조건과 그것을 넘어서는 자유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살짝 바꾸는 건 어떨런지요. 나는 지금 주어진 조건을 핑계로 자유를 회피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구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가?
2026.10.14.WED.악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