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립청소년 독서실에서 지팡구라는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갑자기 어떤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문 밖에 있는 사무실 창구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더듬지 않고 한결같은 음으로, 그러나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하이톤의 목소리로 추정컨대, 그건 말다툼이 확실해보였다. 그 여자는 계속해서 윽박을 지르고 있었다. 대충 들어보니 '사물함 열쇠 블라블라. 일일권도 블라블라"였다. 그 순간 나는 그 말싸움의 상대자일 게 분명한 독서실 아르바이트생을 떠올렸다. 여자였고 나이는 가늠할 수 없었다. 주말 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알바하는 걸 보니 학창시절은 이미 끝낸 듯 했으나 대학생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상당히 어려보이는. 그러면서도 개념' 있는 언행과 밝음으로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그녀. 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여자. 키가 열라 작았는데. 난감해하고 있을 그 알바생을 순간적으로 떠올리자 순간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문을 열고 사무실 창구 앞을 보니 예상대로 꼬장꼬장한 4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주부필 나는 아줌마가 그 알바생에게 블라블라 따지고 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물함 열쇠를 왜 일일권을 끊으면 주지를 않느냐. 어쨌든 돈을 내고 공부를 하는데 당연히 줘야하는 것 아니냐' 뭐 이런 이야기를 해대고 있었다. 주장의 해괴함을 떠나 일단 목소리가 컸고 여기는 독서실이므로, 나는 그 아줌마에게 죄송하지만 목소리를 조금만 낮춰주시면 안될까요. 독서실인데. 최대한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최소한 알았다는 시늉이라고 해야 정상이었다. 허나, 돌아온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아줌마는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는 콧구멍을 노출시키며 한껏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지껄였다. 아니. 아저씨는 또 뭐예요? 내가 내 '권리'주장하는데 왜 나와서 시비예요. 들어가세요. 나오지 말고.....................뭥미? 나도 조금 흥분이 돼서 약간 큰 소리로, 여기 독서실이잖아요. 아줌마 너무 시끄러워요. 이랬더니 아줌마는 황당함의 말뚝을 있는 힘껏 박아버렸다. '그러니까 들어가시라고. 그래서. 공부를 하니까 무슨 '권력'이라고 잡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인데, 그냥 들어가서 공부하시라고!!!꿱~~'사무실의 알바생은 이미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아줌마는 독서실의 규칙을 깨고 일일권도 돈을 내는데 사물함 열쇠를 안주는건 말이 안된다. 열쇠를 달라. 라면서 그 알바생을 울려가며 30분이 넘도록 자기 주장을 존나게 설파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권리'라고 스스로 외치면서 독서실이기에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는 나의 부탁을 '권력'이라고 외치면서. 게다가 주장 자체가 황당하기 이를 때 없었다. 결과적으로 정기권을 끊은 사람의 사물함 열쇠를 일일권을 끊은 사람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더 황당한건 그 다음이다. 규칙을 떠나서 내가 '한 사물함을 쌩판 모르는 두 사람이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라고 말하자 아줌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내가 알바 아니지. 나는 내 권리를 주장하는 거고, 당신은 상관없으니까 들어가시라고요. 그리고 당신이 왜 이 독서실을 '대변'해요? 황당하게. 정말 황당하네 이 사람들?' ..황당하게. 정말 황당하네 이 사람들? 정확하게 이렇게 말했다. 두 번 반복.................................................대체 뭥미?
이후, 몇 사람이 참지 못하고 나와서 구도는 알바생 포함 4대1이 되었다. 우리는 절대 이길수가 없는 상대였다. 헛점은 존나게 보이는데 그 헛점을 자기가 알고 있는게 아니라 모르고 있는게 문제였다. 그러니까 이 아줌마에겐 '독서실에서는 조용히 해야한다'라든가, '독서실의 한 사물함을 모르는 두 사람이 동시에 쓸 수는 없다'라든가, '여기는 구립독서실이고, 알바생은 어떤 힘도 쓸 수 없다'라든가, 뭐 이런 종류의 당연한 상식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게 문제였다. 게다가 결과적으로 '자기의 하루치 이익을 위해 정해진 규칙을 깨고 모든 사람의 사물함을 개방해 달라는'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을 못하고 있었다. 정리하면 아줌마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꼬장꼬장하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만 지껄이며 모든 적대자를 '권력자'로 몰고 가고 있었다. 급기야 아줌마는 '미치고 펄쩍'뛰기 시작했다. 그 말 그대로. 미치고 펄쩍 뛰었다. 억울하다는 듯이. 아줌마 딴에는 독서실의 권력자들의 횡포에 맞서 땅에 떨어진 개인의 권리를 되찾겠다고 발악을 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아줌마가 단지 개인이 아니라 '저런 종류의 인간들'로 보여지기 시작했다. 그가 미치고 펄쩍 뛰자, 이젠 진짜로 독서실vs아줌마가 되어버렸다. (애매한 군중심리도 있었으리라) 그들은 이제 다 나와서 아줌마를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말이 좋아 공격이지 사서 욕을 먹는 판국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아줌마는 절대 지지 않는다. 눈 앞에서 발광하는 40대의 꼬장꼬장함을, 우리 학생들은 도저히 이길 수가 없음을 판단한 현명한 사람들이 무리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더 가면 '피가 튀길지도 모른다'는 낌새를 눈치챈 제빠른 사람들도 무리에서 살며시 빠져나왔다. 그제야, 나는 진정으로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을 했다. 어린 알바생을 상대로 대체 왠 추태냐. 문제가 있으면 구청에 전화해서 쇼부쳐라. 아무런 죄 없는 울고있는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죽을 죄를 졌느냐. 블라블라' 아줌마는 역시 개구리처럼 펄쩍대고 코뿔소처럼 씩씩대면서 내게 또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미쳐가는 그 아줌마를 보면서 다시 한번 느꼈다. 아. 역시 이길 수 없는 상대다. 이런 종류의 인간들은 누구도 이길 수가 없을 것이다. 이길 상대가 있다면 진짜 '권력자'나 되어야하겠지. 나는 그가 말하는 권력자가 아니므로. 나는 허탈하여 그쯤에서 빠지려고 마음먹고는 돌아섰다. 울고 있는 알바생은 계속 신경이 쓰였다. 곧 알바생 대빵이 어디선가 달려왔고 둘이 여차저차 하다가 결국엔 옆에 붙어있는 지구대로 가버렸다. 가면서 아줌마는 이런 말을 했다. '대체 사물함에 물건을 두고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어요? 있냐구요' 그러니까 맥락으로 추측해보면 정기권을 끊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사물함에 자기 물건을 설마 두고 다니겠느냐는 말이었다. 그러고는 경찰에 가서 이야기하자는 말에 순순히 이렇게 말했다. '경찰이요? 좋아요. 가서 이야기해요 그럼.' 나는 그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아줌마는 자신의 그 모든 해괴한 논리와 주장과 난동에 자신이 있다는 투였다. 그 차갑고도 부드러운 마지막 목소리를 듣고 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런 종류의 인간들이란. 그리고 내가 그런 종류의 인간이라면. 저기서 울고 있을 어린 알바생의 가련한 처지는 또 뭐란 말인가. 아줌마에게서는 '설익은 지식인'의 냄새가 풍겼다. 어휘선택과 언변과 말투와 자세와 옷차림. 그리고 개구리처럼 팔짝뒤며 코뿔소처럼 씩씩거리는 행위의 작은 동작들 모두에서. 상식과 개념만 안드로메다에 쳐박았을 뿐. 그에게는 어쨌든 '설익은 지식인'의 냄새가 풍겼다.
나는 만화 지팡구를 읽어야만 했으므로, 그게 오늘 내 계획이었으므로, 나는 그 내적인 흥분상태 속에서도 그 만화책을 끝까지 다 읽어버렸다. 자위대 이지스함 미라이호가 과거 2차대전의 폭풍속으로 뜻하지 않게 시간이동을 하게 된다. 일 제국의 소좌 쿠사카는 미라이호를 통해 원폭과 패전과 냉전과 미국의 패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우라늄을 확보하여 역사를 새롭게 창조할 야망을 품게되고 이지스함의 선장 카도마츠는 그를 저지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게 된다. 둘은 상극의 신념으로 무장한 캐릭터로 각각 등장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신념인지는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그 신념들은 서로 섞일 수 없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전개로 추측해볼 수는 있다. 비약이 확실하지만 어쨌든 나는 오늘 거시와 미시의, 역사와 일상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음을 느꼈다. 결국 문제는 그런 종류의 인간들이었다. 그런 종류의 인간들은 오류조차 합리화하여 당위성을 확보한다. 일단,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그리고 다대일에서 꼬장꼬장할 수 있는 용기와 지칠줄 모르는 체력까지 겸비하면 그를 막을 방법은 또다른 권력과 또 다른 폭력 밖에는 없다. 그런 종류의 인간들로 인해. 아무런 힘이 없는 가련한 영혼들은 진정으로 억울한 눈물을 흘릴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첫댓글 그냥 지팡구 집에서 보시지..엄한데 가서 험한 꼴 당하시고..그런데 지팡구 재밌어요?
시간 되시면 문단 나누기, 들여쓰기도 좀 해주시면 감사..읽다가 중도에 포기한 1人
읽다가 중도에 포기한 2人
오 오랜만에 재밌는 글입니다.
글솜씨가 꼬장꼬장 하시네요 ㅋㅋ 농담 ^^;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ㅋㅋ
전 왜 님과 그 독서실 알바분이 왠지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거죠?;; 요새 계절 탓에 온 세상이 싹 다 멜로로 보여서 그런가;; 암튼 글 잘 읽었습니다!^-^
'욕지거리'라는게 말입니다...흠..흠..점잖고 상식적으로 행동하기 힘들 때 하라고 있는 겁니다..ㅋ 몰상식으로 나올 때는 비상식으로 나가는 게 상책이더군요..숨도 쉬지 말고 한 5분 정도 욕을 한 바가지 퍼 부어준다음에 손담비의 '미쳤어'와 '토요일 밤에'를 콤보로 추면 경찰도 슬슬 피하더군요..이거 괜찮은 방법...ㅋㅋ
아우~ 진짜 마을버스나 백화점 같은 데서 보면 개념 없는 아주머니들 너무 많다는ㅎㅎ 저도 님처럼 불의(?)를 보면 넘어가지 못하는 성격인데 그런 아주머니들한테는 답이 없더라고요. 님 글 읽으면서 제가 다 흥분이 되네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