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초원의 고구려 석인상(石人像)>
"92년 7월 하순에 한. 몽 공동 동(東)몽골 대탐사단의 단원으로 보이르 호수가에 이르렀을 때이다(이 때의 답사결과는 한몽학술조사 연구협회와 몽골과학원 『한.몽 공동학술조사 - 동몽골 1차년도 보고서 -1992』로 정리되어 나왔다).
(...중략) 보이르 호숫가 남쪽에는 고올리 카한 또는 람(람은 스님이라는 뜻)이라고 전해오는 석인상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고올리 나라의 국경 이었다고 한다.
고올리 성읍 터가 두 곳이 있고 고올리 사람의 농장 터도 있었는데, 농법이 중국식이 아니고 소련식(러시아식)도 아니었다고 한다.
석인상 두 기가 있는 곳을 답사하면서 잘 다듬어진 대리석 석인상을 확인하는 순간, 많은 의문들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이 머나먼 외국 땅에 고올리 카한의 석인상이 그토록 오랜 세월 중수(重修 - 거듭 고침)에 중수를 거듭하며 오늘날까지 이렇게 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동몽골의 석인상들은 대부분 목이 잘리운 채 다시 얹어진 것들인데 이 험악한 역사적인 싸움판에 왜 외국인인 고올리 카한의 석인상 (:몽골 교수인 베. 수미야바아타르 - 1996년 현재 단국대 교수 - 는 이 석인상을 고구려의 동명성왕이라고 추정하고 있다고 했지만 물론 근거는 대지 못하고 있다. : 1990년 여름에 사석에서 구두로 제기한 견해이다)만이 이렇게 건재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들에게 도대체 '고올리 카한'은 어떤 존재인가. '고올리'는 이들이 이야기하는 대로 정말 오늘날의 한국일까. 한국이면 역사상의 고구려를 가리키는 말일까.
더군다나 수도 울란바토르를 비롯한 서부 몽골에서는 한국을 모두 '솔롱고스'라고 부르고 있는 터에 『몽골비사』 - 칭기스칸의 기본무대인 동(東) 몽골에서는 1921년 혁명 이후에 새교육을 받기 전에는 솔롱고스라는 이름은 도무지 알지 못했고 오로지 '고올링 올스(고올리의 나라)'라는 이름만 썼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
(....중략)
92년 동몽골 대탐사에서 보이르 호수 언저리의 고올리 성읍터와 수흐바타르, 아이막 다리강가, 솜의 숨팅토이롬, 고올리 성읍터 탐사, 그리고 93년 6월에 있었던 셀렝게, 아이막 오르홍, 솜의 고올리 성읍지와 종이 공방터 답사를 한 다음에 94년 이 종이 공방터를 시굴하고 94~95년에 걸쳐 숨팅토이툼 고올리 성읍터를 발굴하게 되면서 마련되었다.
(이 답사 발굴 결과는 한몽학술조사 연구협회, 몽골과학아카데미 『한몽공동학술연구』 2집(1993년), 3집(1994년)에 보고서로 정리되어 나왔다)
특히 95년 6~8월에 걸쳐 이루어진 숨팅토이롬 고올리 성읍터 발굴에서 고구려 돌칸무덤 2기와 벽화고분을 발굴하여 도깨비 무늬 숫막새 기와 등의 유물이 많이 나와 전설대로 이곳이 고구려 고분이고 따라서 '고올리' 라는 이름은 고려와 함께 보다 더 원초적으로는 고구려는 지칭하는 것임을 확인해 가면서... (이하 생략)"
- 1996년 한.몽골 교류협회가 펴낸 『한. 몽골 교류 천년』 에 실린 주채혁(周采赫) 강원대 사학과 교수(한국 몽골학회 초대회장 역임)의 글 「몽골과 한국의 기원 - '몽'고올리와 '맥'고올리」
저는 예전에는 '고올리' 카한(:'칸'은 보통 군주를 일컫는 말이었고, '카한(가한)'은 칸보다 등급이 높은 지배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합니다)의 석인상이 '고구려가 몽골초원의 동쪽 끝까지 손을 뻗친 증거'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일도안사 님이나 다른 분들의 말씀을 듣다 보니 어쩌면 '고올리'의 성터나 석인상, 현지 주민들의 이야기는 고구려족이 졸본부여를 차지하기 전에는 몽골초원 동쪽에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고구려족은 추모왕이 태어나기 전에는 몽골초원 동쪽에 살다가, 흉노족이 초원을 정복하면서 동남쪽(몽골초원 동남부)으로 밀려났고, 전한이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영역을 동쪽으로 확장하자 한漢을 피해 다시 북부여로 달아났다는 얘기죠.
(주채혁 교수의 보고에 따르면, 고올리 성터로 알려진 곳에 사는 유목민들은 "원래 이곳은 고올리 칸이 살던 곳인데, 어느날 칭기즈 칸처럼 힘센 칸이 젊은이들을 시켜 그를 동남쪽으로 내쫓아 버렸다."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네요)
주채혁 교수님도 몽골초원의 고구려(고올리) 유적을
1. 고구려가 이곳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내려가서 나라를 세웠거나
2. 고구려가 광개토왕/장수왕대에 이곳까지 정복했거나
3. 고구려가 망한 다음 고구려 유민들이 돌궐(:튀르크)로 투항해서 쌓았을
가능성
이 있다고 주장하셨는데, 저는 비록 고구려 유민들이 돌궐에 투항하여 활동한 건 사실이나 돌궐 카한이 고구려인들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성을 쌓는 일을 허락했을 리가 없다고 여겨 3. 대신 1.과 2.를 지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고구려족이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기 전에는 몽골초원 동부에서 살다가, 흉노와 한漢에 쫓겨 동남쪽으로 달아났고, 나중에 다시 힘을 기른 다음에는 거란(:비려)족이 살고 있던 '고향'을 점령해 성을 쌓고 석인상을 세웠다는 결론을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