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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세 용사
삼하 23:8-17
8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지휘관의 두목이라 그가 단번에 팔백 명을 쳐죽였더라
9 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다윗과 함께 한 세 용사 중의 한 사람이라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거기에 모이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간지라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고
10 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11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기가 올라 거기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되
12 그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13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14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5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16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17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삼하 23:8-17 / [다윗의 용사들이 남긴 업적] 다윗의 용사는 모두 37명이었는데, 그의 군대 총사령관 요압과 거국적인 삼용사와 30인 용사에 소속된 세 장수와 엘하난에서 우리아까지 30명의 용사가 그들이었다. 삼용사 중에서 우두머리는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었다. 그는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창 한 자루로 800명의 적군을 모조리 쳐죽인 사람이다. 9) 삼용사 중에서 두번째 사람은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었다. 그는 아호아 사람으로 블레셋 족속들이 다시 이스라엘을 침략하자, 다윗과 함께 출전하여 에베스담밈에서 싸우게 되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블레셋 군인들이 두려워서 모두 높은 산악지대로 후퇴해 버렸다. 10) 그러나 그는 혼자 적진에 뛰어들어 적들을 소탕하였는데 팔에 쥐가 나고 칼잡은 손이 굳어져 풀리지 않을 정도까지 적군들을 쳐죽였다. 여호와께서 직접 개입하신 거룩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엘르아살은 그날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마침내 이스라엘 군인들도 다시 전선으로 돌아왔으나 그들이 할 일은 적진에 들어가 약탈하고 노략물을 회수하는 것뿐이었다. 11) 삼용사 중에서 세번째 사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였다. 블레셋 족속이 또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레히에서 싸우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다 익은 붉은팥이 가득 찬 밭 한 뙈기가 있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여기서도 도주해 버리고 싸우지 않았다. 12) 그러나 삼마는 그 곡식 밭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블레셋 족속들을 쳐서 물리쳤다. 이리하여 그들은 그 밭의 곡식을 조금도 훔쳐 가지 못하였다. 이것도 여호와께서 직접 개입하신 거룩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삼마는 그날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13) 추수가 시작될 때에 블레셋 족속이 또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쳤다. 그들은 유다 남쪽에 숨은 다윗을 북쪽에서부터 공격하려고 힌놈 골짜기 남쪽으로 올라갔다. 북쪽에 있는 이스라엘 군대가 다윗을 지원하러 내려오지 못하게 하려는 작전이었다. 이때에 30인 용사에 소속되었으나 그 수에 포함되지는 않은 세 장수가 아둘람굴로 다윗을 찾아갔다. 14) 이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었고 블레셋 군대의 주둔지는 다윗의 고향 마을인 베들레헴에 있었다. 15) 다윗은 자기의 고향 마을이 적에게 짓밟히는 것을 슬퍼하다가 문득 그곳의 시원한 샘물이 생각나자 `아, 목이 마르구나! 이제 누가 베들레헴으로 내려가서 그 성문 곁의 시원한 물을 길어 올 수가 있겠는가?'하고 탄식하였다. 16-17) 그러자 세 장수가 블레셋 진지를 뚫고 들어가 그 샘물을 길어다가 다윗에게 바쳤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여호와께 제물로 부어 드리며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여, 제가 이렇게 부당한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저를 지켜 주소서! 제가 이런 물을 마시게 된다면 그것은 목숨을 걸고 가서 물을 길어 온 사람들의 피를 마시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다윗이 이렇게 말하며 그 물을 마시지 않았는데, 그 세 장수의 업적은 그 정도였다.
다윗의 세 용사 요셉밧세벳, 엘르아살, 삼마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의로운 병기로서,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블레셋을 상대로 싸웠던 전쟁의 영웅들이며 다윗이 왕이 되도록 도운 자(대상 11:10)들입니다.
다윗의 세 용사(8-12) 요셉밧세벳, 엘르아살, 삼마 이들은 다윗과 함께 처음부터 생사를 같이했던 충성된 용사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체력과 용맹함을 부여받은 전사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창 15:18-21)을 성취하는데 유용하게 쓰임 받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당시 블레셋은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의 원수였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서 멸망 받아야 될 족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용사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사용된 하나님의 도구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용맹과 모든 은사는 약한 자들을 무시하고 압박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하고 거만한 자들을 무너뜨리고 약자들을 돕고 섬기는 일에 쓰임 받는 도구들로 사용되었습니다.
세 용사의 희생적 봉사(13-17) 다윗이 불레셋과 전쟁할 때 다윗은 산성에 있고 블레셋 사람의 영체는 베들레헴에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자기 고향 베들레헴(삼상 16:1)의 성문 곁에 있는 우물 물을 마시고 싶어 합니다. 이 세 용사는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와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그리고 한명은 익명입니다. 이들은 삼십 명의 두목 중의 3인으로서, 베들레헴에 주둔한 블레셋 군을 피해 결사적으로 성문 곁에 있는 우물로 가서 물을 길어다가 왕에게 바치는 충성을 보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극진히 사랑한데서(21:17) 취해진 것입니다. 사랑이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이해타산을 넘어 사랑하는 자를 위해 최대한의 희생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들의 충성심을 인정하여, 생명도 아끼지 않은 세 용사의 피와 같은 물을 마시지 않고 여호와께 부어드렸습니다. 이처럼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지만, 또한 그의 곁에는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충성스러운 용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왕(히 12:2)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도, 충성과 자기희생적인 용기가 있을 때(고전 4:2) 어떤 악한 세력들도 물리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빌 4:12-13).
적 용 : 다윗 왕에게는 충성스러운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왕 주님에게 나는 어떤 충성스러운 용사인가요?
영국의 한 출판사에서 상금을 내걸고 ‘친구’라는 뜻이 무엇인지 공모를 했습니다. 수많은 응모엽서에서 “기쁨은 곱해주고 고통은 나눠 갖는 사람”,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 “많은 사랑을 베푸는 사람” 등 어떤 사람을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지 사람마다 그 대답이 모두 달랐습니다. 그 중의 1등을 차지한 글은 “친구란 온 세상 사람이 다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를 찾아오는 그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에겐 그런 친구가 있으신가요?
호크마 주석
=====23:8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이 이러하니라 - 여기에 소개되고 있는 용사들은 다윗 왕국에서 크게 활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는 데 큰 공을 세운 600명의 용사들 중 일부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본 구절과 거의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대상 11:10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거기에 보면 이 용사들을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다윗의 힘을 도와...왕을 삼았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 구절에는 모두 37인의 용사들이 소개된 반면, 대상 11:10-47에는 16명의 용사들이 추가로 소개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아마도 몇 명의 용사들의 사망으로 인한 누락과 새로운 명단의 추가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Pulpit Commentary).
다그몬 사람 요셉 밧세벱...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 - 같은 내용의 기록인 대상 11:11에는 '다그몬 사람'이 '학몬 사람'으로, '요셉밧세벱'이 '야소브암'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다그몬'은 '학몬'에 대한 오기(誤記)이며, 그리고 '요셉밧세벱'은 이름이라기 보다는 '밧세벱에 거주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의 본 이름은 '야소브암'이며, '아디노'는 그의 별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그는 시글락에서 다윗과 합류하였으며(대상 12:6), 2만 4천명으로 구성된 정월 첫반(다윗은 상비군을 12개의 군대로 나누고, 달마다 한번씩 근무하도록 하는 체번제(替番制)를 실시하였다)의 반장이었다(대상 27:2).
군장의 두목이라 - 여기서 '군장'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솰리쉬'(* )는 '셋'이란 의미의 '솰로쉬'(* )에서 파생된 용어로서, 지휘관중의 지휘관, 곧 가장 뛰어난 세 장군을 의미한다(F.R. Fay). 이들은 왕이 전쟁에 참전할 때 병거에서 왕과 함께 있었으며, 왕 주번에서 특수 부대(호위병)를 지휘하였다(왕하 9:25;10:25). 그러나 이들은 요압이나 아마사가 차지했던 전체 이스라엘 군대의 군장, 곧 '사르'(* )와는 거리가 있는 직책이었다.
=====23:9,10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 - '아호아'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다(대상 8:4). 그리고 '엘르아살'(Eleazar)은 2만 4천명으로 구성된 이월반(二月班)의 반장이었다(대상 27:4). 그는 야소브암, 삼마와 더불어 다윗의 '솰리쉬'(* )로 활약하였다<23:8>.
블레셋 사람이 싸우려고 모이매 - 같은 병행 구절인 대상 11:13에는 '바스담밈'에서 접전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바스담밈'은 삼상 17:1에 따르면, '에베스담밈'(Ephesdammim)이다(Keil). 이 지명은 '피의 경계선'이란 뜻으로,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무수한 전투를 벌인 곳이었으며, 국경 지역인 엘라 골짜기에 위치해 있었다(R. Payne Smith).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간지라 - 혹자는 이 구절이 블레셋을 대항하기 위해 진군해 나아가는 이스라엘 군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Lange, Smith). 그러나 여기서 '물러간지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라'(* )는 '밑에서 위로 올라가다'란 뜻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지(高地) 위로 올라간 사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Thenius, Bottcher).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의 대단한 진용(陳容)에 놀라 높은 고지 위로 도망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0절 하반절에 기록된 '백성들은 돌아와서'란 말을 통해서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의 '솰리쉬'(3인의 용사) 중 하나인 엘르아살은 혼자서 적과 싸움을 하였던 것이다(Keil).
싸움을 돋우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라프'(* )는 '조롱하다', '능욕하다'는 뜻으로, 세 용사가 블레셋 군의 비위를 건드려 싸우믈 유도해 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삿 8:15;삼상 17:10, 26, 36, 45).
손이 피곤하여 칼에 붙기까지 - 이는 어찌나 칼을 손에 꽉쥐고 많은 적군들을 쳐부셨던지 손에 쥐가 날 정도의 상태에까지 이르렀다는 의미이다(Keil, Lange).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 원어상으로는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란 뜻이다. 즉 본서 저자는 이날의 승리가 엘르아살을 힘있게 붙드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23:11,12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 - 다윗의 3인의 용사 중 하나인 '삼마'(Shammah)는 33절에서 30인 중 하나로 다시 소개되고 있다.
떼를 지어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하야'(* )이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말이 '떼를 지어'란 의미의 말이 아니라, '레히'라는 지명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nge, The Interpreter's Bible, Josephus). 특히 이 말이 반드시 지명(地名)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이유는 원문상 뒤어어 지시 부사인 '솽'(* , 거기에)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Thenius, Ewald). 한편, '레히'는 삼손이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 1천명을 살해한 유서깊은 곳이다(삿 15:9, 14, 17, 19).
녹두나무 - 병행 구절인 대상 11:13에는 '보리'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블레셋인들은 이스라엘의 농작물을 망쳐놓기 위해 이곳에 들어온 듯하다(Pulpit Commentary).
백성들은...도망하되 - 여기서 '도망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누스'(* )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달아난다는 의미의 말이다(10:14;왕상 20:30).
막아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칠레하'(* )를 직역하면, '그것을 붙잡았다'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뒤쫓아 밭으로 들어온 블레셋 사람을 삼마가 '뭍잡아' 살해했음을 보여 준다(Keil).
=====23:13
삼십 두목 중 세 사람 - 이 세 사람은 앞절에 언급된 3인이 아니라 아비새와 브나야, 그리고 익명의 한 사람이다(18, 22절). 이들은 둘째 3인으로서 이들의 충성은 첫째 3인(야소브암, 엘르아살, 삼마;8-12절)에 못지 않았으나 능력면에서 첫째 3인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23절).
아둘람 굴 - 이곳은 다윗이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하여 은신한 곳이며, 이곳에서 다윗은 그의 가족과 다른 동료들과 결합하였다(삼상 22:1, 2). 그 위치는 가드와 베들레헴의 중간, 곧 가드 남동쪽 약 16km 지점이다. 최근에 성서 고고학자의 탐사로 이곳의 산 중턱에서 약 400명 정도가 거주할만한 큰 동굴 하나가 발견되었다.
때에 블레셋 사람의 떼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쳤더라 - 이 구절은 여기에 언급된 블레셋 전투가 5:17-25절에 기록된 전투와 같은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Keil). 왜냐하면 양쪽 구절 모두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쳤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르바임 골짜기'(the valley of Rephaim)는 예루살렘 서남쪽에 위치한 골짜기이며,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 지역이었다<5:18>. 또한 이 전투는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직후, 통일된 다윗 왕국의 세력을 우려한 블레셋 족속이 선제 침공함으로써 발발되었다(5:17).
=====23:14
다윗은 산성에 있고 - '산성'(* , 메추다;stronghold)은 아둘람 근처에 있던 산성(山城)을 말한다. 당신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다윗은 천혜(天惠)의 요새지인 예루살렘에 있지 못하였고, 그 대신 아둘람 근처의 산성에서 피신하고 있었던 듯하다(5:17).
블레셋 사람의 영채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 '영채'(* , 맛차브'garrison)는 군부대를 의미하는 말이다(13:23;14:1). 한편 블레셋 사람들은 아마도 길보아 전투(삼상 31:1-7) 때에 베들레헴을 차지한 듯하다.
=====23:15
다윗이 사모하여...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 여기서 '사모하다'(* , 아와)란 말은 '간절히 바라다', '열렬히 추구하다', '애태우다'란 뜻으로, 곧 필요로 하는 그 무엇을 위해 마음이 애타는 상태를 일컫는다. 당시 다윗은 블레셋과의 치열한 전투 와중에 고향 근처에 이르게 되었고, 그는 고향에 대한 향수로 인해 육체와 정신의 피곤에 젖어들게 되었다. 결국 다윗은 고향의 우물 물에 대한 갈증을 애타는 마음으로 호소하게 되었고, 이를 귀담아 들은 둘째 3인의 충정어린 행동이 결행되었던 것이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 - 성서 고고학자 리터(Ritter, Geography of Palestine)에 따르면, 깊은 우물로부터 솟아나오는 이 물은 시원하고 깨끗한 냉수였다. 그러나 당시 다윗이 진 치고 있던 아둘람 근처의 물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깨끗하고 시원한 이 물을 사모했던 것이다(The Interpreter's Bible, Lange).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이 우물은 베들레헴 북동쪽으로 약 15분 걸리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으며, '다윗의 우물'이란 이름으로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Keil). 한편, 다윗은 베들레헴 태생으로(16:2, 18), 어려서부터 이 우물 물을 마시고 자랐다.
=====23:16,17
충돌하고 지나가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카'(* )는 '가르다', '쪼개다'는 뜻으로(시 78:13;사 48:21;욥 26:8), 이는 세 용사들이 베들레헴에 있던 블레세의 부대를 정면으로 꿰뚫고 나아갔음을 보여주는 말이다(Keil). 여기서 우리는 세 용사의 비범한 용맹과 아울러 목숨을 건 충정을 발견할 수 있다.
다윗이...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 이는 다윗이 이 물을 여호와께 전제물로 드린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다윗은 이 물이 용사들의 피와 다름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다윗은 부하들의 피와도 같은 이 물을 자신이 마시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전제물로 바쳐드린 것이다(Smith).
이는...피니이다 - 다윗은 부하의 생명이나 마찬가지인 그 물을 하나님께 전제(奠祭)로 부어 드렸다(16절). 즉 그는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고, 그들의 생명의 대가인 물을 '피'로 간주하여 율법에 따라(레 17:11;신 12:23-27) 한방울도 축내지 않고 하나님께 헌납하였다. 이 같은 행동은 (1) 인간의 생명은 결코 헛되이 허비되어서는 안되며(막 3:4), (2) 모든 희생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고(계 12:11;시 36:9), (3) 어떠한 생명이라도 인간의 사악한 욕구 충족에 희생되어서는 안된다는 등의교훈을 제시해 준다. 하나님은 이웃의 생명과 인격을 존중히 여길줄 아는 자의 생명과 인격을 또한 보존하신다(잠 14:25a;시 56:13a).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 그 이유는 '피를 먹지 말라'(레 17:10)는 율법의 조항을 다윗이 기억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다윗은 세 용사가 떠온 물은 그들의 생명을 걸고 떠온 것이므로 그것을 그들의 피로 간주했던 것이다(Keil). 레 17:11 주석 참조.
< 설 교 >
다윗의 용사들
삼하 23:8-12
교회는 세상일을 잠시 잊어버리고 마음에 안위를 찾기 위해서 오는 곳이 아닙니다. 어떤 목사는 ‘교회는 세상일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잠시라도 마음의 쉼을 얻고 돌아가도록 해줘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또 그것이 교회가 교회를 찾는 사람들에게 해줘야 하는 서비스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교회는 마음의 여유를 찾기 위한 여가활동의 일환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마음에 안위를 찾기 위해 찾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한통속이 되어서 세상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실체를 속 깊이 파악하기 위해 찾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찾아 나왔어도 십자가의 피를 보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여러분은 교회를 찾은 것이 아니라 단지 여가활동으로서의 한 장소를 찾은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 실체를 똑똑히 파헤쳐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은 천국에는 근처도 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인간의 공로나 의로움과 전혀 상관이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부어진 은총임을 부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교회에서 목사를 보려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어떤 사람이냐에 관심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선포되고 십자가의 피가 사람들을 영접하는 교회인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관심을 그리스도의 피에 둔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 자체가 그리스도의 피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관심두지 않는 일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배고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힘도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관심을 두는 일에 나도 관심을 두면서 세상이 살아가듯 그렇게 세상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그러한 잘못된 우리의 모습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돌아간다면 세상과 함께 어울려 살다가 세상이 멸망할 때 함께 망하는 길을 가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잠시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마음의 안위를 누리고자 하는 것은 마약을 찾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종교를 아편이라고 말한 것도 종교가 현실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하고 더 나은 삶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게 해주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의 실체를 아는 것입니다. 세상이 사단에게 지배를 받으면서 하나님과 극렬히 대립되어 있는 가운데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 속에서 구별되지 못하고 세상의 일부가 되어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게서 무엇이 하나님과 대립하는 것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에게서 풍기는 더러운 악취를 맡을 수가 있는 것이고, 냄새 풍기는 모습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리스도의 피가 자신의 더러운 모든 것을 덮으며 나를 영접하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면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이 이러하니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다윗의 옆에 있었던 세 용사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23장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이제 인생을 마치려는 시점에서 왜 다윗의 용사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요? 다윗에게는 용사들이 있어서 그 용사들의 도움으로 다윗이 많은 이방인과 전투를 하면서 승리를 얻었고 이스라엘을 강한 나라로 이룩할 수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일까요?
본문에서도 다윗의 용사들이 전투에 나가서 수많은 이방인들을 무찌르고 승리한 전공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분명 다윗이 용사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다윗의 용사들은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고 할 때 목숨을 걸고 적이 점령하고 있는 베들레헴까지 가서 물을 떠오기까지 합니다. 이는 용사들이 다윗에 대해 어떤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있어서 용사들은 든든한 힘이 되었을 만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10절의 “저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서 저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는 내용을 보면 다윗의 승리는 용사들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로 인한 승리임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11-12절의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이 떼를 지어 녹두나무가 가득한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되 저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는 내용을 봐도 구원은 용사들로 인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로 인한 것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국 다윗의 모든 승리는 다윗과 함께 하고 다윗을 돕고 다윗에게 충성했던 용사들로 인한 것이지만, 정작 용사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즉 용사들로 인한 승리가 아니라 여호와로 인한 승리더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왜 다윗이 인생을 마치는 시점에서 언급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에 서서 자신이 승리한 날들을 돌아보니 용사들이 자신의 곁에 있어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승리였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실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승리에는 용사가 있었지만 용사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사로 인한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인생이었고 오늘 우리의 인생이기도 합니다.
자, 그렇다면 다윗이 바라보고 의지할 존재는 과연 누구겠습니까? 용사입니까? 용사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오늘 주일에 다 아는 문제를 두고 깊이 생각해야하는 것은,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다’ ‘우리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하고 또 믿는다고 하지만 과연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시고 배후에서 일하신다는 이 믿음이 우리의 삶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껏 저로부터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배후에서 일하신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다’는 말에 대해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저의 말에 동조하거나 옳다고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시고 우리의 배후에서 일하시고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여러분의 삶에서 만나시고 느끼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승리하게 하심을 두고 감사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만나고 느끼지 못하는 하나님은 다만 추상적인 하나님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살아계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느냐는 것은 삶을 통해서 증거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여러분이 살펴야 하는 것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에 살아계신다면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들, 우리에게 주어진 형편과 환경들은 하나님에 의해 되어진 것들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과연 그 믿음은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겠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다는 것을 믿으며 살아가십니까? 만약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면 ‘내가 이렇게 하면 손해가 될까? 이익이 될까?’라는 계산을 하지 않게 됩니다. 다만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인가? 틀린 것인가?’만 헤아릴 뿐입니다. 이 일이 나에게 손해로 돌아오든 이익으로 돌아오든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을 여러분의 삶에서 실제 몸으로 체험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용사들이 있었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전쟁에서 다윗을 위해 나가 싸운 자들은 용사들입니다. 이런 경우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바라보고 의지하겠습니까?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우리의 어리석은 시각은 항상 용사들을 바라보게 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다고 하지만 실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용사들입니다. 나에게도 용사를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같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도 전혀 부인하지 않는 것 같지만 실상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의지하지도 하고 살아계심도 부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악취로 가득 차 있는데도 불구하고 냄새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한 채 교회를 찾는다면 과연 교회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얻고 무엇을 만나겠다는 것입니까?
교회에 나와서 한 시간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냄새나는 나의 실체를 들여다보면서, 그러한 우리를 받아주시고 영접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나를 교회로 인도하시는 이유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야 하는 이유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모임의 중요성을 알게 될 때 ‘바쁘다’는 것이 핑계거리로 등장할 수 없다는 것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 인생에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을 얻고자 합니다. 다윗의 용사와 같은 것이 내게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제아무리 힘이 될 만한 것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승리는 여호와로 말미암습니다. 이 믿음이 없기에 삶이 힘든 것이고, 힘든 것을 어떻게 주체하지 못해서 하나님을 찾으며 평안을 달라고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믿음 없는 것은 생각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여러분이 올 한 해를 살아온 것이 여러분이 소유한 것 때문이었다고 여기십니까? 우리가 소유한 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은 여호와로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왜 삶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십니까? 그것은 엉뚱한 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승리를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유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냄새나는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악하고 더러운 것을 용서하시고 깨끗이 씻어주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고 만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피가 나를 영접하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그것이 신자에게는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로 하여금 소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고 만나게 하는 것으로 바라본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모든 삶에서 간섭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분명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믿음이 세상에서 담대한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을 살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기 위해 일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이 일은 한 해에도 변함없이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용사가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힘이라는 믿음으로 한 해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왕의 용사가 되라
삼하 23장 8절 / 최낙중목사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돈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지식이라 말하고요, 건강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고 말씀 하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문제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이 세상에는 크게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절도, 강도, 사기꾼, 마약범, 가정파괴범등 나쁜사람들 입니다.
있으나 마나 한 사람도 있습니다. 남에게 도움을 구하지도 않고 또 남을 돕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남을 돕고 자기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다름아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 죄악세상에서 성별되게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질서를 지키며 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제 2대왕이 되어 40년 동안 그가 통치할 때 정치적 안정과 경제성장과 영토를 넓히는 일과 백성을 평안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왕을 위해 싸우는 용사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삼하 23:8이하에 소개된 용사들은 다윗왕국이 건제하고 번영하는데 있어서 크게 기여한 인물들 입니다. 그중에서 처음에 소개한 요셉밧세벳과 엘르아살과 삼마는 다윗왕국을 세움에 있어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용사입니다.
용사 중에는 쾌활하고 씩씩하고 용감한 대장부가 있는가 하면 도량이 좁고 겁이 많은 졸장부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왕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용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위해, 왕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죄악과 싸워 승리하는 대장부가 되어야 합니다.
다윗을 위한 대장부 가운데서 요셉밧세벳은 혼자서 블레셋 군대 팔백명을 쳐죽였다고 합니다. 엘르아살은 칼이 손에 붙기까지 싸워 이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삼마는 이스라엘 군병이 블레셋 군대 앞에서 도망 할 때에 적진 가운데 뛰어 들어가 그들을 무찔러 승리한 장군입니다. 왕을 위한 신하의 막강한 태도입니다. 왕의 용사들의 투철한 사명감으로 그들은 왕을 위하여 죽을 각오로 싸웠고 그러한 신하와 장군을 거느린 다윗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편안하게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편안한 것 좋아하고 자기 안전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 도모 합니다.그러나 투철한 사명감이 있는 사람은 그 사명의 위치에 굳게 서서 하나님 나라 위해 교회 위해 혹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하나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에 굳게 서서 사명을 잘 감당합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를 향해서 진격 할 때에 러시아의 카쟈크족이 프랑스 군대를 완전히 포위할 때가 있었습니다. 프랑스 군대는 후퇴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느새 캬쟈크족이 모든 교량을 파괴함으로써 대로를 완전히 차단해 버렸던 것입니다.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서 강물이 얕은 폭을 골라서 병사들로 하여금 부서진 교각을 붙들게 하고 또 병사는 그 병사를 붙들게 하고 해서 사람의 몸으로 가교를 만들어 병사들을 밤새도록 철수시켰습니다. 마지막 병사가 동료병사의 등을 밟고 건넌 이후에 그동안 부서진 교각을 붙들고 엎드려 있는 병사들을 향해 나폴레옹은 “이제는 너희 차례다 어서 나오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모두다 교각을 붙든 채 얼어붙어 죽은 것입니다. 몇몇의 병사가 죽음으로써 많은 군사가 생명을 건졌습니다.
사명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내가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죽음을 선택하는 것. 그것은 바로 부활의 약속입니다.
다수의 병사를 살리기 위해 소수의 병사들이 자기 생명을 걸고 사명을 다 했을 때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13-17절을 보면 다윗의 용사들 가운데 30명의 두목이 있었는데 그중에 세 용사들이 나옵니다. 때는 블레셋 군대와 싸울 때 다윗은 산성에 있었고 블레셋 군대의 영체는 베들레헴에 있었습니다. 다윗은 목이 말랐습니다. 산성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말합니다. “누가 나로 베들레헴 성에 있는 샘물을 마시게 할꼬” 물을 가지고 올 용사들을 찾았습니다. 그때에 세용사가 나섭니다. 그들은 적군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블레셋 군대와 충돌합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물을 구하여 왔습니다. 다윗이 그 물을 볼 때에 물이 사랑하는 병사들의 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물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은 병사들이 보는 가운데 그 물을 하나님 앞에 쏟아 부었습니다.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였고 블레셋 군대와 싸워 승리했습니다.
위엣 사람을 존경하고 공경하고 왕을 위해서라면 생명을 내놓았던 병사들, 그리고 그 병사들을 위해서 목이 말라도 마시지 않았던 다윗의 사랑이야기 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은 받듯이 사명을 불러일으키고 사명은 많은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내며 목마른 사람의 마음속에 시원한 생수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왕을 위한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용사,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용사,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용사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용사가 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힘은 위로부터 얻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는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찾고 찾는 이에게 능력을 베푸신다고 역대하 16장 9절에서 말합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에 머물러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힘써 기도하고 왕을 위한 용사들이 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귀와 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하나님말씀과 기도는 두 바퀴달린 자전거와 같습니다. 자전거의 앞바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선악을 분별케 하며 방향을 설정해 줍니다. 자전거의 뒷바퀴와 같은 기도는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동력입니다.
우리 모두 왕이신 예수님을 위하여 싸우는 용사가 되고 승리한 십자가 군병이 되기 위해서 투철한 사명감을 가질 수 있기 바라고 하나님말씀과 기도로 무장한 승리한 하나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밝아오는 새 아침에 주신 복된 말씀 깊이 새기면서 오늘도 승리하는 하루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만남은 신비로운 것
삼하 23장 08~12절 / 서정호목사
난생 처음 백화점엘 가 본 시골 할아버지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신기한 듯 이것저것 구경을 하는데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할머니 한 분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쏙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문이 열리고서는 예쁜 아가씨가 내리니까 이 할아버지는 너무나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손자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니네 할머니도 저 기계 속에 넣었다가 끄집어내야겠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신비한 기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갔다 나오면 죄인이 의인이 되어 나오고, 낡은 인생이 새로워져서 나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성경의 수많은 사람들,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모두 새로워졌습니다.
우리 삶의 행복과 불행은 어떤 만남을 가지면서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만큼‘만남’은 중요합니다.‘좋은 부모’'좋은 아내’‘좋은 남편’‘좋은 친구’‘좋은 스승’‘좋은 선배’‘좋은 후배’와 같은 사람과의 만남이 중요하고, 좋은 사람과의 만남을 위하여‘좋은 학교’와‘좋은 교회’와의 만남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좋은 교회와의 만남은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축복된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누리지 못하는 풍성한 삶
어떤 사람이 호화 여객선을 타고 세계 이 곳 저 곳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비싼 배표를 사느라 돈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2주일 동안 먹을 치즈와 과자부스러기, 캔 몇 개를 준비해서 배에 탔습니다. 그런데 돈이 많아 보이는 다른 사람들은 식사 때마다 뷔페를 즐기기도 하고 고급 음식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습니다. 배가 목적지에 도착한 후 선장이 인사를 합니다. "행복한 여행이 되셨는지요?" "네, 좋은 구경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돈이 모자라서 치즈 조각, 과자부스러기, 캔 몇 개로 식사를 하느라고 배가 많이 고팠습니다." 그때 선장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합니다. "이 배 안의 모든 뷔페와 엄청난 음식들이 당신의 배 삯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단 말입니까?"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이 청년처럼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될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당신의 사명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생명을 얻고 거기에 프리미엄으로 더 풍성한 삶을 얻는 것 -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의 인생은 새롭게 시작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새로운 탄생이고 새로운 출발이요, 거듭남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한 우주와 또 다른 한 우주의 만남으로 비유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은 한 우주가 그 본래 우주의 있어야 할 자리를 찾는 것이고, 그가 있어야 할 가장 편안하고, 적절하고 빛나는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질병을 일으키는 정서적인 요인 중에서 흡연에 버금갈 만큼 심각하게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적인 소외 즉 고독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전인 건강은 본질적으로 관계성에 기인합니다. 즉, "다른 사람들과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아니면 좋지 못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하는 문제는 그 사람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도 바로 얼마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인생은 만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환경과 만나고 사람들과 만납니다. 행복을 만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행을 만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공을 만나기도 하고 실패를 만나기도 합니다. 슬픔을 만나기도 하고 기쁨을 만나기도 합니다. 무엇인가 순간순간마다, 시시각각으로 만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이 세상입니다.
잘 만나 축복을 받은 사람은 복 중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특히 사람에게는 인복(人福)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역경과 환난, 시련과 고통을 당했어도 사람을 잘 만나면 그 어려운 환경에서 헤치고 나와 승리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훌륭한 부모를 만나고, 좋은 남편과 아내를 만나고, 진실한 친구를 만나고 대행자가 될 수 있는 스승을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러나 더 큰 복은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고, 주님을 구세주로 만나고, 성령의 역사하심과의 만남입니다. 은혜 있는 교회를 만나고, 생명이 넘치는 교회,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를 만나고, 또 능력 있는 교회의 지도자를 만나는 것도 성도에게는 가장 값진 축복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날마다 수많은 만남을 통해 관계를 형성해 갑니다. 잠시뿐인 만남도 참으로 많지만 친구들은 5년, 혹은 50년 관계가 지속됩니다. 결혼하게 되면 부부가 50만 시간을 함께 살며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또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는 죽을 때까지 그 관계가 지속됩니다. 그런데 오래 지속되는 관계나 길을 가다가 스치는 관계나 이례적인 만남이나 모두 우연이 아닙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만남은 신비로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목회자를 만나고 교인들을 만나고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된 섭리 가운데에서 되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준비된 만남, 계획된 만남뿐 아니라 예기치 않는 만남도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일임을 믿기 바랍니다.
다윗 왕이 아들의 칼을 피해 피난 가다가 시므이라는 사람을 만난 것은 예측 불허의 만남, 전혀 준비하지 않은 만남, 예상하지 않은 만남이었습니다. 시므이가 돌을 던지고 티끌을 뿌리면서 다윗을 조롱하고 욕되게 할 때 감정대로 하면 다윗은 화가 치밀어 올라 시므이의 목을 쳤어야 했지만 다윗은 시므이를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줄을 알았기 때문에 조심했습니다. 진지해졌습니다.‘왜 하나님께서 시골 사람 시므이에게 조롱을 당하게 하시나?’를 생각하면서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세상은 참 재미있습니다. 거미도 우연이 아닙니다. 캠브리지의 헤라이 헤이브 목사님은 영국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 추격하는 군인들을 피해 도망가다가 큰 가마솥의 아궁이에 들어갔습니다. 누군가가 불을 때면 타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군인들이 달려와서“저기다! 가마솥에 숨었을 거다. 뒤져 봐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가슴이 두근두근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거미 한 마리가 나타나서 거미줄을 빙 둘러쳤습니다. 달려와서 뒤지려고 하던 군인이 “거미줄이 있는 것을 보니 여기에 숨지 않았다.”라며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그때 헤이비 목사님은 감사를 드렸습니다.‘아! 하나님께서 거미 한 마리를 통해 나를 살려 주셨구나. 하나님께서는 저런 거미도 쓰시는구나.’‘거미 한 마리가 내 운명을 바꾸는구나. 거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죽었을 텐데 거미 때문에 내가 살았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그때부터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함부로 생각하지 않고 진지하게 생각하며 모든 일에 겸손하게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요한 사람과의 만남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만남,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 만남도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만남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최근에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구두닦이 출신의 백만장자가 있는데 그 백만장자가 14세 때부터 구두닦이를 했습니다. 구두를 닦아 주고 2불만 받고 나면 끝나는 만남이지만 그 만남을 통해 좋은 관계 형성에 힘쓰고, 또 모든 사람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성공하는 사람, 성공의 정상을 달리는 사람들은 신발이 다른 것을 알았습니다. 신발이 깨끗한데도 또 닦는 것입니다. 신발이 지저분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했답니다. 대개 성공한 사람들은 신발이 깨끗한데도 또 닦았습니다. 그리고 옷을 단정하게 입었습니다.‘아하! 성공한 사람은 옷이 다르구나. 바지 줄이 쭉쭉 서고 깨끗한 사람이구나.’
또 이 친구가 지혜가 있어서 구두닦이를 하면서 돈을 더 벌기 위해 꾀를 썼습니다. 신사가 구두를 닦고 5불을 주면 깜짝 놀라면서 “아니, 왜 이렇게 많이 주십니까?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면 그 인사를 받은 손님은 거스름돈을 당연히 받으려고 하지 않고 다섯 사람 중에 한 사람 정도만 제외하고 대부분은 그냥 간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혜롭게 구두를 닦으니까 어떤 사장이 머리가 비상한 아이라는 것을 알고 ‘이 아이는 뭘 시켜도 되겠구나’하고 점을 찍었습니다. 그래서 구두를 닦은 후 5불과 명함을 주면서 “18세가 되면 나를 찾아오너라.”라고 말했습니다. 이 친구가 그것을 놓치겠습니까? 18세까지 명함을 간직하고 있다가 18세가 되자마자 그 사장을 찾아갔더니 사장은 그 친구가 올 줄을 알고 미리 일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가 그 회사에 들어가서 백만장자가 되는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구두만 닦는다면 성공하기 어렵지만 구두닦이를 하면서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거기에서 관계를 창조하게 되면 성공하게 됩니다. 대수롭지 않은 만남이 우리 인생을 얼마나 크게 바꾸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진지해야 하고 모든 것을 중히 여겨야 됩니다. 모든 만남, 아주 하찮아 보이는 작은 만남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심지어 자동차 사고가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지 않은 만남, 기분 나쁜 만남이 아니라 그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만남으로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이분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왜 하나님께서 내게 사고를 허락하셨을까? 내가 이분에게 어떻게 해야 내게서 하나님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까?’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자리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절대로 헛된 일이 없습니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며 관계를 형성하게 되면 합력해서 복이 되고 선이 되고 값진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세 장수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용사, 챔피언, 장군, 영웅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단어인데, 그들은 다윗과 관계를 잘 맺은 사람들입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고마운 용사들입니다. 요셉 밧세벳이라는 챔피언, 장군은 다윗의 전쟁 상황이 좋지 않을 때 혼자서 8백 명의 적을 쓰러뜨렸습니다. 그 기세에 적들이 다 도망하여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다윗 왕이 “고맙다. 요셉 밧세벳, 고맙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르아살이라는 장수는 진격해 오는 블레셋 군사의 위력에 밀려 이스라엘 백성이 다 도망하는 그 어려운 전세에서도 버티어 혼자 적과 맞서 싸워 엄청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고마워서 다윗이“아, 엘르아살 장군.”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삼마인데, 블레셋 군대가 녹두밭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그 위력에 질려 이스라엘 백성이 겁을 먹고 또 도망을 갔지만, 삼마는 혼자 그 녹두밭에 들어가서 적군을 쳐부수었습니다. 사무엘하 22장 30절의“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 넘나이다”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의지해서 혼자 적군에 달리며 얼마나 많은 적군을 쳐부수었는지 블레셋 군대가 패하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세 장수를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37명의 장수가 소개되는데 요압 장군이 없습니다. 사령관이요, 한평생 다윗 곁에서 싸운 요압이 빠졌는데 요압은 다윗과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다윗을 위해 싸우는 것 같았지만 실은 자신을 위해 싸웠습니다. 자기 자리가 위태로우면 적을 치고, 라이벌 되는 사람을 다윗의 명령도 없이 쳐 죽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너는 필요 없다. 너는 나를 위하지 않았어.’하며 솔로몬으로 하여금 요압을 쳐 죽이게 합니다.
누가 인간관계를 잘 형성하는 사람입니까? 상대방에게 고마운 마음, 감사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눈물 흘릴 정도로 고마워하는 시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며느리를 좋게 보아야 합니다. 대개 시어머니들의 눈은 이상해서 자기 딸의 허물은 보이지 않고 며느리 허물은 어찌 그리 잘 보이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부부는 그 관계가 무덤으로 끝이 나지만 교회의 인간관계는 천국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만남에 더 신경을 써서 만남의 형성을 잘 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관계가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세 용사 삼마, 엘르아살, 요셉 밧세벳이 다윗을 위해 그렇게 싸워 준 것은 다윗이 좋아서 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흠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아내를 빼앗은 사람이고, 그 남편을 죽인 사람이고, 아들을 잘못 기른 사람입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 다윗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려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다윗을 위해 싸우는 것은‘하나님께서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다윗 편에 계시는구나. 내가 다윗을 위해 싸우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구나’하고 깨달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싸워 준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도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악한 인간은 사람을 쓰고 그 사람의 가치가 없어지면 버리지만 선한 사람은 반드시 보상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쓰시고 상을 주십니다. 마귀는 가룟 유다를 사용하고 그가 배가 터져 죽을 때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위해 순교하는 스데반을 보시고“어서 오라”하시며 상을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선한 하나님과 다윗을 닮아야 합니다. 언제나 빛과 그림자는 같이 있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내게 잘 해준 고마운 분들의 손을 잡아 주며 감사할 줄 아는 관계를 형성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상대방도 더 도와주고, 자신도 은총에 겨운 삶을 영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만남의 영성
인생은 만남입니다. 인생은 너와 나의 만남입니다. 산다는 것은 만나는 것입니다. 만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만들어 가는 것은 만남입니다. 우리 인생은 만남과 선택을 통해 만들어져 갑니다. 좋은 만남은 좋은 인물을 만들고 좋은 인물은 좋은 인생을 창조해 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남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부모와의 만남, 배우자와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영적 지도자와의 만남, 동역자와의 만남, 좋은 책과의 만남이 우리를 만들어갑니다. 부모와 친척과의 만남은 바꿀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외의 만남은 얼마든지 우리가 선택할 수 있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스승은 훌륭한 제자를 만날 때 빛을 발하고, 탁월한 제자는 탁월한 스승을 만날 때 빛을 발합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땅을 만날 때 빛을 발합니다. 나무가 아무리 좋아도 좋은 땅을 만나지 못하면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훌륭한 인물의 배후에는 훌륭한 만남이 있습니다. 훌륭한 만남이 없이는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인물을 직접 만날 수도 있고, 책을 통해 만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만남을 통해 사람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큰 나무 곁에 가면 죽지만 사람은 큰 인물 곁에서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게 됩니다.
좋은 만남, 아름다운 만남
좋은 만남은 축복입니다. 좋은 만남은 우리를 변하게 해줍니다. 너와 나의 만남을 통해 깨달음이 옵니다. 만남을 통해 우리는 내면을 보게 되고, 자신을 깊이 보게 되고, 우리 안에 엄청난 가능성을 발견하도록 도와줍니다. 좋은 만남은 사람을 바꾸고. 사람을 살려냅니다. 기적을 일으킵니다. 새로운 생명, 새로운 신화도 좋은 만남에서 창조됩니다.
좋은 만남보다 어려운 것은 그 만남을 가꾸는 것이고 좋은 만남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것입니다.“정원과 가정은 가꿀수록 아름답다”는 말이 있는데 만남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만남이 축복된 만남, 풍성한 열매를 맺는 만남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만남을 정성스럽게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만남이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목적 있는 만남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만남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깊은 영성은 만남을 소중히 여깁니다. 깊은 영성은 만남을 가꿀 줄 압니다. 깊은 영성은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함께 성취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만남이 뒤섞여서 자신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자기 자신을 무한정으로 확대시켜 가는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무한정으로 확대시켜 주며 결코 후회 없는 만남! 꼭 만나야 할 분! 자신을 보석처럼 빛나게 하실 분!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 사람 용사의 행동
김철한목사(오목천교회) / 삼하 23장 13~17절
다윗 왕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았다. 그 주변에는 충성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 충성된 사람들은 임금과 신하의 계급적 관계 때문에 몸을 드리고 다윗의 집에 헌신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여겨진 것처럼 다윗의 사람됨 때문이다. 그 사람됨이 중요하다. 어느 위치에서든지 발휘되는 리더쉽은 지위나 계급이나 명령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다윗과 30명의 용사들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그 원천은 사람됨이다. 그 사람의 사람됨을 결정하는 품성이 리더쉽의 성패를 좌우한다.
신문 지상에 나오는 모 의원과 그를 보좌하고 돕는 의원 보좌 기사와의 관계를 보라. 왜 자신이 모시고 다니는 의원을 고발하는가? 두 사람의 관계가 충성 대신 배신을, 섬김 대신 밀고를, 사랑 대신 미움을 만든 것이다. 이는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인데 관계를 견고하게 하는데는 능력과 힘과 지위가 아니다. 그 사람됨의 품성이 중요하다. 정직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정의롭고 자비로운 품성이 형성될 때 그 사람과 그 사람 곁에 있는 무리는 강하게 연결된다. 리더에게 진정한 팔로워가 되므로 큰 일을 하는 리더쉽이 형성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30명의 용사 중 특별히 3인의 용사를 보라.
세 명의 사람이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다.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데 다윗이 소원을 토한다. 삼하23:15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목마름을 느끼고 있던 다윗은 자신도 모르게 물을 마시고 싶은 탄식을 내뱉은 것이다. 그때 세 사람의 용사는 베들레헴 성으로 달려가 우물 물을 길어다 다윗 왕에게 드린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 사람의 행동이다.
1. 지체하지 않는 즉각적 행동 (삼하23:15~16)
물을 먹고 싶다는 소원이 알려지자마자 세 용사가 적진으로 간다. 삼하23:15~16을 보라.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라 하였다. 이 문장은 다윗의 소원이 세 사람에게 들려지므로 행동이 따라오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용사들이 얼마나 신속하며 다윗의 소원에 얼마나 빠르게,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알 수 있다. 주인의 뜻과 마음의 소원을 간파했을 때 이 즉각적 행동은 다윗의 나라가 튼튼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준다.
우리는 주님의 나라를 섬기기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다. 제자라고 불리워지기도 하고 크리스챤이라 불리워지기도 하지만 우리의 행동이 어떠한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주님의 뜻과 소원이 들려질 때, 주님의 말씀이 귓전에 들려질 때 우리는 머뭇거리는가?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일어서 발을 내딛는가? 지체하는 자는 기회를 놓치고 머뭇거리는 자는 기회를 도모할 수 없다.
마8: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주님께 말씀 드린다.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그러자 마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참된 제자의 모습도 참된 용사의 모습과도 같다. 핑계, 변명, 뒤로 미룸에 서성이지 않는다. 지체하지 않는 즉각적 행동으로 따르라는 말씀 앞에 나서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용사요, 그리스도인의 참된 군사다.
2. 장애물을 돌파하는 감투(敢鬪)적 행동 (삼하23:16)
삼하23:16을 보라. 세 용사는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목적한대로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돌아왔다. 참으로 용감 무쌍한 세 사람이다. 블레셋 사람의 진영, 적진을 뚫고 가야 우물에 도착하는데 적진의 장애물을 개의치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용감 무쌍할 수 있는가? 그들을 가로 막는 장애물을 부수고 나아간다. 다윗의 충성된 세 사람은 거칠 것이 없는 용사다.
사람들은 용기 백 배 하듯 나아가다가도 물질의 장애, 기술의 장애, 여론의 장애, 사람의 장애에 부딪히면 그만 둔다. 충성이란 힘들면 그만 두고 길이 막히면 그만 두는 것이 아니다. 죽기까지 지체지 않고 섬기는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우리 제자들에겐 이 장애물을 돌파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큰 산, 작은 산이 가로 막혀 있어도 지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산을 들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의 용기로 가서 부딪힌다. 삶이란 감투적 행동이 없으면 변화도, 성취도, 보람도 없다.
3. 목숨을 걸고 목표에 집중하는 행동 (삼하23:17)
세 사람은 다윗에게로 우물 물을 가지고 왔다. 성문 곁 우물 물을 마시고 싶어하던 다윗은 그 우물 물을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며 말한다. 삼하23:17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다윗은 이 세 사람의 행동을 피 흘리는 행동으로, 목숨을 걸고 떠온 우물 물을 세 사람의 피라고 말한다. 다윗 왕은 세 사람의 목숨의 가치에 관점을 두고 있다. 어찌 목숨을 걸고 길러온 물을 마실 수 있는가? 피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 마실 수 없다고 선을 긋는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우물 물을 마시기 원한 다윗 왕의 뜻에 관심을 두고 있다.우물 물의 가치가 아니라 피를 흘리고 목숨을 걸어도 좋은 다윗의 인품과 그 마음에 자신들의 삶을 바치고 있다. 우리는 우물 물을 길러 간 세 사람의 목숨이 더 귀한 것을 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우물 물이 관심인 것 같으나 그 물을 마시기 원하는 다윗 왕의 소원에 초점을 맞추고 목숨을 걸고서라도 목표에 집중한 것이다. 이런 행동이란 무모한 것 같으나 사랑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충성과 희생과 섬김을 가져온다.
2005년 시사 주간지 타임에서 우아하게 늙어가는 미국인 10명을 정했다. 그 중 한 명이 샌드라 데이 오코너다. 그는 미국 연방 대법원 대법관으로 사법 역사상 최초 여성 대법관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이 종신력의 자리에서 2006년 스스로 물러난다. 왜 그랬는가? 그의 남편이 17년째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있기에 간호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의 남편 존 오코너가 요양원에서 치료 중 아내를 잘 기억하지 못하고 병을 치료받는 케야라는 할머니와 사랑에 빠졌다. 남편이 케야의 손을 잡고 연애를 한다. 그런데 샌드라 데이 오코너는 오히려 기뻐한다. 입원 초기에 자살만 생각하던 남편이 이 여인으로 인해 안정을 찾았기 때문이다. 55년간 살아온 남편에 대하여 이 여인은 사랑하기에 목숨을 걸고 시간을 드리고 도리어 그것을 기뻐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걸고 주의 나라의 목표에 집중하는 것은 주님이 나의 주가 되시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이이기 때문이다. 때론 주님이 내게 침묵하고 계시고 다른 사람만 사랑하는 것 같아도 우리는 이미 사랑을 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주님을 위해 후회 없이 목숨을 걸 수 있다.
마10:38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눅9:23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서도 우리 제자들에겐 다윗의 세 사람 같은 행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목표에 집중하는 행동, 거기에 무한 발전이 있고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 우리 교회의 삼행시, 오목천은 오직 예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천국 일하는 교회이다. 진정한 예수의 용사가 되려면 오늘 다윗의 세 사람의 용사의 모습이 모델이 되어야 하다. 목숨을 건 사람은 일을 해내고야만다. 하나님이 감동하기 때문이다. 사명이란 자기의 하늘 일에 대해 목숨을 걸어도 좋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명도 아니고 참된 삶도 아니다. 세 사람은 다윗을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우리도 주를 위해 목숨을 걸자. 그것이 사명자의 삶이다.
이관용 시인은 「목숨을 걸고」란 시를 썼다.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시인의 언어에도 목숨을 걸 때 진짜가 된다고 한다. 진짜 교인은 주님에게 목숨을 걸어야 한다. 열 번 돌이켜 보아도 주님의 나라와 교회엔 목숨을 걸어도 되는 곳이다. 영원한 것을 향한 투자이기 때문이다. 짐 엘리엇, 그는 아쿠아족, 즉 식인종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다가 죽었다. 그의 메모장에는 영원한 것을 위한 투자를 비웃지 말라고 하였다.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거기서 교수직을 버리고 선교에 목숨을 드린 그의 삶, 진짜가 되었다. 우리 모두가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마침내 목숨도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은 주님을 체험해야 한다. 인격적 대면을 통해 주의 사랑이 마음에 부어져야 한다. 즉 성령이 오시면 주님의 마음을 알고 사랑을 알고 주님과 공감된다. 주의 영이 임하면 하나님의 깊은 사정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행동하는 크리스챤, 감투적인 크리스챤, 목숨을 거는 강한 용사, 강한 크리스챤으로 서게 된다.
무엇이 우리를 감동케 하는가?
송기성목사 / 삼하 23:13-17
며칠 전에 시각장애인 남성그룹 ‘더 블라인드’(The Blind) 멤버 4명에 관한 프로그램이 방영되었습니다. 그들의 악기 연주와 노래 실력은 아주 탁월한 것으로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은 소리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노래라고 했습니다. 음악 활동을 하면서 어느 때 가장 보람 있었느냐는 MC의 물음에 그들은 어느 사람이 자살을 할 생각이었는데 그들의 모습을 보고 노래를 들은 후 열심히 살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라고 대답했습니다.그들의 세상에 희망을 주는 노래는 곧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노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김국환, 이현학, 정명수, 김지호, 세상에 희망을 주는 시각장애인들의 표정은 밝은 미소로 가득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감동케 하는가? 우리를 감동케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무슨 일로, 누군가로부터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감동을 주는 사람의 행복은 더 크리라고 생각합니다. 감동을 주고, 감동을 받는 사람들의 행복을 우리는 사무엘하23:13~17에 기록된 다윗과 세 용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더욱 실감케 됩니다. 그들은 그 나라와 민족에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감동을 끼친 것은 결코 자기 명예를 위해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그들이 한 일은 아주 명예로운 삶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도 감동을 받을 뿐만 아니라 감동을 주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1. 일사각오의 희생적 충성이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할 때였습니다. 그의 고향 베들레헴은 블레셋의 점령 하에 있었습니다. 아둘람 굴에 피신해 있던 다윗은 그의 고향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 물을 소원하여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삼하23:15)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습니다.
다윗은 결코 세 용사를 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베들레헴 우물 물을 길어 오라고 명령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우물 물을 사모하는 그의 소원을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세 용사가 다윗의 소원을 만족케 해주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놓고 충성하였습니다. 사실 세 사람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돌파하고 지나간다는 것은 목숨을 내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나섰으며 헌신적으로 희생을 무릅쓰고 충성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다윗을 크게 감동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삶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일사각오의 희생적 충성,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를 희생하는 충성이 없으면 감동을 줄 수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감동케 해드리고, 사람을 감동케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일사각오의 희생적 충성이 있습니다. 일사각오의 희생적 충성으로 발 벗고 나서는 사람들은 블레셋 군대와 같은 장애와 장벽을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난공불락의 장애와 장벽을 돌파하고 지나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뜻한바 목적을 달성하는 줄 믿습니다.
2014년 8월 9일 미국 미조리주 퍼거슨시에서 흑인청년 마이클 브라운(18)군이 백인 경관에게 사살되면서 큰 소요가 촉발되었습니다. 이 소요는 인종차별에 대한 폭동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25일 4800여명이 모인 마이클 브라운의 교회 장례식을 기점으로 소요와 폭동이 잠잠해졌습니다. 이처럼 상황이 크게 반전된 것은 연방정부의 적극적인 개입도 있었지만 “차분해지자”는 희생자 가족의 호소가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숨진 브라운의 父 마이클 브라운 시니어는 장례식 전날 “내가 원하는 것은 평화 뿐”이라며 “그것이 내가 요청하는 전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25일 CNN방송 인터뷰에서 “아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은 폭력”이라며 “폭력은 아들의 영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 그런 짓을 하려면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당신의 아이를 한 번 더 안아주라”고 말했습니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의 제목을 “자녀의 억울한 죽음...‘깃발’대신 ‘국가’를 택하는 美부모들”이라고 했습니다. 자녀의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때 깃발을 들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이용해 깃발을 드는 단체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깃발을 들고 소요와 폭력을 일으킨다 해도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영혼을 행복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폭력은 그 죽음을 헛되게 하고. 이름을 욕되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깃발 대신에 국가를 선택하는 부모는 그 자녀의 억울한 죽음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고, 그 이름을 결코 욕되게 하지도 않으며, 그 영혼을 결코 불행하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이 시대에 우리 모두에게도 절실히 요청되는 일사각오의 헌신적인 충성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케 하는 건설적인 처사인 줄 믿습니다.
사도행전 20:24에 사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자기 생명조차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우리를 감동케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일사각오의 희생적인 충성으로 달려가는 사람은 결국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기까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경건한 사람의 죽음을 귀중히 보시며(시116:15), 그런 사람의 이름을 보배롭고 존귀하게 시인해 주실(계3:5) 줄 믿습니다.
2. 멸사봉공의 신앙적 모범이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다윗은 그가 말한 대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소원 했습니다. 그것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의 향수였으며 굴 속 생활로 인한 그의 갈증의 호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블레셋 군대를 반드시 물리치고자 하는 그의 집념의 표시였습니다. 사실 다윗이 물을 마시고 싶어 했던 것은 분명했지만, 세 용사가 물을 길어 오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세용사가 물을 길어 왔을 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을 크게 받았던 것입니다.
적진을 감히 돌파하고 지나가서 물을 길어 온 세 용사의 헌신적인 충성으로 다윗은 그가 그토록 소원했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 물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그 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부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하들의 생명을 위협케 한 자신의 경솔한 언행을 반성하면서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하고 스스로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율법에 따른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피를 먹지 말라”(레17:12)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희생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계12:11 ; 시36:9)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세 용사의 생명의 댓가인 ‘물’을 ‘피’로 간주하여 하나님께 전제물로 바쳤던 것입니다. 모든 희생과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는 멸사봉공의 신앙적 모범,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멸사봉공의 신앙적 모범이 없으면 감동을 줄 수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감동케 해드리고, 사람을 감동케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멸사봉공의 신앙적 모범이 있습니다. 멸사봉공의 신앙적 모범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공동체에 덕을 세우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들의 희생적 충성을 헛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가 그토록 소원하여 얻은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 부어 드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예배를 드리며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끼치는 신앙의 귀감이 되는 줄 믿습니다.
2014년 4월 6월 윤승주(20)일병이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된 지 35일 만에 선임병들의 가혹행위와 집단 폭행으로 그 귀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들의 사고 소식을 접한 날을 어머니 안모(58)씨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4월 6일 네가 의식을 잃고 이송되고 있다는 비보를 듣고도 병원으로 달려가는 차 안에서 이런 생각을 했단다. 훈련소 퇴소 후 한번도 만나지 못한 네가 얼마나 가족이 보고 싶었으면, 하나님이 이렇게라도 네 얼굴을 보여 주시려고 한 게 아닌가.” 그러나 한걸음에 달려간 병원 응급실에는 ‘너무나 참혹한 모습으로 힘없이 누운’ 아들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모습에 안씨는 “하늘이 무너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후 하루하루를 고통과 피눈물로 살아간다는 윤 일병의 어머니는 지난 4월 8일 국방부 앞에서 열린 추모제에 참석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눈물로 흐느끼며 읽어 내려갔습니다. 한 손에 손수건을 들고 안씨는 “늘 부족했던 부모에게 불평 한번 않고, 장학금을 받고, 방학이면 개학 하루 전까지 아르바이트 해서 번 돈으로 부모님 용돈까지 챙겨 주던 속 깊은 아들”이라면서 편지의 끝을 이렇게 마무리 지었습니다.
“네가 한 알의 밀알로 이 땅에 썩어져 널 통해, 너의 죽음을 통해 다시는 너와 같은 제2, 제3의 윤 일병이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한다. 남은 생을 너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고 했습니다. 고통과 비통 속에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가해자들을 증오하지 않고 저주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을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로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을 통해 제2, 제3의 윤 일병이 나오지 않도록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믿음으로 기대하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이 시대에 우리 모두에게도 절실히 요청되는 멸사봉공의 신앙적인 모범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케 하는 긍정적인 처신인 줄 믿습니다.
요한복음 12:24~25에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히12:2),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빌2:8) 예수님이 우리를 감동케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멸사봉공의 신앙적인 모범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결국 많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요15:8)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신실한 사람의 영혼을 영생하도록 보전해 주시며, 그런 사람의 기도를 이루어 주시고(요15:7) 주님의 기쁨이 그 사람 안에 있어 그의 기쁨도 충만하게 하여(요15:11)주실 줄 믿습니다.
최근에 상영 중인 영화 ‘명량’이 한국 영화사상 흥행 기록을 다 깨뜨렸습니다. 아마 2천만 명 가량이 관람한 것 같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내용으로 하는 영화가 큰 호응을 받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이순신 장군을 비롯해서 당시의 사람들이 오늘의 우리들에게 눈물겹도록 감동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감동케 하는가? 어떤 사람이 우리를 감동케 하는가? 나는 무엇으로 감동을 끼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엽전 두 개를 연보로 드리는 것을 보셨을 때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을 감동케 해 드리며, 사람들을 감동케 하는 사람의 생애는 아름답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사각오의 희생적 충성과 멸사봉공의 신앙적 모범으로 감동을 주고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다윗의 사람들, 왕을 섬기는 사람
이윤재목사 / 삼하 23:13-17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셋째주일입니다. 해마다 이때쯤 되면 베들레헴에 커다란 촛대 대섯 개가 세워지고 매주 한 주씩 불을 붙입니다(1. 사진). 4주동안 그렇게 하고 다섯째 주, 성탄절이 되면 그 촛대를 들고 시내를 행진합니다. 그러면 세계에서 온 수많은 순례객들이 찬양을 부르며 그 길을 함께 따릅니다. 이것은 어둔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선포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전 10시에 교회에 다시 모여 성탄축하 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가 전 세계로 방영됩니다.
올해도 우리 사회에 많은 촛불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지난 금요일 국회에서 대통령의 탄핵에 대한 결정이 났습니다. 그 결정이 어떻든, 그것을 보는 입장과 해석이 어떻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나라가 다시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오셨던 2천년전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마2:2을 보시겠습니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멀리 지금의 이란, 이라크에서 온 동방박사들이 왕을 찾는 장면입니다. “유대인의 왕이 어디 계시냐 우리가 경배하고자 하노라”. 동방박사들의 이 소원은 2천전이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같은 소원으로 있습니다. 2천년전에는 로마가 지배하는 시대, 헤롯이라는 폭군이 다스리는 시대였습니다. 왕이 있었으나 제대로 된 왕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제대로 된 왕, 백성을 섬기고 나라를 위기에서 건질 좋은 왕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온 나라가 “이대로는 안된다“, ”이 나라가 새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모시면 어떨까? 어둠속에 오신 참 빛, 죽음의 땅에 오신 생명의 주님이 우리의 왕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왕이신 그 분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주제를 생각하면서 저는 지금까지 보았던 다윗을 종합하면서 새로운 각도에서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다윗은 옛날 이스라엘 시대에 살았던 하나의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앞으로 오신 유대인의 왕, 예수님의 표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뿌리가 다윗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다윗이 가진 왕의 위치와 사역을 계승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예수님을 상징하는 왕으로 본다면 그와 함께 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들이 될 것입니다. 사무엘상하에 걸친 그 긴 다윗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그 시대의 역사적 인물이면서 또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들이기도 합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동안 사무엘상하를 읽으며 방대한 다윗의 사람들의 도표를 만들었습니다(2. 도표).
도표를 보십니까? 그림의 한 가운데 다윗왕이 있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왕관을 쓰고 한편으로는 제사장의 모자를 쓰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두 모습은 다윗의 두 모습, 즉 왕으로 백성을 통치하고 종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입니다. 자, 다윗왕을 둘러싼 사람들을 한번 보시죠. (1) 먼저 태어난 가족이 있습니다. 아버지 이새와 7형제들입니다. (2) 그리고 그 아내와 자녀들입니다. 다윗은 적어도 8명의 아내가 있었고 많은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아비가일같이 좋은 아내가 있었는가 하면 미갈같이 나쁜 아내도 있었습니다. 자녀들도 압살롬같은 반란을 일으킨 아들이 있었는가 하면 솔로몬은 지혜로운 아들도 있었습니다. (3) 오른 쪽으로 오면 제사장들이 있고 (4) 사울의 가족이 있습니다. 사울의 가족은 다윗의 일생 가장 많은 관계를 맺고 산 사람들입니다. 사울왕, 그 아들이며 친구인 요나단, 사울왕조의 마지막 왕인 이스보셋, 그리고 다윗이 용서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 그를 키운 마길, 그를 도운 시바가 있습니다. (5) 다윗을 괴롭힌 것은 사울만이 아니었습니다. 골리앗이 있고 불레셋, 아말렉, 암몬 족속이 있었습니다.
(6) 평생 전쟁속에 살면서 군인들과 맺은 인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밧세바의 남편이며 충직한 군인이었던 우리아, 사울의 장수 아브넬, 다윗의 막장 요압, 그의 두 동생 아비새, 아사헬이 있습니다. (7) 그러나 다윗의 일생에서 잊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진 백성들을 우리는 잊을 수 없습니다. 법궤 때문에 죽은 웃사, 법궤 때문에 복을 받은 오벧에돔,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 다윗을 배반한 아히도벨, 충성스러운 잇대, 후새, 후덕한 바르실래, 성전 부지를 판 아라우나, 이들은 모두 다윗과 깊은 관계로 얽혀 있습니다. (8) 마지막으로 고난의 시대, 다윗을 도왔던 수많은 다윗의 용사들이 있습니다. 모두 세 번 소개되는 데 사무엘하에 두 번, 역대기에 한번, 실명과 무명으로 수백 명이 나옵니다. 이들은 모두 다윗 시대에 살았던 실재 인물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향해 서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분명 이들중의 어떤 사람이거나 몇 사람을 포개놓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분명 다윗에게 충성했거나 베반했거나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모습은 성탄을 맞아 예수님 왕앞에 선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자, 성탄을 앞두고 우리는 예수님에게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다윗을 대적한 사람들입니다.
먼저 우리는 다윗을 대적했던 사람들을 보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너무 자주 주님을 배반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대적했던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골리앗입니다. 골리앗은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힘이 장사인 사람입니다. 삼상17:5-7에 나타난 골리앗의 모습입니다.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 갑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며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 요즘 크기로 그의 키를 재면 2미터 90센티, 갑옷이 90킬로, 몸무게까지 합치면 약 300킬로가 나가는 거구였습니다. 이 사람이 주야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삼상17:16입니다. “그 불레셋 사람이 사십 일을 조석으로 나와서 몸을 나타내었더라”. 무려 40일간이나 골리앗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소리질렀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삼상17:24,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사람들이 두려워 떨었고 도망가기 바빳습니다.
우리도 골리앗입니다. 골리앗으로 상징된 우리는 힘을 추구하고 힘을 얻기 위해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교회역사에서 우리는 힘으로 예수님을 훼손시킨 많은 실수들을 봅니다. 중세시대의 교황권이 대표적입니다. 자신들은 썩을대로 썩었으면서 자신들의 종교적 권력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힘들게 했습니까? 그런데 그 힘의 종교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수되었습니다. 오늘날의 힘은 돈, 성공, 세속주의, 쾌락, 교권, 대형화, 그리고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에 들어와 왕이신 예수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힘이 필요없는 것은 아니지만 힘이 너무 많아 문제입니다. 구약에 “보아즈”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의 뜻이 “보”, “안에”, “아즈”, “힘”, “안에 있는 힘”입니다. 힘이 있었으나 힘을 안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 힘으로 가난한 나오미와 룻을 살리고 그 뿌리에서 다윗이 나왔습니다. 가장 큰 힘은 우리 안에 둔 힘입니다. 가장 위대한 힘은 우리를 십자가에 못박는 힘입니다. 예수님은 힘이 있었으나 쓰지 않은 힘없는 전능자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스스로 십자가에 죽으신 분, 예수님이 보여주신 힘의 비밀은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은 힘이 가장 큰 힘이라는 것입니다. 힘을 함부로 쓰다가 망한 사람이 사울이고, 압살롬이고, 요압입니다. 사울은 왕으로서 권력을 휘두르다가 불레셋에게 죽고, 압살롬은 힘으로 반란을 일으키다가 나무에 걸려 죽고, 요압은 힘으로 정적을 죽이다가 솔로몬에게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최고의 권능자입니다. 우리는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해야 할 반역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성탄절에 우리의 모든 왕관을 벗어던지며 예수님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아멘,
우리는 또한 미갈입니다. 미갈은 사울의 둘째 딸로서 아버지에 의해 정략적으로 다윗과 결혼했습니다. 그가 젊고 용감한 다윗에게 남성적인 매력을 느낀 것은 맞지만 사랑에는 감정만이 아니라 믿음과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그는 몰랐습니다. 그는 다윗이 법궤를 메고 덩실 덩실 춤을 추며 오는 것을 보고 왕이 체통머리를 잃었다고 비난했습니다. 미갈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신앙의 유형에 속합니다. 미갈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보다는 하나님앞에서의 나의 위신을 더 중시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앞에 겸손하지 않았고 하나님앞에서 자기를 낮추지도 않았습니다. 믿음과 헌신이 없으면 우리는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이 됩니다. 다윗의 아내라고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처럼 믿는다고 다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 성탄절에 내 믿음을 한번 점검해 봐야 합니다. 나는 정말 믿는 사람인가?
우리는 또한 시므이입니다. 시므이는 다윗의 신하로서 평소에는 다윗의 은혜로 살다가 다윗이 가장 어려울 때 다윗을 향해 비난과 저주를 퍼부은 사람입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황망하게 도망하는 데 시므이가 나타나서 다윗을 저주합니다. 삼하16:7-8입니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거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아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시므미의 비난은 우리가 남을 비난할 때 보이는 모든 나쁜 요소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시므이는 다윗이 잘한 것은 말하지 않고 잘못한 것만 말합니다. 비난은 항상 잘못한 것만 말합니다. 둘째. 사실이 아닌 것을 왜곡하여 말합니다. 다윗이 사울의 피를 흘린 것이 아니라 사울이 다윗의 피를 흘리게 한 것입니다. 사악한 자는 다윗이 아니라 사울이었습니다. 셋째는 공개적으로 비난합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모든 신하와 함께 있을 때 그를 비난했습니다. 그에게는 최소한 인간적 예의도 없었고 공동체적 질서도 없었습니다. 넷째. 다윗이 가장 어려울 때 비난했습니다. 지금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황망하게 피신하는 데 그 아픈 아버지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겁할 뿐 아니라 은혜를 배신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에 대해 세 가지로 대응합니다. 첫째 변명하지 않고 침묵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둘째 그의 비난과 저주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습니다. 삼하16:11, ”여호아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에게 저주하도록 버려두라“.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셋째 그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억울한 사정을 아시옵소서“. 그 결과 시므이는 솔로몬에게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다윗의 은혜를 입은 신하였음에도 다윗이 가장 어려울 때 다윗을 힘들게 한 시므이는 또한 예수님앞에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우리가 바로 다윗을 죽이려고 평생을 쫓아다녔던 사울입니다. 우리가 바로 성전에 머물렀지만 다윗을 고발하여 수백명의 제사장을 죽게 한 도엑입니다. 우리가 바로 다윗의 신하였다가 하루 아침에 압살롬편에 선 배반자 아히도벨입니다. 우리가 바로 다윗의 은혜를 받아야 겨우 사는 절뚝발이 므비보셋입니다. 우리가 바로 모든 것이 힘으로 된다고 믿고 힘읗 휘두르는 골리앗입니다. 우리가 바로 믿음없는 미갈이요, 우리가 바로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내 주 예수 여전히 날 부르사 그 참되신 사랑을 베푸시나니 내 형제여 주님을 곧 따르라. 주 널 위해 비네. 주 널 위해 비네. 주 널 위해 비네. 항상 비시네“. 대림절에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에게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다윗을 대적한 사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를 위해 충성했던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 첫 번째 사람이 요나단이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원수인 사울의 아들이 아닙니까? 다윗과 요나단은 물과 기름,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잘되면 아버지의 왕권이 흔들리고 요나단이 잘되면 사울이 강해질 것입니다. 그 원수같은 관계가 아름다운 우정으로 하나되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이용가치”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라 “존재가치” 때문에 사랑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친구라고 부릅니다. 요15:15,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기도는 예수님과의 우정의 대화입니다. “죄짐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구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아비가일은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임을 가르쳐 줍니다. 아비가일은 어리석은 남편 나발로 인해 온 가족이 죽게 되었을 때 자신이 죄를 대신 고백함으로 남편을 살리고 나아가서 다윗까지 살립니다. 삼상25:24, “내 주여 원하건데 이 죄악을 곧 내게로 돌리시고”. 아비가일은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예수님은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사랑과 은혜를 회복할 것을 가르칩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깁니다”. “용서는 은혜를 낳습니다”. 그리고 은혜는 모든 것을 이깁니다.
다윗에게 충성했던 사람중에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바르실래입니다. 모두가 다 시세를 따라 압살롬을 좇을 때 바르실래는 다윗을 사랑하여 공개적으로 음식을 가지고 다윗에게 나왔습니다. 삼하17:28-29,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볷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볽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당시 바르실래는 나이가 80,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쟁중에 온갖 정성을 다해 음식을 준비해 다윗과 그 신하들을 공궤합니다. 이것도 대단하지만 더 대단한 것이 있습니다. 전쟁이 그치고 다윗이 그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고자 할 때 겸손히 사양하며 자기 고향에 남겠다고 합니다. 삼하20:34, “바르실래가 왕께 아뢰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위기의 시대에 정성껏 왕을 공궤하고 보상받는 것은 사양한 바르실래는 후덕하고 겸손한 지도자상을 보여줍니다. 자기가 할 일은 최선을 다해 하고 마지막에는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모습을 지도자, 우리는 이러한 지도자를 보고 싶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의 우정의 관계요, 아비가일과 다윗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라면, 바르실래와 다윗의 관계는 헌신의 관계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세 가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 우정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임금, 헌신의 관계입니다. 아멘.
그런데 다윗의 이야기에서 다윗이 가장 잊지 못하는 충성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세 사람의 무명용사 이야기입니다. 때는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아둘람굴로 피할 때입니다. 사울로 인해 박해받은 사람들이 약 400명 다윗과 거기 사는 데 어느날 갑자기 다윗이 심한 갈증에 사로잡힙니다. 너무 너무 목이 말라 견딜 수 없는 데 갑자기 베들레헴 우물이 생각납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출신이고 그곳에서 양을 치다가 사무엘의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곳의 지리를 잘 압니다. 그런데 그곳에 시원한 우물이 있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문제는 아둘람굴에서 베들레헴까지는 멀고 험한 유다산악지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신히 넘었어도 거기는 불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불레셋 사람은 생긴 것도 다르고 의복도 달라서 눈에 확 띱니다. 그곳에 물뜨러 갔다가 잘못해서 잡히면 그 병사들뿐 아니라 다윗도 위험합니다. 그런데 그때 세 용사가 자원합니다. “왕이여, 저희가 가겟습니다”. 다윗이 쳐다보니 이름도 모르는 병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명한 장군도 아니고 다윗의 참모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었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무명의 병사들이 그 일을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물었습니다. “그대들이 정말 다녀오겠소?”. 이때 다윗의 심정은 어땧을까요? 아마 이봉창에게 폭탄 두 개를 맡겨서 상해 홍구 공원으로 떠나 보내는 김구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그때 이봉창의 나이 31살, 꽃다운 나이에 죽으러 가는 이봉창의 뒷 모습을 보는 김구의 마음, 그것이 다윗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무명용사들이 천신만고 끝에 베들레헴에서 물을 길어 옵니다. 그리고 온 몸이 땀에 젖어 말합니다. “왕이시여, 다녀왔습니다. 여기 베들레헴 물입니다”. 다윗이 그 물을 보았을 때 갑자기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아, 나를 위해 이렇게 충성하다니”. 지금 다윗이 어떤 형편입니까? 사울에게 쫓겨다니는 데 미래에 대해 좋은 기대가 있는 때입니까? 그렇게 충성한다고 보상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장군들, 참모들, 가족들도 다 안하는 일을 왜 졸병인 우리가 해야 합니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다윗은 무명용사들이 떠온 물을 보면서 한참을 울다가 말했습니다. “아, 내가 잘못했소. 나 한 사람위해 이렇게 그대들을 힘들게 하다니. 내가 잘못했소. 그대들이 떠온 것은 물이 아니라 피요. 내 어찌 그대들의 피를 마시겠오? 이것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하오”. 그리고 그 물을 제사장에게 주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전제로 부어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성경에 이 이야기가 두 번 나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사무엘하23장에 나오고 대상11:15-19에도 또 한번 나옵니다. 글자 한 자 틀림없이 똑같이 나옵니다. 구약에 같은 이야기가 반복된 것은 이것이 유일합니다. 왜 이 이야기가 두 번이나 쓰여졌을까요? 조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구약에는 두 종류의 역사서가 있습니다.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이것을 신명기역사라고 합니다. 역사의 순서대로 썻습니다. 또 하나가 역대기인데 이것은 흣날 포로시대를 거치면서 다윗 중심으로 역사를 재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무엘하와 역대상은 저자도, 시대도, 사관도 다릅니다. 그 다른 역사에 오로지 이 이야기만 두 번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가 봐도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다윗을 위해 목숨걸고 충성한 무명용사들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고 두고 귀감이 됩니다. 역사를 이렇게 본 사람에게도 감동이고 저렇게 본 사람에게도 귀감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구약에 두 번 나옵니다.
이 이야기의 중요성은 이 용사들이 무명이라는 것입니다. 이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 이름 내려고 난리 법석을 떠는 때에 이들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목숨걸고 충성했지만 무엇인가 보상을 받은 것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입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를 가도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습니다. 미국 워싱톤 알링톤 국립묘지에 가면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습니다(2.사진). 케네디대통령등 유명한 대통령, 위인들이 무덤보다 훨씬 좋은 위치해 있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는 병사들이 여기 명예와 영광가운데 누어 있다”. 그리고 24시간 지킵니다. 이름도 빛도 없이 나라를 위해 희생한 용사들을 기리는 것입니다. 양화진에 가면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습니다(3. 사진). 모두 기가 있습니다. 거기서도 가장 감동적인 이름없이 죽은 선교사들과 그 자녀들입니다. 100여전에 이 나라에 와서 온갑 수고를 다 하다가 이름없이 죽은 사람들, 그들도 하나님만 아는 영광과 명예로 거기 누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한 해동안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왕에게 했던 것처럼 여러분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하셨습니까?
한해동안 우리 교회도 예수님을 위해 충성한 분들이 참 많습니다. 목자로 섬기시는 분중에 지방에서 근무하는 분이 있습니다. 금요일에 할 수 있는 한 일찍 올라와서 금요심야기도회 참여하고 매주 토요일마다 목장모임을 빠지지 않고 인도합니다. 어떤 목자는 남편이 지방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한 주간에 지방에 두 세번 오르락 내리락 히며 목장식구들을 돌봅니다. 남신도, 여신도회장중 웬만한 일은 회비걷지 않고 자신이 헌금해서 운영하는 분도 있습니다. 시니어 대학, 조찬기도회, 여름성경학교 때마다 물질로 헌신하고 몸으로 봉사한 분들이 있습니다. 해외선교때는 아예 병원 문을 닫고 병원 간호사들의 여비까지 지원하며 선교하는 의사들도 있습니다. 어떤 교사들은 토요일 아침 일찍 교회 출근해서 주일 오후까지 봉사하는 교사가 있습니다. 휴가를 안간다고 해서 “왜 휴가 안가요?” 물었더니 “목사님, 저는 교회가 휴가지예요”라고 말해서 제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몇 년 전 제가 미국에 교회들을 탐방했는 데 LA에 있는 유명한 한인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목사님과 약속을 하고 갔는 데 사람은 없고 사무실에 쪽지 하나가 붙어 있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교인 한 분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갔다 오면 1시간 정도 걸리겠습니다. 그때까지 목사님을 안내할 사람이 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한 미국인이 왔는 데 무엇을 하다 나왔는지 머리에 온통 먼지를 뒤집어써 새까맣고 손에는 기름때가 묻고 청바지를 입었습니다. 그 분이 “우리 목사님께서 목사님이 오시면 안내하라고 했습니다.” 하면서 차를 대접하고 과일을 깍습니다. 그리고 돌아갔는 데 1시간쯤 있다가 목사님이 왔습니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불편한 것이 없었느냐 물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미국인 노동자가 차 대접하고 갔다고 했더니 목사님이 웃습니다. “목사님, 그 사람은 노동자가 아니예요. 세계적인 기업 IBM의 부사장예요. 이 사람 한번 만나려면 전 세계 비즈니스맨들이 6개월 전에 약속해야만 하는 데 이 사람이 예수믿고 봉사를 자원해서 우리 교회 관리부장으로 일합니다. 이 사람이 하루 회사에 안 나가면 수백만 달러 손해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은혜받고 봉사를 자청해서 일주일에 한번 꼭 와서 교회봉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아, 참 멋지다”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도 성공했는데 자기의 재능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또 제가 휴스톤에 갔는 데 목사님이 그 교회 비서실장을 소개합니다. “목사님, 이 분이 제 비서실장인데 사실 서울공대 선배님입니다. 이 분이 미국 보잉에서 부사장까지 했는 데 은퇴하고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 하다가 제 비선역할을 자원했습니다. 처음에는 하지 마시라고 말렸는 데 꼭 하고 싶다고 해서 하는 데 너무 잘합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세상에서도 열심히 일해서 성공하고 남은 시간 혹은 은퇴한 후에 교회에서 주님을 위해 봉사한다면 얼마나 멋집니까? 가능하면 우리 교회 사무국, 목양실, 담임목사 비서, 찬양대 기악팀, 솔리스트, 지휘, 자동차 운전, 까페, 모든 직책에서 자원봉사자가 했으면 좋겠습니다. 연말에 때가 되면 “목사님, 새해부터는 이런 일을 자원봉사해 보겠습니다. 저에게 기회를 주세요” 할 분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도 이 대림절에 다윗을 섬겼던 세 사람의 무명용사처럼 주님을 그렇게 섬기기 원합니까? 주남은 누구나 다 쓰시지만 충성된 사람을 쓰시는 것을 믿습니까?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 섬길 우리의 왕이심을 믿습니까? 우리 평생 남은 생에 예수님을 요나단처럼 친구로, 아비가일처럼 사랑하는 자로, 바르실래처럼 헌신으로, 세 무명용사처럼 충성으로 섬기시겠습니까? 시편의 말씀입니다. 시101:6,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특별히 맡은 바 사명을 받은 성도 여러분, 딤전1:12를 기억하십니까?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이 대림절에 다윗처럼 왕이신 주님을 사랑합시다. 왕이신 주님께 충성을 다합시다.
다윗이 드린 고향 예물
이한배목사 / 삼하 23:13-17.
ㅇ 질 문 - 고향에서 제일 생각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
I. 서 론
내일 모래가 추석입니다.
농경문화 속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이, 한해 농사를 지어서 추수를 시작하는 때에, 한 해에 가장 큰 달이 뜨는, 가장 일기가 좋은 8월 보름에 지켜온 절기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우리 민족은 조상신에게, 올해도 농사를 잘 짓게 해 준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이제는 농경문화에서 산업화 문화로 바뀌어서 고향을 떠난 자들이 많은 요즘은 고향을 찾는 “귀성”이 추석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향을 떠나 사는 자들이 많다가 보니, 추석하면 고향을 그리게 됩니다.
흩어졌던 모든 식구들과 고향 친구들이 모이는 고향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추석이 되면 대부분 고향에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추석이 되어도 고향을 잘 찾아가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가지 않습니다.
가지 않는 자들도 있고 가지 못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고향이 없어져서 못 가는 자들도 있고, 고향에 식구들이 없어서 못 가는 자들도 있고, 내 사정이 갈 수 없어서 못 가는 자들도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도 고향에 가지 못하는 자가 나옵니다.
그는 다윗입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의 이야기를 하는 사무엘서의 맨 끝 부분에 나와서 다윗의 역사에 있어서 끝부분에 일어난 사건 같은데, 사실은 매우 초기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 쫓기던 매우 어려울 때 있었던 사건입니다.
①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는 몸이 되어서 고향엘 가지 못합니다.
사울이 왕이 죽이려고 쫓아다닙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지명수배자입니다.
그래서 고향에 갈 수가 없습니다.
② 고향인 베들레헴에, 자기가 죽인 골리앗의 민족의 군대인 블레셋 군대가 진을 치고 있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자기들의 군대장관 골리앗을 죽인 다윗의 고향이 베들레헴인 것을 알고는 다윗을 잡으려고 베들레헴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다윗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곡식을 벨 때”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곡식을 벨 때는 맥추절입니다.
한 해에 첫 수확한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
우리의 추석과 같은 때입니다.
당시 다윗은 지명수배자로 도망을 다니는 신세였기 때문에, 이렇게 추석이 돌아와서 모두들 고향에 모이게 되는 추석이 되자 고향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고향에 갈 수 없습니다.
① 사울 왕이 내린 지명수배 때문에 갈 수 없습니다.
②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들의 대장을 죽였다고 자기를 잡으러 와서 자기 고향에 진을 치고 있기 때문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지금 가나안 땅에서 가장 살기 힘든 유대 광야 아둘람 굴에 있습니다.
사울 왕이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왜만한 곳에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이렇게 최악의 곳에서만 숨어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지금 자기의 처지가 너무나 힘들고 어렵자 다윗은 고향이 더욱 생각이 났습니다.
명절에, 형편이 좋은 자들은, 고향에 못 가도 마음이 그렇게 크기 아프지 않습니다.
그런데 처지가 나빠서 고향에 가지 못하는 자들은, 마음이 매우 아프고, 또한 고향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그러다가보니, 다윗은 고향 베들레헴 성문 곁에 우물물이 더욱 그리웠습니다.
자기는 가장 살기 힘든, 물이 없는 유대 황무지에 있고, 고향 성문 곁 우물에는 시원한 물이 있으니, 어려운 처지에 있는 다윗에게는 그 물이 더욱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도 모르게 이 마음이 입 밖으로 나왔습니다.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샘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
아마도 고향에 가지 못하는 자기의 마음을 하소연 한 것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다윗의 3용사가 들었습니다.
자기 주인의 마음의 소원을 안 이 3용사는 베들레헴으로 달려가서, 성을 지키고 있는 수비대를 물리치고 들어가서 성문 곁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떠다가 다윗에게 바쳤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바로 이 3용사의 용맹과 주인을 위한 충성심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주인을 위해서라면 자기들의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3용사의 충성심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저자는 또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나갑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주제가 첫 번째 주제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그것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 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이 말씀 속에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설교한 “하나님이 사울 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 하여가사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시라 하시더니”라고 한 다윗의 모습이 잘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의 모습이 잘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
II. 본 론
1. 가장 귀한 것을 자기가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물은 그냥 물이 아니였습니다.
① 자기의 3용사가 목숨을 걸고 구해온 것입니다.
이 3용사는 블레셋 군대가 점령하고 있는 베들레헴을 쳐들어가서 그 물을 떠왔습니다.
목숨을 걸고 구해온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까요 ?
목숨을 걸고 번 돈의 십일조를 드릴 수 있을까요 ?
② 가장 갖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그렇게 마시기를 원했던 물입니다.
추석에, 고향에서 가장 생각이 나는 것이였습니다.
이렇게 귀한 것을 내가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까요 ?
③ 다시는 얻지 못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된 후, 가나안 땅을 완전히 차지할 때에는 베들레헴을 다시 차지합니다.
그러나 당시 다윗은 지명수배요, 도망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물을 다시는 마실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그렇게 마시고 싶었던 마지막 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을까요 ?
그런데 다윗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것은 100세 얻은 아들 이삭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지막 아들입니다.
사라는 그 후에 다시 아들을 낳지 못합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까요 ?
이러한 신앙의 자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세입니다.
미국 미시시피 주의 Starkville에 있는 Adaton-Longview Charge 연합감리교회 Bradford Robinson 목사님이 하신 예화입니다.
그 목사님이 전교회에서 목회 할 때 매우 똑똑하고 공부 잘 하는 Patrick이란 손주가 있는 여성 신도가 있었습니다.
그 손주는 대학교에서도 공부를 잘 했습니다.
졸업 당시 그의 성적은 거의 4.0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미국 전역에 대학원에 진학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와 같이 의사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Asbury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신학교에 가자 학교에 교수들이나 주위의 사람들이 너무 안타깝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아들들 중에 가장 공부 잘하는 아들을 주의 종으로 바칠 수 있을까요 ?
의과대학에도 합격한 아들을 신학교에 가라고 할 수 있을까요 ?
하나님께 위대한 인물로 택함을 받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2. 물을 하나님께 부어 드린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다는 믿음을 표현한 것이였습니다.
3용사가 물을 떠왔을 때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렸습니다.
즉 먼저 마시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전부 하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그렇게 마시고 싶어 하던 물이기 때문에 한 모금 마시고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물을 보는 순간 다윗은 감히 물을 입에 대지도 못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부어드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다윗은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사모하는 자기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적진에 들어가 물을 떠온 3용사를 보는 순간 그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① 3용사가 베들레헴에 가서 우물물을 떠온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 때문이였습니다.
아무리 3용사가 날렵하다고 하더라도 적의 수비대를 뚫고 들어가 물을 떠온다는 것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보하심 때문이였습니다.
② 이 3용사를 보는 순간 다윗은, 사울이 왕이 그렇게 자기를 죽이려고 추격하고 있는데, 자기가 살아 있는 것도 전적으로 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③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이 하나님이 자기를 완전하게 지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이 하나님 한 분이면 된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이 물을 마시지 않아도, 이 세상 다할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영원히 하나님이 생명수로 먹이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④ 이것은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께 기름을 부어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큰 아들 에서가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해서 리브가는 둘째 아들 야곱을 친정으로 보냅니다.
리브가는 가는 길에 노자 돈으로 기름 한 병을 줍니다.
그러므로 이 기름 한 병은 야곱에게는 생명과 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벧엘에서 밤에 잘 때에 이 기름병을 끌어안고 잤을 것입니다.
그런데 꿈에 하나님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는 약속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받고, 그 약속에 대한 확신이 생기자, 그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노자 돈 기름병이 그렇게 소중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름병이 자기의 가는 길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한 분이며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창 28:18)
이것은 앞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온전히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을 완전히 믿는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제는 오로지 하나님으로만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예물입니다.
이번 추석 명절에 내가 나왔던 고향에 다녀와 보니, 개나리 보따리 하나 갖고 나왔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풍성하게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그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이제는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나의 가는 인생의 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해 주시는”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믿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오래 계속 되는 COVID19 상황 가운데 고향에 다녀오니, 이제는 이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습니까 ?
그러므로 우리도, 야곱이 생명과 같은 노자 돈인 기름을 하나님께 부어드리며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했던 것과 같이, 다윗이 비록 지금은 물이 없는 유대 광야 중에 가장 나쁜 곳에 있지만 하나님이 생수로 그를 마시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그 귀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가의 물을 다 하나님께 부어드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했던 것과 같이, 여기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이후에도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을 믿고, 내가 목숨과 같이 의지하던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고, 전전으로 하나님만 의지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모든 위대한 작품은 누군가의 희생의 결과라는 것을 깨닫고 성전 건축을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했습니다.
이 귀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유대 광야 아둘람 굴에서 맛 볼 수 있는 것은 3용사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희생 때문이였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통하여 위대한 작품은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Bradford Robinson 목사님이 하신 예화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White Mills, Ky에서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16명이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끝에서 두 번째인 15번째 딸이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은 Kenny라는 아들인데 다운증후군이 있었습니다.
농사를 지면서 간신히 살아가는 집안이였습니다.
그러므로 돈이라고는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13살이 되었을 때 외할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외할머니가 농사를 이어받아서 혼자서 16명의 아이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그런 가정을 꾸려가려니 점점 더 가난해졌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님의 어머니는 생일 선물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엄마보다 몇 살 더 먹은 외삼촌 Coleman이 있었는데, 외할머니를 돕기 위하여 16살에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엄마를 도와 농사일을 하면서 틈만 나면 어디를 가는 것이였습니다.
오빠는 해가 뜨기 전에 나가서 밤 11시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5개월 후에 그 외삼촌이 엄마가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던 전축과 전축 판을 생일 선물로 사다주었습니다.
엄마는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하면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만 위대한 작품을 남길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은 다윗이 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도록 모든 것을 준비하는 것이였습니다.(대상 22:2-5)
“다윗이 가로되 내 아들 솔로몬이 어리고 연약 하고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전은 심이 장려하여 만국에 명성과 영광이 있게 하여야 할지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위하여 준비하리라 하고 죽기 전에 많이 준비하였더라.”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하여 이렇게 많은 것을 준비한 것은 좋은 시절에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내가 환난 중에 준비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대상 22:14)
다윗은 이렇게 어려움 가운데서 아들 솔로몬이 “장려한” 성전을 건축하도록 많은 것을 준비하였습니다.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고향집에 가보니, 부모님들이 어려움 중에도 희생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게 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도 늘 어려움 중에 살아가고 있지만, 후손을 위하여 아름다운 것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장 귀한 것으로
삼하 23장 13~17절 / 류영모목사
□ 만남의 축복
우리 인생은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만남을 갖느냐에 따라서 삶의 내용과 질이 결정됩니다. 좋은 만남은 그들의 삶을 복된 삶이 되게 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만남은 인생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늘 좋은 만남을 주시도록 기도하고는 합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만남의 축복"을 주시기를 기도하곤 합니다. 좋은 선생, 좋은 친구, 좋은 신앙의 선배, 좋은 배우자, 좋은 직장 동료, 좋은 직장 상사...를 만나는 축복을 주옵소서! 이것보다 귀한 축복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출세하고 성공했지만 그로 인해서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 젊은 날의 대부분을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기가 막히는 것은 그의 장인이 군대까지 동원해서 자기를 죽이려고 합니다. 들로 산으로도망 다니면서 수년을 헤매야 했습니다. 붙잡히면 죽임을 당할 것이기에 늘 긴장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힘든 삶이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장래가 없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러한 곤고한 삶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한가지 축복을 주셨습니다. 만남의 축복이었습니다. 도망자의 삶을 살고 있었고 미래가 없어 보이는 삶이었지만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지혜자들"도 있었고, 의리가 있는 "신실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용맹한 장수들"들도 있었습니다. 참 귀한 만남의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 다윗의 간절한 바램과 강한 용사들
오랜 도망 생활 때문에 그는 수년동안 고향에를 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이든 부모님이 계시는 베들레헴은 언제나 그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고향, 수많은 추억들이 서린 고향이었기에 단숨에라도 달려가고 싶은 곳이었고, 꿈에라도 가고 싶은 곳이었지만 오늘 그의 생활은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더더군다나사울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제정신이 아닌 채로 날 뛰고 있을 때, 블레셋이 침공해와서 베들레헴과 그 주변을 점령해 버렸기에 이제 고향 땅은 적군의 진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영영 갈 수 없는 땅이 되었습니다. 손꼽아 보니 고향에 간지가 벌써 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어린 소년기에 고향을 떠났기에 무엇보다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시간이 갈수록 더했습니다. 며칠 후면 구정이어서 그날은 유난히 어머니가 보고 싶었고 고향이 그리웠습니다. 작전 회의를 마치고 다른 장수들은 다 돌아가고, 오른팔과 같은 세 장수들과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고향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윗은 중얼거리듯 그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왜 이렇게 고향 생각이 많이 날까? 오늘은 유난히 늙으신 어머니가 보고 싶네, 그려. 고향마을 앞에 있는 우물의 물이라도 한 모금 먹었으면 한이 없겠어!"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단순한 그리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누다가 세 장수들은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인데, 부르는 소리에 다윗은 눈을 떴습니다. 지난밤 늦게 돌아간 세 장수들이 밤이슬에 젖어서 돌아왔습니다. 그들 손에는 물 한컵이들려 있었습니다. 그 밤, 그들은 그들의 진영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적군의 진지를 뚫고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까지 가서 다윗이 원하던 물을 길어온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요새화 되었고, 블레셋 군대의 총본부(headquarter)가 있던 곳이었기에 경비가 얼마나 삼엄했을 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적진을 뚫고 간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에 물 한 모금 떠오기 위해 세 장수들은 그 일에 그들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저의 스승이기도 한, Columbia 신학대학원의 유명한 구약학 교수인 Walter Brueggemann박사는 그의 "사무엘서 Interpretation 주석"에서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그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용기와 충성심의 모델과 같은 사람들이었다"(They are "the model of courage and loyalty). 그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용기와 충성심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섬길 때, 주의 일을 감당할 때 이렇게 감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섬긴 것입니까? 8-12절에 의하면 성경은 그들이 "강한 용사"였다고소개합니다. "강한 용사!" 그 이미지를 그려보십시오. 얼마나 듬직하며 얼마나 자랑스러운 모습입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일을 감당하는 우리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나의 강한 용사"라고 서슴치 않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그들은 도대체 어떠한 사람이었기에 용사였다고 말합니까? 실버 스텔론과 같이 근육질로 가득찬 몸매를 가졌기 때문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최근 작품성이나 예술성과는 별 상관없이 한국영화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는 "조폭 사모님"에서와 같이 힘으로 밀어 부치는 근력 때문에 강한 용사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출중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겁을 모르는 용감한 사람들이어서도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전투에 나가서 싸움을 잘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남다른 "충성심," 남다른 "사랑함,"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용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앙 생활 하는 데에도 없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좋은 용사가 되어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충성심'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용기'입니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지난주간 저희 장신대에서는 신대원 신입생들을 선발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심층면접과 인성검사를 했습니다. 그들이 기록한 자기 소개서와 신앙고백서 등을 꼼꼼이 읽고 이것 저것을 묻고 확인했습니다. 참 좋은 직장과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온 분들도 있었습니다. 굉장한 비전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틀을 면접하면서 깊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 하나님이 사용하시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분별하여 선발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좋은 학벌과 학위를 가졌다고, 높은 사회적인 지위를 가졌다고, 혹은 돈을 많이 가졌다고 하나님의 좋은 용사가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강한 용사는 얼마나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졌고, 재력을 가졌느냐로 결정되어지지 않습니다. 강한 용사는 얼마나 주님을 뜨겁게사랑하는 사람이냐로 결정됩니다. 강한 용사는 얼마나 간절하게 주님을 섬기느냐로 결정됩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영적 싸움을 하는 용사들"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용사가 되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날마다 계속되는 영적 전투에서 날마다 깨지고, 쫓기고, 두둘겨 맞고, 날마다 얻어터지며, 날마다 KO 패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승리하는 하나님의 용사"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이제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사는 충성스런 용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아직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경험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한다할지라도 그는 하나님 나라 밖에 서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면 그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것입니다. 갓난아이와 같이 영적으로 새롭게 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진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용사들로 성장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연구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며, 예배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렇게 성숙해 가면서 가져야 할 그 다음 단계는 "하나님의 강한 용사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일꾼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진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오늘 하나님 나라와 그 사역을 위해서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몇년전 여름 시카고 외곽에 있는 윌로우크릭교회를 갔더니 넓은 주차장에 안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대해 몇 가지를 물어보면서 알게 된 것은 주차장에서 안내해주는 그분이 명문 시카고 대학의 교수였습니다. 현직 교수들 가운데서 노벨상 수상자가 가장 많은 대학이지요. 시카고대학의 교수는 생업을 위한 직업이고, 오늘 교회를 통해서 주어진 자신의 사명은 주차장에서 주차안내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30도가 넘는 더위와 싸워야 합니다. 한 겨울에 미시간 호수에서부터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맞아야 합니다. 사명을 따라 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사명 감당하는 일은 우리의 땀을 요구합니다. 우리들의 시간을 요구합니다. 우리들의 수고를 요구합니다. 때로는 희생을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눈물을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손해를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사명의 길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충성스런 일꾼들, 헌신된 일꾼들은 그러한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성경은 "강한 용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들을 통해서만 일어납니다.
□ 생명을 건 헌신
이 용감한 이 세 용사들은. 다윗 군대의 30명의 지휘관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용사들로 표현됩니다. 혁혁한 공을 세운 장군들이었습니다. James Bond가 전속으로 출현한 007시리즈 영화를 보신 적이 있습니다. "007 Never Die"라는 제목의 영화도 있습니다만 정말 주인공 007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그는 웬만한 전투와 적진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들러리들은 멀리에서 터진 폭탄 파편에 맞아 죽지만, 주인공은 기관총을 난사하는 그곳을 지나가도 총알이 다 피해갑니다. 혹 총탄에 맞았어도, 적의 손에 붙잡혀도 걱정이 없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해도 걱정이 없습니다. 다 살게 되어 있습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이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인공은 결코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각본이 살게 되어 있기 때문에 빗발치듯 날아오는 총알을 뚫고 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으로 잠입한 세 용사들에게 Happy Ending의 각본이나 보장은 전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왕을 위해서 강한 충성심을 가지고 물길으러 가면 반드시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서, 주의 일하면서 하나님과 Bargain(협상)하려고 합니다. 내가 헌금을 얼마를 하고, 내가 무슨 봉사를 하고, 내가 무슨 일을 하면 하나님은 이만큼 축복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축복을 바라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드리는 헌신, 드리는 봉사가 진짜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다윗의 고향 앞에 있는 우물가에 가서 물을 길러옵니다. 그들이 들고 온 물 한 잔은 단순한 물 잔이 아니었습니다. 왕궁의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생명을 담아온 핏잔이었습니다. 세 용사들은 너무 용감해서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어서 뛰어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무술이 뛰어나서 적진을 뚫고 갈 만큼 용감무쌍한 용사들이었기 때문에 달려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헌신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헌신된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섬기는 사람들이십니까? 하나님의 교회에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Southern Methodist University(SMU)의 Iliff School of Theology라는 신학부가 있는데, 그곳의 유명한 설교학 교수인 Thomas Troeger박사가 그의 설교 가운데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의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공산군이 점령해 들어오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공산군에게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반동분자들을 색출하여 현장에서 처형하기 위해 신문하던 공산군은 사로잡혀온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무엇하던 사람이야? 예수쟁이지?" 그들의 물음에 선뜻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그리스인들에게 주님을 부인할 것을 위협적으로 요구합니다. 함께 붙잡혀온 그의 어린 아들에게까지도 총을 겨누면서 위협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섬겼습니다. 목숨을 걸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그들의 귀한 헌신, 그들의 눈물의 헌신, 그들의 목숨과 자식의 목숨까지도 드리는 피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이 있고, 한국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헌신된 그리스도인"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와 그 복음을 위해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썩어져 없어질 인생과 그 향락을 추구하는 일에 인생의 목적을 두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사역을 위해서 헌신할 마음의 준비가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있는 곳에 교회는 살아납니다. 교회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논리 정연한 '머리꾼'이 아닙니다. 교회의 행정을 잘 알고, 교회 정치를 잘 아는 '이론가'가 아닙니다. 목사의 설교는 어떻고, 교회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정확한 논리와 판단력으로 잣대질하는 '비평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교회에 필요한 것은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어떤 어려움에도, 어떤 손해 앞에서도, 어떤 여건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뛰어가는 "헌신된 믿음의 용사들"이 필요합니다.
□ 헌신된 사람들이 가졌던 확신.
그러나 헌신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다윗의 세 용사들이 헌신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한가지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삼하 18:2-3 말씀을 보십시다. 다윗이 전투를 앞두고 군대를 편성하고 지휘관들을 세우고 작전명령을 내립니다. 어려운 전투에 임하는 군대를 편성하고 나서 다윗은 그도 전투에 나갈 것이라고 병사들을 독려합니다. "나도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그때 전투에 나가는 다윗의 군대가 보인 반응을 보십시오. 왕은 나가시면 안됩니다. 적군이 우리들 절반이 죽어도 주의하지 않지만 그들은 가장 중요한 왕을 죽이려 할 것입니다.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요한 분이시니 성에 남아 계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스려 주시는 것이 우리를 가장 잘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은 왕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가를 알았습니다.
그들이 알았던 것은 그들이 섬기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셔서 사용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다윗을 좋아했지만 하나님이 오늘 그를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다윗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귀한 분이었기에 그분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종이 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대신 내놓고 있습니다. 세 용사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종이 그렇게 간절히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의 샘물 한잔을 마시고 싶어할 때, 그가 귀했기 때문에 그들은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헌신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의 왕 다윗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오늘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사람만이 내게 있는 가장 귀한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소중한 분으로 아는 사람은 헌신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내 생에 있어서 주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가를 아는 사람만이 온전한 헌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주님은 무엇입니까? 다윗을 그들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던 세 용사들은 헌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 더 놀라운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주님은 무엇입니까?
□ 우리가 드려야할 헌신,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
그들이 가져온 것은 그들의 핏잔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것은 그들의 삶 전부를 담은 잔이었습니다. 1999년 미국 장로교회 한인 목회자들을 위한 세미나에 캘리포니아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과 함께 강사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만 그때 그분은 그 세미나를 마치고 돌아가서 새로 건축한 교회에 입당할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교회 건축하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LA의 에너하임 시 한복판에 10.8에이커(약 13,000평)의 대지에, 약 1000만 달러(약 140억)가 넘는 대공사를 마쳤다고 했습니다. 이민교회에서는 1000만 달러라면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에 감동하지는 않았습니다. 2년 전, 1차 헌신 주일에 교인 1000여명이 537만 달러(약 80억원)를 헌금했다고 했습니다. 이민자들의 삶은 아는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를 잘 압니다. 1불, 2불 때문에 언제 총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다운타운 그 위험한 곳에 들어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해서 번 돈을 아까운 줄 모르고 내놓은 헌금이기 때문입니다. 그 헌금은 그들의 생명을 걸고 얻은 핏잔들입니다. 상상을 초월한 헌금이요 헌신이었습니다. 이민 교회를 사역하고 있어서 그 사정을 잘 알고 있었지만 엄청난 헌금을 했다는 것 때문에 감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헌금을 드리고 통성으로 기도하는데, 그러한 생명과 같은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고 난 성도들이 울면서 하나님께 몸부림치면서 그런 기도를 드리더랍니다. "하나님, 더 드리고 싶은데, 드릴 것이 없어요." 그들의 고백을 들으면서 울었습니다. 그 목사님도 울었고, 저도 울었습니다.
그들은 그 성전을 Miracle Complex--"기적의 땅, 기적의 건물"이라고 명명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기적을 이루어 주신 자리라는 뜻에서 였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헌신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고 오늘도 하나님의 기적을 계속하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기적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기적을 기대한다고 해서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적의 삶을 살는 사람들 속에 오늘도 하나님은 기적을 계속해서 일으키십니다. 올 한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시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실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십시오.
용사들이 핏잔을 가져왔을 때 다윗을 그것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한 소중한 헌신을 누가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을 하나님께 부어 드립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헌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로 드립니다. 그래서 다윗과 하나님이 만남의 축복을 주셔서 만나게 하신 세 용사들의 영광스런 예배가 시작됩니다. 그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장소는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아름다운 곳도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운 다윗의 궁궐에서 드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굉장한 예물을 드렸던 희생 제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새벽, 다윗과 세용사가 아둘람 굴 앞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드렸던 예배는 최고의 예배였습니다. 그들이 드렸던 것은 물 한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피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땀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내놓았던 거룩한 희생이었습니다. 그 핏잔을 아무도 받기를 거절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 올려드립니다. 울면서 예배합니다. 감격하면서 예배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되는대로 나오지 마십시오. 아무렇게 드리지 마십시오. 최고의 것을 드리십시오. 생명의 핏잔을 부어 하나님께 드리듯, 가장 귀한 것을 내려놓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올 한해 가장 좋은 예배를 드리는 좋은 예배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해보십시오. 오늘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충성스런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헌신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기적을 원하십니까? 오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 더 드리고 싶은데 더 드릴 것이 없어요!" 그 고백을 가지고 나아와 생명의 잔을 드리는 예배자들, 한 주간 직장에서, 가정에서,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 목숨을 내걸고 믿음으로 달려간 사람들이 핏잔을 주님께 부어드리며 예배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좋은 예배자들이 있을 때, 그곳에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기적들, 예배의 축복들을 허락하십니다.
영국의 육상 팀이 1924년 LA 올림픽에 참가했습니다. 100m 경주에서 유력한 우승후보인 '에릭 리델'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오면서, 자기의 경기 일정이 주일로 잡혀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미국에 도착해서 깊은 생각 끝에 그는 코치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저는 주일에는 달리지 않습니다." 감독이, 대표팀 단장이, 심지어는 영국에서 황태자까지 찾아와서 설득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경기가 있던 그 시간 어느 교회에 참석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며칠후 400m 경주가 있었습니다. 출전 예상자였던 친구가 자기는 도무지 우승할 가능성이 없는 것을 잘 알았기에 그것을 에릭에게 양보합니다. 그는 단거리 선수이지 중단거리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단거리 선수가 금메달을 딸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신 출전했습니다. 그는 출발선에 엎드려 신호를 기다리면서 그렇게 나직히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달린다. 내가 달리고 달릴 때, 하나님은 나를 더 빠르게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해주신다." 그는 한번도 선수로 출전해 보았던 적이 없는 400m 허들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합니다. 에릭 리델의 이 이야기가 "The Chariot of Fire"(불수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81년도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습니다.
지옥과 같은 혹독한 훈련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출전해서 금메달을 딸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선수들에게는 거의 일생에 한번 올까 말까한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금메달의 영예도, 사람들의 박수 갈채도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헌신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주님을 위해서 포기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을 위해서 바칩니다. 하나님은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올 한해가 가장 귀한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셔서 하나님의 기적으로 넘치시는 한해가 되시기를 빕니다. H. B. Grose는 302장 찬송에서 그렇게 고백합니다.
2. 주님께 내 귀한 것과 내 맘과 내 생각도 주 위해 온몸을 바쳐 힘 다해 섬기면
독생자 보내신 성부 은혜로 갚아 주리. 그대의 정성을 다해 주님을 섬기어라.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구원의 갑주를 입고 끝까지 싸워라.
3. 우리의 귀한 것 모두 주님께 바치어도 단번에 생명을 주신 그 사랑 못 갚네.
하늘의 영광을 버려 우리를 구했으니 그대의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어라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구원의 갑주를 입고 끝까지 싸워라.
사랑의 힘
삼하 23장 13~17절 / 김신섭목사
고등학교 시절 저희 반에 괴짜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보통 고 2- 3학년 되면 주로 쉬는 시간에는 자는 것이 보통의 일과입니다. 늦게까지 공부하기 때문에 틈만 나면 잤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가끔씩 자다가 놀라 벌떡 일어나 공부를 하곤 했습니다. 점심먹고 얼마나 졸립니까? 수업시간에 졸지 않으려면 틈이 있으면 자야 했습니다. 그런데 점심시간후에도 공부합니다. 가끔 "야 자라 넌 잠도 없냐?"하면 이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적 떨어지면 내 여자 친구 못 만나!"
여자친구가 하나 있었던 모양인데 성적이 떨어지면 안 만나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피곤해도 잠 안자고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남자, 여자친구는 정말 멋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때 "사랑의 힘이 대단하구나" 생각했습니다. 어디 사랑의 힘이 그뿐이겠습니까?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사랑이 있어서 강한 것 아닙니까? 이전 부모님들이 힘들고 어려운 여건과 상황에서도 꿋꿋이 사실 수 있었던 것, 힘들어도 자식을 바로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성경본문 말씀을 보면 다윗의 인물됨과 그 신앙, 그리고 다윗의 하나님 사랑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큰 행동보다 비록 작은 행동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쓰임 받은 인물을 꼽는다면 다윗을 뺄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 누구보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크고 작은 모습 속에서 마음중심에 하나님을 두고 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 우리는 정말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으며 그 사랑이 다윗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본문 말씀
이 당시 블레셋은 아주 강력한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늘 블레셋에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연약한 나라의 설움이겠지요. 시련과 고난의 우리 역사와도 같습니다.
당시 강국이었던 블레셋 군대는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중앙산악지대의 아둘람의 산성요새에 있었습니다. 이 아둘람은 블레셋 경계 부근에 위치했기 때문에 전에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은신처로 자주 삼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아둘람은 동굴들이 많아서 은신처로 적합했습니다. 전에 자신이 도망자의 처지에서 피신지로 삼았던 곳에 다윗은 지금 일시적으로 지휘본부를 두어 블레셋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고향이 적에 손에 넘어가 있으니 그 광경을 바라보는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착잡했겠습니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다윗은 혼자말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누가 베들레헴 성문곁에 있는 우물물을 나에게 길어다 주어 마실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말을 들은 3명의 용사는 목숨을 걸고 블레셋의 진을 뚫고 베들레헴의 성문곁에 있는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와서 다윗에게 바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부으면서 말합니다.
"하나님 이 물을 제가 어찌 감히 마실 수 있습니까? 이것은 목숨을 걸고 다녀온 세 용사의 피가 아닙니까?"
그러면서 다윗은 그 간절히 사모했던 물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너무 간절 했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기에 마시지 못하고 하나님께 부어 바칩니다.
성경에 다른 곳에서는 다윗의 용사들이 적을 무찔러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무용담을 자랑하지만 오늘 본문의 세 용사이야기는 적진을 뚫고 지나가, 물을 떠 올뿐 적군을 크게 무찔러 전황을 일거에 뒤집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세 용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서 승리를 가져왔으며 이스라엘에 큰 힘을 주었는가 하는 전쟁 영웅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 용사가 다윗에게 한 아름다운 행동, 또한 다윗은 부하들이 떠온 물을 통해 보여준 아름다운 모습이 그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영웅담이 아니라도 강력한 기억으로 간직되어 오늘 성경으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께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동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전하라고 명한 사실과 같습니다. 세 용사들의 행동 뒤에 감춰진 강렬한 사랑의 힘, 그리고 다윗은 길어온 물을 마시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드린 것이 그의 성품과 신앙이 오늘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1. 사랑의 힘은 참된 용기와 능력을 만듭니다.
다윗은 적 수중에 들어가 있는 베들레헴을 생각하며 "그 베들레헴의 물 좀 마셔보았으면"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3명의 용사는 이 말을 듣게 됩니다. 다윗의 말을 듣고 행동을 개시합니다. "누가"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으로 알 듯이 명령한 것이 아닙니다. 왕의 소원하는 말이 세 용사에게는 지상명령으로 들린 것입니다.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작은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가장 작은 만족과 기쁨이라도 줄 수 있다면 아무리 큰 희생이라도 아끼지 않겠다는 사랑과 헌신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참된 용맹의 원동력이며 사랑의 본질입니다.
누가 명령하지 않아도, 아니 부탁하지 않아, 그 마음만 알아도 스스로 자발적으로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용기를 갖게 합니다. 담대하게 만듭니다. 계산하기 보다 행동이 앞서게 합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려 헌신합니다.
내 모든 것을 주어서라도/ 생명을 드려서라도 이익과 계산에만 움직이는 타산적 생활태도와/ 나중에 귀찮은 일이 생길까 보아 될 수 있는 대로 일을 하지 않으려는, 아니 그저 눈치만 보거나, 시키는 일만 하는 무사안일과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입니다.
◎1865년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리 장군은 책슨 장군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 말미에 의례적인 인사를 덧붙였습니다. "빠른 시일 안에 당신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편지를 받은 잭슨 장군은 당장 적탄과 폭풍우를 뚫고 리 장군에게 갔습니다. 의아하여 묻는 리 장군에게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보고 싶다고 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가장 작은 소원이 나에게는 곧 가장 큰 명령입니다.
사랑은 적진을 뚫고 달려가게 하는 용기와 담대함을 줍니다."
우리는 이렇게 찬송합니다.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그 피로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내 자신의 모습, 내 신앙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말 존경하는 사람, 내 은인에게 하는 것보다 주님에 대한 나의 충성과 헌신이 나옵니까? 정말 주님 말씀하신 것을 옆에서 들어도 달음질 쳐 나갑니까? 십자가의 고난으로 나를 구원하셨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그 사랑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에 와 있습니까? 어린 시절 부모님의 심부름하는 것이 싫어 투정하고 억지부리는 철없는 자식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 용사의 다윗에 대한 사랑은 신약시대의 제자도와 통하며 오늘날 교회에서 다시 재현되어져야 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우리의 진실한 신앙의 고백은 주님의 뜻을 알 때 그 어디로도 달려갈 수 있는 마음, 무엇이든지 하는 순종이 아니겠습니까?
2.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다윗은 처음에 베들레험 성문곁 우물물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다윗은 물을 마실 수 있었지만 그 물 마시기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 목마름중에도 물을 자신이 마시지 않았습니다. 가장 사모하는 것을 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 내 갈증보다 더 중요한 것을 먼저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은 세 용사가 목숨을 걸만한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세 용사의 마음과 헌신의 가치를 알았습니다. 세 용사가 아끼지 않을 사랑을 불러 일으켰으면서도 그는 이것을 자기가 받을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생리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떠온 물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물은 사랑의 물이고 자기 희생의 물이고 곧 용사의 생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부어 드리는 제사로 드렸던 것입니다. 다윗은 가장 귀한, 그 어느 것보다 귀한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린 것입니다. 자기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옮겼던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사랑을 쏟는 대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 있으면 전에는 "할어버지 할머니 먼저" 했습니다. 그런데 자식으로 변했습니다. 맛있는 것, 좋은 것, 귀한 것 있으면 자식몫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또 바꾸어졌답니다. 요즘은 어떻게 변했겠습니까? 맛있는 것, 좋은 것, 귀한 것 있으면 "우리 자기 줘야지" 라고 한답니다. 아니면 "내가 먼저" 젊은 부부들 이야기이겠지만 사회가 점점 자기중심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기 전 수가성의 한 사마리아 여인처럼 수단과 방법을 별로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구 만족 채우며 삽니다. 돈이 되는 일이면.... 자신의 이름이 나는 일이면.... 삶의 향락을 위해서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얻고 채우려는 것이 요즘 세태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전보다 더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소금물을 먹은 것처럼 마셔도 마셔도 갈증은 더해 옵니다. 살면서 나오는 갈증은 더 심해졌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 헛된 욕망을 쫒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옷 로비 사건을 통해 인간의 헛된 욕심과 허영이 얼마나 큰가를 알지 않았습니까?
오늘 교훈은 다윗의 하나님 중심된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오히려 자신의 욕구를 꺽고 먼저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이요. 하나님이 다윗을 높게 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받게 되려 할 때에 기겁하여 옷을 찢으며 막았습니다. 그런데 헤롯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가로챔으로 벌레가 먹는 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전에 어른들이 힘들 때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자식 때문에 살아야지 자식 때문에" 삶은 힘들어도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힘듦에도 산다는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의 힘이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자신을 떠받쳐온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전 분들이 "애들 때문에 살지"라고 했던 것을/ 우리는 이제 한층 더 큰 예수에 대한 사랑으로 "예수때문에 살지 예수 때문에 살지"라는 고백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예수 때문에 사는 인생, 그 예수 사랑에 힘이 있습니다. 그 삶 중심에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섬기기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찬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남이 알아주고, 성도가 알아주어야, 인정해 주기만을 바라면 안됩니다. 봉사할 때도, 선한 일을 할 때도, 교회에 헌신할 때도 모든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고 싶은 것도 참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바꿀 것은 바꿉니다. 그러나 더 큰 것은 예수님 때문에/ 나는 하고 싶지 않아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어도, 사랑하고/ 섬기지 않고 싶어도/ 봉사하고 싶지 않아도 예수님이 원하시니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귀중한 물을 부어 하나님께 제사로 드린 것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 마음중심으로 우리의 가장 귀한 것으로 드리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3. 사랑은 온전히 변하게 만듭니다.
다윗은 처음에 베들레헴 성문곁 우물 물을 사모합니다. 그런데 16절에 보면 갑자기 다윗은 그 물 마시기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어 버립니다. 도대체 다윗은 어떻게 된 사람입니까? 목숨을 걸고 적진을 뚫고 베들레헴까지 가서 물을 길어 왔지만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드린다고 부어버리니 말입니다.
오늘 짧은 이야기 속에 다윗의 행동을 15절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다가/ 16절에서 부하들이 물을 떠오자 16절과 17절에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였다"고 두 번씩 강조합니다. 왜 그랳을까요? 다윗의 성격이 원래 변덕스러운 사람이어서 그럴까요?
아니지요. 마시고자 하는 마음보다/ 나중에 물 마시기를 기뻐하지 않는 마음이 더 강렬히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이 이러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까? 마음의 변화는 왜 일어난 것입니까? 부하들의 큰 헌신, 사랑이 자기가 받을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다는 자각에서 온 것입니다. "너무 감사해, 너무 귀해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돌리고자 하니, 전에 사모하던 것을 강렬하게 싫어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되고 깊은 신앙은 다른 사람의 사랑과 헌신의 가치를 알게 했습니다. 명령하나로 사는 사람이 부하들의 용기를 이렇게 까지 평가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생명을 돌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 다윗의 감정까지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시킵니다. 사랑은 마음을 변하게 합니다. 사랑은 가치를 바꿉니다.
어떤 집사님에게 변변하게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남편에 대한 불만이 늘 있었습니다. 월급날이 되면 남편이 벌어온 돈을 보면 한숨이 먼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이 돈으로 어떻게 사나?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 남편이 일하는 것을 보고 회개했답니다. 저렇게 힘들게 일하면서 벌어 오는 것인데....
남편의 수고를 안 뒤 감사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가치를 알 때 변합니다. 아까웠던 것도 아깝지 않게 됩니다. 더 주고 싶습니다. 더 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내가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영광이 드러날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사는 삶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결론
사실 다윗이 베들레헴의 물을 그리워한 것은 단순히 목마른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단순한 목을 축이기 위한 음료가 아니었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출생지이자 성장지입니다. 다윗이 그 물을 마시기를 원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원이 단지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겠습니까? 13절을 보면 당시는 곡식을 벨 때였다고 했습니다. 추수 때는 날씨가 덥고 물이 부족한 때이지만 적과 대치 중인 상황에서 추수 때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추수 때 이방사람들이 애써 가꾼 식량을 약탈하러 쳐들어 오곤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자기 손으로 수고한 것을 자기가 거두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입니다. 그러나 지금 블레셋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하고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상황, 다윗 자신의 형편을 볼 때에, 베들레헴의 물은 단순한 해갈용 물이 아니라 상실한 하나님의 축복을 회복하고자 하는 다윗의 염원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소원이 있으십니까? 그 마음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삶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하나님을 높이며 살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십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
전에 어떤 성도분께서 치통으로 고생 고생하다가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고 좀 나아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니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잘못난 사랑이 때문에 다른 이빨까지 썩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름 값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쓸모없이 별 유익을 주지 못하는 이름만 이쁜 사랑니. 정말 오늘 우리 나의 모습의 자화상에 비치고 있는 모습은 아니겠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배보다 아직도 일이, 사업이, 가정이, 쉬는 것이 먼저 이지는 않습니까?
예수의 영광보다 내 이익이 먼저 이지는 않습니까?
교회보다/ 성도보다 내 생각이 우선이지 않습니까?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 사랑하면서 변한 것이 있습니까?
내가 좋아하던 것, 내가 즐기던 것, 내 위주의 생각이 변했습니까?
예수로 인해 변하지 않았다면 변한 행동이 나와 있지 않다면 진정한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 사랑하는 대상 때문에 용기가 납니다. 용맹스러워 집니다. 헌신과 자발적 순종이 일어납니다. 상관의 명령도 아닌 말 한마디에 목숨을 걸고 적진을 뚫고 물을 길러온 용사들, 목말라 간절히 원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그 피같은 물도 여호와를 생각하면서 부어버렸던 그 다윗의 사랑을 기억하시면서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생각하는 마음
삼하 23장 13~17절 / 박상훈목사
어느 여성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갖춘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남이 알지 못하는 한 가지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눈썹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짙은 화장으로 눈썹을 그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그린 눈썹 때문에 마음은 늘 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그에게 사랑하는 남성이 생겼습니다. 둘은 서로를 사랑하게 되어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사랑하는 남편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면서도 늘 마음 한 구석에는 불안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혹시라도 이 눈썹이 그린 눈썹이라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나를 싫어서 버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늘 이런 걱정이 그의 마음 밑바닥에 감돌고 있었습니다. 일 년, 이 년, 삼 년을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한 삼 년쯤 되었을 때, 그만 그 가정에 예기치 않았던 불행이 닥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남편의 사업이 망한 것입니다. 완전히 알거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맨손으로 제일 밑바닥의 인생부터 다시금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부부는 제일 먼저 연탄을 배달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리어카에 연탄을 가득 싣고서 남편은 앞에서 당기고, 아내는 뒤에서 미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연탄을 배달하는데 그 날 따라 바람이 세차게 불었습니다. 그래서 연탄의 시커먼 잿가루가 뒤로 계속 날아와 아내의 얼굴이 그만 연탄재로 온통 시커멓게 뒤덮이고 말았습니다. 이따금씩 잿가루가 눈 속에 들어와서 눈이 쓰리고 아팠습니다.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마음대로 눈물을 닦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눈물을 닦다가 그만 화장한 눈썹이 지워지기라도 하면 그 동안 남편 모르게 숨겨왔던 비밀이 모두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하고 혼자서 고통 가운데 끙끙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남편이 리어커를 잠시 멈추고서는 아내에게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목에 걸치고 있는 수건을 벗어서 그것으로 아내의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가슴은 철렁 내려 앉았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탄로가 났구나!"
이런 불안한 아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은 자기의 수건으로 계속해서 아내의 얼굴을 깨끗하게 닦아주었습니다. 눈물도 다 닦아주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자기 아내의 눈썹 주위만큼은 조금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이미 남편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를 생각해서 일부러 그 동안 모르는 척 해왔던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얼굴을 다 닦아주고 난 뒤에 씽긋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의 얼굴이 이제는 예전처럼 예뻐졌구료!"
그러면서 남편은 태연하게 리어카 앞으로 가서 다시금 리어카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를 그토록 사랑해 주는 남편의 마음이 아내는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가슴이 뭉클했을 것입니다.
상대방을 생각해 주는 마음, 남을 생각해 주는 마음은 얼마나 아름답고 귀합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마음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면 그 가정은 절로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교회는 절로 은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회는 그만큼 밝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생각해 주는 아름다운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뒤를 이어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급선무는 사울 왕 때에 블레셋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영토를 다시금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스라엘 군사들을 이끌고 진두 지휘하면서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의 고향 땅이었던 베들레헴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을 회복하기 위해서 군사를 이끌고 블레셋과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진두에서 지휘를 했기 때문에 무척 목이 말랐을 것입니다. 때는 곡식을 벨 때라고 했습니다. 더위가 아주 기승을 부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갈증을 느꼈겠습니까? 그 때 다윗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고향 땅, 곧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이었습니다. 다윗은 어릴 때 양을 치면서 자기가 직접 그 물을 길어, 자기도 마시고 또 치던 양무리에게 나누어주기도 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 때의 시원한 물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고향 땅, 베들레헴은 지금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방인에게 고향 땅이 짓밟힘을 당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속이 상한 나머지 탄식 가운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그 소리를 들은 다윗의 부하들 가운데 세 사람이 나섰습니다. 그들은 용감하게 적진을 뚫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기어이 물을 길어왔습니다. 그들은 적군들과 좌충우돌하면서 싸우는 가운데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윗은 부하들이 건네주는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차마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물이라기보다도 오히려 그들의 피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자기가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때문에 사랑하는 부하들이 목숨이 위태로웠던 것을 생각하면서, 두 번 다시 다윗은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는 절로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 마음이 되어 가는 곳마다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더욱더 강성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편의상 세 대지로 나누어서 그들이 보여주었던 아름다운 마음, 생각하는 마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지금 다윗의 진영에 물이 없어서 다윗이 그렇게 탄식한 것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고향 베들레헴이 이방인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는 사실에 속이 상한 마음으로 그러한 말을 했을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세 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다윗에게 바쳤습니다. 그들이 다윗에게 잘 보여서 높은 벼슬이라도 차지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까? 그들은 왕을 위하는 길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왕이 편해야 나라가 편하고 왕이 살아야 나라가 사니까, 왕을 위하는 일은 곧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왕에게 충성을 다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나 개인의 유익을 생각하기에 앞서서 먼저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55년 전 1945년 8월 15일,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광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때 남한 땅에서는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해서 정부수립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 땅에는 공산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정부수립을 준비하면서 최측근에 있는 한 사람을 조용히 불렀습니다. 그리고 은밀한 가운데 그를 평양으로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해외에서 40년을 살아가는 동안에, 조국 땅에서 우리 동포들이 일제치하에서 고통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오. 그러나 평양 산정현 교회 장로인 고당 조만식 선생이 우리 민족의 앞장을 서서 우리 동포들을 이끌고 일제와 맞붙어 싸운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내가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소. 이제는 우리가 해방을 맞이해서 우리 힘으로 속히 정부를 수립해야 되니까, 민족의 지도자인 고당 조만식 선생을 서울로 모시고 오시오. 우리가 함께 힘을 합쳐서 일해야 되지 않겠오?"
이승만 박사의 보냄을 받은 사람이 평양에 있는 고당 선생을 비밀히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그는 고당 선생을 서울로 모셔가기를 원했습니다. 그 때 고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필요해서 나를 데리러 와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오. 그러나 지금 이 북녘 땅에는 공산정권하에서 신음하는 내 동포가 일천 만명이 살고 있오! 어떻게 그들을 내버려 두고서 나 혼자 편하겠다고 서울로 갈 수 있겠소. 안될 말이오. 나는 갈 수가 없소. 그리고 내가 여기에 남아있어야 공산당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하지를 못한다오."
고당은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도 그를 존경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차례 걸쳐서 그를 구출해 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고당 선생은 그 때마다 번번이 거절을 했습니다.
"그럴 수 없소. 나는 내 동포들을 이곳에 남겨 두고 나 혼자 서울로 갈 수 없소. 나는 살아도 이곳에서 내 동포들과 더불어 살고, 죽어도 이곳에서 내 동포들과 함께 죽을 것이오."
고당 선생은 자기 개인을 생각하기보다는 먼저 나라를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드디어 6·25동란이 터졌습니다. 계속해서 밀리던 우리 국군들이 북진을 했습니다. 평양을 탈환했을 때 평양에서 철수하던 인민군들이 평소에 자기들의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던 고당 선생을 학살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당 선생은 자기의 말대로 그곳에서 동포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다가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나라를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 백두산 천지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시냇물을 내가 언제나 마셔볼꼬? 저 평양의 아름다운 대동강 물을 내가 언제나 자유롭게 바라볼꼬?"
북녘 땅을 그리워하면서 북한에 있는 동포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그 옛날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 있는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하루에 세 차례씩 잊지 않고 조국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조국을 위해서 기도해야 될 줄 압니다.
우리 나라가 지금 얼마나 어수선합니까? 의료계 폐업사태, 각종 노조의 파업사태, 현대사태 등 무슨 사태가 그리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병원도 문닫고, 호텔도 문닫고, 회사도 문닫고 다 문닫게 생겼습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우리 국민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정신을 차리고, 나 개인의 이익을 생각하기보다는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아울러 무분별하게 해외여행이나 다니면서 값진 달러를 낭비해서야 되겠습니까?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자기 혼자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세 용사처럼 충성스럽게 왕을 잘 섬기는 어진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다윗은 성군이었습니다. 어진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왕으로써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알았습니다. 자기 때문에 세 부하가 피를 흘리면서 목숨이 위태로웠던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는 그 물을 자기가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다윗은 두 번 다시 자기 때문에 부하들을 위태롭게 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생각해 주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생각해 주는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될 줄 압니다. 그리하면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상대방을 생각해 주지 않고, 그저 나만 생각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아껴주고 잘 되도록 이끌어 줍시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경해 주고 섬겨줍시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남성이 퇴근하고 집에 오면서 옷가게에 들렀습니다. 그리고 긴 바지를 하나 구입했습니다. 내일 그 바지를 입고서 어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저녁 식사 후에 가족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사온 바지를 입어보니까 아무래도 너무 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옷을 벗어 거실에 있는 소파 위에 걸쳐놓고 아내에게 이렇게 일렀습니다.
"여보! 내일 아침 일찍 내가 이 옷을 입고 가야되는데, 아무래도 조금 긴 것 같으니까 당신이 밑단을 5cm정도만 줄여주구료."
그 뒤 아내는 설거지를 마치고 옷을 수선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자꾸 칭얼거립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아기를 재워두고 나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방에 들어가 아기를 옆에 누이고 재웠습니다. 아내는 아기를 재우다 자신도 그만 깜박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남편의 여동생인 시누이가 그 모습을 보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니가 살림을 하랴, 또 아기를 키우랴, 얼마나 힘들고 고단하겠는가? 언니를 깨우지 말고 차라리 내가 하지."
그러면서 오빠의 옷을 가져다가 5cm를 자르고, 밑단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다림질까지 정성껏해서 옷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깊은 밤중이 되었습니다. 시어머니가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 잠시 일어났습니다. 거실을 지나가다 보니까 옷이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쯧쯧, 젊은 아이가 얼마나 고단했으면 저렇게 정신없이 잘까? 그래 깨우지 말고 그냥 두자. 내가 하지 뭐."
그러면서 시어머니가 또 5cm를 잘랐습니다.
새벽녘이 되었습니다. 깜박 잠이 들었던 아기 엄마는 놀라서 깨어보니 이미 새벽 5시입니다. 정신없이 나와서 5cm를 또 잘랐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몇 cm를 잘랐습니까? 15cm를 자른 것입니다.
남편이 아침에 일어나서 옷을 입어보니까 이게 웬일입니까? 바지가 깡총해졌습니다. 반바지가 다 되어버렸습니다. 남편은 바지를 보며 왜 이렇게 많이 잘랐느냐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알고 보니까 자기 여동생이 5cm를 자르고, 또 어머니가 5cm를 자르고, 아내도 5cm를 자른 것입니다. 비록 바지는 짧아져서 볼 모양이 없었지만, 그의 마음은 한없이 기뻤습니다.
"그래, 바지의 길이가 짧은 것이 무슨 대수냐? 우리 가족이 이만큼 서로 생각해 주고 위해주고 아껴주는데 내가 더 부러울 것이 무엇이냐?"
그러면서 그는 자랑하는 마음으로 그 짧아진 바지를 입고 모임에 참석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이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일터가 이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각 부서도 이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가 서로를 생각해 주고, 위해주고,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아름다운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세 용사가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왔습니다. 블레셋 군사들과 좌충우돌하면서 물을 길어오는 그들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다윗은 도저히 그 물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오, 하나님! 이것은 물이 아니고 저들의 피입니다. 이 소중한 피를 제가 어찌 마실 수가 있겠습니까? 이 영광, 이 충성은 오직 하나님만이 받으실 수가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그는 그 물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 물을 땅에 헛되이 쏟아 부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쏟아 부어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받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이 없으셔서, 목이 타셔서 그 물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그만큼 생각하는 다윗의 마음을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다윗은 형통할 때나 곤고할 때나 늘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삼하7:1이하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형통케 하셨습니다. 모든 대적을 물리쳐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궁에 평안히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다윗이 누구를 생각했습니까?
"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백양목 좋은 궁에서 평안히 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궤는 아직도 휘장 가운데 거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습니까?"
그 때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로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다윗은 이처럼 형통할 때 하나님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곤고하고 어려울 때도 하나님을 잊지 않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오, 하나님이여! 어느 때 까지 입니까? 나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나이다. 내가 주만 의지하나이다. 그러하오니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시옵소서."
다윗은 형통할 때도 하나님을 생각했고, 곤고할 때도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부어드려야 할 우리의 가장 귀중한 물은 무엇입니까? 다윗처럼 하나님께 미련없이 부어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형통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께 충성해야 됩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충성하셔야 됩니까? 당연히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충성해야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삶은 그렇지 못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귀중한 것을 드리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은 내 모든 것을 아시고 충성스럽게 내가 써야 할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셔야 되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충성하고,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시면서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몇 일 전에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읽으셨을 것입니다. 어떤 젊은 부인이 신문사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제 남편을 고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남편은 법관입니다. 그런데 제 남편이 동료법관들과 더불어서 불법으로 영업을 하는 어떤 단란주점에서 술과 향연으로 접대를 받았습니다. 사회의 불의를 심판해야 할 법관이 불의한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그가 법대로 심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법관들이 타락하면 이 사회는 갈 곳이 없다는 판단에서 저는 제 남편을 고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남편도 내일 책임을 느끼고서 사직서를 내고 법관임을 포기할 것입니다."
그 기자는 통화를 끝내놓고 나서 확인을 하기 위해 그 분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똑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아내의 순수한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된 것을 저는 마음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법관으로서 제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을 통감하고서 저는 내일 사직서를 내고 사법부를 떠날 예정입니다."
그 부인은 믿음이 독실한 분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들 두 부부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기 위해서 뭇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법관의 직분까지도 아낌없이 하나님 앞에 쏟아 부어드린 것입니다. 그와 같은 부부가 이 땅에 있는 한 이 나라는 더 이상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복이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어두움 가운데서 빛을 회복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빛이 큰 어두움을 물리치는 법입니다. 작은 소금이 큰 부패를 방지하는 법입니다. 일어나서 빛을 발하십시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 서로가 서로를 생각해 주는 마음,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우리 모두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빛을 발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어려움이 물러가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변의 사회가 좀 더 밝고 아름다운 사회로 바뀌어지기를 바랍니다.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억하게 하소서
삼하 23장 13~17절 / 김영현목사
6월은 호국의 달입니다. 6월6일이 현충일이요, 6월 25일이 6.25사변이 터진 날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현충일 기념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현충일이란 “애국선열과 전몰장병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추모하는 기념일”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넋을 추모하고 부상당한 사람들(상이군경들)을 위로하고 감사를 하는 기념일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공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나라든지, 어떤 공동체든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제가 미국을 떠나오기 전날이 5월 마지막 월요일이어서 미국의 현충일격인 Memorial Day 즉 Remembrance Day였습니다. 가정마다 그들의 국기인 성조기를 게양하고 곳곳에 포스터와 프랭카드가 걸려 있는데 한결같이 “We'll never forget you”(우리는 결코 당신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글귀들이 있었습니다. 당신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나라, 오늘의 이 땅,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6.25 후에 국가가 너무 빈곤하다보니 전몰장병들의 유가족들이나 상이군경 용사들을 방치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분들이 분노하여 질서를 어지럽히며 사회에 반항적인 삶을 살던 모습들이 눈에 선합니다. 나라가 잘못한 일입니다. 그분들이 목숨 걸고 싸워주지 아니했으면 이 나라는 이미 강대국들에 의해 흡수되었거나 지금의 북한처럼 공산주의자들에게 짓밟히고 인권이 유린당하는 비참한 국가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나라가 잘 되려면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과 그의 가족들을 높이 받드는 정신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는 전통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삼하23장에는 다윗이 죽기 전에 이스라엘을 세우기 위해 다윗과 함께 충성을 다했던 장군들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하23:8에서 “다윗의 용사들은 이러하니라”고 시작하면서 나라를 세우고 적군이 침략해 들어왔을 때 목숨 걸고 지켰던 이름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그 후손들에게 그들의 희생과 충정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후손들에게 “기억하라”(Remember)는 명령을 내리는 것은 잊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3장에는 지도자에게 있어야 할 덕목을 잘 보여주는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다윗 왕이 산성에 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쳤습니다. 블레셋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었습니다.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군이 적군에게 둘러 쌓이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물이 문제였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마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블레셋 진영 안에 있었습니다. 이를 안 다윗의 세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돌파하여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다윗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물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의 뒤에는 수많은 군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있는데 자신만 물을 마신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물은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길어온 장병들의 피나 다름이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물을 여호와의 제단에 부어드리고는 하나님께 아룁니다.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물을 길어온 세 용사는 목숨을 걸고 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병사들 모두가 목숨을 내놓고 전투에 임하고 있는데 왕이라 해서 특권을 누리면 안 될 일임을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다윗의 이런 위대한 리더십이 가나안을 통일하고 통일국가를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호국선열들은 모두가 자신의 생명을 민족과 나라를 위해 내어 놓은 분들입니다. 그 분들의 희생정신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수많은 호국선열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도,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혈통도 이어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공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나라의 위기를 겪지 않아서 조상들의 호국정신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 안타깝습니다. 후손으로서, 사람으로서 결코 그분들의 은공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면이 바로 이 “잊지 않는 마음”입니다. 잊지 않는 마음에서 ‘역사의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 “잊지 말아야 할 사건들”을 기록해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억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기념비를 세우게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을 몇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첫째는 에벤에셀 기념비입니다. 삼상 7:12에 있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미스바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놓고 성회를 열었습니다. 블레셋이 그 소식을 듣고 쳐들어왔습니다. 속수무책인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블레셋에게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혀서 혼비백산케 하여 마침내 이스라엘에게 패하게 만들었습니다. 여세를 몰아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까지 쳐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사무엘은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취하여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하고 에벤에셀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후손들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여호수아 장군이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넜을 때입니다. 범람하던 요단강물을 멈추게 하고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은 요단강 바닥의 돌 열두개를 취하여 요단강 바닥과 길갈에 비석을 세우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수 4:7)
이렇게 기념비를 세우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홍해를 말리시고, 요단강 물을 마르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신 은혜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에 연계되어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우리를 낳아서 기르시느라 희생하신 부모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명령이요, 우리를 만드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입니다. 신명기 6:5 이하에서 쉐마의 말씀을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난 5월 27일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소냐 소토마이어 연방판사를 대법관으로 지명했습니다. 그녀는 2차대전 중에 푸에르토리코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노동자의 딸로 태어난 소냐는 9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두 남매를 기르기 위해 간호사였던 어머니는 두 가지 직업을 갖고 일주일 내내 일해야만 했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소냐 소토마이어(Sonia sotomayer)는 뉴욕의 사우스브롱스에 있는 정부 임대주택(South Bronx housing project)에서 성장했기에 그녀가 연방판사로 지명될 때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더구나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윈 소냐는 이미 8살부터 중증당뇨병을 앓는 등 역경 속에서 성장하여 대법관까지 임명되었으니 감동을 주고도 남았습니다. 미국최초의 히스패닉계 대법관이 될 소냐 소토마이어는 프린스톤 대학과 예일대학 로스쿨에서 공부를 했고 진보성향의 판사입니다. 공화당인 아버지 부시 대통령에 의해 연방판사로 발탁된 사람인데도 민주당 대통령 오바마는 정당 성향에 관계없이 소냐를 9명의 대법관 중 한명으로 지명했습니다.
오늘 소냐에게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녀가 말하는 어머니의 희생입니다. 두 남매가 아직 어릴 때 남편을 잃은 소냐의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자녀들을 위해 온통 희생하였습니다. 대법관에 지명되는 날 오바마 대통령이 장황하게 소냐를 소개하자 소냐는 인사말에서 지금까지 자기가 성장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기 때문이라며 일일이 감사의 말을 표했습니다. 그녀는 그들을 결코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여기에 아주 특별한 분이 한 분 오셨는데 바로 어머니”라며 일으켜 세웠습니다. 눈물을 가득 담은 그녀의 어머니가 일어나자 임석한 모든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소냐는 “나의 어머니는 두 남매를 기르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고 했습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한 여인의 희생과 헌신이 여덟 살 때부터 당뇨병으로 고통 받는 딸아이를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대법관의 자리에 오르게 한 것입니다.
어느 가정이든, 어느 나라든, 그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이 있었기에 보존되어지고 발전해 올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 공동체는 더 이상 존재하기 힘듭니다. 지구상의 수많은 종족들이 있었지만 세월이 가면서 사라진 종족들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나라 주변에도 많은 종족들이 있었지만 사라졌습니다. 나라들도 생겼다가 없어진 나라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극동아시아의 작은 반도 안에서 반만년의 역사를 지켜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기적입니다. 주변에는 강대국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비록 950여회의 외세의 침략이 있었지만 잘 버티며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발전하여 온 것은 선조들의 슬기와 지혜도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바쳤던 위대한 용사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가까이는 일제 36년 동안 민족이 수치를 당할 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독립투사들이 있었기에 나라를 되찾았습니다. 지난 6.25전쟁에서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 만 명의 전몰장병들이 있었기에 이 땅의 자유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잊지 맙시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피를 바친 호국선열들을 잊지 맙시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잊지 맙시다.
은혜를 잊지 맙시다. 오늘 우리가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순교하신 믿음의 선조들을 잊지 맙시다.
은혜를 잊지 맙시다. 우리를 낳아서 기르시느라 온 삶을 다 바쳐 희생하신 부모님들의 은혜를 입지 맙시다.
잊지 맙시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잊지 맙시다. 그분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습니다.
다윗의 용사들
삼하 23장 13~17절 / 이성우목사
오늘은 저의 건강상태가 몹시 좋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말씀만 전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건강상태를 고려한다면 입원 치료를 받고 싶었는데, 코앞에 다가온 주일이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지난 주간 목요일부터 금요일까지 1박 2일 간의 짧은 일정으로 중, 고등부 학생들을 인솔하고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수련회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출발하던 날, 포항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한참 달려가고 있는데, 이제까지 한 번도 그런 일이 없던 내비게이션이 갑자기 작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운이 되어 버려서 할 수 없이 차를 갓길에 세우고 배터리를 빼는 방법으로 다시 작동을 시켰습니다. 얼마를 달리다 보니까 이번에는 자동차 온도 메타가 끝까지 올라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전한 갓길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천천히 가고 있는데 차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갓길에 주차를 시키고 학생들을 안전하게 갓길 난간 옹벽위로 올라가게 한 후에 긴급출동서비스를 신청해서 견인조치를 했습니다. 라디에이터가 터져서 냉각수가 샌 것이 문제여서 가까운 카 센터에 가서 필요한 부품을 교체해서 수리를 하다보니까 거의 세 시간 가량이 소모가 되어 버렸습니다.
서둘러 목적지인 울진 엑스포 행사장까지 가서 우리 일행을 안내하기 위해 현장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울진지방 목사님 가족을 만나서 엑스포 행사장을 돌아보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번에는 제 몸이 갑자기 다운되기 시작했습니다. 온 몸이 아파오고 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할 수 없이 서둘러서 하루 저녁 묵기로 했던 최진경전도사님 댁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전도사님 남편의 도움으로 울진 의료원까지 가서 응급조치를 했는데도 계속해서 목이 부어오르고 열이 나면서 몸이 점점 더 다운이 되었습니다. 하루 밤을 꼬박 새우며 앓다가 할 수 없이 성도들에게 전화를 해서 후송을 부탁했습니다. 이튿날, 성도들 다섯 명이 일을 접고 달려와 주었습니다. 다시 병원에 가서 응급조치를 하고서 교회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김형식권사님 차 뒤에 누워서 병원에 갔다가 교회로 돌아오는 길에 이번 주일을 위해서 준비해 놓은 설교가 생각이 났습니다. 마침, 이번 주일 설교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홀로 위대한 인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 점은 역사적인 업적을 남긴 모든 인물들에게는, 반드시 훌륭한 스승이나 조력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성장해야 할 시기에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되고, 일을 할 만한 위치가 되면 훌륭한 조력자를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만남의 복의 중요성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람을 잘 만나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잘못 만나서 가지 말아야 할 곳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윗 왕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중대한 이유는 훌륭한 신하들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두 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다윗 왕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다윗 왕이 지휘하는 군대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는 블레셋 군대와 대치하고 있을 때, 세 용사가 추수할 무렵에 아둘람 동굴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갔습니다.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었고, 블레셋 수비대는 베들레헴에 있었습니다.
하루는 다윗 왕이 사모하여 말하기를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였습니다. 그 우물물은 다윗 왕이 젊은 목동이었던 시절에 마시곤 했던 물이었습니다. 어쨌든, 혼잣말처럼 한 이 말이 자연적 욕구에서 나왔든 부하들을 시험하기 위해서 나왔든 간에, 어처구니없는 말이요 분별없는 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상식적으로는, 겹겹이 포진하고 있는 적진을 뚫고 나가 물을 길어 가지고 다시 그 적진을 뚫고 도망쳐 온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도 될 일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 합리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 왕의 말을 복종할 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다윗 왕이 어느 누구를 특별히 지목하며 복종을 요구한 말도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윗 곁에 있었던 세 용사가 감히 블레셋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와서 다윗 왕에게 바쳤습니다. 목숨을 건 세 용사의 행동은 정말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적어도 인간의 상식으로는 그렇습니다.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 세 용사는 몰랐겠습니까? 그들이 천치가 아닌데, 자기들이 기름을 들고 불 속에 들어가는 미련한 짓인 줄을 왜 몰랐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시키지도 않은 일에 무모하게 목숨을 걸었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 용사는 다윗 왕이 우상들을 숭배하는 이방의 왕들과 전쟁할 때마다 승리했는데, 그 승리의 비결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 용사는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의 승리를 굳게 믿었습니다. 바로 그 믿음 때문에 세 용사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왕인 다윗을 위해 목숨을 건 충성을 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운 왕에 대한 섬김과 충성이 곧 하나님께 대한 섬김이요 충성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10:40에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상, 복종 또는 충성은 여건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충성은 비례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의 고백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적어도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시고 하나님의 교회와 양 무리를 맡겨주신 목회자에게 순종하고 충성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이요 당연한 것인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다는 분명한 표시이며 하나님과 더불어 바른 교제 가운데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인 줄로 믿습니다.
일꾼에는 네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상사의 눈치만 보고도 복종하는 일꾼이고, 둘째는 직접 시켜야만 복종하는 일꾼이고, 셋째는 강권해야만 마지못해 복종하는 일꾼이고, 넷째는 그럴 듯한 핑계를 대면서 거역하는 일꾼입니다. 다윗의 세 용사는 “우리에게 명령한 것이 아닌데······”, 또는 “개죽음하는 것인데······”, 또는 “불가능한 일인데······” 등등의 핑계를 대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더 믿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 왕에게 복종했습니다. 그 결과 그 세 용사는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아군의 사기를 한껏 높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과 복음 선교를 위해 생명을 초개와 같이 여기던 그는, 누구보다도 더 많은 승리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2장 14절에서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언제, 어디서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종에게 순종과 충성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목숨을 걸고 적진을 뚫고 나갔다가 다시금 적진을 뚫고 돌아오느라고 피투성이가 된 세 용사가 가져온 물을 다윗 왕은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께 부어 드리며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다윗 왕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은 여느 임금들처럼 스스로 신이나 신과 동등한 존재로 자처하는 교만을 떨지 않았습니다. 또, 자기 위에 아무도 없다고 여겨 백성들의 충성과 섬김의 마지막 대상으로 자처하지도 않았습니다. 수많은 왕들과 독재자들이 나라와 민족에 대한 충성과 섬김을 요구하지 않고, 그 자신들에 대한 충성과 섬김을 강요하는 바람에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초래했는지 모릅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세 용사의 목숨을 다한 충정이 담긴 물을 당연히 마실 법도 했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먼저 한 일은 겸허한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그 고귀한 충정이 담긴 물, 아니 그 고귀한 충정이 담긴 피를 받을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고 믿고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위대한 지도자의 조건이란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다는 소명의식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책임 의식, 그리고 자신도 잘못할 수 있다는 겸허한 생각,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킬 줄 아는 결단력, 깊은 이해심,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복종하며 일하는 자세, 그리고 모든 충성과 섬김을 하나님께 돌리는 자세 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지도자가 지혜로운 지도자요, 권위 있는 지도자요, 위대한 지도자인줄로 믿습니다.
모든 위대한 인물들의 배후에는 반드시 훌륭한 조력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기꺼이 따라 준 대중이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업적이 남겨질 수 있었습니다. 이 시대, 모두가 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이 시대야말로, 하나님이 세운 지혜로운 다윗 왕에게 목숨을 걸고 충성한 세 용사와 같은 인물들이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6장에서 자신의 복음 전파 사역을 위해서 헌신과 충성으로 동역 자가 되어 주었던 여러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하면서 그들에게 지극한 감사를 표함으로써 자신에게 돌아올 모든 영광을 그들에게 돌려보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3-4절 말씀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 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 왕은 이새의 여덟 아들 가운데 막내로써 베들레헴의 목동이었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우시고 그에게 충성스러운 용사들을 붙여 주심으로써 그가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가장 태평성대한 나라를 만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저는 충남 공주의 한 시골에서 태어난 촌놈으로써 그동안 여러분들이 겪어 보신 것처럼 부족함과 허물이 많은 사람인데,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저에게 기름을 부어 목사로 세워주셨고 보이지 않는 섭리 가운데 이 교회에 보내셨으며,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위하여 성전 건축에 매진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저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도우심이며, 다윗의 세 용사와 같은 여러분들의 동역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더 큰 역사를 위하는 일인 줄로 믿기에 오늘 저는 감히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새 역사를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저를 위해서 다윗의 세 용사와 같은 충성스러운 용사들이 되어주십시오.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삼하23장 13~17절 / 성홍모목사
오늘 우리가 설교 후에 부를 찬송은 459장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를 선정하였습니다. 이 찬송은 프랜시스 리들리 해버갈(Frances Ridley Havergal, 1836-1879)이라는 여성도가 쓰신 찬송시입니다. 영국의 여류 시인 해버갈은 주옥같은 많은 찬송시를 쓰셨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213장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주소서”, 292장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311장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329장 “주 날 불러 이르소서 말씀대로 전하오리”, 331장 “영광을 받으실 만유의 주여”, 459장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487장 “어두움 후에 빛이오며” 등, 7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프랜시스 리들리 해버갈은 어학의 천재였습니다. 그는 풍부한 감성과 영성을 가지고 있었고, 음악적 천품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건강 악화로 43세밖에 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찬송시를 써서 교회음악 분야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는 1836년 영국 애스틀리(Astley)에서 태어나 1879년 캐스웰에서 세상을 마쳤습니다. 오늘 부르게 될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이 찬송은 독일의 존 고스(John Goss 1800-1880)에 의하여 작곡되었습니다.
해버갈은 성경을 읽던 중에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에 많은 용사들이 다윗의 편에 속하여 생사고락을 함께 하면서 승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지금 쫓기는 신세인데, 어린 청년 다윗에게 속하면 어떤 어려움을 당할지, 먹고는 살 수 있을지, 사울이 보낸 군인들에게 죽을 수도 있었는데, 죽음을 각오하는 용사들이 다윗을 찾아와 다윗을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해버갈은 이런 말씀을 읽어가다가, 우리 주님께서 악한 사탄의 세력과 싸우실 때에 주님의 편에 설 사람이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 시를 썼다고 합니다.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누가 죄를 떠나 주만 따를까 누가 주를 섬겨 남을 구할까 누가 주의 뒤를 따라 가려나 부르심을 받아 주의 은혜로 주를 따라 가네 주만 따르네”
다윗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아주 불리한 편이었습니다. 언제나 잡혀죽을지 모르는 쫓겨 다니는 도망자의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모시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나라를 세우고, 지키려는 용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다윗은 성군입니다. 자신의 무용담이나, 업적만을 기록하지 않고 부하 군인들의 혁혁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수많은 부하들의 이름을 기록하게 하였고, 그들의 수고를 후세에 전하게 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있는 용사로는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군 지휘관 중에 두목이었습니다. 이 사람 혼자서 단번에 블레셋 군대 800명을 죽였습니다. 다음으로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란 장군이 있었습니다.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이스라엘에서 추수가 시작될 때였는데, 블레셋 군대는 르바임 평원에 진을 치고, 삼십인 특별부대 소속인 세 용사가 아둘람 동굴로 다윗을 찾아갔습니다. 아둘람 굴은 유다지파에 속한 남부지역에 있었는데, 후대의 발견으로 한 400명 정도는 거주할 수 있는 큰 동굴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둘람 동굴을 사령부로 삼고 있었고, 적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은신처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다윗은 아둘람에서 가까운 산성 요새에 있었고, 블레셋 군대의 진영은 베들레헴이 있었습니다. 블레셋이 베들레헴을 차지한 것은 사울왕과 전투하던 길보아 전투에서 승리하여 베들레헴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에 다윗을 찾아간 용사들은 앞에 아비새와 브나야,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비새라는 장군은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을 지낸 요압의 아우요, 다윗과는 외삼촌과 조카 사이였습니다. 다윗에게는 누이로 둘이 있었는데 스루야와 아비가일이 있었습니다. 아비새는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비새라는 용사는 다윗을 보호하는데 대단히 훌륭한 품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비새는 그가 창을 휘둘러 블레셋 군인 300명을 죽인 대단한 용사였습니다.
용사 아비새와 솔로몬의 군대장관을 지내게 된 브나야와 다른 한 장군이 다윗을 찾아갔을 때에 적군 블레셋이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이란 동리가 다윗의 고향인데, 적군에 넘어가 적군이 진영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북진하면서 중앙고원지대까지 쳐들어와 베들레헴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다윗은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며 소원을 말했습니다.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나에게 길어다 주어, 내가 마실 수 있도록 해주겠느냐?” 다윗은 고향 베들레헴을 탈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이 자라난 고향이니 베들레헴 근처는 속속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한 눈에 들어옵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에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 물은 깊은 우물로부터 솟아나오는 물로 시원하고 깨끗한 생수였습니다. 다윗이 진을 치고 있는 아둘람이나 산성에는 좋은 물이 별로 없었고, 다른 곳에서 길어다 먹어야 했습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마시고 자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이 마시고 싶었습니다. 다윗은 사모하여 간절히 소원하였습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끝나기도 전에 다윗을 찾아온 세 용사들이 쏜살같이 뛰어 내려가는데, 정말 블레셋이 진을 치고 있는 베들레헴에 가서 물을 길어오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들 세 사람 용사는 블레셋 군인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에 이르고 그 성문 곁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었습니다. 그들은 블레셋 군대를 치면서 물을 길어오기 위해 계속 싸워야 했습니다. 한 사람이 물을 길어 담는 동안 두 사람은 적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이 사건을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 용사가 물을 길어오기까지 수많은 블레셋 군인들과 싸워야 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 세 용사가 물을 가지고 올라왔습니다. 다윗은 그 물을 보면서 이것은 세 용사의 목숨을 건 피와 같았습니다. 물통에 담긴 물은 물이 아니라, 용사들의 피였습니다. 용사들이 목숨을 걸고 가지고 왔으니 물이 아니라 피였습니다. 최고사령관이라고 하면 인간의 생명을 경시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다윗은 공연히 베들레헴의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여 부하들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흘린 땀, 그들의 옷은 땀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블레셋을 충돌하고 지나갔으니 물이 아니라, 피를 담아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마시고 싶었던 베들레헴의 물인데 마시기를 기뻐하지 않고 그 물을 여호와께 전제로 부어드리기로 하였습니다. 전제라는 제사는 단독으로 드리는 제사는 아니고, 번제나 속죄제를 드릴 때에 제사를 마치면서 포도주를 부어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아마도 다윗의 진영에는 적지만 하나님의 제단을 쌓은 것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의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 이 물을 제가 어찌 감히 마시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을 걸고 다녀온 세 용사의 피가 아닙니까!”라는 말입니다.
다윗의 용사들이 이런 일도 하였습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다윗은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면서 베들레헴을 탈환하기로 소원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고향이 전진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지금 다윗은 적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굳건히 세우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함께 하던 용사들은 다윗의 적은 소원 하나를 이루어드리기 위해 생명을 걸고 적진을 돌파하고 충돌하여 다녀왔습니다. 이것은 군대를 동원하는 것도 아니요, 세 사람의 용사들만이 나선 것이니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만용이었습니다. 살신성인적인 행동은 다만 한 사람 다윗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는 기름 부으신 이스라엘의 왕이요,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였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성민 이스라엘의 왕이요 목자였습니다. 이것은 한 왕을 위한 것이요, 한 걸음 나아가 이스라엘 나라를 위한 것이요,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영혼 구원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들 세 용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왕을 위하여, 왕의 간절히 소원하시니 우리의 목숨을 다하여 그것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신하된 도리요, 부하된 사람의 할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무사안일만을 위하지 않았습니다. 나태한 고위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높은 명성을 얻은 용사였으니 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왕과 백성들,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섬기고 봉사하고 생명을 담보하면서 충성해야 하는 신하임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군사들인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주님의 백성이요, 우리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주님의 구속의 사역을 위하여 부름 받은 소명감을 확실히 하고 새롭게 가져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주님을 위하여 무엇하고 있습니까? 말로만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으로는 아주 미흡합니다. 행동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1:16절에 보면 오랜 신자 나손이라는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행21:16에서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일행 10여명이 지금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는 것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었습니다. 나손은 오랜 제자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집을 선교사들에게 제공하고 대접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라는 말을 많이 아실 것입니다. 상류사회, 귀족 계급의 도덕적인 의무와 책임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로마 사회를 비롯하여 유럽의 여러 나라에 있어, 왕족이나 귀족들은 평민보다는 앞서 솔선수범하고 절제된 행동으로 국가의 초석을 다져왔습니다. 로마제국에서 포에니 전쟁 때에 전쟁세를 신설하게 되었습니다. 재산이 많은 원로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원로원에서는 서로가 먼저 기부하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수레에 돈을 싣고 와서 국고에 가져다 바쳤다고 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관습은 유럽의 오랜 전통으로 중세를 거쳐 근세에 이르도록 리더십의 표본으로 삼았습니다. 어느 나라나 어느 사회든지 혼란에 휩싸이면 일반 국민들은 본능적으로 움츠리고 소극적인 자세로 돌아서게 됩니다. 이것을 ‘방어적인 퇴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때에 지식층에서, 많이 가진 사람들, 우리사회 엘리트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솔선하여야 합니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귀족의 집에서 출전하였습니다.
영국은 의회 민주주의의 창시국이면서도 국왕제도와 귀족제도가 남아있습니다. 영국에서, 아르헨티나와 싸웠던 포클랜드 전쟁 당시에 영국의 앤드류 왕자는 헬기 조종사로 참전하였습니다. 그 왕자의 역할은 전함의 주위에 떠 있으면서 전함으로 날아드는 적의 미사일을 대신 맞는 것이었습니다. 왕실에서 자란 왕자인데, 영국의 많은 병사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먼저 죽겠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지난 국치일 100년을 보내면서 부끄러운 마음도 들고, 분노의 마음도 가득하였습니다. 우리나라를 망하게 하고 이 나라를 일본에 갖다 바친 양반들이 조선총독부로부터 후작은 받은 이들이 6명, 백작이 3명, 자작이 22명, 남작이 45명 모두 76명이 한일합병의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부상으로 엄청난 땅을 받았고, 부와 명예를 대물림하였습니다. 혹한의 추위와 가난과 천대를 받으면서 독립 운동하였던 독립유공자들은 음지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것은 국가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단체 어떤 조직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라고 예외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쯤 이야기하면 다 알아들을 것으로 판단하고 더 이상의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눅12:47-48절에 보면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아닙니까?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였습니까? 그는 많이 맞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 앞에 가서 구원이야 은혜로 받으니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구원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는다고 하셨습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건강도 받았습니다. 일찍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허락받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많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많이 받으신 분들은 주님 앞에서 많이 내놓으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으로 보답하는 것이라고 하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여러분, 각자가 판단하고 선택하고 응답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아무도 여러분은 성숙하게 만들어줄 수 없습니다. 영적 성숙은 여러분 자신이 결정할 문제요, 매일 자신이 책임질 문제입니다. 아무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이 시작해야 하고, 계속 유지해야 하는 과정입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나의 맘 나의 몸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 주소서 가진 것 모두 다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백이 어떤 목회자의 고백이나 신학생의 고백이라고 생각하시면 은혜될 것이 없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 나가서 기도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니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이사야가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십니다.
김길복이라는 집사님은 “천국에 혼자 갈 수는 없잖아요” 라는 책을 써서 자신의 전도 체험을 간증으로 한 내용을 출판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옥 불에 방치해 두고 나 혼자 천국에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전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전도에는 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이 잘 아는 젊은 주부가 있었는데, 그는 이 젊은 주부를 전도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처 그 젊은 주부를 전도하기도 전에 그녀의 남편이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남편이 갑자기 생활을 비관하고 자살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 젊은 주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이 김집사님의 마음 속에 “내가 좀 더 일찍 전도를 했더라면...!” 하는 그런 깨달음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좀 더 일찍 전도를 했더라면...” 그의 남편은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고, 젊은 주부는 그렇게까지 통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를 하라'는 말씀을 따라 전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미용실에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전도하고, 음식을 먹으면서 식당에서도 전도하고, 심지어 목욕탕에 가서도 전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전도를 해서 그는 자그마치 2천명이 넘는 사람을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낸 것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전도의 효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은, 환자를 전도하기 위해서는 3일 금식기도를 한 후 복음을 전하고, 또 매일 밤 10시에는 전도 대상자를 위해 기도를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수고의 대가없이 열매를 거둘 수 없듯이 그는 전도의 씨앗을 뿌리고 그것이 열매를 맺기까지 부단히 수고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책임이요 사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간 칠레의 산호세 광산의 광부들이 구조되는 감격적인 사건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훈훈하던지, 우리는 생명의 소중함과 인류애, 그리고 사랑과 희망을 바라보았습니다. 한 생명을 구원한다는 것이 얼마나 값지고 귀한 일인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작업반장이라는 우르수아가 구조되고 33인이 다 구조되었습니다.
그들은 지구촌의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의 같은 가족과도 같았습니다. 지하 700m, 하루가 지나가는데 수십 년이 지나는 것 같았을 터인데 무려 69일간을 버텨준 광부들도 귀하지만, 그들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구출하려는 노력, 칠레의 대통령과 온 국민이 보여준 열정에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칠레국민들이 우리의 만세인 비바를 외쳤습니다. 우리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또 하나의 비바를 외칠 수 있습니다.
칠레 광부들의 기적적인 생환 소식에 전 세계는 기뻐하였지만, 정작 이들이 소속된 광산업체인 ‘산에스테반’은 막대한 구조비용과 광부들의 손해배상 소송으로 최대 위기를 맞을 것으로 보입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33명 광부를 구조하는 데 든 비용이 최소 22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26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현장에 설치된 ‘희망캠프’ 유지비는 포함되지 않아 실제 비용은 이를 크게 넘어설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도 생명을 구원하는데,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베들레헴 성준 곁 우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우리 주님의 간절한 소원에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존귀한
삼하 23장 13~19절 / 김광일목사
최문경 목사의 저서 ‘순간을 살아서 영원으로’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런던 켄터베리 교회에 니콜라이 집사가 있었습니다. 17세부터 관리집사가 되어 교회 청소와 심부름 같은 잡다한 일과 매일 5분 동안 종치는 일을 했습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종을 쳤던지 런던 시민들은 니콜라이가 치는 종소리에 시계를 맞추었다고 합니다. 신앙으로 양육된 두 아들은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아들들이 “아버지, 이제 일 그만 하세요” 라고 말렸지만, 니콜라이는 그 때마다 “아니야, 나는 끝까지 이 일을 해야 해” 라고 말했습니다. 75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58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종을 쳤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가족들이 임종을 보려고 모였습니다. 그런데 종을 칠 시간이 되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비틀거리며 종탑 아래로 가서 종을 치기 시작하더랍니다. 2분정도 종을 치다가 쓰러져 숨을 거두었습니다. 죽도록 충성한 것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 소식을 듣고 감동받아 시신을 황실 묘지에 안장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의 장례식 날, 런던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닫았고 유흥업소들도 자진해서 쉬는 바람에 그 날이 자연스럽게 공휴일이 되었답니다.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고 충성하였더니 성자의 칭호를 받게 되었고, 온 가족이 귀족처럼 대우를 받는 존귀한 자의 삶이 된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 위기상황에도 왕께 충성을 다하는 용사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강대국 블레셋 군대가 베들레헴을 점령하고 있을 당시 아둘람 요새에 있던 다윗은 적의 손에 넘어간 고향을 바라보며 착잡한 마음에 혼잣말을 합니다.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내게 마시게 할까?” 그러자 세 용사가 적진으로 뛰어들어가 목숨을 걸고 물을 가져왔습니다. 세 용사의 행동에 감격한 다윗은 목이 메였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물이 피로 보여 차마 마실 수가 없어서 그 물을 하나님의 제단에 부었습니다.
세 용사는 왕이 소원하시니 목숨을 다해 이루어드리는 것이 신하된 도리요, 부하의 할 일이라고 믿었던 자들입니다. 특히 세 용사 중 아비새를 향하여 다윗은 ‘가장 존귀한 자’ 라고 불렀습니다. 아비새는 누구입니까?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피난갈 때, 시므이로부터 저주를 받을 때도 다윗의 옆에 함께하며 위로에 힘썼던 자입니다. 비록 아비새가 한 일은 작은 일이었지만 언제나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큰일을 했느냐 작은 일을 했느냐를 보지 아니하시고 최선을 다했느냐를 보십니다.
아비새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아비새처럼 우리도 가장 존귀한 자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말로만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으로는 미흡합니다. 행동하는 신앙이 되어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가장 존귀한 자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가장 존귀한 자가 되려면,
첫째로 충성을 보여야
로렌스 올리비에 (Laurence Olivier)는 ‘햄릿’, ‘폭풍의 언덕’ 작품에 출연하여 ‘연극의 대부’ 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아카데미 작품상, 오스카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그가 배우가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배우가 되려고 극단에 들어갔는데 허드렛일만 시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배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배역을 맡은 사람이 나오지 않아 청소를 하던 올리비에가 발탁된 것입니다. 역할은 궁궐에 뛰어 들어가 왕에게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올리비에는 군복을 입고 자기가 등장하는 장면이 될 때까지 2~3시간 동안 계속 뛰어 다녔습니다. 며칠을 뛰어온 후 왕 앞에 엎드려 “전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라는 30초짜리 장면을 위해 그는 계속 뛰면서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의 차례가 되어 아주 실감나게 연기를 하였습니다. 연기를 인정받은 그는 그때부터 단역에서 조연으로, 점차 조연에서 주연으로 바뀌었습니다. 유명 배우가 된 것은 30초짜리 배역에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세 명의 용사는 다윗 왕에 대한 충성을 보였습니다. 다윗이 물을 떠오라고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닙니다. 혼잣말로 마음을 표현한 것뿐인데 세 명의 용사는 주저하지 않고 블레셋 적진 한 복판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왕에 대한 충성입니다. 충성은 이성적인 판단이나 계산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명령하면 무조건 순종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충성하는 자는 결코 말로 하지 않습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행동으로 옮깁니다. 성서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은 모두 한결같이 주님의 부르심에 충성한 자들입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섬기는 교회를 위해 부담을 느끼지 않고 있다면 안일한 신앙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로 인정받는 비결은 충성을 보여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 사도바울은 권면합니다. 충성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해야 합니다. 큰 일 만 아니라 작은 일에도 충성해야 합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용기 있게 행동하는 충성을 보여야 합니다. 충성하는 것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때로는 남들이 볼 때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을 보여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로 존귀한 자로 세우십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주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충성을 보임으로 면류관을 받아쓰는 은혜가 입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사명을 다해야
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이 미항공우주국(NASA)을 방문했을 때 일입니다. 대통령이 로비를 지날 때 지저분한 바닥을 닦고 있는 청소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바닥을 닦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지금껏 내가 본 청소부 중에서 가장 훌륭한 청소부입니다.” 그러자 청소부는 대통령에게 대답했습니다. “각하, 저는 일개 청소부가 아닙니다. 인간을 달에 보내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 비록 바닥을 닦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맡은 사명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세 용사는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사명감에 투철한 자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는 반드시 이루시기 원하시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게 주신 사명입니다.
항상 기회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명을 감당할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주어진 인생의 시간이 점점 단축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감당하라고 우리에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물질을 주셨습니다. 지혜를 주시고, 일터를 주셨습니다. 사명을 이루라고 생명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움직일 수 있는 건강을 주셨을 때,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재물을 주셨을 때, 내가 일할 수 있는 일터를 주셨을 때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맡겨진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사명에 힘쓰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고자 합니다. 주어진 사명을 다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존귀한 자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사랑을 드려야
소냐 소토마이어(Sonia sotomayer)가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으로 지명되었습니다. 그녀는 2차대전 당시 푸에르토리코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노동자의 딸로 태어난 소냐는 9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두 남매를 기르기 위해 간호사였던 어머니는 두 가지 직업을 갖고 일주일 내내 일해야만 했습니다. 소냐는 8살부터 중증당뇨병을 앓는 등 역경 속에서 성장하였지만 대법관까지 임명됨으로 모두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소냐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그녀가 말하는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입니다. 두 남매가 어릴 때 남편을 잃은 소냐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해 온통 희생하였습니다. 대법관에 지명되는 날 대통령이 소냐를 소개하자 그녀는 인사말에서 지금까지 자기가 성장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기 때문이라며 일일이 감사의 말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에 아주 특별한 분이 한 분 오셨는데 바로 어머니” 라며 일으켜 세웠습니다. 눈물을 가득 담은 어머니가 일어나자 배석한 사람들이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는 두 남매를 기르기 위해 일생을 바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분이라고 소냐는 말했습니다. 한 여인의 희생과 사랑이 여덟 살 때부터 당뇨병으로 고통 받는 딸을 모두가 존경하는 대법관의 자리에 오르게 만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진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 역시 헌신적인 사랑에 감동을 하십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세 용사는 다윗을 향해 희생적 사랑을 바쳤습니다. 저들의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습니다. 생명을 주는 것보다 더 고귀한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하면 목숨을 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일은 언제나 희생적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말로만이 아닌 사랑의 헌신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으며 또한 가장 존귀한 자로 여김 받게 됩니다.
프랜시스 리들리 해버갈(F. R. Havergal)은 어학의 천재였습니다. 풍부한 감성과 영성이 있었으며, 음악의 천부적 재능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건강의 악화로 43세밖에 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찬송시를 써서 교회음악에 기여하였습니다. 해버갈이 본문을 읽던 가운데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 용사들이 다윗의 편에 속하여 함께 하며 승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쫓기는 신세의 다윗에게 속하면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었으나 죽음을 각오한 용사들이 다윗을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해버갈은 주께서 사탄의 세력과 싸우실 때 과연 주님의 편에 설 사람이 누구일까라는 생각이 들어 찬송시를 쓰게 됩니다.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 가” 의 찬송 459장입니다.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누가 죄를 떠나 주만 따를까 누가 주를 섬겨 남을 구할까 누가 주의 뒤를 따라 가려나 부르심을 받아 주의 은혜로 주를 따라 가네 주만 따르네”
우리도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들어야 합니다.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그 하나님의 음성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충성을 보이며, 사명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희생적인 사랑을 드려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존귀한 자로 여김 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