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을 입구에 있는 공동묘지 아름다운 길, 아름다운 마을들
누군가 턱을 괴고 사랑을 속삭였을지도 모를 창문가에 신발을 말리고.. 드디어 바다를 만나다.
바다를 만난 순례자들은 환호를 지르고. 땅끝에 닿은 대서양에 발도 담그고
땅끝으로 넘어가 모든 허물을 밤사이 바다에 씻고 맑은 빛으로 다시 떠오를 해를 보는 신명나는 시간.
내 발끝에 딸린 허물과 부족함이함께 타버리기를...
<30>땅끝으로 SANTIAGO DE COMPOSTELAàFINISTERRE (산티아고 데 콤포스떼라à피니스떼레) 90KM (3일 일정) *SANTIAGO DE COMPOSTELAàNEGREIRA(산티아고à네그레이라) 22KM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산티아고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일부가 버스를 타고 하루 일정으로 피니스떼레를 관광한다. 그리고 소수의 순례자들이 땅끝 마을이라는 그 곳까지 걷는 날을 3-4일 더 늘린다. 우리 부부는 거기에 하루를 더 해, 열 명 안팎의 사람들만 간다는 산티아고 성인의 시신이 다다른 바닷가 마을 묵시아(MUXÌA)까지를 마지막 날로 정하고 길을 다시 떠난다. 산티아고에서의 감격이 순례길의 여독을 풀어 주었는지 말끔한 기분이 된다. 맑은 물에 잘 빤 빨래를 한 번 더 헹궈서 햇볕에 너는 듯한 느낌이다. 빨간 지붕을 머리에 얹은 집들도, 활엽수로 이어지는 산길도 고요함으로 가득하다. 새 소리마저도 귓속 깊숙이 묻힐 조용함. 하늘과 땅 사이가 참선을 하는지 침묵에 빠졌다. 우리 둘의 발소리가 메아리로 돌아 와 나뭇잎의 늦잠을 깨운다. 하나의 화두로 긴 세월 깨달음의 경지를 찾는 스님들께도 썩 어울릴 길이지 싶다. 배낭 주머니에 끼워 둔 좋은 글귀 하나를 꺼내 읽으며 길 벗으로 삼는다. ---시간은 보이지 않는 내 그림자 입니다. 내가 차를 마시면 시간도 따라서 차를 마시고, 내가 화를 내고 싸우면 시간도 ‘화내고 싸운 시간’이 됩니다. 시간은 또 다른 나입니다. 내가 나쁜 생각을 하면 나를 닮아 나쁜 시간이 되고, 내가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시간이 됩니다. 시간은 늘 내 삶의 보폭과 함께 합니다. 내가 빨리 걸으면 시간도 빨리 가고, 내가 헐떡거리면 시간도 헐떡거리며 따라 옵니다. 내가 천천히 걸으면 시간도 천천히 갑니다. 오늘은 놀며 쉬며 빈둥거리며 갈 요량입니다. <김재일의 생명산필에서> 숨 돌리는 시간마저 아까워하며 살아 온 시간을 이제 접으려 한다. 돌아가 새로 맞을 시간은 천천히, 빈둥거리기도 하면서 즐거움으로 채울 것이다. 잡히는 것 없어도 산도 찾고, 서글픈 이웃도 돌아보며 좋은 시간을 만들어 보리라. 우리를 내려 보내신 그 분도 결코 힘겹게만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을 거라고 자연 속을 걸으며 짐작 해 낸다. 이 전 마을들 것과는 비교가 안 될 굵직한 밤송이로 도로를 포장 한 네그레이라(NEGREIRA) 알베르게에 잠자리를 마련한다. 순례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단층침대가 내 차지가 된다. 마침, 아무도 없어 침대 위에 올라가 천정을 향해 두 팔을 저어 보는 철 부족한 짓을 하고 있는데, 배낭에 캐나다 국기를 꼼꼼히 밖아 붙인 청년이 웃으며 방문을 연다. 돌아 갈 곳이 같은 사람을 만난 기쁨에 사는 곳을 묻자, 사실은 미국에서 왔는데 미국인이라는 것이 별로 안전하지 않아 캐나다 표식을 달고 다녔다는 답을 준다. 그런데 이 길에 사는 사람들은 왜 미국인이 캐나다인 보다 위험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고… 침대 수가 채 20개도 안 되는 곳이고, 시립 알베르게가 가까이 없어 3시쯤 되자 자리가 다 찬다. 다음 도착 자부터는 마당에 세워진 2인용 텐트에서 묵고 가야 하는데 아무도 망설임 없이 배낭을 내린다. 저녁시간 누군가 군밤을 만들어 돌리지만 밤이 더 이상 귀물이 아니다. 민들레의 예쁜 꽃이 생각 난다. 흔하지만 않았으면 화분에 소담하게 담아 키워 질 고운 꽃이 밉상으로 견디어 내야 하는 힘겨운 봄과 여름. 입에서 나오는 말도 너무 쏟아 내면 그리 될 건데 나는 왜 하고 싶은 말이 이리도 많은지… 며칠 전부터 베네딕도는 네 잎 크로바를 줍느라 늦은 저녁이 되어야 도착한다. ‘행복’이란 꽃 말을 가진 세 잎 크로바면 되지 굳이 애써 ‘행운’을 찾을 필요가 있냐고 말렸지만, ‘행운’을 찾아서 같이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싶다고 무거운 배낭을 맨 채 허리를 못 펴는 수고로 하루를 보낸다. 오늘은 고운 마음에 탄복한 신이 드디어 고루 나눌 만큼의 행운을 베네딕도 손에 쥐어 주신 날이다. 우리 부부도 세 개나 되는 정성 가득 한 ‘행운’을 받아 기도 책 갈피에 끼운다. * NEGREIRAàOLVEIROA (네그레이라à올베이로아) 32KM 새벽 창 밖으로 안개가 가득하다. 밤을 텐트에서 보낸 사람들이 떠 날 준비를 하면서 아무런 불평이 없다. 하기야 어제 밤에는 해당자가 없자, 장애인용 방을 텐트에서 잘 사람들에게 개방했지만 서로 양보하는 미덕을 보이질 않았던가. 잘 잤냐는 인사에 야경이 좋았다는 답을 한다. 900KM가까이 걸어 온 사람들은 하루 밤 잠자리 때문에 긴 시간 기분을 망치지는 일이 얼마나 바보스러운지를 안다. 네그레이라에서 시작하는 아침 나절의 길은 천상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바다를 향해 목청을 키운 새 소리는 내륙 깊숙한 곳의 새들 과는 다른 음색이 난다. 새 소리로 마음을 씻으며 걷는다. 한 발작 앞서 가는 남편 어깨위로 안개 바다가 펼쳐 진다. 입에서 경탄이 절로 나온다. 아스트로가(ASTROGA)에서 일정이 달라져 작별인사를 나눈 남미 아가씨 안나가 길 옆에서 나온다. 많이 반가웠는지 스틱을 쥔 채로 내가 터질 만큼 꽉 껴안는다. 어제는 알베르게를 지나쳐 불을 피우고 노숙을 했단다. 상당히 피곤해 보이건만 밤 풍경과 소리를 추억으로 가슴에 담았다고 흰 구름보다 환하게 웃는다. 절묘한 고요함과 아름다움이 가득 한, 땅끝으로 가는 길.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일은 아침에 떠날 때 물과 음식을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걷는 내내 음식을 파는 곳을 만나기 어렵고, 겨우 한 두 곳의 BAR가 있을 뿐이다. 더구나 일요일은 먹거리나 마실 것을 구하는 일이 쉽지가 않다. 우리 일행도 저녁은 각자 가진 재료를 다 털어 만든 감자국 비슷한 것에 스파게티 국수를 말아 먹는 식사를 한다. 일상에서 삶의 목표처럼 여겨지는 먹고 자는 일이 흡족하지 않아도 행복하기만 하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아침 출발 길에 나누는 사과 한 알로도 세상 복을 다 받은 즐거움을 찾아 낼 수 있으니까. 올베이로아(OLVEIROA) 알베르게는 수 백 년 된 돌 집을 개조한 운치 있는 곳이다. 따끈한 햇볕에 잠바와 침낭을 뒤집어 널어 말리고, 누군가 턱을 괴고 사랑을 속삭였을 지도 모를 돌담 창문 위에 등산화 두 켤레를 해를 향해 나란히 올려 놓는다. 마을을 들어서며 느꼈던 서늘한 분위기,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인사를 해도 웃지 않고, 나중에 올 테니 알아서 침대를 정하고 기다리라는 메모만 있는 현관, 멈추지 않는 종소리의 이유를 다 늦은 저녁 알베르게를 찾은 봉사자를 통해 알게 된다. 24년 간 긴 병을 앓아 온 86세 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날이라는 설명이다. 마을 어른이 돌아가셨으니 모두 상복을 입고, 하던 일을 멈추고 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단다. 이 곳 사람들이 나누는 훈훈한 정이 마을을 둘러싸고 돌아가는 풍차가 만들어 내는 정경만큼 곱게 느껴진다. * 땅끝 마을 FINISTERRE(피니스떼레) 산이 끝나고 바다가 보이는 길목에서 두 손을 들고,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던 큰 소리를 꺼낸다. 지구의 한 부분을 걸어서 지나왔다는 자족감이 남은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바다 소리, 바람 소리, 새 소리… 살아 있는 내 심장이 뛰는 소리와 늘 함께 해 주는 또 한 사람의 숨소리가 만들어 내는 화음을 어떡해 간직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모든 소리를 어우러지게 지휘하는 햇살의 경쾌함도 내 것으로 하기에는 벅찰 뿐이다. 설렘을 안고, 산과 바다를 따라 한참을 걷다 땅끝에 닿은 마을을 만난다. 피니스테레(FINISTERRE)! 알베르게 앞에 순서를 기다리는 배낭이 줄을 서 있다. 산티아고부터 걸어 왔는지를 끄리덴시알 도장으로 유난히 꼼꼼하게 확인하는 담당자가 BUS 타고 온 사람들을 가려내 사립 알베르게로 돌려 보낸다. 그리고는 산티아고에서 받은 증서와 PASSPORT까지 대조 하고, 화려한 증서에 정성 드린 고운 글씨체로 이름을 담아 내준다. 순서를 기다리는 순례자들이 박수로 축하를 한다. 땅 끝 마을에 짐을 푼 사람들은 석양을 맞이 하며 태울 물건을 챙겨 땅끝에 서 있는 등대 (FARO)로 향 한다. 운 좋게 우리가 도착하자 마자 해가 서쪽에서 마지막 손 짓을 한다. 세상에 별로 많지 않을 풍경과 분위기에 흥이 난 내 짝은 나를 이리 저리 놓고 사진작가가 되어 작품을 만든다. 순례자들이 군데군데 불을 피우고, 뭔가를 태워 날려 보내는 의식을 시작한다. 나는 한 달간 신고 온 양말을 태워 보냈다. 내 걸음에 딸린 부족하고 부당한 것들이 사라졌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서쪽으로 지는 해와 함께 태운 것들이 바다에서 몸을 씻고, 몇 시간 후면 우리가 사는 동쪽에서 맑은 빛으로 떠 오를 것을 생각하니 신이 난다. 먼 길 떠난 해가 사라진 등대에서 내려 오는 길. 한 쪽엔 숲이 우거진 산 길이 있고, 다른 쪽엔 문어 잡이 배들이 밝히는 불 빛이 반짝인다. 대서양의 향내를 폐 가득 집어 넣는다. 바닷가로 내려와 먹는 홍합과 쌀로 만든 해물 스프가 순례자를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풍요로운 삶으로 이끈다. 걸어서 땅 끝에 발을 디딘 나와 남편을 많이 칭찬 해 주고 싶은 날이다. 어떤 시간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게다. 바다 바람을 탄 행복감이 온 몸으로 스며든다.
|
첫댓글 많이 길었지요? 3일 일정을 한회에 넣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 이제 딱 한 회 남았습니다.
아름다운 길, 아름다운 마을들, 글구 가장 돋보이는 아름다운 마음씨에 고운 글구들... 신앙인의 동일한 잣대는 아니라도 열심히 따라 다녔답니다. 땅끝 마을과 바다정경을 분리시켜서라도 앙코르로 딱 3회분만 더 안되나요???
넘치는 칭찬에 구름위에 선 기분이 됩니다.^^ 풍요한 마음으로 읽어 주시니 보잘 것 없늘 글도 넉넉해지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짜여행도 좋았지만 글에서 묻어나는 선생님의 정겹고 훈훈한 인간미가 더 좋았다 생각합니다.
여정길 끝에서 '걸음에 딸린 부족하고 부당한 것들을 태우는' 의식에 동참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