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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 Dilkusha
곽명규
1. >>성당<<
장례 미사는 곧 끝날 것 같으면서도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대부분 무겁고 어두워 보였다. 아주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꽤 먼 사람까지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인과 이별하면서, 동시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자신의 죽음도 미리 조금 맛보고 있는 중이었다. 작가 유지수의 죽음이 옅은 회색의 연기처럼 성당 바닥을 흘러 다니며 사람들에게 전염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문득 목덜미가 썰렁해지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막 그의 약력과 업적이 소개되었고, 끝 순서로 지인들의 조사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제단 앞 중앙통로에 놓인 검은 관 위에는 흰 꽃으로 장식된 커다란 초상이 세워져 있었다. 액자 속의 유지수 안셀모는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육십이 훨씬 넘었다고는 보이지 않는 천진스런 모습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제단 쪽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는 검은 상복을 입은 미망인과 가족들에게로 목례를 보내고 나서, 카메라를 주머니에 넣으며 옆문을 통해 성당 밖으로 나갔다. 가을 아침의 맑은 공기가 콧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김준오 작가--”
누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려는데, 벌써 얼굴 하나가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무작정 따라 나왔지, 내 앞을 지나가길래. ...바쁜가봐?”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아니야. 그냥, 거의 끝난 거 같아서 나왔어. ...반가워. 오랜 만이야.”
그의 손을 잡았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손이었다.
“영성체 때 뒤에서 봤었지. 교우일 줄은 몰랐었는데?”
목소리에서 특별한 반가움이 배어나왔다.
“아, 난 뭐, 그저 , 미사나 안 빠지면 다행이지. 사람들한테 신자라는 말도 못해. ...넌 알짜배기지?”
“아니야. 나도 마찬가지지. 겨우, ...성가대에나 나가는 정도야.”
“성가대에? 야, 놀랍구나. 이 나이에도 노래를 부를 수 있다니!”
놀라움과 감탄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실제보다도 훨씬 키가 커 보였다.
“정규 성가대는 아니고, 장례하고 혼배 미사 때만 해. 노인네끼리 하는 성가대거든.”
“그거 멋지군그래. 백발 성가대라! 정말 훌륭한 얘긴데?”
“훌륭하긴 뭘...”
“안 바쁘면, 커피나 한 잔 할까?”
“그러지.”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동의했다.
“자동차 가져왔어?”
“ BMW야 .”
“그래? ...한 시간 쯤은 놔둬도 괜찮을 거야.”
“아니, 걸어왔다구!”
“아아, 그 BMW!"
우리는 웃으며 언덕길을 걸어 내려갔다.
“별이나 콩 같은 집이 어디 있을 텐데?”
찻집을 찾는 일이 제안자의 의무라고 생각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잘 가는 집이 있어.”
그 말을 듣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명동은 아직 쇼핑객들을 맞을 시간이 안 되었지만 부지런한 가게들은 하나둘 문을 열고 있었다.
2. >>패스트푸드점<<
안젤로--방금 알게 된 그의 세례명이다--는 찻집이 아니라 Q라는 패스트푸드점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시간이 어중간한지 손님이 없었다. 주문을 받는 청년이 얼핏 그를 알아보는 듯 했다. 그는 커피와 비스킷을 쟁반에 받쳐 들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길 건너 명동이 내다보이는 창가에 마주 앉았다.
“커피가 너무 뜨거운데?”
“ 호호 불면서 오래 마시라는 거지.”
잔 뚜껑을 열고 입김을 불어 식히는 동안, 내 머리는 안젤로라는 인물의 프로필을 훑어보느라고 바쁘게 움직였다.
안젤로는 성공한 월급쟁이였다. 그룹의 주력회사 사장까지 올라간 경력만으로 충분히 그렇게 단정할 수 있었다. 인간적으로도 그는 평판이 좋은 친구였다. 비교적 얌전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언행 또한 언제나 모나지 않은 사람이었다.
다만 그의 지위로 볼 때 개인적인 생활만은 매우 화려했었으리라고 짐작되었다. 이제는 회사에서 은퇴를 했지만, 모아 놓은 재산이 적지 않을 것이므로, 상류생활을 계속하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 커피를 마시러 패스트푸드점에 다닌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어울리지가 않아 보였다. 그래서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면 괜찮은 인터뷰 기사--나는 동창 소식지에 편집위원으로서 종종 기고를 하고 있다--를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런데 어떡하다 이런 데를 드나들게 된 거야?”
우선 이렇게 한 마디를 던져 놓고서 그의 표정을 살폈다.
“이런 데라니? 못 올 데 처럼 말하네?”
“못 올 데라는 게 아니고... 예상 밖이라는 거지. ...찻길을 건너길래, 이 옆 M 호텔 커피샵으로 가는 줄 알았어. 후지긴 하지만, 그래도 호텔 아닌가? 대기업 사장님이신데.”
“호텔 커피샵은 갈 데가 못 돼. 재미가 없잖아. ... 여긴 재미있는 데야. 밝고, 빠르고, 젊고!”
“시끄럽지 않아? 항상 지금 같진 않을 거 아냐?”
“시끄럽지! 젊은이들이라 여간 웃고 떠드는 게 아냐. 하지만 난 그 소리를 들으면 젊음으로 샤워를 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져. 그래서 한 주일에 한 번은 꼭 커피를 마시러 오지. 소설책을 갖고 와 읽으면서 두어 시간 씩 앉았다 가곤 해.”
“소설? 무슨 소설을 읽어? ...내 소설집도 보내 줘야겠네--”
“그래, 싸인 해서 보내 줘. ... 요새 읽고 있는 건 <위대한 개츠비>야. 영어 원문이지.”
“영어로 읽어? 대단하구나! ...어렵진 않아?”
“읽을 만 해. 사전을 자주 찾아보긴 하지만.”
“...그렇게 읽으면 속도가 너무 느릴 것 같은데?”
“ 천천히 읽는 것도 좋더라구. 오히려 소화가 깊게 되는 것 같애. ...; 여기 올 때만, 한 번에 한 챕터 씩 읽고 있지. 길면 두 번에 나눠 읽고.”
“ 그렇게 학구적인 사람인 줄 몰랐는데?”
“아, 내가 지금 학생이라는 얘기를 안 했군!”
“학생? 학교에 다닌단 말이야? ...아아, 역사나 철학 같은 강의를 들으러 다니는구나. 노인대학 같은 데에.”
“그런 학교가 아니고, 매일매일이 완전히 수업시간으로 차 있는, 그야말로 옛날식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이라구.”
“에이, 지금 나이에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어디 있어? 불가능이야, 우리나라에선.”
“그래서 내가 직접 학교를 만들었지. 학생 겸 교장이 된 거야.”
“학교를 세웠어?”
나는 말끝에서 벌어졌던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라 곧 감탄할 채비를 하고서, "그래, 정말 학교를 세웠다니까!."라는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아직 학생은 나 하나 밖에 없지만, 하하하.”
“학교가 어딘데?”
호기심이 목구멍 밑으로부터 치밀고 올라왔다.
“어디라고 집어서 말하기는 어렵지. 세상 도처에 교실이 있거든. 과목별로 장소가 다른데다가 과목 수도 굉장히 많아서 말이야. ...들어 볼래? ...초등학교 때 시간표 기억나지? <국산사자> 말이야. 중고등학교 때는 그 과목들이 세분되고, 그 위에 <영독불>과 <음미체>가 더해졌었잖아? 지금 내 시간표엔 그런 과목들이 다 들어있어. 거기다가 <특별활동> 시간까지 있고, 여학교에나 있던 <가사>까지 포함돼 있지. 엄청나지 않아?”
“그 많은 과목들을 한꺼번에 배운다구? ...학생 겸 교장이라면서... 그럼 독학이라는 뜻인데... 불가능이야, 그건!”
나는 어이가 없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불가능이라고 단정할 건 아니지. 주입도 암기도 없고, 또 시험도 없이, 내 마음대로 내용과 진도를 정하면서 가는 완전 자율 학습이니까.”
“ 글쎄 그렇다면 모르지. ...자율학습이라--. ... 조금은 알 것도 같군. 그러니까, 성가대도 음악 과목의 자율학습이겠네.”
“ 그보다는 특활이라고 봐야겠지. 음악 시간은 따로 있고.”
“아아, 합창 동아리니까 특활이란 말이지!”
이제는 그의 학교가 어떤 곳인지 대략 그림이 그려졌다.
“ 그렇다면 , 오늘은 무슨 과목이 있는 날이야?”
“ 오늘은 원래 두 과목이 있는 날이었지. 오전에는, 말하자면 국어 시간인데, 요즘은 한국문학을 훑는 중이어서, 김유정 생가를 방문하러 춘천을 다녀올 예정이었어. 장례미사 때문에 휴강이 되고 말았지만. ...하기는, 유지수가 유명한 소설가였으니까, <한국문학>에서 <현대문학 특강>으로 제목이 바뀐 거라고 볼 수도 있겠네.”
“...그럼, 나도 이름은 없지만 소설가는 소설가이니... 지금 이 자리도 <현대문학> 강의실인 셈이군 그래, 하하하.”
일부러 큰 소리로 웃으면서 나는 가책을 느꼈다. 나이가 흠씬 들어 소설가로 등단하기는 했지만, <바닷가 여인숙>이라는 중단편집 하나를 낸 뒤로는 주로 집에서 손녀딸이나 보며 창작생활은 매우 느슨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린 학생--자칭 학생인 안젤로를 이렇게 표현해 본다--까지도 관심을 보이고 있는 김유정 생가 방문을 소설가인 나 자신은 생각조차 안 해 보았다는 것이 부끄럽게마저 느껴졌다.
“김유정 생가라면 나도 한 번 가 보려던 곳인데, 같이 가지 않을래, 지금?”
“시간이 될까 몰라. 오후 세시 음악시간엔 강사까지 초청해 놓아서, 늦으면 안 되는데--”
“ 지금 바로 가면 10 시 기차를 탈 수 있을 거야.”
“그럼 얼른 가 보자.”
그는 빠르게 결정했다.
3. >>기차<<
용산역에서 떠나는 청춘열차는 평일 아침이어선지 텅 비어 있었다. 유럽식으로 군데군데 칸막이를 한 깨끗한 기차간은 Q의 이층 창가처럼 한가롭게 앉아서 이야기를 이어가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안젤로, 자네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니, 은퇴 뒤엔 누구보다도 편안하게 지낼 줄 알았는데, 웬 공부에 그렇게 엄청난 욕심을 내는 거야? 한두 과목도 아니고.”
“젊어지고 싶어서지. 학생 때 처럼 매일 학교에 다니면, 그 때 처럼 젊어질 것 같아서. ...그때 우리가 젊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이 때문만이 아니라 공부 자체가 주는 특수한 에너지 덕분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는 말처럼, 공부를 하면 젊어지는 것이라고 말이지. 난 젊어지는 에너지가 필요한 거야.”
“젊어져서는 뭘 하게? 이제 와 새삼!”
나는 장난을 섞어 웃으며 물었다.
“늦었지만, 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
“뭔데? 아직도 못 이룬 게 있었어?”
“어렸을 때의 꿈이지. 음악가가 되고 싶었던 꿈.”
“아, 맞아. 노래를 잘 불렀었지. ...하지만 음악가가 되고 싶었으리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는데? ...맨날 글쟁이 유지수하고만 어울려 다녔었기 때문일까?”
“그래, 그땐 지수하고 정말 친했었어.”
“그러고 보니 의문이 하나 생기는군. 소설가와 음악가로, 서로 갈 길이 다른 두 사람이 그렇게 친했던 이유가 뭐였을까 하고 말이야.”
“같은 이상을 공유했었다고 보면 어떨까? 소설가나 음악가나, 가는 길이 다른 것처럼 보여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이상을 가진 것 아니겠어?”
“그 말엔 동의할 수 있겠어. ...그럼, 지수와는 그 뒤로도 줄곧 친하게 지냈겠네, 최근까지? 고등학교 때 친구가 흔히 평생 친구로 가니까.”
“그러지는 못 했어. 졸업 후에도...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학교는 달라졌지만 한 동안은 어울려 다녔었는데... 결국은 서로 가는 길이 달라서... 2 학년 가을쯤부터는 점점 멀어지게 됐지.”
“그건 혹시 지수가 소설가의 길로 계속 치달아 간 반면에, 자네는 음악가의 길을 포기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상의 공유는 이제 끝난 거라고 봐야 할 테니까.”
“글쎄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평범한 소시민의 길을 택했다고 해서 음악까지 내던졌던 건 아니었어. 전공은 아니었지만 혼자 오히려 본격적으로 음악을 파고 들어갔었거든. 그건 지수도 알고 있었어. ...어쩌면 우리가 이상이 아니라, 현실을 보는 눈이 달랐던 것 아닐까 싶어. ...하여간 그 뒤로는 그리 가까이 지내지 않았지.”
“아아, 그래서 오늘 장지에 따라가지 않았군. 아까부터 그게 이해되지 않았었어.”
“꼭 그래서는 아니야. 오후에 약속만 없었다면 장지까지 갔을 거야. 그 동안 너무 멀리해 미안했었다는 말을 들려주고 싶었어. 아까 미사 때도 속으로 그런 말을 하기는 했지만.”
안젤로는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낯선 시골 풍경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젊음>의 그림자 속에서 <슬픔>의 푸른 빛깔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4. >>김유정의 집<<
크고 번듯하게 생긴 김유정의 양반집 생가를 둘러보는 동안 내 머릿속은 할아버지 생각으로 차 있었다. 할아버지의 생애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에게서 여러 차례 들은 단편적 이야기들을 짜 맞춰 나 자신이 재구성해 놓은 그의 일대기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유정이 그 집에서 태어나던 무렵, 할아버지도 충청도의 어느 양반집에서 외아들--나의 아버지--을 낳았었다.
할아버지는 원래 시문과 가곡을 좋아했던 한량이었는데, 일본 치하에서 어린 외아들--나의 아버지--을 기르며 우울증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결국은 자식의 일본식 교육을 멀리하고 자신은 술과 도박을 가까이해 가산을 축내기 시작했다. 외아들이 십대 후반 들어 가출을 한 뒤로는 더욱 심한 방탕으로 일관하다가, 마침내 전 재산을 도박의 형식을 통해 독립군의 비밀자금으로 내주고서 남의 집 문간방을 얻어 살았다.
그런 생활은 나중에 아들이 귀향해 작은 집 한 채를 지어 드리기까지 십년 넘게 계속되었다. 해방 후에는 서울로 모셔 가려는 아들의 권유를 계속 거절하며 고향의 작은 집에서 할머니와 외롭게 살았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부친의 방탕에 희생된 불운한 아들로만 자신을 여겼고, 그래도 타고 난 효심 덕에 부친을 미워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방탕만은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다. 일찍부터 나에게 술과 도박을 멀리하라고 이를 때마다 자신의 부친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곤 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할아버지 혼자 병이 들어 서울집으로 모셔다 놓은 뒤로도, 아내--나의 어머니--에게만 간병을 맡겼을 뿐 외아들로서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달리 실제적인 사람이었고, 술도 도박도 여자도, 그리고 시문도 노래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김유정처 럼 교육만 잘 받았다면, 아버지도 문인이나 음악가가 되었을까?”
생가를 돌아보는 동안 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의문이었다.
안젤로에게는 그런 내색을 할 수 없었다. 그 또한 말없이 집 안팎을 둘러보기만 했다. 기차를 기다리며 역 부근에서 동동주 한 잔을 곁들여 막국수를 먹으면서도, 김유정의 생가가 크고 좋더라는 것 말고는 둘 다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은 내가 지금 자네를 밀착취재하고 있는 중이라네. 대화도 모두 인터뷰를 겸하는 거고. ...소식지에 실을 기사를 쓰려고 말이야..”
돌아오는 기차에서 나는 안젤로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다.
“하지만 만일 싫다면 기사를 쓰지 않겠네.”
“아냐, 괜찮아. 알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지 물어봐. 숨길 일도 없고, 또 내 생활을 소개해서 누군가에게 참고가 된다면 좋은 일이지, 뭐.”
그의 표정도 목소리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고마워. 그럼, 오후 수업에도 계속 따라다닐게. ...그런데, 참 , 유지수 기사도 써야 되는데 말이야. ...장례미사는 다 찍어 놓았지만, 학교 때 사진이 있으면 좋겠는데, 어디서 구하지?”
나는 기대를 품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두어 번 눈을 껌뻑이고 나서, 집에 사진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5. >>홍난파의 집<<
기차는 알맞은 시간에 왕십리역에 도착했다. 지하철로 갈아타고 서대문에서 내려 정동 맞은편 언덕길로 올라갔다.
“저 병원 건물 한 쪽에, 김구 선생의 경교장이 붙어 있는 것 알지?.”
병원 앞을 지나가다가 안젤로가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몰랐어. 이쪽에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게 여기였구만!”
“그렇다대! 나도 최근에 알았어. 다음 <한국사> 시간에 한 번 와보려고 해.”
“나도 청강생으로 받아 줘.”
나는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마지막 재산이 경교장까지 흘러 들어갔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좋지. 환영해. 학생 수가 느는 것은 반가운 일이야. ...참, 혹시... 딜쿠샤라는 집 알아? 이 부근에 있다던데...”
“딜쿠샤? ...딜쿠샤라면, ...샹그릴라하고 같은 말 아닌가?”
“글쎄... 같다고 할 수 있겠지.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라는 뜻이니까,”
“이 동네에 그런 멋진 집이 있다구?”
“아아, 정말 딜쿠샤라는 게 아니라, 이름이 그렇다는 거지. 일제 시대에 미국 기자가 지은 집이라는데... 독립운동을 지원하다가 잡혀 갔었다나봐. ...그 집을 찾으려고 몇 번 왔었는데 못 찾아서, 혹시 아나 하고....”
“미국 기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니, 참 감동적인 이야기구만!”
그 말과 함께 할아버지의 늙은 얼굴이 떠올라 미지의 젊은 미국인과 겹쳐졌다.
“그렇지? 자기네 나라 일도 아닌데 말이야. ...어쩌면 그래서 일부러 특파원을 자원했을지도 몰라. 안 그래?”
“그래, 맞아. 자신의 이상을 펴려고 왔었던 걸 거야. 그러니 그의 집이 딜쿠샤였을 밖에.”
“아아, 그러니까, 이상향을 찾아서 온 게 아니라, 그걸 만들러 왔던 거로구나! 이제 알겠어. 이상향은 스스로 만드는 거야!”
안젤로는 두세 번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했다.
오른 쪽으로 갈라진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올라가니 복원된 성벽이 보였고 그 밑에 새로 조성된 공원이 보였다. 한 쪽에 야외무대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 앞에 홍난파의 작은 이층집이 서 있었다. 안젤로의 오늘 음악 클래스가 열리게 되어 있는 곳이었다.
푸른 담장이가 둘러쳐진 창문들이 커튼을 열어젖히고 우리를 내다보는 듯 했다. 안에서는 난파의 손주라는 초로의 여인이 혼자 앉아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안젤로가 그녀와 인사를 하고서 뒤를 돌아보며 나를 불렀다.
“여기는 제 친구인 소설가 김준오 씨입니다. 난파 선생님께 관심이 많다고 해서 함께 왔습니다.”
“네, 어서 오세요. 저의 할아버지께서는 작곡가셨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얼린이스트시기도 했었죠. 그래서 가곡 외에 바이얼린 곡도 여럿 남기셨어요, 물론 동요도 아주 많이 지으셨고요. 고향의 봄과 낮에 나온 반달도 할아버지 곡이에요.”
“아, 그렇습니까? 저는, 어제 온 고깃배가... 내 놀던 옛동산에... 그런 가곡이 선생님 작품이라는 정도 밖에 몰랐는데요.”
“그 만큼 아시는 것도 굉장하신 거죠.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피아노를 칠 테니 노래를 불러 주시겠어요?”
“노래는 여기 이 성악가 친구가 불러야지요.”
“아니에요. 여기 오시는 분들마다 노래를 청하고 있답니다. 많은 분들이 불러 주실수록 할아버지께서 좋아하실 거예요.”
“그렇긴 하겠군요.”
그녀는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 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료.”
음정은 그런 대로 틀리지 않고 부를 수 있었으나, 피아노와 호흡을 맞추는 일이 쉽지 않았다. 시조로 된 이 노래의 중장과 종장 사이에 간주가 있는 것을 모르고 노래를 이어 부르다가 멈칫해야 했을 때는 계면쩍은 웃음조차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집안은 음악가의 숨결이 남아 있어 아름다웠다. 난파 선생의 사진들과 함께 일생을 요약한 연대기가 벽에 붙어 있었다. 한쪽에 친일행적에 관한 논란까지 요약되어 있었다. 전쟁 때 일제로부터 의뢰받은 선전곡들을 작곡한 경력이 있어 친일로 분류되었다는 것이었다.
“적극적인 친일이었다고 보지는 않지만, 그런 작품을 썼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어, 이렇게 스스로 공개하면서 후손으로서 대신 용서를 빌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안젤로, 성악가께서 몇 곡 불러 주셔야지. <한국가곡 특강>이라고 여길 테니까.”
“그래요. 다른 분들이 오실 때까지 계속 부르세요.”
그녀가 나를 도와 말했다. 안젤로는 듣기 좋은 바리톤의 목소리로 반주에 맞춰 정확하게 노래를 불렀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 하기. 장하던 금전벽 위 잔재되고 남은 터에.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디 마오. 뉘라서 저 바다를 밑이 없다 하시는고.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간다...
“이런 노래들이 모두 난파 선생님 곡인 줄은 몰랐군요. 참 아름다운 노래들인데--”
그렇게 말하는데, 현관문이 열리고 여성 방문객 두 명이 들어섰다.
“ 이제는 바통을 넘겨드릴 수 있게 됐군요.”
안젤로는 그녀들을 쳐다보며 피아노 곁을 떠나려고 몸을 돌렸다.
“아니에요. 더 불러 주세요. 우리는 노래를 들으려고 온 거예요.”
그녀들은 도리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럼 끝으로 하나만 부르겠습니다.”
그가 마지막 노래를 부르는 동안 나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금강에 살으리랏다. 금강에 살으리랏다. 운무 더리고 금강에 살으리랏다. 홍진에 썩은 명리야 아는 체나 하리오.”
어쩌면 이 노래에 홍난파의 진심이 담겨 있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가로서의 성공과 자기실현조차도 덧없는 인생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제는 산속에 들어가 깨끗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2 절에서 그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이 몸이 슬허진 뒤에 혼이 정녕 있을진대, 혼이나마 길이길이 금강에 살으리랏다. 생전에 더럽힌 마음, 명경같이 하고저.”
끝 구절이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명경같이 하고저. 명경같이 하고저.”
홍난파는 그 구절을 통해 용서를 빌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마구 피어올랐다.
“우리 집에 들렀다 갈래?”
집을 나오면서 안젤로가 불쑥 말했다.
“지수 사진을 줄게.”
6. >>아파트<<
그의 집은 이촌역의 철길 옆에 있는 작은 아파트였다. 복도식이어서 처음부터 놀랐었지만, 집안에 들어선 다음에는 방이 두 개 밖에 없다는 데에 또 놀랐다.
“집이 아담하구만. 전에 주소가 압구정동이었던 것 같은데, 언제 이리 온 거야?”
“육개월 전에 전세로 왔지. 그 집은 정리했고, ...집이 작아 보이지만 혼자 살기엔 외려 큰 것 같아. 나중에 집사람이나 돌아오면 알맞아질는지...”
“아주머니가 어딜 가셨는데?”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으응, 미국에. ...딸애가 아기를 낳았는데, 직장에 나간 동안 봐 달래서.”
“아아! 그럼 곧 오시겠네.”
“언 제가 될지 몰라. 오더라도 곧 다시 가야 될 거야. 프리스쿨 보낼 때까지는 집에서 누가 봐 줘야 되니까. ...베이비시터 값이 감당 못하게 비싸다더라고.”
“그런데, ...그 동안 여기 있는 사람은 어떻게 살지? 남자 혼자서.”
.“ 다 적응하고 살게 마련이지. 밥해 먹는 일도 자꾸 하니 이골이 나더라구. 웬만한 반찬은 만들어 먹고 있어. 앞으론 김치도 담그려고 해.”
“김치야 사 먹는 것 아냐? 우리 집에서도 안 담그는 지가 오래 됐는데.”
“사 먹는 게 편하긴 하지만, 재료를 뭘 쓰는지 몰라서 말이야.”
안젤로는 냉장고에서 꺼낸 야채를 잘라 믹서에 넣고 즙을 내서 내밀었다. 보기보다 훨씬 맛이 상큼하고 역한 데가 없었다.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마누라를 데리고 와서 좀 배워 가야겠어.”
“에끼, 이 사람! 공연히... 이런 얘긴 입도 뻥끗하지 말게.”
그 말을 끝으로 부엌을 나와 그의 방으로 갔다. 데스크탑 컴퓨터가 있는 책상 주위에 사진이 잔뜩 든 상자들이 놓여 있었다.
“ 요즘은 남는 시간에 옛날 사진 스캔을 하고 있어. 공부나 취미로 하는 건 아니고, 장기 프로젝트로 하고 있는 거지. 스캔 작업이 끝난 뒤엔 사진들을 없애 버리려고 해.”
안젤로는 오래 돼 보이는 앨범 한 권을 꺼내서 한 장씩 넘겨 갔다.
“여기 있군. 지수하고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이야.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지.”
“어디 가서 찍은 거야?”
“땅끝.”
“땅끝? 전라남도 제일 남쪽 끝 말이야?”
“그렇지. 그 땅끝에 가서 찍은 거야. ...이 사진 쓸래?”
“그래. 괜찮겠는데? <유지수 땅끝으로 가다>라고 제목을 붙이면 근사할 것 같군.”
안젤로는 사진을 꺼내려고 투명 필름으로 된 덮개를 조심조심 들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덮개가 열리자 그 밑에 끼워져 있던 사진들이 조금씩 움직이면서 정렬이 흐트러졌다. 그는 땅끝 사진을 집어 건네주고, 남은 사진들을 하나씩 바로 놓으면서 차근차근 덮개를 덮어 가기 시작했다.
“ 거기 , 그 여학생은 누구야?”
지수와 안젤로 사이에 교복을 입은 단발머리 여학생이 서 있는 것을 보자 반사적으로 질문이 나왔다.
“응, 그곳, 민박집 딸이야.”
“어리네? 몇 학년이야?”
“고 1이었지. ... 원래는 고 2 라야 맞는데, 중학교 졸업 후에 한 해를 쉬었다더라구.”
“어리긴 해도, ...귀엽다고는 할 수 없고, ...깨끗하게 생겼네, 시골 학생 같지 않아. 그렇다고 얄밉거나 새침한 것도 아니고, ...기품이 있다고 할까.”
“그렇게 보이지? 실제로는 더 기품 있게 생겼었어.”
그는 한참동안 사진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앨범을 닫았다.
“그럼, 이젠 사진도 받았고 하니 그만 갈까, 나는?”
안젤로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 먹고 가야지, 저녁 시간인데. 금방 차려 줄 수 있어.”
그의 말투가 진정으로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러지 말고, 나가서 맥주나 한 잔 하지. 내가 취재비로 쏠 테니까.”
나는 학교신문을 만들던 옛날을 떠올리며 그때처럼 취재비를 받는 척하고 거짓말을 했다.
“쏜다구? 그거 반가운 소리군. 취재비는 지어낸 말이겠지만.”
그의 목소리에도 즐거움이 들어 있었다.
집을 나서자 바로 이촌역이었다.
“내가 잘 가는 데가 있지.”
안젤로는 또 앞장을 섰다. 그를 따라 지하철 역 안으로 들어섰다.
“역사 안에 먹을 데가 있어?”
“아니, 한 정거장 가야 돼.”
때를 맞춘 듯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방송이 들려왔다.
7. >>지하철<<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저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안젤로는 반대쪽 문 앞으로 가서 섰다. 나는 그 옆의 좌석 앞에 손잡이를 붙잡고 섰다.
“ 여기 앉으세요.”
청년 하나가 일어서며 자리를 권했다.
“아니, 괜찮아요.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니까.”
나는 당황해서 황급히 말했다.
“다음 정거장에선 다들 내린다네. 종점이니까.”
안젤로가 킥킥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그래서 문간에 서는 거라고! 괜히 자리 양보나 받지 않으려고 말이야.”
그 때 옆 칸으로부터 누군가 들어오려는지 사잇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할머니 한 분이 들어서고 있었다. 안젤로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할머니가 천천히 다가왔다.
“아주머니!”
안젤로가 큰 소리로 할머니를 불렀다. 안젤로를 쳐다보는 할머니의 눈에 갑자기 반가움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하모니카는 왜 안 불어요?”
안젤로가 천원짜리 지폐를 내밀다 말고 손을 멈추며 물었다.
“잃어버렸다우. 누가 훔쳐갔는지...”
안젤로는 다시 지갑을 열고 만 원 짜리 지폐 한 장을 집어 내밀었다.
“이걸로 중고 하모니카를 사세요. 아주머니 하모니카 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은데--”
나는 안젤로와 할머니와 무표정한 주위 사람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 이 장면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해 진 내 얼굴이 유리창에 비쳐 있어 눈을 돌렸다.
8. >>마트<<
“이 열차의 종착역인 용산입니다.”
열차를 내려 사람들 틈에 섞이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역사를 빠져나가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장부터 좀 보고.”
그는 S 마트를 향하고 있었다. 내일 먹을 찬 꺼리를 사려는 것이려니 생각하며 뒤를 따라갔다. 그는 캔 맥주 큰 것 몇 개와 바나나 작은 꾸러미 하나를 집어 바구니에 담았다.
“찬 꺼리는 다 있나봐?”
계산대를 떠나며 내가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아니, 지금 먹으려는 거야. 맥주나 한 잔 하자고 했잖아?”
“...맥주 집에서 먹자는 거였지. 여긴 마트잖아?”
“따라와 봐.”
그는 또 한 걸음 앞서 걸어갔다. 마트 옆에 푸드코트가 있었다.
“빈대떡이나 몇 장 사 봐.”
그가 시키는 대로 빈대떡을 주문했다. 안젤로는 구석진 곳의 빈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내가 잘 가는 데가 있다고 했지? 마트에 드나들면서 개발한 거야.”
나를 쳐다보며 그는 환하게 웃었다. 한 쪽 눈을 찡그려 윙크마저 보내고 있는 것으로 느껴질 만큼 큰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 전염된 듯 내 마음도 한결 가볍고 유쾌하게 바뀌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안젤로의 하루 공부가 끝난 것을 축하하며!”
나는 맥주 캔을 눈 높이로 쳐들었다.
“김 작가의 취재 여정이 끝난 것을 축하하며!”
안젤로가 내 말을 흉내내며 캔을 부딪쳤다. 빈대떡이 구워졌다는 신호가 전광판에서 깜빡거리는 것이 보였다. 한 낮이 끝나고 저녁이 시작되었다. 술에 취할 일 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진 스캔 말이야. 왜 굳이 앨범에 있는 사진들을 꺼내서 스캔을 하는지 모르겠어. 디지털 앨범을 만드는 목적이 진짜 뭔지--”
“ 뭐, 특별한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그저 종이 앨범이 부피가 크니까 줄여 보려는 거지. 아이들한테 간단히 유에스비 한 개에 담아서 주면 좋을 것 같아서...”
“죽을 때에 대비한 프로젝트로군, 그럼?”
“하하, 그런 셈이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 아냐? 지수가 저렇게 간 걸 봐도.”
“그렇긴 하지. 그런데, 힘들진 않아? 매일 하는 공부도 많은데...”
“힘들 건 없어. 시간 나는 대로, 하루에 몇 장 안 하니까. ...사실은 오히려 재미가 있는 편이지. 스캐너에 사진을 올려놓고 기다리노라면, 그 사진을 찍던 때의 일들이 떠오르거든.”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쓰는 셈이군 그래!”
“그렇지. 하지만 항상 재미있기만 한 건 아니야. 부작용도 있지.”
“부작용?”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은 일들도 있거든. 잊어버리고 싶은 일, 잊어버린 줄 알았던 일들이 되살아나 공연한 괴로움 속에 빠지게 되는 경우 말이지.”
“그렇기도 하겠어. 하지만, 그래도 계속할 수밖엔 없겠지?”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빈대떡도 바나나도 모두 먹어치웠다. 취기도 적당히 올라왔다. 기분은 빠른 배를 타고 달리는 듯 상쾌했다.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간다. 물 맑은 봄 바다에 배 떠나간다.”
입속으로 노래가 흥얼거려졌다.
“몇 시야? 지하철 끊어지려면 아직 멀었겠지?”
“아직 멀었지, 몇 시 안 됐어. ...하지만 이제 그만 가자.”
“그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용산역으로 올라갔다. 내 입에서는 또 노랫소리가 새어나왔다.
“야, 안젤로. 맥주를 내가 쏜다고 분명히 말했었는데! 그 S 마트에 저녁 장보는 줄 알고 따라갔다가, 날치기를 당해 버렸잖아. ...이대로 갈 수는 없지. 날 따라와 봐. 나도 아는 데가 있으니.”
나는 취한 사람처럼 일방적으로 말하고는 앞장을 서서 걸어갔다. 힐끔 돌아다보니 안젤로는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복수를 해야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9. >>광장<<
용산역 광장--3층에 있었다--은 지하철 뿐 아니라 멀리 가는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붐볐지만, 워낙 넓어서 답답하지는 않았다. 편의점에서 큰 맥주 캔 두 개를 사고, 옆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작은 닭발 튀김을 산 뒤, 그 앞의 파라솔 테이블에 가 앉았다.
“어때? 베니스의 싼 마르코 광장에라도 온 것 같지 않아?”
안젤로가 따라 웃었다. 나는 그를 더 웃기고 싶었다.
“아니, 베니스가 아니라, 땅끝 바닷가에 온 거야! ...넌 안젤로지? 난 유지수 안셀모야. 우리는 세례명까지 비슷할 만큼 친한 친구로구나. ...내일 아침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보자꾸나.”
안젤로는 웃지 않았다. 나는 말을 멈췄다. 옆 테이블에 앳된 여학생 두 명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와 앉았다.
“우리 주인집 따님들이 오셨네. 같이 사진 한 장 찍자고 할까?”
나는 다시 장난을 치고 싶었다.
“ 그만 해, 김 작가,”
안젤로가 짧은 말로 나를 제지했다. 목소리가 굵고 무겁게 깔려서 자못 위압적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잠깐 동안 서로 말을 잃었다.
여학생들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일어서 기차시간표가 깜빡거리는 전광판 쪽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그애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아까 그 땅끝 사진 말이야. 사실은 그때 사건이 좀 있었어. 결국 그 여파로 지수와 멀어지게 된 사건이지.”
안젤로가 전광판 쪽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나는 긴장이 되어 가만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는 무엇에 이끌리고 있는 사람처럼 허공에 눈길을 고정한 채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때 우리는 무작정 남쪽으로 떠났었는데, 땅끝에 이르러 더 갈 데가 없게 됐지. 거기 잠시 묵고 나면 서울로 돌아가야 했어. 2박3일 밖에는 있을 수 없었으니까, 제대로 있을 날은 둘째 날 하루뿐이었지. 그날 이웃집 배를 얻어 타고 가까운 섬에 가보기로 했었어. 맑은 날이었지. ...그런데 아침에 지수가 갑자기 배가 아프고 오한이 난다고 하는 거야. 피로했던 데다 더위를 먹은 것 같았어. 섬에 가는 걸 취소하려고 했지만, 지수는 나 혼자라도 배를 타야 된다고 우겼지. 결국 혼자 배를 타고 나가기는 했지만, 도중에 일정을 단축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 지수한테 미안하고 걱정이 돼서였지.
집에 도착하니 데레사--사진에 있는 그집 딸 이름이 데레사였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어. 지수는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팔팔한 모습으로 그애와 놀고 있었지. 날 보는 순간 깜짝 놀라던 지수의 얼굴엔 배신자의 어설픈 웃음이 얹혀 있었어.“
“데레사를 좋아했구나, 안젤로?”
“그래, 맞아. 그 전날 처음 데레사를 보았을 때, 그애는 세 살 아래 여동생이 아니라 장래의 애인처럼 보였었어. 물론 그때 한 눈에 사랑에 빠졌다는 건 아니지만, 자네 말처럼 깨끗하고 기품 있는 모습이 내 마음속을 파고 들어왔다는 것만은 분명해. 소설가인 자네가 잘 알겠지만, 그맘때엔 짧은 순간의 눈빛 하나로도 모든 걸 알 수 있잖아? 날 바라보는 데레사의 눈 속에도 내가 새겨지고 있었다는 게 느껴졌었지. 우리가 서로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건 지수도 눈치 챘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지수는 나를 억지로 내쫓아 놓고서 데레사와 종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거야.”
“흠, 그렇게 사건이 진행되었군.”
“나중에 나한테 자랑삼아 한 이야기에 의하면, 그날 지수는 데레사에게 영화 <기적>--수녀원의 고아였던 여주인공의 이름이 데레사였어--이야기를 들려주며, 그 영화에서 데레사가 사랑했던 남자가 바로 자신이었던 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던 거야.”
“흠, 그렇게 해서 데레사를 빼앗겼고, 그 때부터 지수를 미워하게 된 거군? 이해가 돼. 나라도 그랬을 거야.”
“그렇게 된 이야기가 아니야. 친구 사이의 삼각관계에서는, 하나가 먼저 앞서 나가면 다른 하나가 조용히 양보하는 일도 있는 거거든.”
그는 나를 타이르듯이 말했다.
“ 하긴 그 당시 우리들의 보편적인 생각이 그랬었지. ...그러니까 그 일 때문에 바로 지수를 멀리하게 된 건 아니었네!”
“그렇지. 바로 그 때부터가 아니라, 나중에 두고두고 생각하며 나 자신이 미워져, 결과적으로 지수를 볼 수 없게 된 거지.”
“아니, 피해자인 자신이 미워지다니, 왜?”
“잘못이 나에게 있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내가 좋아했던 데레사를 지켜 주지 못한 잘못!”
“양보를 하기로 결심했었다면서?”
“그 결심이 잘 못 됐던 걸 알게 된 거지.”
“양보했다는 걸 후회하게 된 거구만,.”
“그게 아니야. 만일 지수가 데레사를 정말로 좋아했었다면 내 양보는 적어도 후회할 일은 아닐 수 있었어.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거든. 지수가 진심이 아니었다는 걸 말이야.”
안젤로는 말을 끊고 멀리 광장의 맞은편 벽을 응시했다. 벽에서는 커다란 물레방아가 크리스마스의 장식처럼 반짝이는 작은 전구들로 몸을 감은 채 세월을 되돌리려는 듯 삐걱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옛날의 땅끝을 바라보는 것 같았고, 나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다음에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괴로워. 긴 여름방학이 끝나고 가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할 때였어. 데레사에게서 학교로 편지가 왔었지. 우리의 안부를 묻는 간단한 편지였지만, 나는 그애의 본심을 알 것 같았어. 자신에 대한 지수의 마음을 묻고 있는 거였지. 그러나 나는 그냥 둘 다 잘 있노라는 말만으로 된 짧은 답장을 엽서에 써서 보내고는 그애를 잊어버렸지. 그리고 나중에 지나가는 말처럼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지수가 아무 반응도 관심도 보이지 않는 걸 보고서도, 여전히 데레사를 팽개쳐 둔 채 잊고 말았던 거야.”
“흠!”
나는 외마디 신음소리를 내고 고개를 숙였다.
“사건은 거기까지 가서야 끝났어. 난 그 뒤로 지수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게 됐지. 그런 놈에게 데레사와 내가 농락당하고 만 것을 생각하며 그가 미워졌어.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도 생각했지. 그러다가 해가 가면서 조금씩 모든 게 내 잘못이었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어 가게 됐던 거야.
오늘 지수를 떠나보낸 뒤 데레사의 사진을 보면서 눈앞이 환하도록 분명하게 다시 확인했지. 역시 정말 미워할 건 지수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어. 지수는 단지 본능을 따랐을 뿐이고 그 때의 사건은 기껏 작은 실수에 불과했지. 하지만 나는 두 번 씩이나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던 거야. 내가 진심으로 데레사를 좋아했다면--그건 지금도 부인하지 않네만--난 그 때 그렇게 돌아서지 않고 내 진심을 보여 줬어야만 했어. 그애가 나를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아. 그건 그애의 일이니까.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중에 다시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도 또 다시 데레사를 외면하고 말았던 거야. 그러니 어떻게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데레사는 그 뒤에 어떻게 됐어? <기적>에서처럼 수녀가 됐을까? 아니면 평범한 주부가 되어 우리처럼 늙어왔을까?”
나는 겨우 조금 정신을 가다듬으며 이야기 말미를 정리하는 질문을 내놓았다.
“그것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도 화나는 일이야. 난 정말 형편없는 인생을 살아왔어. 데레사가 그 뒤에 무엇이 되었든, 난 그애에게 얼굴을 쳐들 수 없게 됐다구.”
안젤로는 거의 눈물을 떨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위로해 줄 말을 찾지 못하고 숨소리만 죽인 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10. >>땅끝<<
밤이 익어가고 있었다. 지하철이 끊어지기까지 시간은 꽤 남아 있었지만 그만 헤어지기로 했다. 둘 다 매우 피곤했다. 길고도 긴 하루였다.
“경교장에서 보자.”
“그래, 잘 가. 조심해.”
안젤로의 손끝이 촉촉했다. 나는 소변이 보고 싶어 화장실을 찾아갔다. 거울 속의 내가 보였다. 약간 취해서 헝클어진 늙은 사내였다. 나를 쏘아보고 있는 눈이 낯설게 느껴졌다.
“넌 지금껏 무얼 하고 살아 왔니, 후회할 일조차 없이?”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래오래 손을 닦았다. 젖은 손을 건조기에 대고 느릿느릿 말린 뒤에 화장실을 나왔다. 지하철 타는 데가 어느 쪽인지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안젤로?”
언뜻 안젤로 같은 뒷모습의 사내 하나가 방금 저쪽 계단 아래로 사라져 간 것 같았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향해 달려갔다. 아래쪽을 살폈으나 그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뛰듯이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에는 기차가 서 있었다. 호남선의 고속열차였다.
"광주? 목포? 왜?"
세 단어가 거의 동시에 머릿속에서 솟아오르고 나자, 가 본 적 없는 먼 곳의 이름 하나가 갑작스런 소리를 내며 입 밖으로 뛰쳐나왔다.
“땅끝!”
나는 빙그레 웃고 돌아섰다. 가슴이 후련했다.
“그래, 데레사를 찾아내서 용서를 빌게나, 젊은이! 그것이 그대의 딜쿠샤이리니.”
계단을 올라 지하철을 타러 가면서, 나는 안젤로를 깡그리 잊어버렸다. 조금 전까지 내 마음을 짓누르던 젊음, 슬픔, 후회 같은 단어들도 모두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다만, 할아버지의 얼굴만이 붙박이로 눈앞에 떠올라 있었다.
“당신의 아픔을 몰랐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대신해 그에게 용서를 빌고 있었다.*
(문학과 의식 동인지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