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비해 볼 것이 없다고 말한다.
있다고 해도 세부나 마닐라 팍상한과 따가이따이를 곧잘 말하곤 한다.
그런데 그런 곳은 규모 면에서는 중국에 비할 바가 못 되고, 열대지방 특유의 자연경관 면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곳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비록 공포와 경계의 속에서나마 경험했던 로하스 거리 관광이었다.
첫날밤 늦은 시간에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어디가 어딘지 자세히 알 수가 없어서 그저 17층 호텔방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정도로만 관광을 했다.
이 날 가이드가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것도 있고 해서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일찍 식사를 마친 우리는 도저히 궁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일정대로 관광지로 출발하기엔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었다.
호텔 정문을 나서면 대기하고 있는 버스 주위로 잡상인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매달리는 바람에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무로 만든 개구리, 물고기, 게 등의 장난감에다 인형, 시계, 그리고 신문지에 싼 진주목걸이를 한 움큼씩 들고 와서 호텔 밖을 나서는 관광객을 에워싸서는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든다.
그래도 꼭 나가 보기로 한 거리였으므로 여섯 명이 용기를 내어 그 잡상인들을 뚫고 탈출을 감행했다.

호텔 맞은편에는 마닐라 시내로 접근할 수 있는 항구가 있고, 그 곳을 마닐라 베이라고 한다.
아마 옛날 스페인이 이곳을 점령할 때 여기로 들어왔으리라.
그 항만을 따라 길게 만들어진 거리가 바로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로하스 거리이다.
아침에 우리는 이 거리를 걷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각자 뭔가를 하고 있다.
웃통을 벗고 쉬고 있는 젊은이, 낚시를 하고 있는 어른, 쓰레기가 떠다니는 바다임에도 불구하고 수영을 하고 있는 어린이, 그리고 음료수를 파는 아주머니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저쪽 한편에는 영화 주라기 공원에서나 있을 법한 온갖 공룡들로 채워져 있다.
이 공룡과 열대나무의 상징인 야자수가 어울려 있는 풍경은 정말 잘 만들어진 휴식 공간 같다.


내가 서두를 이렇게 끄집어냈지만 진정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
이 날 저녁에는 마차 사건을 겪고 나서 더 이상 밖으로 나가지는 못 했지만, 그 다음날은 단단히 준비를 하고 또 밖으로 나갔다.
이때의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첫날과 이튿날 저녁처럼 가이드는 밖으로 절대로 나가지 말라고 또 당부하면서도 우리들에게 은근히 이 거리를 자랑하고 있었다.
"저길 한 번 보세요. 저 가로등 말입니다. 무엇을 상징하는지 아는 분 계세요?"
"맞히면 선물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아는 분 없을 걸요. 껄껄껄."
"할 수 없죠뭐, 제가 그냥 말씀드리죠. 이건 이멜다 여사가 제일 좋아해서 필리핀의 상징이 된 진주를 뜻합니다. 가로등 하나에 77개의 진주가 박혀 있는 모양으로 반짝거리는 모습이 참 특이하고 예쁘죠? 그래서 이 거리의 모든 가로등에 새겨진 진주 개수가 이 나라의 총 섬 개수와 같은 7,107개랍니다. 대단하죠?"
그러고 보니 정말 예쁘게 만들어져 있었다.
디자인도 잘 되어 있고 반짝이는 불빛도 참 화려했다.

바로 이 거리가 토요일 저녁도 그랬지만 일요일 저녁에도 사람들로 넘쳐났고 사람들로 떠들썩했다.
약 2km정도 되어 보이는 8차선 차도를 끼고 있는 이 로하스 거리에 수만 명이 몰려든 것이다.
저 멀리 바다에는 유람선이 불빛을 발하며 항만을 순항하고 있다.
수 킬로미터 떨어진 로하스 거리 남서쪽으로는 놀이공원에서 흘러나오는 휘황찬란한 빛들로 가득하다.
우리 일행은 호텔 맞은편 도로를 출발해서 복잡한 군중들 사이로 들어가서는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갔다.
바닷가 난간에는 젊은 남녀 연인들이 죽 줄을 맞춰 앉아 있다.
어깨를 끌어안은 사람, 서로 마주 보고 안고 있는 사람, 키스하고 있는 사람, 무릎베개를 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서로 손을 꼭 잡고 있는 사람들이 줄을 이루다시피하고 앉아 있다.
그 연인들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보고 있는 데도 어떻게 저러고 있을까 싶다.
"벗씨야, 쟤들은 덥지도 않은가 봐. 저렇게나 꼭 붙어 있다니?"
"사랑하면 다 참을 수가 있어. 호호호."
조금만 내려가니 음악이 흐르는 노천카페가 나온다.
조그맣게 무대를 만들어 놓고 4인조, 6인조, 8인조 등의 밴드들이 연주를 한다.
남녀 혼성 밴드도 있고, 섹시한 여자들만 나오는 밴드도 있다.
어린이와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가 같이 하는 가족 공연도 있다.
어떤 팀은 나와서 묘기 춤을 추다가 바지가랑이가 터지는 바람에 그것(?)이 비집고 나온 상태에서도 끝까지 공연하는 것도 봤다.
모두들 배꼽을 잡고 웃었으니 아마 일부러 컨셉을 그렇게 잡았으리라.
무대 앞 테이블에 앉아서 술과 음료수를 시켜서 먹는 사람도 수백 명이나 된다.
주머니 사정이 안 되어 테이블에 앉을 수 없어서 그냥 서서 구경하는 사람도 그 이상이나 된다.
가족들끼리 나온 사람들이나, 연인들끼리 나온 사람들이나, 그리고 우리처럼 관광 온 사람들로 붐비는 이곳은 정말로 젊음의 거리 그 자체였다.

또 길거리를 걷고 있노라면 모노 판토마임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얼굴엔 마네킹처럼 허연 분칠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해적 옷을 입고 눈엔 애꾸 안경을 쓰고 있는 분도 있으며, 그리고 난장이와 같이 합동 판토마임을 하고 있는 분도 있다.
내가 즉석에서 이름 붙이기를 '모노 마네킹 판토마임'이라고 해 버렸다.
왜냐하면 옷과 얼굴에 분장을 한 남자가 조그만 거리 무대 위에 홀로 올라서서는 마네킹처럼 가만히 서 있기 때문이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떼거리로 모여서 그냥 보고 즐기고 있다.
그러다가 그 사람 앞에 놓여 있는 빈 통에다 동전을 한 닢 뗑그렁하고 넣어주면 이 마네킹은 움직인다.
우리는 재미있기도 하고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하고 해서 20페소라는 거금을 넣었더니 움직임이 과하다 할 정도로 몸을 많이 비틀었다.
마이클 잭슨의 브레이크 댄스까지 추었다.
악수하자고 하면 로봇처럼 움직여서 악수도 해 준다.

이러한 판토마임류의 길거리 공연자를 세 곳에서나 봤고, 야외무대를 차려 놓고 춤추고 노래하고 술을 파는 카페는 일곱 곳이나 봤다.
우린 그 중에서 제일 섹시한 여자들이 나오는 야외 카페에 들어가 필리핀 맥주 세 캔과 쥬스 세 캔을 시켜서는 안주 없이 마시며 그들과 같이 즐기기도 했다.
캔 하나에 우리 돈으로 1500원이 채 안 되니까 몇 캔이나 먹어도 돈은 문제가 안 되었다.
이런 분위기와 광경이 밤이 새도록 계속 된다니까 정말로 부러운 풍경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아니 작게 봐서 우리 대구에만이라도 이러한 거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구 동성로가 그렇게 되면 좋겠고, 아니 신천변이 이렇게 바뀌면 더 좋겠고, 더 나아가 구석으로 비켜서서 동촌유원지만이라도 이렇게 변한다면 더더욱 좋으리라.
낭만이 있는 거리, 기가 살아 있는 거리, 생동감 넘치는 거리, 젊음이 꽃피는 거리, 꿈이 펼쳐지는 거리, 그리고 자유가 흐르는 거리가 너무나 부럽다.
그래서 난 이곳이 이번 여행 중에서 제일 감동적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매일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너무나 좋다는 뜻이다.
필리핀 마닐라 베이의 로하스 거리, 영원히 잊지 못 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2007년 6월 8일
멋진욱 김지욱 서.

첫댓글 사진을 집에가서 가져와 붙여놓을 때까지 단우님들이 이 글을 읽지 말고 기다리셔야할텐데..^*^
벌써 다 읽어 버렸어. 사진이 늦는 바람에. 히히.
맞심다 이왕이면 찐한걸로 올려 주세요
찐한 것 한 장 있습니다. 최 단우님 판토마임 같이 하시는 것. 히히.
사진 다 올려놨습니다. 이제 읽으셔도 됩니당. 필리핀 여행을 통하여 멋진욱님이 가슴에 품고 오는 것이 있었네요.
대구 동성로도 아마 젊음의 광장으로 변화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죠? 히히.
낭만이 있는 거리라! 낭만이 있는 삶, 낭만적인 사람! 그러고 보니 멋진욱님도 낭만적인 사람이넹!
전 무뚝뚝한 사람이예요,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