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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과 칠지도
일본 나라현 天理市 石上神宮에는 七支刀가 소장되어있다. 나무줄기의 좌우에 3개씩의 가지가 나있는 특이한 모양의 검으로, 1873년 그 검의 녹을 제거하고 보니 刀身의 앞뒷면에 다음과 같은 銘文이 새겨져있었다.
泰和四年十一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鍊銕七支刀, □辟百兵, 宣供供侯王 □□□□作 - 앞면
(태화 4년 11월 16일 병오 정양에 철을 백번 단금질해서 칠지도를 만들었다. 百兵을 피할 수 있는 신검으로 후왕에게 준다. 〇〇〇〇작)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 뒷면
(선세 이래 이런 검은 없었다. 백제왕세자 기생성음이 왜왕 지를 위해서 만들었다. 후세에 전하여 보여주도록 하여라)
그런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367년 백제의 근초고왕이 일본의 神功황후에게 조공함으로써 양국이 처음 통교를 하였고, 369년에는 왜군이 백제군과 함께 가라7국을 평정하고 호남지방을 복속시켰으며, 이때 일본은 이 호남지방을 백제에게 할양했다. 그래서 372년에 백제 근초고왕은 神功황후에게 조공하고 감사의 표시로 칠지도를 바쳤다고 한다. 이에 관한 일본서기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神功 52년(372) 9월 10일 백제의 구저 등이 千熊長彦을 따라 일본으로 왔다. 그때 七枝刀 한 자루, 七子鏡 한 개 및 각종 보물을 헌상했다. 그리고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서쪽에 강이 있는데 그 水源은 곡나 철산입니다. 7일을 가도 닿지 않는 먼 곳입니다. 그곳의 물을 마시고 그 산의 철로 오로지 聖朝를 위하여 만든 칼입니다”
石上神宮의 칠지도가 일본서기에 나오는 칠지도와 동일한 것이라는 보증은 없다. 사실 石上신궁의 그 칼은 원래 六叉刀라고 불렸는데 녹을 제거하고 보니 刀身에 ‘七支刀’라는 명문이 새겨져있어서 칠지도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七支刀가 일본서기에 기록된 七枝刀와 동일한 물건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
칠지도 명문의 해석에 있어서 우선 명문의 ‘泰和’라는 연호를 둘러싸고 동진의 太和 설, 북위의 泰和 설, 백제고유연호 설 등이 있다. 泰和라는 연호는 북위에 있지만 북위의 泰和 4년은 480년에 해당하므로 칠지도가 372년에 헌상되었다는 일본서기의 기술과는 맞지 않는다. 동진에는 泰和라는 연호는 없다. 하지만 동진에 太和라는 연호가 있고 이 太和 4년이 369년이므로 지금은 동진연호설이 거의 정설로 굳어져있다. 백제연호설은 동진의 연호가 泰和가 아닌 太和이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일본학자들은 泰和가 백제의 고유연호라는 것에 부정적이다. 그 첫째 이유는 백제의 建元을 전하는 사료가 없다는 것이다. 확실히 삼국사기에는 백제 建元에 대한 기사는 없다. 그렇지만 고구려도 建元에 관한 사료는 없지만 ‘永樂’(광개토왕비문)을 비롯한 다수의 연호가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백제에서 연호를 사용한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사택지적비에는 기년이 ‘甲寅年正月九日’로 표기되어있고 부여 능산리 寺址에서 출토된 백제창왕銘사리감(국보 제288호)에는 ‘百濟昌王十三季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로 되어있어 역시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무녕왕릉 출토의 무녕왕 誌石에도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 到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 安厝登冠大墓 立志如左
라고 있어 무녕왕이 ‘영동대장군’이라는 중국의 작위를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중국의 연호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백제가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꾸로 칠지도의 泰和가 중국의 연호가 아니라는 증거로도 된다. 중국의 연호를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백제가 칠지도에서만은 동진의 연호를 썼다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일본학자들은 일본서기의 서술에 따라 이 칠지도가 야마토정권에 헌상된 것이라고 보고 그에 맞추어 명문을 해석하려고 시도했다. 그 결과 온갖 기상천외한 해석들이 나왔다. 福山敏男은 奇生聖音의 聖音을 천황의 ‘聖恩’으로 해석하여 백제헌상설의 주요 근거로 하였다. 三品彰英은 倭王 旨를 ‘왜왕의 뜻’이라고 보고 故爲倭王旨造를 ‘왜왕의 뜻을 받들어 만들었다’라고 해석했으며, 가장 권위가 있다고 정평이 나있는 일본고전문학대계의 <일본서기>도 마찬가지로 ‘백제왕과 태자는 생명을 천황의 聖恩에 의존하고 있으므로(奇生聖音) 왜왕의 聖旨를 받들어 만들었다’고 주석을 붙여 놓았다.
하지만 북한학자 김석형은 1963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 銘文은 명백히 윗사람인 백제왕이 아랫사람인 왜왕에게 하사한 문장이라고 주장하였고 일본학자 上田正昭도 이에 적극 찬성한 이래 백제헌상설, 백제하사설, 백제.왜 동등설, 동진하사설 등 의견이 분분했었지만 지금은 백제하사설 쪽으로 기우는 느낌이다. 동진하사설은 栗原朋信이 주장한 것으로, 聖音을 聖晉이라고 보고 칠지도제작의 배후에 聖晉, 즉 東晋이 있다고 상정한 것이지만 이것은 백제하사설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그 代案으로 만든 억지논리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백제.왜 동등설도 결국은 왜가 백제의 下位에 있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나온 설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칼은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일본서기는 칠지도가 神功황후에게 바치기 위하여 정성을 다하여 만든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실제 칠지도의 명문은 侯王, 供 등의 용어, ~해라 투의 명령어를 썼다는 것 등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사용하는 문장인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칠지도가 근초고왕에 의하여 그 하위자인 왜왕(侯王)에게 하사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이것은 실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367년 통교 이래 백제가 왜국의 속국이었다는 일본서기의 서술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칠지도는 그와는 정반대로 왜국이 백제의 속국이었고 왜왕은 근초고왕의 후왕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것은 칠지도가 이른바 ‘가라7국 평정’과 호남 할양에 대한 답례로 제작된 것이라고 하는 지금까지의 일본학자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다. 그렇다면 칠지도는 무슨 목적으로 제작된 것일까?
개로왕은 458년 남조 송에 제출한 상표문에서 자신이 11명의 신하에게 임시로 관직을 내렸음을 밝히고 송의 황제가 이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 중에는 좌현왕. 우현왕이 포함되어있었다. 즉 개로왕은 좌현왕, 우현왕을 거느린 王中王, 즉 大王이었던 것이다. 또 동성왕은 490년과 495년에 남조 齊에 제출한 상표문에서 자신의 신하 중 面中王. 邁盧王. 辟中王. 弗斯侯. 八中侯 등의 관직 승인을 요청하고 있다. 그가 신하에게 王, 侯의 칭호를 부여했음을 알 수 있다. 개로왕과 동성왕은 단지 修辭上의 대왕이 아니라 王과 侯를 거느린 실질적인 대왕이었던 것이다. 익산 미륵사 <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을 ‘대왕폐하’라고 했으며, 삼국사기 전지왕 즉위 조에서는 아신왕을 ‘대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은 백제왕의 ‘대왕’ 호칭은 근초고왕 대에 시작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근초고왕은 侯王들을 거느린 실질적인 대왕이었다고 본다.
369년 9월 근초고왕은 고구려와의 치양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11월에 대대적인 열병식을 하였는데 이때 깃발은 모두 황색을 썼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황색은 天子를 상징하는 것이다. 근초고왕은 천자의 위엄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치양전투 및 열병식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있다.
秋九月, 高句麗王斯由帥步騎二万,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戶. 王遣太子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余級, 其虜獲分賜將士. 冬十一月, 大閱於漢水南, 旗幟皆用黃 (근초고왕 24년)
가을 9월에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주둔하며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은 태자에게 병졸을 주어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게 하여 고구려군을 급습하고 5천여 수급을 얻었으며, 포로는 장군과 장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겨울 11월, 한강 남쪽에서 대 열병식을 거행했는데 깃발은 모두 황색을 사용했다.
열병식이 끝난 뒤 근초고왕은 칠지도를 제작하여 치양전투에 공이 있는 후왕(호족)들에게 하사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때 그는 칠지도에 연호를 새겨 넣을 필요성을 느끼고 자신의 연호를 만들기로 했다. 후왕을 거느린 王中王으로서 자신의 연호를 갖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전혀 새로운 연호를 만들면 후세에 혼란을 야기할 우려가 있어 동진의 연호인 太和를 泰和로 바꾸어 백제의 연호로 사용키로 한 것이다.
열병식이 거행된 것은 치양전투 두 달 뒤인 369년 11월인데 칠지도의 제작연월일도 369년(泰和 4) 11월로 되어있다. 열병식과 칠지도제작이 같은 달에 행해진 것이다. 이것은 칠지도가 치양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말해준다. 칠지도가 실제로 제작되는 것은 371년경이었다고 생각되지만 근초고왕은 치양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열병식이 거행된 연월일에 맞추어 칠지도의 제작일자를 새겨 넣었던 것이다. 칠지도가 왕세자 귀수의 명의로 되어있다는 것은 치양전투를 주도하고 대승으로 이끈 사람이 태자 귀수였기 때문이다.
칠지도의 명문에서 奇生聖音의 奇生은 근초고왕의 태자 귀수(근구수왕)를 가리킨다. 聖音은 존칭어미라고 본다. 石上신궁의 칠지도는 근초고왕의 태자 귀수가 왜왕 旨를 위하여 만든 것이다. 나는 이 왜왕 旨를 백제의 호족 진씨라고 생각한다. 즉 이 칠지도는 369년의 치양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둔 근초고왕이 그 승전에 크게 기여한 진씨에게 감사의 표시로 준 것이다. 진씨를 ‘왜왕’이라고 한 것은 369년 이래 전라도지방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 있던 진씨가 그 칭호를 희망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왜왕’은 면중왕, 벽중왕의 경우와 같이 지역 명에 의거한 칭호인 것이다. 칠지도는 여섯 개 제작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이것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칼의 6枝는 백제의 여섯 호족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학자 김석형은 <일본열도 내의 삼한삼국의 분국에 대하여>(1963)라는 논문에서 4세기 후반에 일본열도 내에는 조선3국의 분국이 있었으며 광개토왕비문의 왜는 백제가 이 백제분국의 왜를 동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같은 논문에서 그는 칠지도 명문이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하사한 형식임을 들어 칠지도가 백제의 근초고왕에 의하여 일본열도 내의 백제분국의 후왕에게 하사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칠지도가 神功황후에게 헌상되었다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품고 있지 않았던 일본학자들에게 이 논문은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 논문 이후 일본학자들은 칠지도명문과 광개토왕비문에 대한 재검토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칠지도에 관한 한 이제는 더 이상 칠지도헌상설을 거리낌 없이 주장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일본학자들은 김석형의 분국설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나는 일본학자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그 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369년이건 391년이건 일본열도의 왜군이 渡海한 사실 자체가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석형이 지적한 것처럼 칠지도는 神功황후에게 헌상된 것이 아니라 왜왕에게 하사된 것이다. 이것은 칠지도가 일본서기의 ‘가라7국 평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가라평정이라는 것 자체가 일본열도의 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한반도내의 일로, 근초고왕 대에는 백제와 일본열도의 왜 사이에는 아무런 교류가 없었다고 본다. 칠지도는 치양전투에서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서기는 아무 근거가 없는 허튼소리를 써놓은 것일까? 아니다. 단지 칠지도의 수령자가 왜곡되어 있을 뿐이다. 칠지도의 수령자는 가공인물인 神功황후가 아니라 실재했던 진씨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씨에게 주어진 이 칠지도가 어떻게 하여 일본의 石上신궁에 보관되어있는 것일까?
칠지도의 왜왕 旨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우선 旨는 일본식의 이름이 아니다. 이 왜왕 旨가 眞氏라면 그는 근초고왕 대의 재상 겸 외척인 眞淨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淨과 旨는 이름이 전혀 다르지만 旨는 眞과 글자 모양, 발음이 닮아있다. 神功황후의 ‘神功(진구)’가 근수구왕의 장인 진고도와 이름이 비슷하다는 것도 주목된다. 진고도와 진정은 형제 사이가 아닐까? 하여튼 진고도와 진정, 왜왕 旨는 모두 근초고왕 대에 활약한 사람들이다.
근초고왕의 다음 세대인 광개토왕시대에 일본의 야마토정권에서는 神功황후의 뒤를 이어 그녀의 아들 應神천황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있다. 고대 일본의 천황 가운데 시호에 ‘神’字가 들어있는 천황은 이들 외에 초대천황으로 되어있는 神武천황이 있다. 그러나 神武천황은 應神의 분신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神功황후는 원래 가공인물이므로 결국 ‘神’ 字가 들어있는 천황 중 실재했던 인물은 應神 하나뿐이다. 일본학자들은 이 ‘神’ 字가 건국자에게 주어진 시호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神은 眞과 통한다. 나는 이 應神천황을 396년 백제로부터 독립하여 익산(또는 직산)에 ‘왜국’을 건국한 진씨라고 본다. 진씨는 일본열도로 건너가 야마토정권의 초대천황이 되었던 것이다. 만일 神功황후가 진고도의 代役이라면 應神은 진고도의 아들인 셈이다.
광개토왕비문에 의하면 영락 14년(404) 왜군은 불의에 대방계 공격을 감행했지만 참패를 당하고 물러났다. 영락 17년(407)에 고구려는 步騎 5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적군을 참살 탕진하고 1만점의 甲冑를 비롯한 다량의 전투 장비를 노획하였으며 돌아오는 길에 6성을 깨는 대승리를 거두었지만 비문에 결자가 많아 전투대상국이 어딘지 확실치 않다. 후연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비문에 대 후연관계가 일체 생략되어있다는 점, 중국역사서에 그런 기록이 없다는 점, 沙溝城, 婁城 등 백제의 것으로 생각되는 이름이 나온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나는 백제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은 수군을 동원한 백제 남쪽의 왜국에 대한 공격은 아니었을까? 광개토왕은 404년 왜군의 대방계 습격에 대한 보복공격을 한 것은 아닐까? 광개토왕비문에 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 외 남쪽거주 韓人은 국연 1명에 간연 5명의 비율로 守墓人을 선발한다는 뜻인데 여기서 南居韓은 왜국(백제의 남쪽)에 거주하는 韓人을 가리키는 것 아닐까? 광개토왕은 왜국이 더 이상 고구려를 넘볼 수 없도록 步騎 5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하여 왜국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진씨는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금관가야를 통하여 북규슈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고 본다. 404년 대방계에서의 참패 및 407년에 입은 자국영토내의 괴멸적인 타격으로 인하여 자신의 존립기반마저 크게 위협을 받게 된 진씨(應神천황)는 재기를 도모하기 위하여 북규슈로 건너갔으며 칠지도는 이때 진씨가 家寶로 가져간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칠지도가 일본의 石上신궁에 보관되어있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칠지도는 야마토정권의 전신이 목지국이라는 것에 대한 둘도 없는, 매우 귀중한 증거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첫댓글 가설이야 세울 수 있겠습니다만, 칠지도가 야마토정권의 전신이 목지국이라는 증거라는 말은 순환논증에 의한 오류일 뿐입니다. 왜냐? 결론이 되어야 할 <왜 = 전라도 존재> 를 먼저 전제로 깐 뒤에 이 전제에 의해 칠지도의 왜가 전라도에 있었다고 결론내리고 그 결론에 따라 이후 왜로 불릴 야마토 전신이 전라도에 있었다는 식의 논리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칠지도를 <초기 왜 = 전라도지역> 의 근거로 삼고자 한다면, 결론이 될 <초기 왜 = 전라도> 라는 내용을 논의의 전제로 삼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했음에도 칠지도를 통해 왜가 초기에 전라도에 있었음을 추론해 낼 수 있다면 비로소 칠지도는 그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겠지요.
본문에서 그런 추론으로 보이는 부분은 旨 = 眞氏 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왜왕 旨' 라고 할 때 旨 자리에 성씨가 오는 것이 과연 일반적인 표기방식일 지 의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위와 같이 표기할 때엔 旨 자리에는 이름이 오는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근초고왕이 한의 왕가에게 왜왕이라 하면서 하사한다는 게 쉽게 납득이 가질 않는군요.
두 분의 지적, 다 옳다는 것 잘 압니다. 그렇지만 일본군이 369년과 391년에 渡海하여 신라. 가야 또는 신라. 백제를 깼다는 주장을 저는 전혀 신용하지 않습니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에 버금가는 군사력을 갖고 있었고 신라나 금관가야 또한 만만치 않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일본군에게 깨졌을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본학자들의 역사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어떤 가설을 100% 증명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또 그것이 학문의 세계이겠지만, 역사에서 그런 경우는 흔치 않다고 생각됩니다. 하여튼 역사의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고민하고 밝혀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초고왕과 진씨는 일본 구주에 세력을 구축했을 개연성은 없을까요? 진씨는 근거지를 구주로 옮기고 근초고왕에게 예전 자신의 지역 통치권을 위임했을 가능성이요. 근초고왕 때 근거지를 옮겼다면 왜래도해의 해석도 더 쉬워지지 않을까요?
진씨는 407년 이후 북구주 筑紫로 건너가 일본땅에 왜국을 건국합니다. 그 진씨의 왜국은 수십년 후 畿內로 건너가 아먀토정권을 세웁니다. 야마토정권의 천황이 진씨라는 증거는 비록 간접적인 것이지만 여럿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아이디어는 저의 생각은 물론 아니고 일본학자 江上波夫가 제일 먼저 주장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재야학자 중에도 근본은 이와 동일한 설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저도 江上說에 대한 비판 등을 검토하여 나름대로 가설을 세워본 것입니다.
진씨는 백제의 왕(자신의 외손)에게 예전 자신의 지역통치권을 위임하고 구주로 건너갔지만 그 시기는 근초고왕 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럴 경우 왜래도해의 해석이 쉬워질지 모르지만 그 왜(진씨)가 백제를 깨고 신민으로 삼았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江上波夫가 비판을 받고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목지국의 진왕세력이 <4세기 초>에 도해하여 筑紫에 왜한연합국을 세웠다고 하는 그 <시기>에 있습니다. 江上波夫는 고분의 부장품이 주술적, 제사적인 것에서 무기류, 실용적인 것으로 바뀌는 점을 그 주요 근거로 내세웠지만 일본에서는 5세기 이전에는 마구류가 발견되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