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회원 알림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박예인
    2. 시에스타
    3. 소정
    4. 갈메기
    5. 삼산이수
    1. 剩愛
    2. 최해덕
    3. 단대
    4. 대종교천부경학회
    5. 슬픈고양이
 
 
카페 게시글
백제 토론방 근초고왕과 칠지도
귀거래사 추천 0 조회 1,045 11.07.07 10:52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11.07.07 13:11

    첫댓글 가설이야 세울 수 있겠습니다만, 칠지도가 야마토정권의 전신이 목지국이라는 증거라는 말은 순환논증에 의한 오류일 뿐입니다. 왜냐? 결론이 되어야 할 <왜 = 전라도 존재> 를 먼저 전제로 깐 뒤에 이 전제에 의해 칠지도의 왜가 전라도에 있었다고 결론내리고 그 결론에 따라 이후 왜로 불릴 야마토 전신이 전라도에 있었다는 식의 논리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칠지도를 <초기 왜 = 전라도지역> 의 근거로 삼고자 한다면, 결론이 될 <초기 왜 = 전라도> 라는 내용을 논의의 전제로 삼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했음에도 칠지도를 통해 왜가 초기에 전라도에 있었음을 추론해 낼 수 있다면 비로소 칠지도는 그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겠지요.

  • 11.07.07 14:18

    본문에서 그런 추론으로 보이는 부분은 旨 = 眞氏 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왜왕 旨' 라고 할 때 旨 자리에 성씨가 오는 것이 과연 일반적인 표기방식일 지 의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위와 같이 표기할 때엔 旨 자리에는 이름이 오는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 11.07.07 21:52

    근초고왕이 한의 왕가에게 왜왕이라 하면서 하사한다는 게 쉽게 납득이 가질 않는군요.

  • 작성자 11.07.07 23:08

    두 분의 지적, 다 옳다는 것 잘 압니다. 그렇지만 일본군이 369년과 391년에 渡海하여 신라. 가야 또는 신라. 백제를 깼다는 주장을 저는 전혀 신용하지 않습니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에 버금가는 군사력을 갖고 있었고 신라나 금관가야 또한 만만치 않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일본군에게 깨졌을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본학자들의 역사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어떤 가설을 100% 증명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또 그것이 학문의 세계이겠지만, 역사에서 그런 경우는 흔치 않다고 생각됩니다. 하여튼 역사의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고민하고 밝혀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11.07.12 02:20

    근초고왕과 진씨는 일본 구주에 세력을 구축했을 개연성은 없을까요? 진씨는 근거지를 구주로 옮기고 근초고왕에게 예전 자신의 지역 통치권을 위임했을 가능성이요. 근초고왕 때 근거지를 옮겼다면 왜래도해의 해석도 더 쉬워지지 않을까요?

  • 작성자 11.07.12 10:00

    진씨는 407년 이후 북구주 筑紫로 건너가 일본땅에 왜국을 건국합니다. 그 진씨의 왜국은 수십년 후 畿內로 건너가 아먀토정권을 세웁니다. 야마토정권의 천황이 진씨라는 증거는 비록 간접적인 것이지만 여럿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아이디어는 저의 생각은 물론 아니고 일본학자 江上波夫가 제일 먼저 주장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재야학자 중에도 근본은 이와 동일한 설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저도 江上說에 대한 비판 등을 검토하여 나름대로 가설을 세워본 것입니다.

  • 작성자 11.07.12 10:01

    진씨는 백제의 왕(자신의 외손)에게 예전 자신의 지역통치권을 위임하고 구주로 건너갔지만 그 시기는 근초고왕 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럴 경우 왜래도해의 해석이 쉬워질지 모르지만 그 왜(진씨)가 백제를 깨고 신민으로 삼았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江上波夫가 비판을 받고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목지국의 진왕세력이 <4세기 초>에 도해하여 筑紫에 왜한연합국을 세웠다고 하는 그 <시기>에 있습니다. 江上波夫는 고분의 부장품이 주술적, 제사적인 것에서 무기류, 실용적인 것으로 바뀌는 점을 그 주요 근거로 내세웠지만 일본에서는 5세기 이전에는 마구류가 발견되지 않는 것입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