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의 삶과 시 세계
맹문재
1.
박인환 시인은 1955년 10월 15일 첫 시집 『선시집』(산호장)을 간행했다. 전체 4부로 구성해 총 56편의 시작품을 시집에 수록했다. 시집 제목을 『검은 준열의 시대』로 정하려다가 스펜더(Stephen Spender)의 시집 제목인 『선시집』을 따라 바꾸었다. 1909년 영국에서 태어나 1995년까지 활동한 스펜더는 박인환의 시 세계에 가장 영향을 끼친 시인이자 비평가였다. 스펜더는 시를 쓴다는 것이 순수한 개인의 문제였던 시대는 지났다고 단언하고 시의 사회적 효용성을 주장했다. 그의 선배인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이나 파운드(Ezra Loomis Pound)의 시 세계와 단절하고 불안한 시대를 배경으로 사회 참여의 시를 쓴 것이다.
박인환이 『선시집』에서 추구한 시 세계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성장해온 그 어떠한 시대보다 혼란하였으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준 것이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지지할 수 있는 마지막 것이었다. 나는 지도자도 아니며 정치가도 아닌 것을 잘 알면서 사회와 싸웠다.”라고 밝힌 시집 후기에 잘 나타나 있다. 박인환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충격과 고통에 함몰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시를 썼다. 사회의 지도자나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시인으로서 전쟁의 폭력에 맞선 것이다.
박인환이 미국 여행을 하고 돌아와 쓴 시를 『선시집』에 수록한 면도 주목된다. 박인환은 1955년 3월 5일부터 4월 10일까지 한 달 남짓 미국 여행을 했는데, 총 11편의 시를 시집에 수록했다. 그에게 미국 여행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먼 나라로/여행의 길을 떠났다/수중엔 돈도 없이”(「여행」)라고 토로했듯이 다소 우연적인 것이었지만, 미국의 문명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기회였다.
박인환은 해방기 이후 한국 모더니즘 시 운동을 주도했다. 해방기의 정치적 혼란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면서 새로운 세계관을 추구한 것이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목마와 숙녀」)라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박인환은 신세대적인 감각으로 전쟁으로 인한 상실감과 허무함을 노래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노래한 그의 감각은 전통 서정시와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따라서 한 잔의 술을 마시는 행동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로 볼 수 있다.
2.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일제의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되자 박인환은 평양의학전문학교를 그만두고 상경한 뒤 종로3가 2번지에 ‘마리서사(茉莉書舍)’라는 서점을 개업했다. 세련된 분위기와 희귀한 외국 도서를 갖추어 많은 고객이 찾았고 문인들이 교류하는 장소가 되었다. 박인환은 마시서사에서 만난 젊은 시인들과 모더니즘 시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김경린, 김경희, 김병욱, 임호권과 함께 ‘신시론’ 동인을 결성한 뒤 동인지 『신시론』을 발간했다.
1949년에는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과 함께 ‘신시론’ 동인지 제2집에 해당하는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했다. 박인환은 동인지에 「인천항」「남풍」「지하실」「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등을 발표했다. 제국주의의 팽창이 심각한 해방기의 정국을 반영하면서 그 극복을 지향한 것이다. 인도네시아, 월남,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홍콩 등 오랫동안 식민지 지배를 받은 국가들과의 연대도 추구했다. 300년 동안 포르투갈, 네덜란드, 일본으로부터 온갖 착취를 받아 온 인도네시아 국민을 향해 “반항하는 인도네시아 인민이여/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라”(「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라고 호소한 것이 그 한 예이다. 시민 정신을 토대로 제국주의에 대항하면서 진정한 민족 해방과 민족 국가 건설을 추구한 것이다. 그렇지만 박인환의 그 모든 희망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말미암아 사라졌다.
3.
박인환은 한국전쟁 기간(1950. 6~1953. 7)에도 10편의 시작품을 발표했다. “새벽에 돌아가는 길 나는 내 친우가/전사한 통지를 받았다”(「무도회」), “향기 짙은 젖가슴을/총알로 구멍 내고”(「미래의 창부」), “침략자 공산군을 사격해라”(「신호탄」) 등에서 보듯이 전쟁 상황을 여실하게 담았다. 생사를 넘나드는 참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절망하고 분노한 것이다. 박인환은 『경향신문』 기자로서 전쟁 상황을 기사로 알리기도 했고, 육군종군작가단에도 가입해 활동했다.
박인환은 한국전쟁이 휴전된 뒤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다. 1955년에 『선시집』을 간행한 것이 그 여실한 성과물이다. 이 시집은 박인환이 남긴 유일한 시집이기도 하지만, 시인의 작품 세계가 집약되어 있기에 매우 중요하다.
전쟁 때문에 나의 재산과 친우가 떠났다.
인간의 이지를 위한 서적 그것은 잿더미가 되고
지난날의 영광도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다정했던 친우도 서로 갈라지고
간혹 이름을 불러도 울림조차 없다.
오늘도 비행기의 폭음이 귀에 잠겨
잠이 오지 않는다.
―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 부분
위의 작품에서 보듯이 박인환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친구를 잃어버렸다. 가족과 친척과 이웃들도 찾을 수 없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을 들을 수 없다. 자신의 재산이며 서적이며 지난날의 영광도 상실했다. 따라서 상실감과 허무함으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 박인환은 1955년 3월 5일부터 한 달 넘게 미국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이와 같은 심정이었다.
비가 내린다.
내 모자 위에 중량이 없는 억압이 있다.
그래서 뒷길을 걸으며
서울로 빨리 가고 싶다고
센티멘털한 소리를 한다.
― 「어느 날의 시가 되지 않는 시」 부분
위의 작품에서 박인환은 “내 모자 위에 중량이 없는 억압이 있다”고 토로하고 있다. 미국 여행 동안에도 전쟁으로 인해 황폐한 조국의 상황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박인환은 “서울로 빨리 가고 싶”어 한다. 힘들게 살아가는 조국의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하려는 것이다.
4.
박인환이 타계한 뒤 「세월이 가면」을 비롯해 10편의 유고 시가 발표되었다. 「세월이 가면」은 대중가요의 노랫말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박인환의 타계 20주기(1976년)에는 맏아들 박세형이 『선시집』에 실리지 않은 시들을 추가해 『목마와 숙녀』(근역서재)를 발간했다. 또한 박인환의 타계 26주기에는 김경린, 김규동 등 그와 함께 활동했던 문인들이 추모 문집 『세월이 가면』(근역서재)을 간행했다. 가난했지만 신의를 소중히 여겼고, 책을 아꼈고, 품위를 지켰고, 그리고 호오가 분명했던 박인환의 성격을 문인들은 들려주었다. 추모 문집에는 박인환의 아내 이정숙과 이봉구 소설가에게 보낸 13통의 편지도 수록되었다. 박인환의 다정다감했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박인환은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1956년 3월 20일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까지 그의 시작품은 총 89편이 발굴되었다. 1편의 번역 시도 있다. 박인환은 해방기의 정치적인 혼란과 한국전쟁의 참상에 좌절하지 않고 모더니즘 시 운동을 주도했다. 역사의식을 견지하고 1945년부터 시작해 1950년대의 한국 시단에 새로운 시의 흐름을 이끈 것이다.
맹문재 | 시인․안양대 교수
【박인환 시인 약력】
1926년(1세)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159번지에서 아버지 박광선(朴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 사이에서 4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나다.
1933년(8세)
인제공립보통학교 입학하다.
1936년(11세)
서울로 이사.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다.
1939년(14세)
3월 18일 덕수공립보통학교 졸업하다. 4월 2일 5년제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다. 영화, 문학 등에 심취하다.
1941년(16세)
3월 16일 경기공립중학교 자퇴하고, 한성중학교 야간부로 옮기다.
1942년(17세)
황해도 재령으로 가 기독교 재단의 명신중학교 4학년에 편입하다.
1944년(19세)
명신중학교 졸업하고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3년제)에 입학하다.
1945년(20세)
8․15광복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상경하다. 종로3가 2번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茉莉書舍)’를 개업하다. 초현실주의 화가 박일영(朴一英)의 도움으로 세련된 분위기를 만들어 많은 문인들이 교류하는 장소가 되다.
1948년(23세)
입춘을 전후하여 마리서사 폐업하다. 4월 20일 김경린, 김경희, 김병욱, 임호권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 발간하다. 4월 덕수궁에서 1살 연하의 이정숙(李丁淑)과 결혼하다. 종로구 세종로 135번지(현 교보빌딩 뒤)의 처가에 거주하다. 겨울 무렵 『자유신문』 문화부 기자로 취직하다. 12월 8일 장남 세형(世馨) 태어나다.
1949년(24세)
4월 5일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과 동인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도시문화사) 발간하다. 김경린, 김규동, 김차영, 이봉래, 조향 등과 ‘후반기(後半紀)’ 동인 결성하다.
1950년(25세)
1월 무렵 『경향신문』에 입사하다. 6월 25일 한국전쟁 일어남. 피란 가지 못하고 9․28 서울 수복 때까지 지하 생활하다. 9월 25일 딸 세화(世華) 태어나다. 12월 8일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란 가다.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1951년(26세)
5월 육군 종군작가단에 참여하다. 10월 『경향신문』 본사가 부산으로 내려가자 함께 이주하다.
1952년(27세)
5월 15일 존 스타인벡의 기행문 『소련의 내막』(백조사) 번역해서 간행하다. 『경향신문』 퇴사하다. 12월 무렵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하다.
1953년(28세)
3월 후반기 동인들과 이상(李箱) 시인 추모의 밤 열고 시낭송회 가지다. 여름 무렵 ‘후반기’ 동인 해체되다. 5월 31일 차남 세곤(世崑) 태어나다. 7월 중순 무렵 서울 집으로 돌아오다. 7월 27일 한국전쟁 휴전 협정 체결하다.
1954년(29세)
1월 오종식, 유두연, 이봉래, 허백년, 김규동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발족하다.
1955년(30세)
3월 5일 대한해운공사의 상선 ‘남해호’를 타고 미국 여행하다. 3월 5일 부산항 출발, 3월 6일 일본 고베항 기항, 3월 22일 미국 워싱턴주 올림피아항 도착, 4월 10일 귀국하다. 대한해운공사 사직하다. 10월 1일 『시작』(5집)에 시작품 「목마와 숙녀」 발표하다. 10월 15일 시집 선시집(산호장) 간행하다. 제본소의 화재로 인해 재간행하다.
1956년(31세)
1월 27일 『선시집』 출판기념회 갖다. 2월 자유문학상 최종 후보에 오르다. 3월 시작품 「세월이 가면」이 이진섭 작곡으로 널리 불리다. 3월 17일 ‘이상 추모의 밤’ 열다. 3월 20일 오후 9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하다. 3월 22일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다. 9월 19일 문우들의 정성으로 망우리 묘소에 시비 세워지다.
1959년(3주기)
10월 10일 윌러 캐더의 장편소설 『이별』(법문사) 번역되어 간행되다.
1976년(20주기)
맏아들 박세형에 의해 시집 목마와 숙녀(근역서재) 간행되다.
1982년(26주기)
김규동, 김경린, 장만영 등에 의해 추모 문집 세월이 가면(근역서재) 간행되다.
1986년(30주기)
박인환 전집(문학세계사) 간행되다.
2006년(50주기)
문승묵 엮음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박인환 전집』(예옥) 간행되다.
2008년(52주기)
맹문재 엮음 『박인환 전집』(실천문학사) 간행되다.
2012년(56주기)
강원도 인제군에 박인환문학관 개관되다.
2014년(58주기)
7월 25일 이정숙 여사 별세하다.
2019년(63주기)
맹문재 엮음 『박인환 번역 전집』(푸른사상사) 간행되다.
2020년(64주기)
맹문재 엮음 『박인환 시 전집』(푸른사상사) 간행되다.
2021년(65주기)
맹문재 엮음 『박인환 영화평론 전집』(푸른사상사) 간행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