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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93년 9월 29일
□김제원 교무님 설법
수심결이 총 40장 중에 30장까지 하게 되겠네요.
3/4 정도 하게 되었네요. 한달 만 하면 수심결을 마치게 됩니다.
아마 여기에 앉아 있는 분들이 집에서 수심결을 읽어 보실 수는 있을 거지만
수심결을 깊이 있게 강의를 들으면서 오롯하게 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일생에 한번 일 것입니다.
수심결을 또 공부할 수 있는 기회는 또 없을 것입니다.
한달 남은 기간, 수심결 뒷장에 보면 사람 몸 받아서 이 법을 만났을 때 잘 하시라고 나옵니다.
오늘 중요한 대목입니다. 무슨 이야기냐하면, 전반적으로 마음이 부처다 그래 놓고 견성을 하면 돈오를 하고, 바로 신통이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돈오와 점수에 대한 설명을 하고 선정과 지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성문정혜와 수상문 정혜가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오늘 공부할 곳이 자성문정혜와 수상문정혜의 설명이 끝납니다.
지난주에는 정혜가 등지다. 선정과 지혜가 하나다라는 이야기를 들였습니다.
하열한 등기는 정다음에 혜다라고 생각하고 선후를 잡고 하지만, 자성자리 자체는 정과 혜가 원래 한 뭉치가.
진공이 묘유고 묘유가 진공이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설명하면 그렇습니다.
선후가 없는 가운데 선후가 있는 것이 참 선후입니다.
먼저 28장 자성문의 이야기입니다. 29장은 수상론 정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0장은 다시 한번 확인시키기 위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28장
則達人分上에 定慧等持之義는 不落功用이라 元自無爲하야 更無特地時節일새 見色聞聲時에 但伊(마)하며 着依喫飯時에 但伊(마)하며 (아)屎送尿時에 但伊(마)하며 對人接話時에 但伊(마)하며 乃至行住坐臥或語或默或喜或怒히 一切時中에 一一如是호대 似虛舟駕浪에 隨高隨下하며 如流水轉山에 遇曲遇直하야 而心心無知니 今日에 騰騰任運하고 明日에 任運騰騰하야 隨順衆緣호대 無障無碍하며 於善於惡에 不斷不修하야 質直無僞하고 視聽尋常이라 卽絶一塵而作對어니 何勞遺蕩之功이며 無一念而生情이라 不假忘緣之力이니라
즉달인분상에, 달인분상이라는 것은 견성을 했다는 것입니다.
견성을 한 사람은 정의 정과 혜를 같이 단련하려고 하는 뜻이라는 것은 불낙공용이다.
그 깨달음에는 따로 공을 들일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은 견성을 해놓고 또 견성을 한다고 또하고 있어요.
자성론, 수상론의 핵심은 의혹이 있고 없다라는 것입니다.
자성론이라는 것은견성을 했기 때문에 의혹이 없습니다. 단지 전생에 닦은바 무명, 업력, 습관 이생에 욕심이 있을 뿐입니다.
계속 의혹이 남아있다는 것은 수상론적인 것입니다.
공용이라는 것은 따른 공력입니다.
부인이 이사를 가서 남편이 찾아갈려고 하는데 주소로 찾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갔는데 또 찾고 있으면 그것은 문제가 있잖아요.
주소를 찾아 들어갔으면 참 나가 뭣이다. 이 자리다라는 것이 자성자리구나, 이 자리는 텅 비어서 진공묘유자리다 하면 되는 것이지 거기에다가 뭔 의혹을 또 넣는다는 말인가요?
그래서 자성론의 핵심은 원자무위(元自無爲)입니다.
원래 스스로 함이 없다. 무념으로 종을 삼는다고 나왔는데 같은 소리입니다.
저를 좀 봐주세요.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나라는 것이 영혼과 영식이 있어서 그것이 밝게 만들어서 그것이 들어서 마음공부를 하고 챙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반쪽 공부입니다.
원자무위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수행을 한다라는 생각입니다.
무위라고 하는 것은 함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수행을 하긴 하는데 없는 내가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다하는 것은 자성자리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견성을 하지 않으면 공부에 초문을 들지 않는 것입니다. 불보살이 되고 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실체를 견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는 실체에 묶여서 일생을 그것이 나인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범부입니다.
잘하는 나, 학벌이 좋은 나, 못 배운 나, 성격 있는 나, 이것이 과연 있나요?
무엇이 있어서 제 목소리를 듣는데 무엇이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진짜 나라는 것이 있어서 듣는 건가요?
아무 것도 없는 제가 말하는 것과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 산을 넘지 못하면 이것을 깨치지 못하면 결국 그 사람은 오염수 수행이요, 정혜등지라는 것은 복혜족족이라는 것입니다. 복과 지혜라는 행복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일심을 하고 아무리 해도 복과 지혜의 근처에서는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보통 중생은 육신이 나라고 생각하고 그 다음에 조금 더 있는 사람은 지식 있는 나 아니면 육신과 대비되는 영혼이 있는 나가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돈오 점수의 길에 갈 수 없고 원자무위의 길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먼저 신, 믿음과 서원이 들어야 한다.
육신이 나가 아니라는 사실과 부처님의 법이 확신하다는 것을 믿고 거기에 먼저 들어가야 합니다. 아는 아는 만큼 믿겠다라고 하면 공부의 시작인 돈오와 견성까지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정을 해도 선정을 하는 나가 있고 공부를 해도 공부를 하는 나가 있고 마음에는 항상 의혹이 남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 재주가 자기요, 그것을 분별성 주착심이라고 합니다.
중생들은 생을 산다고 하지만, 자기 몸을 위해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정말로 보조구사는 너희들 니 몸이 너가 아니고, 지금 너라고 생각하는 실체가 있다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것이 무위이다. 하는 이것이 없다. 그것을 알아야 비로소 돈오 견성이요,
비로소 영원한 행복으로 들어갈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원자무위라는 것은 스스로 나라고 할 것이 없는 전체가 나인 텅 비어서 하나인 이 자리를 깨칠 거 같으면, 조금 생략되어 있습니다.
돈오 돈수의 경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돈오돈수-각행일치
돈오점수-자성문정혜(自性門定慧)
수상문정혜(隨相門定慧)
돈오돈수는 각행일치입니다. 대종사님이 그렇게 하셨죠.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돈오점수에 자성문적인 정혜와 수상문적인 정혜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돈오점수에 돈오 역시 수상문정혜가 있습니다.
처음에 불법을 만났을 때, 돈오를 하기 전까지는 수상문정혜를 따라야 합니다. 기도를 하고 좌선을 하고 경전을 쓰고, 복을 지으라니깐 보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반드시 수양과 서원과 신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통해 버리면, 이것이 그대로 수양으로 연결이 됩니다.
서원을 일정(一定)심이라고 하니다. 신을 정이라고 합니다. 정(定)이라는 것은 고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이라는 것은 맑은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오염된 마음, 욕심이 많은 사람은 신심이 절대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깐 머리 속이 복잡한 것입니다.
수양에 들어가서 연구에 들어가서 뭐 이꼬라는 의심이 날려면 신심이 없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서원이 세워지면 수양에 70%가 끝나는 것입니다. 고요해 집니다.
하지만 욕심이 그득하고 나를 중심으로 해서 원불교를 그대로 이용하겠다하면서 나는 수양하겠다 하는 것은 해봤자입니다.
머리로 연구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심으로 연구를 뚫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요하고 맑아지니깐 탁 뚫리는 것입니다. 전생에 많이 닦은 사람은 빨리 솟는 것입니다.
연구를 통해서 돈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구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점수를 공부를 하면서 자성문정혜가 오늘 설명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시대를 없다. 내 마음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경계속에서도 걸림이 없다.
견색문성시에, 색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에 이렇다라는 것은 자성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나다라는 상에 끌려서 바라봅니다.
근데 원자무위입니다. 나가없는 나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것을 하더라도 그 자리를 누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날때에도 또한 그렇다. 항상 마음이 단전에 있다라는 것입니다.
내지행주자와, 동정간에 육근을 운동할 때
一切時中에, 항상 자성자리를 놓지 않고
내가 들어서가 아니라 진공이 들어서 걸어다니고 말하고 생각하고 뭔가를 베풀고 수양을 하는 것입니다. 진공이 체가 되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어떤 경계도 다 수용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섭섭한 소리를 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속으로 밝아봐라. 나는 밝힌 나도 없다라고 하면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자존심이 뭔데. 나라는 것이 뭔데하면서 내가 억울하다는 것에 내가 뭔가요?
자성문정혜는 자성의 정혜는 심지물안 자성정이 자성정입니다. 심지무치 자성혜가 자성혜입니다. 심지에는 본래 요란함이 없다. 본래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정과 혜라는 것입니다.
요란함이 없게 만들고 지혜를 비추어서 지혜를 있게 만들자라는 것은 수성문정혜이니다.
一一如是호대 似虛舟駕浪에 빈 내가 물결을 타고
래프팅을 하다보면 빈 배다 보니깐 물 흐름 대로 가게 되잖아요.
어떤 경계가 오더라도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빈배라는 것은 내가 없기 때문에 어린이가 오면 어린이와 놀아줄 수 있고 노인이 오면 노인과 함께 놀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隨高隨下하며높으면 높은대로 낮으면 낮은대로
如流水轉山에 산을 감아 돌아간다는 것
여러분 큰 경계를 만나보았죠? 큰 경계 만나면 가버립니다.
단지 큰 경계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내가 있기 때문에 죽겠네 죽겠네 하는 것입니다.
遇曲遇直하야 굽은 대로 굽은 대로 가고
우리의 성품 자리를 영원히 놓치지 않고 묘유로써 용으로 쓴다라는 것입니다.
작은 나가 나오지 않는다. 그게 수상문정혜입니다.
而心心無知니 마음 마음이 무지다. 무지라는것은 뭔가요?
지는 분별성과 주착심입니다. 나는 안다라는 것이 없는데 이것이다라는 것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지금 제 목소리를 듣는데 듣는 것이 실체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심무지가 아닙니다.
그대로 들을 뿐입니다. 나 없는 나가 들을 뿐입니다.
今日에 騰騰任運하고 明日에 任運騰騰하야 번거롭게 수많은 경계 속에서 운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만 그런게 아니고 내일도 운전하는 것입니다.
등등 임운이 되던가요?
정과 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하면서 동하는 것입니다.
隨順衆緣호대 無障無碍하며 수를 닦는데 여럿인연에 따르되, 장애가 없고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다.
여러분 어떠신가요? 인연에 걸리고 경계에 걸리고 돈에 걸리고 욕심에 걸리고 명예에 걸리고 자빠지시죠?
잡고 있는 거 때문에 한이 되는 울음도 있고, 잡고 있는 것이 여태 잡을 것도 없는 것이 나를 괴롭혔구나를 알고 흘리는 눈물도 있고 업장이 녹아나는 눈물이 있습니다.
중생들의 99%가 욕심을 취하고 싶은데 안되니깐 흘리는 눈물입니다.
시험에 떨어져서 울고 시험에 붙어서 우는 것입니다.
본래 참 나는 무장무애입니다. 떨어졌으면 떨어졌나 보다하고 하면서 철저한 인과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을 때는 인과를 믿습니다. 사은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떨어지니깐 인과를 믿지 않게 됩니다.
於善於惡에 不斷不修하야 선을 행하되, 닦음이 없는 선이다.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선을 닦은바가 없다는 것은 내가 들어서 선을 행한다는 상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악을 끊되 악을 끊는바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선악에 관한 차별 상대심이 있지 않나. 우리 자성자리는 무선무악입니다.
심지 무선악입니다.
무선무악을 근간하지 않는 사람은 선에 빠지고 악을 버리고 스스로 자학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버드대 나왔어도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선악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실수 있습니까?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할지 몰라도 또 악에 걸리는 것입니다.
선에도 걸리지 않고 악에도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質直無僞하고 순박하고 정질하고,
그 마음자리에는 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대로이되, 나타난 세상에 소자리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視聽尋常이라 시지불견이요 청지불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상입니다.
卽絶一塵而作對어니 한 티끌(미생유주)도 상대되는 것이 없거니
나라는 상, 흔적 껍데기를 그대로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상대되는 것이 없다라는 것은 나라는 것이 있으면 너라는 것이 있잖아요.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둘인 것입니다.
何勞遺蕩之功이며 유탕지공이라는 것은 방탕한 것을 버릴 려고 하는 공덕입니다.
즉, 수상문정혜의 방법을 말합니다. 자성문정혜는 뽑아버리겠다. 닦아야겠다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그대로 본연인 것입니다. 따로 닦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無一念而生情이라 한 마음도 감정이나 망정에 생함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일념 미생전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똑똑한 사람을 보면 일념미생전자리를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근데 한 생각이 이전까지는 수양력을 통해서 깨달음을 통해서 가는 것입니다.
不假忘緣之力이니라 불필요한 망념들을 끊겠다. 힘쓸것도 말 것도 없다.
29장
然이나 障濃習重하고 觀劣心浮하야 無明之力은 大하고 般若之力은 小하므로 於善惡境界에 未免被動靜互換하야 心不恬淡者는 不無忘緣遣蕩功夫矣니 如云六根이 攝境에 心不隨緣을 謂之定이요 心境이 俱空하야 照鑑無惑을 謂之慧라하니 此雖隨相門定慧라 漸門劣機의 所行也나 對治門中에 不可無也니라 若掉擧가 熾盛則先以定門으로 稱理攝散하야 心不隨緣하야 契乎本寂케하고 若昏沈이 尤多則次以慧門으로 擇法觀空하야 照鑑無惑하야 契乎本知케할지니 以定으로 治乎亂想하고 以慧로 治乎無記하야 動靜相이 亡하고 對治功이 終하면 則對境而念念歸宗하고 遇緣而心心契道하야 任運雙修하야 方爲無事人이니 若如是則眞可謂定慧等持하야 明見佛性者也니라
然이나 그러나
障濃習重하고 업장이 농해지고 습관은 무거워지고
觀劣心浮하야 관조하는 힘은 약하고 마음은 구름같이 뜨고
항상 들떠있습니다. 안정된 감이 없습니다.
요새 아이들이 귀에 음악을 듣던가, 이야기를 하던가 혼자 가만히 있으면 미쳐버릴 려고 합니다. 자신의 자리로 들어가야 하는데... 혼자일 때 가장 편안하고 참 자리 속에서 행복을 느껴야 하는데 상대의 자리에서 분별식심으로 살다보니깐 분별식심이 있는 것이 마음이 편안한 것입니다.
처음에 담배를 끊을 때는 정말 힘듭니다.
제가 출가하기 전에 군대에서 금년에 담배를 끊어야 겠다하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오후가 되니깐 세상이 답답하고 숨이 차고 죽겠습니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때 담배를 피니깐 정말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담배를 안피니깐 제 마음이 불안하잖아요. 편안하니깐 좋은거 아닌가요?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습관을 들이냐에 따라서 편안한 것이 습관과 업력에 편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자들은 편안하고 도를 얻는 사람은 없습니다.
배고파야 도를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육신이라는 것이 웃깁니다.
無明之力은 大하고 욕심이 반복해서 습관이 되는 것입니다. 악습입니다.
무명의 힘은 크고
般若之力은 小하므로 반야의 힘은 약하고
법마상전급은 법왕과 마왕이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한 경계를 여기에다 주면 기가 막힙니다. 경계를 5가지를 주고 이 교당을 안 떠날 사람이 없습니다. 불신을 주면 딱 떨어져 나갑니다.
법문 한 시간 들어도 귀에 안들어오는데 누가 어쨌구나 하면 그건 100% 믿습니다.
於善惡境界에 선악경계는 천만경계입니다.
未免被動靜互換하야 동정화환이라는 것은 뭔가요?
동과 정이 서로를 꽉 물고 있습니다.
똘똘한 사람은 정할 때는 미리 준비하고 수양과 연구를 하고 정할 때는 취사가 중심이 되어서 다시 미리 준비한 것을 해나간다는 것입니다.
미리 준비를 한 것은 한 경계를 확 바뀌는 것입니다.
교무가 존경받는거 간단합니다. 성지순례를 갑니다. 버스를 예약을 합니다.
버스를 어떤 기사를 모시고 몇 시까지 오게 할 것지, 중간에 어떤 아이가 아플지를 사전에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를 사전에 한 사람은 한 경계에 존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잘하게 되면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정기훈련은 정시 훈련이요 상시 훈련은 동시훈련입니다.
서로 윈윈이 되어야 합니다.
心不恬淡者는 마음이 편안하고 담담하지 못한 사람은
不無忘緣遣蕩功夫矣니 방탄을 놔버리는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꼭해야 한다.
여기에 해당 되시나요?
어지간한 사람은 해당 될 것입니다.
수상문정혜공부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如云六根이 攝境에 경계를 대할 때에
心不隨緣을 마음이 수연에 끌려가지 않는다. 경계에 끌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이라는 것입니다. 자성문정혜의 정은 심지물안이고 수상문정혜의 정이라는 것은 육근이 경계에 속지 않고 끌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謂之定이요 心境이 俱空하야 照鑑無惑을 마음을 비워서 비춰라하는 것입니다. 혹이라는 것은 미혹을 말합니다.
무혹되게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경계 속에서 자성자리를 비춰보고 미혹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돈오점수문에 수상문정혜의 공부입니다. 점수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습관과 업력을 비춰보고 습관과 업력을 녹아가는 것입니다.
若掉擧가 熾盛則先以定門으로 稱理攝散하야 원래 자성문정혜는 선후가 없는 것입니다.
수상문정혜는 업력과 습관으로 요란한 마음이 자꾸 올라옵니다. 회사가서 상사보면 열받고 그러죠. 그럴 때 선이 정문으로써 요란함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자성문정혜는 신심으로 하는데 수상문정혜는 이치에 근간해서 요란함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돈오에 바탕해서 하니깐 팍팍 녹아나는 것입니다.
心不隨緣하야 마음이 망념을 따르지 않고. 수연이라는 것은 밖의 경계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끌려가는 마음을 돌이켜서
契乎本寂케하고 본래 공적영지한 마음에 계 앞에 가는 것입니다. 돈오를 했기 때문입니다.
若昏沈이 혼침이라는 것은 혜문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일처리를 못하니깐 좌선도 못하고 머리 속이복잡한 것입니다. 이것이 혼침입니다.
원래 정과 혜가 하나이지만 둘인데 혼침이라는 것은 강의할 때 졸고 있는 것입니다.
혼침은 인과에 어둡습니다. 인과를 모른 척 하는 것이고
시비에 이해를 잘 못하는 것입니다. 이정도면 됐지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됐지 했는데 욕 얻어 먹고 하는 것입니다.
尤多則次以慧門으로 擇法觀空하야
택법관공이 정말 중요합니다.
쉽게 말하면 수양법을 택해서 진공자리를 관하는 것인데 막연합니다.
택법이라는 것은 자성자리만 관조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염불법을 보면 자신의 상황에 따라서 염불법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머리가 산란할 때는 염불법을 써라. 마음이 고요할 때는 좌선법을 써라.
헌배를 해도 200배 300배를 해도 청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경을 쓰니깐 독경을 하니깐 마음이 선정하고 지혜가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각자의 근기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공부법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이 신심이 납니다. 어떤 사람은 세운 목적, 서원 반조로 아침에 딱 일어나는 것입니다. 확실하는 사람은 그럽니다.
힘들 때는 목적 반조를 해야합니다. 고시를 공부하는 사람은 내가 고시를 공부하는 사람이다하고 목적을 반조해야 합니다.
법이라는 것은 일체의 모든 현상, 모든 존재를 말하니다.
그것이 관공, 공(空)이다라는 것입니다. 공은 모든 현상이 있고 물체가 있지만 그것은 실체인 것입니다. 복잡성을 가지고 있지 않고 시간적으로는 변화하고 있고 공간적으로는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공인 것입니다. 연계라고 하고 일체무아라고 합니다.
나를 놓고 봅시다.
나라는 실체가 있나. 육신은 지수화풍입니다. 나는 무엇인가?
독자성이 있느냐? 독자성이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수많은 사은의 은혜속에서 인연이 엮여져서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사은의 덩어리, 실체가 없어서 무아라는 것이 관공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지혜로써 바라보는 것입니다.
照鑑無惑하야 契乎本知케할지니 본지라는 것은 본래 영지입니다.
안으로는 착심을 놓고 밖으로는 성성한 묘유자리로써 공적영지를 놓지 않고 동정간에 내 마음을 써나간다는 것입니다.
以定으로 治乎亂想하고 정으로써 난상을 가지고
以慧로 治乎無記하야 혜로써 무기를 가지고
動靜相이 亡하고 동과 정 테두리 없이 한다는 것입니다.
對治功이 終하면 대치하려고 하는 놔버리면
則對境而念念歸宗하고 생각 생각이 하나로 돌아간다. 자성자리, 일원자리, 법신불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분들 중 순경이 오면 잘 나오지 않습니다.
遇緣而心心契道하야 우연이라는 것은 인연입니다. 선악의 인연, 상생의 인연, 선연을 만났든 생각생각이 도에 계합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任運雙修하야 정헤등지입니다. 정혜쌍수해서
方爲無事人이니 무상이라는 것은 한가한 것입니다. 휴휴암좌선문, 쉬고 쉬는
걸리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서원을 가지고 신심을 가지고 수양에 적공을 들이고 돈오를 한 다음에 습관과 업을 녹이는 수많은 점수에 자성문정혜, 수상문정혜공부를 통해서 삼학을 통해서 비로소 무상이 되는 것입니다.
수양을 어느 정도 해서 법력이 올라가서 성품을 놓치지 않고 어떤일이 와도 시비이해를 놓치 않는 것이 무상인 것이니다.
若如是則眞可謂定慧等持하야 明見佛性者也니라 정혜등지를 갖추어서 밝게 불성을 갖추어서 깨달은 자입니다.
30장
問- 據汝所判컨댄 悟後修門中에 定慧等持之義가 有二種하니 一은 自性定慧요 二는 隨相定慧라 自性門則曰任運寂知하야 元自無爲하야 絶一塵而作對어니 何勞遣蕩之功이며 無一念而生情이라 不假忘緣之力이라하야 判云此是頓門箇者의 不離自性하고 定慧等持也라하고 隨相門則曰稱理攝散하며 擇法觀空호대 均調昏亂하야 以入無爲라하야 判云此是漸門劣機의 所行也라하니 就此兩門定慧하야 不無疑焉이로소이다
질문을하고 끝납니다.
보조국사가 또 질문을 합니다.
問- 據汝所判컨댄 너가 또 판단컨대.
悟後修門中에 定慧等持之義가 有二種하니 깨달음 뒤에 닦은 바는 정혜등지의 뜻이 두 가지가 있다.
一은 自性定慧요 二는 隨相定慧라 하나는 자성정혜이고 또 하나는 수상정혜이다.
自性門則曰任運寂知하야 元自無爲하야
絶一塵而作對어니 何勞遣蕩之功이며 앞에서 설명이 나온 것입니다.
無一念而生情이라 不假忘緣之力이라하야
오늘 사실 이렇게 하면 불교를 너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자성문정혜 수상문정혜에 대해서 쉽지 않은데 동정이해가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동정이해는 여래위입니다.
동할 때 정할 때 공부 방법이 다릅니다.
원불교에서는 정할 때에는 정규훈련을 통해서 수양연구가 주체가 되고 동할 때에는 작업취사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정-진공-정규훈련-일정심
동-묘유-상시훈련-일직심
현대인들은 너무 동에 빠져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저도 조절이 안되고 있습니다.
옛날에 한 황제가 있었는데 그 분 전생이 나병 환자셨습니다.
힘든 경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인과를 믿고 수양 적공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음 생에 황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 같은 경우는 역경 난경이 있습니다.
죽겠다 하겠죠.
조금만 잘 풀리면 좋겠다 하고 빠지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진공과 묘유가 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좋고 나쁘든, 돈이 벌리든 벌리지 않든 중심을 딱 잡고 있는 것이 동정입니다.
결국 이렇게 됐을 때 여래위입니다.
특히 어렵습니다.
정할 때 미리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감사합니다(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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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연님 감사해요
쌩유베리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