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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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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생활불교 스크랩 신행담 군불교와 함께한 소중한 시간들
보리수생각 추천 0 조회 205 06.01.12 19:17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군불교와 함께한 소중한 시간들

 

 

여러 선지식과 불자 여러분, 오늘 드리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간 제가 살아왔던 이야기입니다.
막상 남다른 선행을 한 것도 아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빼어나게 실천했다고 자부하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여러분과 만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간 군법사로 오랫동안 생활하며, 예편 후에는 군포교를 후원하는 일을 맡아 오면서 나름대로의 느낌을 말씀드리면 조금이라도 여러 불자님의 신행 생활에 도움이 되고, 또한 군포교에 관심을 가지시는 불자님이 많이 생겨서 전군의 불자화라는 간절한 기원이 조금이라도 빨리 이루어질까 하는 바램으로 나서는 것입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불교에서의 군포교는 그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허술한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 불자님이 가지고 계신 관심이나 종단적인 지원이 아직도 미미한 실정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현역의 동료 법사님들이나 후배 법사님들은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묵묵히 부처님께 기도 드리며 간절한 소망 속에서 우리의 장병들을 불자로 만들고 바른 신행 생활로 이끌어 늘 기도하고 감사하는 마음 속에서, 상대에게는 자비로 대하고 자신을 돌이켜 참회하고 정진하는 올바른 젊은이로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벌써 우리 군에 불교 군종제도가 도입된 지 30여 년이 흘렀지만 관심 있는 분 몇몇을 제외하고는 불교 군종제도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던 덕분입니다. 어릴 때부터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이고 아주 작고 사소한 일까지 부처님의 가피로 이루어졌음을 감사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늘 부처님께 간절한 소망과 기도로 일을 이루곤 하였습니다. 그런 집안의 분위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불교는 늘 생활의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서울 인창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꿈 많은 학창시절이었습니다. 한창 희망에 부풀어 있던 고등학교 2학년 때,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서 절에 몸을 의탁하고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학창시절의 수학여행은 아주 기대되고 부푼 희망을 심어주게 마련입니다. 절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그 때 마침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도 희망에 부풀어 있었지만 의탁하고 있던 절에서 허락 하지 않아 그만 낙담하였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수학여행 계획을 짜며 즐거워할 때에도 풀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모두 수학여행 열차에 몸을 싣고 즐거워할 때 저는 절에서 먼 하늘만 바라보며 한숨만 쉬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비보는 더욱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학교 학생들, 친구들을 싣고 가던 열차가 대형 사고를 일으켜 수많은 사상자가 난 것입니다. 물론 우리 반도 예외일 수 없어 어제까지 같이 뛰어놀던 친구들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놀랍고도 무서운 경험은 그 이후 저를 더욱 철저한 불교신자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만약 절에 있지 않아서 수학여행에 참석하였다면 그 무서운 사고를 저만 피해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때 마침 부처님의 인연으로 절에 들어가 살 수 있었고, 그 가피 덕분에 사고를 모면했다면 남은 삶은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는 데 쓰이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곧 제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모든 삶을 불교 포교를 위해 바치겠다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는 곧 동국대학교 승가학과에 진학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좀더 체계적으로 자세히 배운 다음 승가학과 1기로 졸업했습니다. 졸업하자마자 소정의 군사교육을 마치고 해군 군법사로 임관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역할 때까지 18 6개월간을 젊은 장병들과 함께하며, 나름대로 인생을 보람있고 소중하게 가꾸어 왔습니다.
강산이 두 번 변한다는 긴 세월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늘 아쉽고 부족함이 많았던 시간이기도 합니다. 한겨울 매서운 바람과 함께 흩뿌리는 눈보라만큼이나 거세고 매서웠으며, 서릿발처럼 긴장의 연속이기도 하였습니다.
아직도 군포교의 많은 부분이 부족하고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제가 임관했던 초기에는 그야말로 허허벌판에 덩그마니 혼자 떨어진 꼴이었습니다. 말이 군종법사이지 종교활동을 주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인 법당조차 없었습니다. 참 기가 막힌 실정이었습니다. 겨우 장병들을 모아 법회를 보려면 그나마 찾을 수 있는 공간이 사병식당이었습니다. 아니면 쓸모없어 비워둔 허름한 창고를 임시로 빌려 먼지만 겨우 털어 내고 종교활동을 주관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심정은 정말 제대로 된 법당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형편이 이러니 지급되는 물품도 야전에서 들고 다니며 어디서나 펴놓으면 바로 불단을 꾸밀 수 있는 작은 불감과 목탁 등이 든 야전법회 용품입니다. 말이 좋아 야전법회이지 정말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흡사 불법 노점상과 같은 처지입니다. 그나마 부대장이 불교신도이거나 종교에 대한 기본 소양이 있으면 법회를 보는 것이 수월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자신의 종교만을 고집하고 남의 종교는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는 부대장을 만나면 법회장소를 구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장병들이 농담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항상 춥고 배고픈 것은 군인과 거지뿐이라고, 밥을 잘 먹고 돌아서서 식당 문을 나오면 벌써 허기지는 것이 군대 장병들입니다. 지금이야 먹을 것이 훨씬 풍부해서 덜하겠지만 한창 나이에 돌을 씹어도 소화될 것인데 정량급식이 오죽했겠습니까. 또 한 곳에 수용되었다는, 사회와 떨어졌다는 심리감에서 흔한 말로 사제(私製)’면 사족을 못쓰는 것이 그들의 심리이기도 합니다.
먹을 것과 사제, 이 둘을 연구한 저는 군에 있을 때 동짓날이나 칠석날이면 꼭 팥죽과 떡을 보급했습니다. 물론 우리 민간 신앙적 의미도 있었지만 그들을 위로하고 조금이라도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서였습니다.
처음에 이러한 행사를 시작했을 때는 개인 주머니를 털어 조금씩 마련하여 나누어 주곤 했는데 해를 거듭하니 호응해주시는 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매년 칠석날이면 푸른 떡과 붉은 떡을 만들어 장사병에게 나누어주기도 하고 동짓날이면 부대 주위의 사찰에서 적극 도와주셔서 점심엔 전부대 장병이 팥죽 공양을 받고 즐거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같이 근무하시던 목사님(군목)들이 보시면 눈엣가시입니다. 애써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띄워놓으면 2
3일 전에 팥죽을 들고와 훼방 아닌 훼방을 놓으니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몇 년을 근무해 이제 부대 돌아가는 사정을 알 만하자 본격적으로 법당을 지을 궁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렵게 군용차량을 한 대 마련하여 전남북에 있는 모든 사찰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도시에 있는 사찰은 물론이고, 궁벽한 산골까지 안 가본 사찰, 안 만난 스님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돌아다닌 보람이 있어 차츰 각 사찰의 주지스님과 신도분들이 이해하고 도와주시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도움을 많이 주신 분이 목포 보현정사의 정각 큰스님이었습니다. 스님은 부대와 가까이 위치한 보현정사에 계셨다는 인연도 있지만 누구보다 군포교에 대해 잘 이해하시고 한국불교의 중흥은 바로 군포교를 활성화하여 젊은이들이 투철한 불심을 가지고 생활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군법당을 짓기 위해 전남북을 헤매고 돌아다녀 많은 지원을 받았지만 정작 군법당을 짓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돌아다닌 거리가 총 10만 킬로미터가 넘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목표가 멀리만 보이자 점차 허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구나, 아니면 나의 정성이 부족한 것일까?궁리궁리하다가 하루는 거액의 생명 보험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유서를 한 장 썼습니다. “내 소원은 군 장병들이 편안히 종교활동을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군법당을 건립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이렇게 돌아다니는데 정성이 부족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사고가 나서 내가 죽게 되면 이 보험금으로 우리 부대에 훌륭한 군법당을 짓고 더욱 훌륭하신 법사님이 오셔서 우리 부대를 불교인 부대로 만들 수 있도록 발원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기도 하고 치기어린 것이지만 그 때는 그만큼 절박하고 꼭 이루고 싶었기에, 또 덜컹거리는 산길을 군용 짚차에 의지한 채 10만 킬로 이상을 돌아다니다 보니 언제 사고가 있을 지도 모르겠고 해서 비장한 각오로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그 유서가 어느 틈엔가 소문이 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목포 보현정사 정각 스님이 그 소식을 듣고는 헐레벌떡 찾아오셨습니다. 왜 군포교를 잘하지 죽으려고 하느냐.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이르러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죽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사고가 있을 지도 모르고 군법당은 꼭 지어야겠는데 불사금은 형편없이 모자라 혹시 내가 죽고 난 다음에라도 군법당 불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발원한 것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잘 알았다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정각 스님이 바로 큰 화주를 해주셨습니다. 그 때 보현정사를 막 창건하신 후여서 스님의 절을 지으려고 마련해 놓으신 불사 자금을 선뜻 내주신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젊은 군법사가 너무나 불쌍하고 가여웠던 모양입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목포 해역사 법당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준공을 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집 없는 서러움에서 벗어났다는 회한도 있었지만 이렇게 좋은 법당을 마련하도록 자비를 베풀어주신 부처님의 은혜, 그리고 절 불사를 미루고 도와주신 정각 스님에 대한 고마움, 또 생면부지의 젊은 법사를 믿고 화주를 해주신 모든 분께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습니다.
법당 불사를 마치고는 법당 앞 논 300여 평을 사서 메우고 그 위에 범종각을 지어 불사를 마무리했습니다. 그 때는 더 이상 도와 달라고 손을 벌리기가 부끄러워 훗날을 기대하며 마련해 두었던 안양에 있는 작은 서민아파트를 팔아서 보탰습니다. 어쨌든 훌륭한 법당과 범종각을 바라보는 저의 마음은 흐뭇하기만 했습니다.
군법사들은 정기적으로 부대를 옮겨다닙니다. 인사 이동의 명에 의해서 정든 부대를 뒤로 하고 새로운 곳을 찾아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옮겨 다니며 법당 건립 불사는 계속되었습니다. 해병대 사령부에 배속되어 법당을 지을 때는 법당 터 위에 작은 텐트를 치고 살면서 불사를 이루었습니다. 해군이나 해병대는 그 특성상 바다와 가까이 있기 때문에 겨울에는 보통 매서운 추위가 아닙니다. 또 여름에도 저녁으로는 서늘합니다. 아무리 젊은 몸이지만 맨바닥에 텐트 하나만 의지하여 무리한 불사를 추진하니 몸이 성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급기야는 통합병원에 입원하기도 하고, 그 때의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육신에 남아 시린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을 펴는 법당 짓기를 그만두지 않았고 오해와 모함이 있었지만 지금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계수에 밝지 못해 설령 착오가 있었을지 몰라도 사욕을 위해 부처님을 빙자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는 가끔 부대를 방문하여 제 손으로 직접 지은 법당이나 다른 법사님들이 지은 훌륭한 법당을 보게 되면 그 때의 일들이, 그 어려움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 때는 괴롭고 힘들었어도 지난 날들은 아름다운 법인가 봅니다. 아련한 추억이지만 가끔은 그래도 그 때가 그립고, 그 신심, 그 열정을 되살려보고 싶기도 합니다.
군부대 종교행사는 쵸코파이가 주인입니다. “어느 종교에서는 쵸코파이 두 개다.” 이 말이 퍼지면 다른 종교활동은 그야말로 썰렁해집니다. 그러다 보니 간식으로 제공하는 빵이나 과자도 무시하지 못합니다. 우선 장병들이 모여야 원활한 종교활동이 될 수 있는데 그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형국입니다.
그러다 보니 쵸코파이를 많이 확보하는 법사가 가장 유능한 법사라는 웃지 못할 평가가 내려집니다. 부대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군법사의 박봉으로 일일이 간식거리를 마련하기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는 조금씩 인식이 좋아져서 많은 분들이 도와주고 계시지만 전국의 군법당 중에서는 아직도 어렵고, 법사님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젊은 불교인을 가장 빠르고 쉽게 확보할 수 있는 곳, 불교인이 아니어도 적어도 불교에 대한 바른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곳이 바로 군대입니다. 한국의 성인 남자는 의무적으로 군대에 입대하여 일정 기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부대에서는 종교활동 시간을 마련하여 자유롭게 자기들의 신앙심을 표현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좀더 애정을 가지고 군포교에 관심을 보일 때입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불교의 미래를 위한 값진 투자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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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6.01.14 10:32

    첫댓글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성불하십시요

  • 06.01.17 11:01

    전생으로부터 불사를 하셔야하는 인연을 타고 나신것 같아요. 훌륭하십니다.다음생에는 꼭 부처님이 되실겁니다. 지금도 부처님 이시구요.^^*()

  • 06.01.17 16:40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 06.01.22 10:37

    저도 군에 몸담고 있으면서 군법당의 건립과 포교활동이 절실하다고 느꼈습니다...그래서 저도 또한 군 포교의 원력을 세우고 열심히 공부중입니다...우선은 현실보다 자신이 스스로 군포교의 주인이 되는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아미타불()

  • 06.01.27 21:11

    훌륭하십니다...성불제중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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