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덕이 공연】

 

 

 

 

 

 

 

 

 

 

 

 

 

 

 

 

 

 

 

 

【바우덕이묘】


바우덕이는 안성 남사당패의 유일무이한 여성 꼭두쇠였다.

언젠가 안성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요즘으로 따지면 보아정도될까?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하여간 5살 때 안성 남사당패에 들어가서 15세에 남사당패의 꼭두쇠가 되고 전국의 누비다가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공사때에 전국 남사당패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해서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옥관자기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런 바우덕이는 23세 때 지병인 폐결핵으로 죽었고 나이 많은 남편은 그 골이 떠나가라하고 슬피울었다는 것이다.

안성 남사당패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전국을 누비고 겨울에는 요즘 이야기로 하자면 동계훈련겸 휴식을 위해 청룡사에 있었다는 것이다.

바우덕이 묘는 청룡사가 있는 서운산 자락에 있었는데 막상 큰 길에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간판은 조금 이상했다.

바로 들어가는 곳에 길 안내 표시가 있어야 하는데 들어가는 길에서 몇 미터 뒤에 길 안내가 있어서 모르는 사람은 더 가서 들어가는 길이 있겠구나 혼동이 되는 것이다.

안성시에서 빨리 이 안내판을 뽑아다가 들어가는 입구에 꽂아 놓아야 할 것같다.

사소한 것이지만 신경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차로 들어가니 바우덕이 묘 바로 앞에는 개울이 있는데 거기에 차를 대면 돌려나오기도 쉽지 않을 것같다.

운전기술이 좋은 사람은 예외지만 평범한 사람은 차라리 석재회사 대문 앞에 차를 대고 걸어가는 편이 좋을 것같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강낭콩도 심어져 있었고 닭의장풀도 눈에 많이 띠는 것같았다.

바우덕이 묘를 가기 위해서는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튼튼한 콘크리트 다리가 있어서 좋았고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위해 그 개울에 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바우덕이 묘는 참 이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산 뒤퉁이에 석축을 쌓고 거기에 묘를 쓴 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었는 지 평범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묘는 향토유적 제38호라고 안내판에 쓰여 있었는데 묘에 올라가기전에 안내판과 비석이 있었다.

바우덕이 묘 근처에는 무릇과 며느리밥풀이 많이 피어 있었다.

그리고 거미 암, 수 한쌍을 발견했는데 그 거미는 커다란 수놈이 작은 암놈을 키운다고 하는 것같았다.

바우덕이 사당은 청룡사 들어가는 입구에 커다란 나무가 있는데 그 곳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청룡사 부도들이 모여 있고 그 앞으로 해서 쭉 들어가면 있었다.

들어가는 길에는 큰세잎쥐손이풀이 많이 피어 있었고 짚신나물, 벌노랑이도 많았다.

그리고 며느리밑씻개도 보였고, 사위질빵도 보였다.

바우덕이 사당은 돌로 쌓은 축대위에 단아하게 세워져 있었고 사당 마당에는 사당 안내문과 바우덕이 동상이 있었다.

사당의 현판은 한글도 바우덕이 사당이라고 쓰여 있었고 그 현판에는 말벌들이 집을 짓고 있었다.

마치 말벌들이 바우덕이 사당 수호천사를 자청하는 것같았다.

나오면서 보니 길가에 바위취도 보이고 감나무도 많이 심어져 있었다.

어찌되었든 그동안 잊혀졌던 왕년의 스타 바우덕이가 안성시민들의 노력으로 부활하고 있었다.


아래 글은 안성시 홈페이지에서 이해를 돕기위해 [옮긴글] 입니다.


바우덕이는 안성남사당의 전설적인 인물이며, 우리나라 남사당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여성 꼭두쇠로 알려진 인물이다. 구전에 의하면 5살 때 머슴살던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남사당패에 맡겨져 살면서 재주를 익혀 염불, 소고춤, 출타기 등 남사당의 모든 기예를 익혔다고 한다. 15살 때 당시 안성남사당패를 이끌던 윤치덕이 사망하자 남사당패의 관례를 깨고 바우덕이를 우두머리인 꼭두쇠로 선출했다. 바우덕이는 여성꼭두쇠라는 특성과 탁월한 기예로 안성 남사당패를 최고의 인기패로 육성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1865년(고종2)년 경복궁 중건 공사 때, 인부들을 위로하기 위해 전국의 남사당패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이때 안성에 거주하던 이승지의 후원으로 바우덕이패와 안성 돌우물패가 최고의 인기를 얻어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옥관자기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바우덕이가 살던 곳은 청룡사가 위치한 불당골인데, 이 곳은 예로부터 남사당패가 겨울을 나던 장소이다. 이 곳 남사당패는 청룡사의 신표를 받아 봄부터 가을까지 전국을 누비고, 겨울에는 이곳에 와서 월동을 했다고 한다. 바우덕이는 23세 때 폐병으로 사망했다고 하며, 마지막에 그를 돌보던 이경화가 망인의 유지에 따라 청룡골 입구 개울가 양지바른 곳에 매장했다고 한다.


※바우덕이 연보※


1848.-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출생

1853. - 안성 서운면 청룡사 안성남사당 입단 (당시 5세)

     - 선소리, 줄타기, 풍물, 무동, 새미의 모든 남사당 공연예술 학습

1863. - 안성남사당 꼭두쇠 추대 (당시 15세)

        남사당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여성 꼭두쇠로 활동 시작

        (당시 꼭두쇠 였던 윤치덕의 사망 후 바우덕이가 꼭두쇠로 추대됨)

1865. - 고종 2년 경복궁 중건에 안성남사당패를 이끌고 출연

        최고의 영예인 정3품 당상관 벼슬 상당의 옥관자 수상

        남사당을 전국 예술집단의 최고봉으로 끌어 올림

1865. ∼ 1870. - 안성남사당패가 “바우덕이”로 통칭됨 전국을 다니며 공연활동을 펼침

              → 대한민국 연예문화 탄생 → 최초의 연예인 : 남사당 바우덕이

1870. - 폐병으로 사망 (남사당 단원의 간호를 받다가 사망함)

        남사당 단원들이 바우덕이를 청룡리 골짜기에 안치하고 장례를 지냄

 

 

 

 

 

 

 

 

 

 

 

 

 

 

 

 

 

 

 

 

 

 

 

 

 

 

 

 

 

 

 

 

 

 

 

 

 

 

 

 

 

 

 

 

 

 

 

 

 

 

 

 

 

 

 

 

 

 

 

 

 

 

 

 

 

고인의명복 빌며

삼가 영전에

꽃과 음악 올립니다

 

 

 

 

 

 

 

 

 

 

 

 

 

 

 

 

 

 

 

 

 

 

 

 

 

 

 

 

 

 

 

 

 

 

 

 

 

 

 

 

 

 

 

 

 

 

 

 

 

 

 

 

 

 

 

 

 

 

 

 

 

 

 

 

 

 

 

 

 

 

 

 

 

 

 

 

 

 

 

 

 

 

 

 

 

 

 

 

 

 

 

 

 

 

 

 

 

 

 

 

 

 

 

 

 

 

 

 

 

 

 

 

 

 

 

 

 

 

 

 

 

 

 

 

 

 

 

 

 

 

 

 

 

 

 

 

 

 

 

 

 

 

 

 

 

 

 

 

 

 

 

 

 

 

 

 

 

 

 

 

 

 

 

 

 

 

 

 

Brian Crain - Piano And C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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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서자료방 스크랩 [전설같은 역사이야기] 대한민국 최초의 연예인 : 남사당 바우덕이
송서율창(송규철) 추천 0 조회 425 16.09.08 02: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전설같은 역사이야기


대한민국 연예문화 탄생 → 최초의 연예인 : 남사당 바우덕이

 

 

   


 

 

 


▼ 1968년 동아일보 기사,

바우덕이가 경복궁 중건에 참여한 이야기와 흥선대원군과의 인연이 소개되어 있다.


1909년 황성신문 기사,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바우덕이 관련 문헌이다.

 

바우덕이는 실존인물인가?

먼저 바우덕이가 실존인물인가와 관련해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상식이기는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과거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과거의 인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떤 과거의 인물에 대해 온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 내 눈앞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다 알지 못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과거의 인물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으며, 현재도 제대로 재현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과거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역사적 사실을 통해 즉 남아 있는 각종 문헌과 증거, 구전 등을 통해 합리적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런 전제하에 이야기하자면 1) 청룡리 불당골 사당패의 우두머리로 1865년 경복궁 중건에 참여해 그 실력을 인정받고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친 바우덕이는 실존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2) 청룡리 불당골에 살았고 남사당패 유일무이의 여자 꼭두쇠로 경복궁 중건에 참가했던 바우덕이는 실존했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

1)과 2)의 결정적 차이는 바우덕이를 사당패로 보느냐, 남사당패로 보느냐의 차이다.

이를 중심으로 바우덕이의 실존과 관련해 하나 하나 살펴보자

 

“남사당패 연구”의 혼란

 

그동안 바우덕이의 실존에 대한 의문은 한마디로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즉 청룡리 주민들의 기억과 이야기만 있고, 그나마 남아 있는 자료를 보면 흥선대원군때 사람인지 일제강점기 사람인지 알 수 없고 따라서 실존이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주로 안성의 청룡리 주민들과 심우성의 “남사당패 연구”(1974년)에만 의존하다시피해 바우덕이의 실존을 주장하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 문제였다. 청룡리 주민들은 일관되게 바우덕이가 청룡리에 살았고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에 참여해 옥관자를 받았다고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촌로들의 이야기고 받아들여질 뿐이었다.

그런데 최근까지도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민속학의 권위자인 심우성씨의 책은 논지가 일관적이지 않아 바우덕이의 생몰년대에 대한 논란을 부채질했고, 나아가 바우덕이의 실존까지도 의심받게 된 것이다.

 

사당패와 남사당패는 구분해야

 

심우성 교수의 “남사당패 연구”가 주는 혼란에 대해 홍원의 학예사는 먼저 심우성 교수가 “사당패”와 “남사당패”를 구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즉 각종 문헌기록을 조사해 보면 1900년을 전후로 하여 비로소 “남사당패”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즉 사당패의 뒤를 이어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전문 예인 집단인 남사당패가 등장하는데 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사당패와 남사당패를 혼동하거나 구분하지 않고 쓰는 바람에 혼란이 생겼다는 것이다.

즉 바우덕이는 남사당패가 아니라 사당패라는 것이다. 사당패에 대해서는 앞에서 자세히 이야기한 바 있다.

즉 사당패는 조선중기이후 형성된 유랑예인 집단으로 노래나 창을 중심으로 기예를 펼쳤다. 이에 비해 남사당패는 사당패와 관련이 있지만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유랑예인집단으로 그 펼친 기예도 줄타기 등이 들어간 사당패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뒤에서 이야기 할 현재까지 밝혀진 문헌이나 청룡마을 주민들의 기억으로 볼 때 바우덕이는 남사당이 아닌 사당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바우덕이를 언급하는 문헌기록들

 

홍원의 학예사는 우선 바우덕이가 실존했음을 뒷받침하는 여러 문헌적 근거를 제시했다.

기존에는 심우성 교수의 남사당패 연구가 바우덕이를 언급한 가장 오래된 문헌이었다.

그런데 홍원의 학예사 등에 의해 최근 이보다 앞선 기록들이 잇달아 발굴되었다.

먼저 1968년 2월 17일자 동아일보기사에 바우덕이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1906년생으로 6살 때 남사당패에 들어갔다는 양도일씨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바우덕이가 경복궁 중수식에서 춤을 잘 추어 대원군이 손을 잡아주어 손에 명주를 싸고 다녔다”는 일화를 밝힌 것이다.

두 번째는 안청학원을 설립했고 안성기략 등 안성의 역사와 관련해 많은 기록을 남긴 김태영 선생이 1956년에 쓴 미간행 필사본 안성문화금석관(安城文化今昔觀)에서 바우덕이를 언급한 것이다. (이 책은 지난 2011년 안상정씨에 의해 “편역 안성문화”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발행되었다)

그 내용 중 일부에 “여사당은 안성군 서운면 청룡사 부근인 청룡리에서 ‘바위덕’이라는 여자가 처음으로 꾸며낸 것”이라는 내용을 비롯해 바우덕이와 사당패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1908년 황성신문 기사내용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으로 홍원의 학예사가 최초로 발굴한 기록이다.

기사 내용은 비취란 기생에 대하여 언급하며, “일락서산(日落西山)하고 월출동령(月出東嶺)은 안성청룡 바위덕이가 오더라도 그 머리(頭)를 양보하고 쥐구멍을 찾겠다더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일락서산(日落西山)하고 월출동령(月出東嶺)은 산염불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기사내용을 해석하면 비취가 산염불을 바우덕이보다 훨씬 잘 부른다는 것인데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1908년 당시 이미 바우덕이의 명성이 조선땅 전역에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운면 주민들이 이야기하는 바우덕이

 

청룡리 주민들의 증언은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증언들을 재구성해 앞에서 소개한 바우덕이 축제 홈페이지에서 소개하는 바우덕이의 생애가 정리된 것이다.

다만 기존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주민들의 증언과 서운면 인리에 살았던 한 주민이 남긴 바우덕이에 대한 기록을 소개하고자 한다.

두 내용은 유사하면서도 바우덕이가 사당이었다는 사실과 관련해 시사해 주는바가 크다.

청룡리 주민들의 증언은 홍원의 학예사가 채록한 내용과 이번에 마을주민들에게서 들은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바우덕이와 그 사당패가 경복궁 중건에 참여한 것과 관련해 주민들의 대부분이 말하는 것은 기예를 했다는 내용보다는 터를 다질 때 하는 “지경다지기 선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홍원의 학예사는 당시 경복궁 중건에 참여한 공연패들이 지경소리를 했다는 것은 승정원 일기 등에 나오는 사실이라며 청룡리 주민들의 증언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또한 사당패의 주된 공연종목이 선소리를 중심으로 한 노래였다는 것과 관련해 청룡리 주민들의 증언은 매우 신빙성이 높다 할 것이다.


바우덕이 사당과 동상


< 바우덕이 사당과 동상.
<

 

바우덕이 공연】

 

 

 

 

 

 

 

 

 

 

 

 

 

 

 

 

 

 

 

 

【바우덕이묘】


바우덕이는 안성 남사당패의 유일무이한 여성 꼭두쇠였다.

언젠가 안성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요즘으로 따지면 보아정도될까?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하여간 5살 때 안성 남사당패에 들어가서 15세에 남사당패의 꼭두쇠가 되고 전국의 누비다가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공사때에 전국 남사당패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해서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옥관자기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런 바우덕이는 23세 때 지병인 폐결핵으로 죽었고 나이 많은 남편은 그 골이 떠나가라하고 슬피울었다는 것이다.

안성 남사당패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전국을 누비고 겨울에는 요즘 이야기로 하자면 동계훈련겸 휴식을 위해 청룡사에 있었다는 것이다.

바우덕이 묘는 청룡사가 있는 서운산 자락에 있었는데 막상 큰 길에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간판은 조금 이상했다.

바로 들어가는 곳에 길 안내 표시가 있어야 하는데 들어가는 길에서 몇 미터 뒤에 길 안내가 있어서 모르는 사람은 더 가서 들어가는 길이 있겠구나 혼동이 되는 것이다.

안성시에서 빨리 이 안내판을 뽑아다가 들어가는 입구에 꽂아 놓아야 할 것같다.

사소한 것이지만 신경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차로 들어가니 바우덕이 묘 바로 앞에는 개울이 있는데 거기에 차를 대면 돌려나오기도 쉽지 않을 것같다.

운전기술이 좋은 사람은 예외지만 평범한 사람은 차라리 석재회사 대문 앞에 차를 대고 걸어가는 편이 좋을 것같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강낭콩도 심어져 있었고 닭의장풀도 눈에 많이 띠는 것같았다.

바우덕이 묘를 가기 위해서는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튼튼한 콘크리트 다리가 있어서 좋았고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위해 그 개울에 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바우덕이 묘는 참 이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산 뒤퉁이에 석축을 쌓고 거기에 묘를 쓴 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었는 지 평범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묘는 향토유적 제38호라고 안내판에 쓰여 있었는데 묘에 올라가기전에 안내판과 비석이 있었다.

바우덕이 묘 근처에는 무릇과 며느리밥풀이 많이 피어 있었다.

그리고 거미 암, 수 한쌍을 발견했는데 그 거미는 커다란 수놈이 작은 암놈을 키운다고 하는 것같았다.

바우덕이 사당은 청룡사 들어가는 입구에 커다란 나무가 있는데 그 곳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청룡사 부도들이 모여 있고 그 앞으로 해서 쭉 들어가면 있었다.

들어가는 길에는 큰세잎쥐손이풀이 많이 피어 있었고 짚신나물, 벌노랑이도 많았다.

그리고 며느리밑씻개도 보였고, 사위질빵도 보였다.

바우덕이 사당은 돌로 쌓은 축대위에 단아하게 세워져 있었고 사당 마당에는 사당 안내문과 바우덕이 동상이 있었다.

사당의 현판은 한글도 바우덕이 사당이라고 쓰여 있었고 그 현판에는 말벌들이 집을 짓고 있었다.

마치 말벌들이 바우덕이 사당 수호천사를 자청하는 것같았다.

나오면서 보니 길가에 바위취도 보이고 감나무도 많이 심어져 있었다.

어찌되었든 그동안 잊혀졌던 왕년의 스타 바우덕이가 안성시민들의 노력으로 부활하고 있었다.


아래 글은 안성시 홈페이지에서 이해를 돕기위해 [옮긴글] 입니다.


바우덕이는 안성남사당의 전설적인 인물이며, 우리나라 남사당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여성 꼭두쇠로 알려진 인물이다. 구전에 의하면 5살 때 머슴살던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남사당패에 맡겨져 살면서 재주를 익혀 염불, 소고춤, 출타기 등 남사당의 모든 기예를 익혔다고 한다. 15살 때 당시 안성남사당패를 이끌던 윤치덕이 사망하자 남사당패의 관례를 깨고 바우덕이를 우두머리인 꼭두쇠로 선출했다. 바우덕이는 여성꼭두쇠라는 특성과 탁월한 기예로 안성 남사당패를 최고의 인기패로 육성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1865년(고종2)년 경복궁 중건 공사 때, 인부들을 위로하기 위해 전국의 남사당패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이때 안성에 거주하던 이승지의 후원으로 바우덕이패와 안성 돌우물패가 최고의 인기를 얻어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옥관자기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바우덕이가 살던 곳은 청룡사가 위치한 불당골인데, 이 곳은 예로부터 남사당패가 겨울을 나던 장소이다. 이 곳 남사당패는 청룡사의 신표를 받아 봄부터 가을까지 전국을 누비고, 겨울에는 이곳에 와서 월동을 했다고 한다. 바우덕이는 23세 때 폐병으로 사망했다고 하며, 마지막에 그를 돌보던 이경화가 망인의 유지에 따라 청룡골 입구 개울가 양지바른 곳에 매장했다고 한다.


※바우덕이 연보※


1848.-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출생

1853. - 안성 서운면 청룡사 안성남사당 입단 (당시 5세)

     - 선소리, 줄타기, 풍물, 무동, 새미의 모든 남사당 공연예술 학습

1863. - 안성남사당 꼭두쇠 추대 (당시 15세)

        남사당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여성 꼭두쇠로 활동 시작

        (당시 꼭두쇠 였던 윤치덕의 사망 후 바우덕이가 꼭두쇠로 추대됨)

1865. - 고종 2년 경복궁 중건에 안성남사당패를 이끌고 출연

        최고의 영예인 정3품 당상관 벼슬 상당의 옥관자 수상

        남사당을 전국 예술집단의 최고봉으로 끌어 올림

1865. ∼ 1870. - 안성남사당패가 “바우덕이”로 통칭됨 전국을 다니며 공연활동을 펼침

              → 대한민국 연예문화 탄생 → 최초의 연예인 : 남사당 바우덕이

1870. - 폐병으로 사망 (남사당 단원의 간호를 받다가 사망함)

        남사당 단원들이 바우덕이를 청룡리 골짜기에 안치하고 장례를 지냄

 

 

 

 

 

 

 

 

 

 

 

 

 

 

 

 

 

 

 

 

 

 

 

 

 

 

 

 

 

 

 

 

 

 

 

 

 

 

 

 

 

 

 

 

 

 

 

 

 

 

 

 

 

 

 

 

 

 

 

 

 

 

 

 

 

고인의명복 빌며

삼가 영전에

꽃과 음악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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