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이 때에 해부루 해모수 온조 박혁거세 등 여러 성인과 철인들이 그 누가 우리나라의 오랜 번영의 기초를 연 자가 아니리요마는 다만 그 중에서도 공적이 풍부하고 덕업이 왕성함이 가장 우렁차고 가장 뛰어난 이는 오직 동명성왕 고주몽일 것이다.
왕은 해모수의 측실의 아들로 동부여에 얹혀 살다가 금와왕의 여러 아들의 시기를 받아 홀몸으로 멀리 도망함이 그 길이 험하여 나아가지 못할 때 부분노 부위염 오이 마리 협보 극재사 중실무골 소실묵거 등 여러 영웅 호걸과 결탁하여 험한 길을 열고 풀을 헤치고 구려산에 도읍을 세워서 말갈을 물리치며 송양을 항복시키며 행인 숙신 등의 나라를 없애고 부분노를 보내어 선비족을 내쫓고 부위염을 써서
옥저를 복속하여 동쪽으로는 삼한을 위협하고 서쪽으로는 중국에 대항하니, 이에 단군의 옛 영토가 다시 다물(多勿: 고구려 말에 강토 회복을 가리킨다)의 영광을 드러내었으니 부여 민족의 깨뜨릴 수 없는 터전을 정한 것이다. 당시 수많은 주변 종족의 사이에서 고단한 근본으로 우뚝 선 부여족이 하루 아침에 비약함은 모두 동명성왕의 공덕이다. 온조와 박혁거세가 비록 남한을 평정한 공이 있으나 그들이 다스린 지역이 모두 작은 토착 추장의 부락에 지나지 않으니 그 후 역대 조정이 모두 동명성왕의 사당을 세워 존중하고 추모하는 뜻을 나타냄이 진실로 마땅한 것이다.
살펴보건대 고주몽을 혹 성왕이라 부르다가 다시 성제로 부름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고대 우리나라 군주 및 관위(官位)의 이름을 단지 국어로 부르고 국문으로 쓰더니 후에 한자로 번역하매 제왕의 두 자를 통용함에 이르렀던 까닭으로 단군이 단왕 단제의 칭호가 있게 되고 (고려인의 시에 “檀帝보다 먼저 戊辰歲에 태어났다”와 같은 종류) 알영에게 제부인(帝夫人) 왕비의 칭호가 함께 있으니 동명왕이 가끔 혹은 제로 혹은 왕으로 불리는 것도 곧 이 예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그 수명을 더 빌려주지 아니하므로 (동명의 수명은 40년이었다) 그 공덕이 겨우 여기에서 머물렀다. 그 후에 아들 유리왕이 왕망의 군사를 물리치고 한나라 땅을 잠식하고 동명의 손자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하여 중국세력을 없애버렸으니 유리왕 대무신왕이 그 또한 영명한 군주이다.
또 살펴보건대 고구려의 강대함이 대무신왕 이후로 비롯되었다. 대무신왕 이전에는 비록 동명성왕의 빛나는 공적이 멀리 미치어 많은 부락을 통일하였으나 그 토지나 병력이 동부여에 비하면 아직 손색이 있기 때문에 유리왕 27년에 동부여왕 대소가 사자를 보내어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겨야 하는 의리로써 꾸짖었을 때 왕이 두려워 주저하면서 답변할 바를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대무신왕에 이르러 동부여를 병합했을 때 고구려의 위대한 이름이 동서에 비로소 떨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