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치세 전반기에는 동인이 득세하였고, 임란 직전 당시 득세하던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뉜다. 임진왜란 기간중에는 류성룡을 필두로 하는 남인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임란 종결을 전후로 북인세력들이 남인들을 탄핵하고 득세하였으며, 이후 선조의 후사를 두고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으로 나뉘게 된다.
광해군이 등극한 전후로는 사색당파 모두가 참여하는 연립내각이 형성되었지만 몇번의 대대적인 옥사 끝에 대북세력들이 득세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대북세력들은 완전히 축출된다. 소북세력들은 살아남았으나 광해군 치세때 이미 독립 당파로써의 힘은 상실했고 여타 당파로 흡수되었다. 여기까지가 붕당정치의 제1기로 붕당 정치의 틀이 마련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미 북인은 사라졌다.
인조반정으로 서인들이 집권하게 되지만, 남인을 함께 기용하였으며 서로 공존하는 정치를 하였다. 애초에 호란을 거치면서 서로 싸울 시간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북벌의 시대가 온 효종시기에는 서인이 남인을 억압하는 양상을 보였으나 예송논쟁 이후 남인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이 시기가 붕당정치사의 제2기이다. 이 시기 붕당의 양상은 서인과 남인간의 대립 양상을 띄게 되었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구도가 형성되었다. 실제로 이 시기를 붕당정치의 이상이 그나마 잘 지켜진 시기로 평가된다. 이 때는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파벌의 경우도 유배나 낙향 정도였고 사약이 내려가는 사사는 정말 드문 경우였다.
이후 숙종시기 남인이 서인을 축출하면서 득세하게 되지만 이도 얼마 안 갔다. 이후 숙종의 환국정치를 거치면서 붕당은 낙향, 파직, 좌천 정도가 아니라 위리안치, 사사, 연좌제가 넘쳐나는 피비린내나는 정면승부의 시대로 나아가게 된다. 숙종 말기 집권당이었던 서인은 경신환국 이후 송시열이 자신을 도운 김석주를 비롯한 척신들을 옹호하자 이에 실망한 젊은 사림들이 송시열과 그를 추종하는 기성세력에게 반기를 들면서 노,소론으로 분당된다. 그리고 노,소론 대립이 격화됨과 동시에 다수당이 소론에서 노론으로 바뀌는 사건이 터지니 남인정권이 들어서는 와중에 송시열을 비롯한 거물들이 대거 죽임을 당하자 많은 젊은 소론들이 대남인 강경파인 노론으로 전향한 것이다. 소론은 권좌는 지켰지만 경종을 싫어한 숙종이 병신처분으로 소론을 날리면서 노론이 집권한다. 이후 경종이 대리청정 문제로 함정을 파서 영조를 지지한 노론의 수뇌부를 대거 숙청하고 다시 삼수의 옥이 터져 이들을 대거 죽이면서 소론이 잠시 득세하는 듯 했으나 경종이 덜컥 죽어버리는 바람에 즉위한 영조에 의해 영조 즉위에 많은 공을 세운 노론이 제1정당이 된다. 이 시기가 붕당정치사의 제3기이다. 이 때에는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발생한 사회의 변동과 그로 인한 과거시험의 남발로 인해서 관료예비군이 넘쳐흐르던 시대였다. 때문에 정권에서 밀려난 학파의 경우는 지방 영향력까지 상실하며 그야말로 쪽박차는 상태가 되어서 밀려난 세력에게는 유배 정도가 아니라 집단으로 사약을 내려서 씨를 말리려고 하고 왕이 중재해도 의리상 상대 당파들과는 한 하늘 안에 살 수 없다고 배수진을 치고 악착같이 싸우는 시대가 벌어진다. 그리고 밀려난 당파들도 이게 다 왕이 찬탈자라 그렇다! 라고 죽기 살기로 반역을 일으키고 대놓고 왕을 모욕하는 등 테러행위를 저질러 스스로의 목숨을 재촉한다.
이러한 붕당의 흐름을 잘 알고 있던 영조는 집권 초기 노론의 세력의 주도 시기를 지난 이후에는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들을 중심으로 하여 여기에 정권에서 밀려나 있던 남인 세력 일부를 더한 탕평파를 구성해서 그 탕평파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에 들어간다. 이른바 완론탕평이다. 하지만 이는 영조의 왕권강화 시도 정도로 탕평파는 또 하나의 붕당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을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주도세력이 되지도 못했다. 민진원, 정호, 유척기같은 노론의 강경파는 이런 분위기에 호응하는 시늉도 하지 않았고 김일경을 비롯한 남인 강경파과 소론 준론은 아예 영조를 찬탈자로 지목하고 계속하여 반역하여 준론과 남인 강경파들은 아예 멸족되고 남은 소론 완론들과 남인 온건파들도 영조 31년 이후에는 입지가 너무 좁아져서 주도권을 노론에게 내주는 정도를 점어 아예 조정에서 거의 퇴출당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론이 영조의 왕권을 능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조의 왕권에게 짓눌려서 거의 장난감 취급을 받고 있던 터였다. 노론이 소론, 남인을 마구 폄하하다가 분노한 영조에게 걸려서 다시는 붕당 안하게도 싹싹 빌며 울고불고 난리친 사건이 여럿 된다. 하지만 의리니 토적을 외치는 강경한 노론 명문가에게 질려버린 영조는 당파의 의리보단 왕의 말이나 잘 듣는 척신 홍봉한과 그의 아우 홍인한이 주축이 된 풍산 홍씨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노론계 외척들을 대거 끌어들이게 되어 영조 후반에는 당파의 의미 자체가 사라지고 척신 정치가 강하게 자리잡는다. 영조 말년에는 이러한 척신 정치를 혐오한 척신인(...) 정순왕후의 처가인 경주 김씨와 김종수, 심환지 등의 청명당이 힘을 합쳐 홍봉한에 맞서게 된다. 그런데 한가지 변수가 터지니 사도세자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흔히들 사도세자의 처분 문제를 두고 벽파, 시파 등으로 갈라지고 당파들이 싸움을 벌였다고 묘사되어 있지만 이미 그 당시에는 당파 라는 개념 자체 희미해지고 있었고 벽파니 시파니 분류된 것은 정조 때의 일이다. 주로 시파가 사도세자에 동정적이고 벽파가 사도세자를 죽였다고 하지만 영조 때는 벽파와 시파 구분 자체가 없었고 홍봉한의 탕평당과 척신 정권에 김종수, 심환지 등이 주축이 된 청명당이 서서히 반발하고 경주 김씨 일문이 홍봉한에 맞서면서 그들과 손을 잡는 모습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사도세자의 죽음은 영조의 의지였지 노론은 별 잘못이랄게 없다. 그때 정권을 차지하고 있었다는게 죄라면 죄일 뿐이지. 자세한 것은 사도세자 항목 참조. 정조가 벽파와 대결했다는 증거로 이조판서를 지낸 홍인한은 영조가 나이를 이유로 세손인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고 한 것에 대해서 '세손은 노론 소론을 알 필요도 없고,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에 누가 좋은지도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더욱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필지설을 내세웠다는 것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애초에 조선시대에 세자가 정치에 관여한다는 것은 별로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고 세자는 침선의 문제만을 살피면 되지 괜히 정치를 알려 들었다가는 오히려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위험해지기 십상이었다. 이 발언 자체는 그다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그때는 벽파 시파 구분이 없었다.
오히려 뒤에 밝혀지지만 정조의 정치적 성향은 오히려 벽파의 그것에 가까웠고 홍인한 등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별 책임이 없었다. 정작 후에 강경 벽파로 분류되는 김귀주와 그의 아비 김한구, 사촌 김관주 및 경주 김씨와 정순왕후 파는 정조를 크게 지지했고 김귀주 등은 번번이 상소를 올려 세손을 지원사격했으며 정순왕후는 영조에게 세손의 승계가 당연하지 않냐고 정조를 대리청정 등을 종용하는 발언을 하곤 했다.
정조는 즉위 이후 홍국영을 친위세력으로 해서 척신 정치의 상징이자 자신의 대리청정을 방해한 홍인한,화완옹주,정후겸을 제거했고 사도세자의 복수로 죽은 김상로와 홍계희, 문성국의 벼슬을 추탈하고 영조의 후궁 문씨를 폐서인하는 수준으로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시파 정권을 열었다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흔치않게도 소론 벽파인 서명선, 노론 벽파의 거두인 김종수와 심환지 등을 중용하였다. 그리고 당시는 홍봉한의 척신 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벽파가 상당수였다. 애당초 벽파라는 것이 사도세자 죽어라! 가 아닌 우린 척신이나 역적인 소론, 남인 애들하곤 못놀겠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벽파가 사도세자 추숭에 반대한 것도 사도세자가 미워서가 아니라 사도세자의 신원은 당시 조정을 장악하던 노론의 잘못으로 귀결될 문제고 세자가 죽음까지 당했으니 노론은 반역자가 되어 일망타진 당할 처지가 된다. 실제로 체제공은 이걸 실현시켜 남인의 복귀를 꾀했다. 그러니 노론 벽파가 여기에 반대할 수 밖에.
정조는 이어 새로운 척신이 되어가는 홍국영도 제거하면서 척신 정치를 완전히 청산하고 정민시와 소론, 남인, 규장각 출신 소장파가 주축이 된 시파도 대거 끌어들여 오히려 붕당정치를 다시 열었다. 정조의 경우는 영조와는 달리 붕당의 시시비리를 가린다는 이유로 소론과 노론의 과격파들과 역시 남인들을 중심으로 한 준론탕평에 들어갔다. 이후 신해통공과 천주교 문제, 문체반정운동 등을 통해 정조는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이 시기가 탕평정치기로 붕당정치사의 제4기이자 사실상 마지막 시기이다. 이에 대해서는 표면적으로는 붕당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지만 사실상 영조와 정조의 왕권강화책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하지만 정조가 급작스럽게 사망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수렴청정을 맡은 정순왕후 김씨와, 그녀를 지지하는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지만, 불과 4년 뒤 정순왕후가 죽고 순조의 장인이 된 노론 시파인 안동 김씨 김조순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시파가 득세하게 된다. 이것으로 실질적으로 붕당의 역사가 끝나고, 세도정치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