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태조 4년 9월로 새 궁궐을 다 지어놓고 남문을 광화문이라 한다는 태조실록의 기록이다. 한데 ‘세종실록’ 8년 10월조에 집현전으로 하여금 경복궁 안의 여러 문이름을 짓게 했는데 남문을 광화문이라 한다 했음으로 미뤄 그때까지는 정문(正門)으로 불렸던 것 같다.
‘동국여지승람’에 광화문의 옛이름이 정문이었다 하고 정도전(鄭道傳)이 정문으로 이름을 지은 뜻을 “이 문을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광화문이라는 본 이름 대신 정문이라는 보통명사로 불려오다가 세종 때 중수와 더불어 본래 이름인 광화문으로 정착한 것이 아닌가 싶다.
광화문 현판 글씨는 누가 썼는지 알 수 없으며 고종 초 흥선대원군이 중건했을 때 현판은 당시 궁궐 경비사령관이던 어영대장(御營大將) 임태영(任泰瑛)이 썼다고 ‘고순종실록’이 밝히고 있다.
이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궁을 떠난 후 방화로 타버렸고 성벽과 월대(月臺) 그리고 경회루의 돌기둥들만이 남아 있었으며 궁 안 노송에는 백로가 깃을 드리워 마치 눈에 덮인 듯했고 광화문 자리에는 임시로 새문을 세우고 ‘구광화문(舊光化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 ‘한경지략(漢京識略)’이 전하고 있다.
정조 때 학자 유득공(柳得恭)이 폐허가 된 경복궁을 읊은 시에서 광화문전 해태를 두르고 있던 난간은 허물어지고 문지기는 버들가지 아래 졸고 있으며 과객들이 궁 안 잔디밭에 늘펀히 앉아 쉰다 했다.
즉 경복궁은 왜란에 타버린 이래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중건할 때까지 폐허였으며 정조의 집권시절에도 폐허로 문지기를 위한 막사만이 세워져 있었을 뿐이다.
정조 때 이 ‘구광화문’이 쓰였다면 왕대비가 경복궁 후문께 있는 육상궁(毓祥宮)에 행차할 때 거쳐간 것이 고작이었다. 곧 정조와 광화문과는 관계가 없다. 왜 정조의 글씨를, 그나마도 만들어서까지 현판글씨로 삼으려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굳이 임금의 글씨로 현판을 삼겠다면 이 궁과 광화문을 지은 태조나, 중창한 세종이나 그리고 광화문 다락에 군림하여 정사의 잘잘못을 살펴 징벌하는 것을 정례화했던 성종의 글씨라면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