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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시죠? 오랜만에 도서를 추천하러 왔습니다.
이게 올해의 마지막 독서 감상문이 될 것 같네요.
이번에 읽은 책은 상당히 골치가 아픈 부류입니다. 정치학 관련한 인문서거든요.
말하자면 사회과학 내지는 총류 분야로 분류할 수 있겠네요.
도서명: 군주론
저자: 니콜로 마키아벨리
* 이 도서는 넓은마을 도서관의 5번 인문 부문에서 다운로드가 가능합니다.
* 소개글 서평
이 책을 들게 된 건 그분의 권유에서 기인한다. ‘그분’이 누구냐고? 우리 아버지시다. 어디 책을 소개하는 TV에서 이 도서를 극찬했단다. 트럼프니 누구니 하는 지도자급의 인물들의 필독서라며 큰 이슈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 책이 바로 이번에 읽은 저 유명한 ‘군주론’이다.
정치학의 최고의 고전이자, 저자에게 ‘마키아벨리즘보다 더 야비한 마키아벨리’라는 불명예의 수식어를 안겨준 책이요, 한때 교황청에서 금서로 지정된 적도 있는 굴곡진 역사를 지닌 작품이다.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언정, 그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다는 화제의 ‘군주론’을 독서 후 나름대로 정리하려 한다.
“할 수 있다면 착해지십시오. 그러나 필요할 때는 주저없이 사악해져야 합니다.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나라를 지키고 번영시키는 일입니다. 일단 그렇게만 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 군주가 무슨 짓을 했든 상관없이 칭송받게 될 것이며, 위대한 군주로 추앙받을 것입니다.”
이 문장이야말로 총 26장에 걸쳐 군주와 군주국에 대해 논하고 있는 ‘군주론’의 핵심을 관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흔히 ‘마키아벨리즘’이라 하면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이 책이 시사하고 있는 바도 비슷하다. 여기서 ‘군주론’이 어떻게 집필됐나 하는 맥을 짚고 가도록 한다.
저자인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 피렌체를 통치하던 메디치 가문이 추방당하고 공화정이 들어선 시기에 14년간 외교관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러다 1512년 스페인의 공격으로 피렌체 공화국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문이 재집권하면서 반메디치 일파로 잡혀 옥살이를 하다가 겨우 사면을 받는다.
일단 목숨은 건졌으나 그는 이미 밉보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권력 구도 역시 왕정 체제로 달라져 있었다. 그런 판국에서 마키아벨리는 궁리 끝에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를 일군 로렌초 데 메디치를 위해 지도자의 덕목을 담은 ‘군주론’을 집필한다. 이 책을 보고 자신을 알아달라, 자신을 등용해달라는 의도로 말이다.
이것만 보면 사심만 가득하게 보이지만 이 책에는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정치의 밑낯을 경험하고, 차마 보지 못할 꼴, 그나마 봐줄 만한 꼴을 옆에서 보고 겪으며 통찰한 니콜로 마키아벨리 나름의 사상이 담겨 있다. 그는 물론 자기의 출세도 바랐지만, 이 책을 통해 평지풍파가 끊이지 않는 이탈리아를 어떻게 좀 잘 살게끔 해달라는 희망도 담은 것이다. 군주론의 문체는 간결하고 짧은데, 그 또한 독서할 시간도 없이 바쁜 군주 로렌초 메디치를 위해 취한 서술 방식이다.
하지만 로렌초 데 메리치는 그 책을 들춰보지도 않았고, 그리하여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더불어 ‘군주론’은 제법 오랫동안 무수한 지탄과 비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내세운 사상이 매우 불편했고 불온했기 때문이다. 위의 저 문장을 봐라. 저거 보고 마음이 편하다면, 그 사람은 도덕관이 없는 놈일 거다. 착해질 수 있다면 선해지되,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야비해지고 치사해지고 비겁해져도 된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궤변이란 말이냐! 그럼 착해질 수 없는 현실에서는 삐뚤어져도 된다는 말이냐!
“비참한 땅에서 피 흘리는, 아아, 비굴한 이탈리아여. 거대한 폭풍우 속에서 선원이 없는 배여. - 단테”
내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옹호하느냐 묻는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하겠다. 하지만 그를 좀 변론하자면, 군주론이 탄생한 시대는, 위의 궤변 같은 사상을 늘어놓을 정도로 암울한 체제의 온상인 때였다. 오죽했으면 그 유명한 단테가 저런 읊조림을 남겼겠는가?
이탈리아는 피렌체와 베니스 등으로 사분오열되어 각자 자기가 지도자임네 하며 당파 싸움을 하던 시기였고, 프랑스나 에스파냐 등의 외세는 자기가 이탈리아의 주인이 되겠다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면서 각축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무능한 지도자 만큼 나라를 파탄내는 인물도 없다. 또 정쟁 만큼 국가를 아작내는 것도 없다. 한마디로 일제강점기가 벌어지기 직전,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와 그 외 기타 등등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뜯어먹을까 하며 눈치 싸움을 하던 시기, 왕은 힘이 없고 능력도 없던 시기, 그럼에도 이놈의 관리들은 개혁을 하네 내가 맞네 너는 틀리네 하며 당쟁만 하던 때와 비슷한 꼴이었다.
이때 필요한 건 ‘독’이었다. 한낱 도덕율이나 종교적 신념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떻게든 정세를 안정시킬 수 있는 지도자였다. 그가 소시오패스든 전쟁광이든 상관없이 권력을 쟁취하고 나라를 번창시킨다면, 그걸로 된다고 할 만큼 혼란한 시대였던 것이다. 요컨대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민중의 위에 군림하라, 사랑받을 바에야 차라리 공포를 받겠다, 수단이 정당하지 않아도 일단 성공만 하면 그걸로 모든 게 용서가 된다는 식의 슬로건이 나온 배경부터가 비정상적이었다는 뜻이다. 하기사 정상적인 환경에서 이런 사상이 나왔다면, 그 철학을 주창한 학자가 정상이 아니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는 그런 사상이 담겨져 나왔다. 그는 다수의 평화를 위해 다소의 위법은 묵인해야 한다고 했고, 그것은 곧 그 정도로 정세가 극단적이었다는 방증이 아니었을까? 한마디로 마키아벨리즘 자체가 극한 위기 상황에서만 통용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 군주는 왜 ‘죄’에서 자유로운가? 많은 사람의 운명을 쥐고 있으니 도덕적으로만 행동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다수의 번영과 부귀를 위해 소수의 제물을 필요로 한다면 그 소수를 기꺼이 단두대의 세울 수 있어야 ‘군주’라는 거다.
저자는 군주의 자질로 두 가지 면모를 꼽는다. 우선 적이 판 함정을 꿰뚫는 두뇌와 직접 함정을 파서 누군가를 빠뜨리는 기획력, 책략이라기보다 ‘모사꾼 여우’의 기질이라고 정리하고 싶다. 하지만 머리만 잘 굴려서는 군주라고 할 수 없다. 나라를 이끌고 군림하며 적을 박살내려면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용병술일 수도 있고, 군권이나 권력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저자는 그 조건을 ‘사자의 용맹’이라고 정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금서 지정은 심하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21세기 필독서’라고 일컬어지는 이유는 모르겠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군주론’을 꺼리는 까닭은 오로지 결과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과정이 옳고 좋으며 선하다고 해도 실패했다면, 틀린 거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결과 만큼이나 그 과정도 중요하다고, 결과가 옳다면 그 과정 또한 정당해야 한다고, 옳지 못한 과정으로 인한 결과라면 그것은 바르지 않다고 배워온 우리에게는 지나치게 이질적이다.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며 수긍하는 우리가 있다는 것 역시도 부정할 수 없다. 한 나라의 지도자는 그 국가를 위한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옆에 있는 나라까지 살피고 고려하며, 악습 철폐를 주장하고 복지정책을 건의할 이유가 있을까? 내 국가만 잘 먹이고 잘 살게 하면 되는 거다. 이런 방면에서 본다면 비단 ‘군주’라는 지도자뿐 아니라 작게든 크게든 한 집단을 책임지는 이들은 어느 정도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정치’가 종교든 도덕이든, 정치적이지 않은 그 모든 것들로부터 제한받지 않아야 할까?
“공동체의 일꾼은 위기가 닥치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얻을 이익이 생기면 옳은지 부정한지에 생각을 집중하라. - 논어”
조선 중기의 학자 율곡 이이 선생은 말했다. ‘견득사의’, 이득을 얻음을 보노라면 그것이 옳은가 생각하라고.
위 문장을 봐도 알겠지만, 원래 논어에서 기인한 말이다. 문장 출처가 어디든 맞는 말임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군주론’ 설명하다가 왜 ‘논어’가 나오냐 하면, 이 두 정치학 고전은 서로 대척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불 가릴 것 없다’의 마키아벨리와 ‘이득이고 성공이고, 그 전에 그것이 과연 정당한지부터 고려해야 할 거 아니냐’고 외치는 논어의 공자. 그러고 보면 둘이 활동했던 시대 배경도 얼추 비슷하다. 이탈리아나 중국이나 권력가들의 깽판으로 민중의 삶은 팍팍하다 못해 수난의 역사였으니까.
그러나 엇비슷한 환경 가운데서도 둘이 표방한 군주와 군자의 리더상은 차이가 있었다. 꼴랑 뒤에 붙는 모음만 다른 게 아니라, 사상부터가 극과 극이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남을 다스리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데 능통한 이를 최고로 쳐줬다. 사리사욕을 절제하고 지배계급으로서 지켜야 할 덕목에 충실한 인물을 알아줬고, 자기 배 채우기에 급급한 인간은 쓰레기로 취급해 왔다. 그래서 정치 지도자가 도덕적이지 못하면, 우리들 모두 촛불 들고 광화문 광장으로 나가지 않던가?
마키아벨리가 본다면 도통 이해하지 못할 행동일 거다. 그의 입장에서는 국가 지도자, 즉 군주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면 장땡이니까. 하지만 공자 이래로 우리는 국가 지도자의 자리에 윤리적 축을 부과해 버렸고, 그것은 시간에 퇴색될지언정 아직 잠제 의식에는 그 사상이 남아 있다. 사회적 공분을 사는 말도 안 되는 잇속 챙기기를 하는 정치가를 보면 ‘소인배’라고 손가락질을 하지 않는가. 권력에 제동 장치를 만들어 걸어놓은 셈이다.
그러나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군주는 필요하다면 모든 사악한 방책의 실행을 고려해야 하며, 그것은 단 한 번에 끝내야 한다고. 그에게는 브레이크가 없다. 단지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만 있을 뿐. 이 점에서 마키아벨리도 영 미친 건 아닌 것이, ‘필요하다면’이라고 이성적 명분을 내세웠다는 부분이다. 즉 굳이 필요하지 않다면 나쁜 짓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지만 한 번을 했든 여러 번을 했든, 나쁜 짓은 ‘나쁜 짓’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최악인 상황에서만 통용된다는 점이다. 즉, 일반적이지 않다는 거.
그렇다고 ‘군주론’이 가치가 없는가 하면 그건 좀 다르다. ‘군주론(The Prince)’은 정치의 이상과 현실, 그리고 정치와 윤리를 철저하게 구분하고, 선과 악을 떠나 오로지 실효성만을 논했다. 또 정치를 ‘인간의 의지 문제’의 시각으로 조명했다. 이상을 표방했던 사상에 고개를 저은 것이다. 말하자면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한 격이다. 그런 측면에서 ‘군주론’은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동조할 수는 없다. 다들 미쳐 있는 판에서 혼자만 군자 왈을 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으니 일단 살고 보자는 시대상은 알지만, ‘군주론’은 어디까지나 ‘반면 교사’로서만 가치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 헌법 제1조 2항”
물론 ‘이상적인 정치’의 실현은 지극히 어려운 게 사실이다.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정치가들은 그 ‘이상’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강의에서 어느 교수가 그랬다. 이상은 급류 속에 판자와 같다고. 그 이상마저 없다면 우리는 현실이란 급류에 속절없이 휩쓸리고 말 것이라고. 이상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니라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정치는 모든 국민들을 잘 살게 하자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학문이다. 이런 걸 보면 애초에 그 학문 자체가 현실과 약간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정치가이기 이전에 사람이므로 인성 역시 갈고 닦아야 함은 물론이다. 사람이 되어야 치국도 할 수 있는 법이니까.
군주론을 가만히 읽다 보면 씁쓸하게도 한국의 근현대사와 비슷한 맥락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내가 근현대사 과목을 배울 때, 그 시절이 좋았다고, 훈륭했다고 하는 칭찬을 들은 기억이 없다. 혼란의 격변기라는 평가만 들었다. 즉, ‘군주론’대로 하면 발전이 아니라 퇴보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사상대로 행하려는 자들을 막고자, 이 책을 읽는 것에 의의를 둘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 헌법대로 하자면 권력과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니, ‘군주론’을 일단은 읽고 볼 일이다. 뭘 알아야 고리눈을 뜨고 예의주시할 거 아닌가. 윗분들이 그런 ‘헛짓’을 하지 않나 체크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