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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51 - 강건성세의 두번째 황제로 일 중독자 라고 불리는 옹정제!
1722년 12월 청나라 강희제 뒤를 이어 넷째 아들 윤진이 옹정제로 즉위했는데 흔들리는 황권을 막기위해
직계 형제들을 포함한 황친들을 옥에 가두거나 죽여버렸고.... 뿐만 아니라 연갱요와 악종기를 시켜
티베트의 반란을 평정한뒤 라싸에 주차대신 (駐藏大臣) 을 설치해 관리했으며, 외몽골을 합병하고
러시아 제국과 캬흐타 조약을 체결해 북쪽 국경을 완전히 확정지으며 외적에 방비를 철통같이 유지합니다.
옹정제는 부친과 아들의 재위기간이 길고 화려한 업적들에 비해 눈에 띄지않는 내치에 전념한 일 중독자로,
하루에 4시간만 자면서 나랏일에 열정을 쏟아부었으니, 강희제가 외치에서 업적을 남겼다면, 옹정제는
부정부패와 느슨해진 공직기강을 바로잡는데 전력을 다해 청나라가 200년을 더 버틸 여력을 만들었습니다.
어머니 우야씨는 서비 (庶妃) 라서 황 4자 윤진 (옹정제) 을 기를 수 없었으니 황귀비 이자 내궁
을 관리하던 동가씨의 경인궁에서 자랐고, 몇년 후 황 8자 윤사가 경인궁으로 들어
오면서 함께 자랐으며, 효의인황후 동가씨가 죽은 후에도 그들은 계속 경인궁에서 살았습니다.
황자들의 교육은 상서방 (上書房) 이 맡았는데, 만주어, 몽골어, 한어 등 세가지 언어를 배웠고, 역사책과
경서들을 익힘과 동시에 말타기, 활쏘기, 수영까지 익혔는데, 또한 어린 나이에 춘일독서, 하일독서 등
시가를 창작했으며 나이가 들면서 강희제의 일을 돕기 시작했고 16세 때 공자의 고향 곡부로 내려가
공자 제사를 지냈으며, 19세때 부황이 준가르의 갈단 칸을 공격할때 따라가서 정홍기 군영을 관장했습니다.
초기에 강희제에게 신임을 받지 못해 질타를 받은 기록이 있으며 강희 37년 황자 제1차 분봉을 할때, 황 3자 윤지
까지만 군왕으로 책봉하고 그 이하는 패륵으로 책봉했는데, 대신들이 의아해하며 황자들을 왕으로 책봉해
달라고 주청하자 강희제는 황 4자(윤진) 는 경솔하고 희로애락이 오락가락하며 황 7자는 우둔하다고 말했습니다.
1702년 강희제는 황4자 윤진 (옹정제) 과 황8자 윤사에게 왕부를 하사하며, 서쪽은 4패륵,
동쪽은 8패륵이 기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때 윤진 (옹정제 )이 하사받은
왕부가 훗날의 옹화궁이며, 강희 48년 황자 제2차 분봉 때에 옹친왕 (雍親王) 에 올랐습니다.
강희제에게는 아들이..... 11명의 부인에게서 26명의 자녀(아들은 19명) 를 얻은 조선 세종대왕
보다도 많은 35명이나 있었는데, 어려서 죽거나 양자로 준걸 제외하면 26명이
있었지만...... 둘째 아거 (阿哥) 윤잉 만이 효성인황후가 낳은 아들 이었으니,
강희제는 적장자인 윤잉을 몹시 귀여워해서 빠르게 황태자로 만들고 후계자 수업을 시킵니다.
강희 36년 (1697년) 제3차 준가르 원정때 강희제는 원정에 참전했고, 윤잉을 북경에 두어 정사
를 대신 처리하도록 했는데, 윤잉은 강희제의 신뢰를 잃기 시작했으니 47년까지
윤잉이 저지른 각종 비행에 속을 끓이다가 결국 윤잉을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하고 감금시킵니다.
윤잉이 황태자의 자리에서 쫒겨나자 여러 황자들은 황태자가 되려고 애썼으니 강희제는 황장자
윤제에게 황태자 자리를 주지 않겠다고 공언했는데, 관상가 장명덕이 황 8자 윤사가 귀해
진다고 하니.... 윤사는 부황이 손 쓸 필요없이 윤잉이 죽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자 강희제는
윤사를 아꼈으나 반태자당의 당수임을 알게되면서 윤사를 구금하고 패륵의 작위를 삭탈합니다.
강희 48년 (1709년) 폐태자 윤잉을 다시 황태자로 책봉했는데 1712년 윤잉은 역모를 꾀하다가 발각돼
황태자 자리에서 쫒겨나 함안궁에 연금되자, 황3자 윤지는 장자 역할을 하면서 세력을
모았고 황8자 윤사가 강희제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이광지등의 지지를 받으며 강력한 세력을 구축합니다.
하지만 황4자 윤진 (훗날의 세종 옹정제) 은 황위 쟁탈전에서 평범한 황자일 뿐이었는데 강희제가
윤진에게 제천행사를 맡기고 서거하니 보군 통령 롱코도가 이끄는 군사들이 황궁을 통제하고,
옹정제가 강희제의 유조를 발표하며 황위에 오르자.... 모든 황자들과 대신들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야사에서는 그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조서를 위조했다고 주장하니..... 강희제가 十四(십사), 즉 14번째 아들
윤정을 후계자로 지목했는데 十(십) 자가 第(제) 자로 고쳐졌다는 설인데, 물론 옹정제는 정적들을
처단해 논란을 잠재웠으며 많은 문학작품에서 소재로 쓰였지만 역사학자들은 근거가 빈약하다고 봅니다.
옹정제는 정사에 대해 아는게 없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을 정도로 황자시절 중요한 정무를 도맡거나
조정 대신들과 왕래가 많지않아 자기 세력이 부족했기에...... 황 13자 윤상, 황16자
윤록 등을 측근으로 삼고 강희제의 유조를 전달한 융과다와 장수 연갱요을 측근으로 중용합니다.
옹정제의 이복형제로 황 8자 윤사는 대신들과 왕공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옹정제는 황 8자당인
형제들을 외지로 보내 와해시켰고, 윤사의 권력 기반 중 하나이자 정람기의 세 기주 중 가장
강력한 안군왕부를 해체시키고 정람기 이친왕 윤상에게 그 속하의 니루를 수여해 권력을 강화합니다.
때마침 서북 지역의 전쟁에 나섰던 옹정제의 신하 연갱요가 승리를 거두면서 옹정제의 입지는
탄탄해 졌는데..... 만약 이 전쟁이 뜻한 바대로 끝나지 않았다면 공격받았을 수도
있었지만, 승리를 거두면서 자신의 위상을 제대로 잡았지만 연갱요가 오만해져 문제가 됩니다.
연갱요와 함께 군대를 둘러보던 옹정제는 병사들이 땀에 젖어 힘들어 하자 “날이 더운데 중무장을 하고
있으니 고생들이 많구나. 모두 갑옷을 벗고 쉬도록 하라.” 하지만 놀랍게도 연갱요는 침묵을 지켰고,
병사들도 가만히 있자 옹정제는 못들었나 싶어서 다시 한번 말했으나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옹정제가 속으로 경악하고 있을 때 연갱요가 느긋하게 말했으니 “황상께서 말씀하시니 옷을 벗고 쉬거라.”
그때야 병사들은 옷을 벗었으니 옹정제는 곧바로 손을 대진 않고 "쉬지 않고 일을 하려는 모습이
가상하다." 라는 듣기좋은 말로 상을 내려주었으며 기회를 엿보다가 결국 연갱요와 부하들을 숙청합니다.
연갱요를 숙청한후 옹정제는 칼날을 황 8자당으로 돌리니, 3년간 지속적으로 황 8자당을 억압하고 견제
하다가 옹정 4년 정월, 황 8자 윤사, 황 9자 윤당, 황 10자 윤아, 황 14자 윤제에게 역모 혐의를
씌우니, 윤사는 거짓말을 했다면 일가족이 죽을 것이라고 맹세하자...... “감히 하늘에 대고
맹세하다니 천지귀신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미 양심을 잃었도다! 저주의 뜻이 명백하다 라며 처벌합니다.
제6대 정친왕이자 철모자왕 아이강아는 작위를 박탈당했고, 정람기의 세 기주 중 하나인 공친왕 상녕
의 아들들은 강등당했고, 복전을 대신해 유친왕을 계승한 조카 광녕은 종인부에 감금당했고,
이미 옹정 2년 종적을 박탈당하고 유배지에서 사망한 패륵 소노는 부관참시당했고 황8자
당의 수많은 대신들도 처형됐으며, 황 8자 윤사는 유배지에서 유폐되어 1년도 되지 않아 사망합니다.
자신의 즉위에 공을 세운 융과다와 악종기 마저 죄를 뒤집어 씌워 숙청한 옹정제의 숙청으로 강화된 황권
은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는데.... 태종 이방원은 정몽주와 정도전등을 죽이고 배다른 동생 2명을
죽이면서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처가의 힘을 빌렸는데, 이후 장인과 처남 4명을 죽이고 장모를
노비로 만드는 숙청으로 세종은 권신들에 휘둘리지 않고 통치할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과 같습니다.
일찍이 명나라 주원장이 개국공신등 3만명을 주이고 정권을 안정시켰듯 자신에게 반항하는 자라면
형제든 사촌이든 숙부든 고관대작이든 무자비하게 숙청했지만, 지지해준 이들은 온갖 특혜를
주며 우대해줬으니 신임하는 이복형제 강희제의 황13자 애신각라 윤상은 화석이친왕
(和硕怡亲王) 라는 청황실 황족이 받을수 있는 최고 작위를 내리고 자손에게 세습까지 허락합니다.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가 문무가 균형을 이루었던데 반해 철저할만큼 문치(文治)에 비중을 두었으니 강희제가
삼번(三藩)의 난 평정, 대만 정복, 러시아와의 분쟁, 외몽골 정복 등을 감행하고 준가르와 전쟁을 치르는등
외정에 관여하여 성과를 내면서 내치도 돌본 것에 비하면 철저하게 평화주의나 부전(不戰) 주의로 일관했습니다.
즉위 초기에는 연갱요가 서북에서 군사 작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지만, 1731년 티베트의 갈단 체링
에게 청군이 대패한 뒤로는 군사적인 정복 활동을 벌이는 작업에서 거의 손을 놓았지만,
내치에서는 선제 때 마무리가 안된 내정 체계를 크게 정비하여 강희제와 거의 동급의 찬사를 받습니다.
대만에 다두 왕국의 마지막 후신들을 한족의 군사작전을 통해 그대로 토벌하여 대만 원주민들의
부족 동맹 연합 왕국이었던 다두 왕국을 멸망시키고 그곳의 영토를 청나라의 관할로
삼으며 타이완 섬을 청나라의 복건성 영토로 편입하여 타이난을 중심으로 타이완 섬을 통치했습니다.
팔기군 체제를 손보고 군기처를 설치하는 등의 개혁으로 권력을 황제에 집중시켰으며 또한 '본인
즉위 문제' 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황태자 밀건법도 시행했는데..... 다만 만주족
후비에게서 난 소생이 본인 뿐이던 건륭제 등의 사례로 실제 이 법의 효과가 있었던 때는 적습니다.
본래 황제 중심의 정치에서는 황제가 모든 일을 알아야 했는데, 이런저런 관리를 거쳐서
올라오는 상소문은 비밀성이 떨어지다 보니 황제가 쉽게 휘어잡을 수 없었으니
이에 따라 옹정제는 황제에게 곧바로 바칠수 있는 사적인 연락통인 주접을 강화시킵니다.
이를 통해 옹정제는 관리들의 생각과 행동을 알아냈는데, 하지만 아무래도 황제가 모두 하기엔
일손이 모자란지라 군기처라는 주접 전담 부서를 만들어 돕게했으니 이들은
황제의 최측근이었고, 황제 집무실 근처에서 숙직하며 필요할 때마다 바로바로 대응 합니다.
이 주접이 유명한 까닭은 '주비 유지' 란 것 때문인데 빨간펜 선생님이었으니 다만 부정적이라서
문제였는데, 황제와 사적으로 이야기하는 편지이다 보니 당연히 황제가 직접 답장을
썼는데 그 답장이 '그래 잘 받았다' 가 아니라 보낸 사람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내용이 가득했습니다.
옹정제의 탄압은 측근과 형제들만 머물지 않았으니, 이민족으로 중국을 통치한 만주족은 사상적인 면에서
많은 통제를 펴야 했기에 자주 문자의 옥(文字之獄) 이라는 필화 사건을 일으켜 많은 책을 검열
하고 분서시켰는데, 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 시기를 걸치며 더욱 강화시켰고 가경제 때 부터는 줄어듭니다.
강서성 과거에 사사정은 유민소지(維民所止)라는 시제를 냈는데, 유(維) 자와 지(止) 자가 옹정제의
연호인 옹정 (雍正) 에서 위의 변만 뺀 것이라 해서 옹정제의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뜻으로
해석해 구족을 베어버렸는데, 창작이 아니라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 에 나오는 말이며,
전설의 무기 혈적자가 옹정제가 보낸 환관 무사들이 숙청 대상자를 암살할 때 썼던 무기라 전합니다.
또 한림학사 서준이 '폐하' (陛下) 의 '폐' (陛) 자를 들개를 뜻하는 '폐' (狴) 자로 바꾸어 쓰자
그를 죽여 버리기도 했는데, 이렇게 무자비한 탄압에 옹정제의 권력은 커지기만
했으니..... 설령 형제나 아들이라도 황제인 자신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절해야 하는
신하임을 강조하여 사적으로는 형제나 아들이나 공적으로는 엄연히 군신지간임을 강조합니다.
지정은제는 명나라 때의 일조편법(一條鞭法)에서 부터 출발하는데, 당시 지방에 세력이
컸던 향신세력(鄕紳勢力) 이 소유한 땅을 속여 보고하고 탈세하는 일이
많았지만, 장거정은 이에 단호히 대처하여 관청 몰래 경작하는 대량의 땅을 적발하였습니다.
그때까지 세제인 양세법은 항목이 너무 많고 복잡해 불공정한 점이 많았는데 일조편법은 그것을
일관화시켜 과세 대상을 토지로 옮기고 은으로 납세시켰으니 이러한 개혁으로 명의 재정은
크게 호전되었고 국고에는 10년분의 식료와 4백만냥의 잉여금을 축적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전세, 노역을 대신 하는 정은, 잡세, 잡역 모두 은으로 내게 했는데, 이때쯤이면 민간에서는 화폐
경제가 활발해졌고 나라 입장에서도 가격이 요동치는 현물 보다는 화폐가
편했으니 청나라 시기에도 일조편법은 계승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가지 폐단이 나타납니다.
그 하나는 지방 유지들은 관리들과 유착해 자기들 세금을 일반 농민들에게 떠넘겼고, 못살겠다 싶은
농민들은 달아나서 나라는 안정적인 수입원을 못 얻었으며 특히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워낙
많이 도망치니 관리들이 책임을 피하려고 숫자를 속이니 정세(인두세) 를 매기기가 힘들었습니다.
정역(征役), 즉 조세와 부역을 부과하려면 인구 조사는 필수인데 가난한 농민들은 대책이
없으니 도망가거나 납세를 안 하고, 부자들은 당연히 이를 피해버렸으니
나라의 재정은 엉망이었고, 관리들도 문책을 겪으니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청나라 강희제 50년인 1711년에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 이 실시되었는데, 정세는
사람의 머리수만큼 걷는 것이니 결국 사람이 늘어나면 더 걷어 들이는데, 이 해인 강희제
50년에 인구를 조사한 다음 정세를 영원히 동결시켰으니 말 그대로 세금이 더 안 늘어납니다.
이는 엄청난 뜻이 있는데 이때부터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니 호구 수에 따른 세제
부담으로 호적 체계에서 벗어났던 농민이 그만큼 많았다가 그러한 부담이
사라지면서 이 체제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며 애를 많이 낳아도 이젠 큰 부담이 없습니다.
이 정책으로 정세 수취량은 고정했으나 농민들이 도망쳐 수취량은 줄기 시작하니 강희제는 이러한 문제를 풀기
위해 지세 1냥당 약간의 정세를 부과하는 식의 탄정입묘 (攤丁入畝) 방법을 고안하였고, 정세가 지세로
합쳐지게 되는데, 광동성에서 먼저 시험을 해보았고 결과가 괜찮자 사천, 절강, 하남성에서 시행해 효과를 봅니다.
지정은제 (地丁銀制) 가 이렇게 시행되었으니 엄청난 논란이 있었으나 옹정제 때 끝내 시작되었고,
반대가 극심했으니 정세를 지세에 통합하면 토지의 소유자는 세금이 늘어나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세금이 사실상 면제되니 땅 가진 부자들은 세금을 많이 내야하는터라 반대합니다.
1726년 향시에 응시한 천명의 응시생들은 단체로 시위하면서 항의했고 상인들에게는 문을 닫으라 협박했으며
지정은제에 찬성하던 순무 이위(李衛)는 이들을 간단하게 때려잡아 처벌했는데, 그뒤 2년 동안 지정은제는
복건, 섬서, 감숙, 강서, 호북, 강소, 안휘성을 걸치고 산서성에서도 시행해 건륭 연간에는 완벽하게 정착합니다.
옹정 5년, 계주의 지주 서리 진순예(秦順兒) 는 지세를 납부하라고 재촉했지만 지방의
유력자들은 반발하고 거부하며 오히려 진순예를 탄핵했는데,
하지만 옹정제는 진순예는 그대로 두고 지세 납부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때려잡았습니다.
중국 향신(과거에 합격하고 임관하지 않은채 향촌에서 사는 자와 퇴직 관리나 대지주)은 존경받는 실질적인
향촌 지배자였는데, 이들은 지세 납부에 반발하며 저항했는데 1727년 동광현의 지현 정삼재(鄭三才)
는 악랄한 향신들이 온갖 구실로 관을 위협하고 지세를 내지 않아 백성들에게 전가하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지세 납부에 대한 향신들의 반응이 얼마나 나빴나 하면, 지세를 내면 대장부가 아니다 라는 말까지 퍼져
나올 정도였으며, 이들은 아예 향시 시험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누군가가 나가면 응시자들의
답안을 뺏어서 찢어버렸으니 호광 지역에서도 이들은 단합해 지세 납부를 거부하며 관과 맞섰습니다.
옹정제는 강력히 대응했으니 응시생들이 단체활동을 한번만 더 벌이면 영원히 응시자격을 박탈하겠다는 조서를
내리고, 산동 지방의 진사, 거인, 수재, 감생 등 1천 4백여명의 공명을 모두 박탈시키는등 불이익을 주거나
벼슬길 자체를 막아버렸고, 지세를 미납한 사람은 모조리 체포하는등 강력한 대응 끝에 지정은제를 확립합니다.
심지어 이때 중국은 영토는 넓은데 교통과 통신도 극악이라 행정 구역 경계에 숨어사는 사람을 못 잡아
내던 때 였고, 향신들의 힘이 지방관보다 강한데다가 이미 '꽌시' 문화로 지방관과 향신이 결탁하기
쉬운 시대였는데도 이를 극복해 낸 것은 그야말로 조세 행정에 있어 몹시 철두철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정은제가 강옹시기 이후 호경기가 잦아든 청조에 좋은 영향을 끼쳤는가면 인구폭발로 인한 식량문제가
심각해지는데 조세는 점차 줄어들고 만 것이니 '가난한 사람한테 유리'라는 점만 강조되지만, 역으로
세금징수도 안 되고 전근대 사회가 부양시켜줄 수 없는 인구의 과잉을 불러일으킬 문제점 또한 있었습니다.
옹정제는 관리의 부정부패 문제를 가장 많이 손봤으니 명·청 시대에는 모선(耗羨) 이라는 공공연한 관행이
있었는데, 본래 지정한 세금 보다 쌀이나 은을 조금 더 걷는 것이었으니 이 관행은 기본적으로 행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부가세의 필요성과 관리들의 봉급이 너무 적다는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청나라 시대의 소설 홍루몽을 보면, 농민이 1년에 20냥 정도를 버니 말단 관리들은 봉급만으로 생활하자면 빈민
이었으며, 상사의 접대, 지인과 자신을 추천해준 은인에게 주는 선물, 부족한 행정 비용까지 겹친다면? 세금을
규정액 보다 조금 더 걷는 "모선" 은 관리 입장에서는 생계와 임무 수행을 위해서 어쩔수 없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강희제도 이런 문제에 대해 "1냥을 걷을 때 1할만 걷는다면 청렴한 관리" 라고 할 정도였지만 모선은 정규 세금이
아닌 부가세이고 필요할 때마다 걷는 것이다 보니 내는 사람은 내고 안내는 사람은 안내는지라, 지방의
막강한 향신과 지주들이 갖은 수를 써서 내지 않으려고 하여 다른 농민들에게 세금이 전가되는 폐단이 심했습니다.
옹정제는 현실적인 사람이었기에 부정부패를 막으면서도 관행을 완전히 근절시키려고 하지 않았으니 모선귀공
(耗羨歸公)제를 실시해 뇌물인 모선을 세금화해 모선 징수 과정과 징수량을 국가에서 파악해 부정부패가
일어날 소지를 줄였으며 관료의 모선 징수를 합법화하는 대신 수치를 정해 놓고 범위 안에서만 징수하게 합니다.
또한 관료에게 양렴은을 지급해 대우를 개선하면서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관리들은 가혹하게 처벌했는데 관료가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고서는 생계는 커녕 경비조차 충당하기 힘든 구조를 감안하여 녹봉의 최대 300배에
달하는 양렴은을 지급해 관료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제공하는 대신 부정부패에 대해서 엄단하는 정책을 취합니다.
옹정제는 각 성의 지세 보유량을 확실하게 파악하면서, 측근들을 모아 적자 상황을 관리시켰으니 적자
가 나면 책임자가 사재로 채워야 했고 조사해서 세금을 착복한 사람이 나오면 옹정제는 만주족
이든 몽골의 귀족이든 한족 신사층이든 예외없이 모조리 처벌하니 혼자서 대제국을 경영한 것입니다.
추징금을 납부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메워야 했고 옹정제의 형제들까지 가재도구와 집까지
팔아 돈을 바쳤는데 몰수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부와 주현에서 세금을
횡령한 관리들의 재산을 몰수해 국고에 넣고, 은닉한 재산까지 찾아내 경매에 붙여
팔았으며 부당하게 천민이 된 사람은 원래 신분을 회복시키고 못된 지주는 강력히 처벌했습니다.
횡령죄가 드러나도 횡령금을 채워놓으면 관직을 유지했지만 옹정제는 횡령한 금액을 채워놓기 위해 백성들의
주머니를 털어 돈을 마련하는 것을 깨닫고는 관리들을 파직시켰고, 옹정제 3년에 호남성에서 조사를 시작
하니 관원중 절반 이상이 부패혐의로 쫓겨났으며 허베이성에서도 3년이상 고참 관리들 대부분이 파직됐습니다.
관리가 백성의 돈을 뺏어먹으면, 혜택은 관리만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 친척들까지 돌아가는지라
옹정제는 횡령 사실이 드러나면 가족과 친구는 물론 친척들까지 다 털어 재산을
뺏어갔으니 탐관오리들은 가족, 친척, 친구들까지 연루시키지 않기 위해 꼼짝도 못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대신 횡령금을 배상하는 제도도 없앴으며 죄를 추궁받아 자살한 사람도 철저하게 털어서 가족
에게 책임을 물었기에, 탐관오리는 자살해도 죄를 벗어날 수 없었으며 조금이라도 흠을 보이는 관리는
파면하고, 후임자를 임명했기에 많은 관리들은 자신을 대신할 존재가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비리가 너무 심한 관리나 지주는 바로 처형했으니 적자로 적자를 메우는 편법을 쓴 사람도 마찬가지였는데, 정책
들은 성과를 내어 옹정 10년차는 적자에 시달리던 하남성이 70만냥 은을 보유하며 흑자로 돌아섰으니 역사
학자 장학성(章學誠)은 “옹정제가 관료사회를 개혁해 기강을 바로잡은 일은 실로 천년에 한번 있을만한 쾌거로다!”
그러나 옹정제의 개혁에도 한계가 있었으니 모선귀공제와 양렴은은 물가 상승을 반영하지
않았기에 가치가 떨어졌고, 옹정제 사후 청 조정이 물가 상승, 행정 비용 상승,
영토 확장, 인구 증가등 사회 변화에 맞춰 제도를 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 뒤에는 유명무실한 것이 되어버려 기강은 다시 무너지고 부정부패가 퍼져나갑니다.
지방에서는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는 있어도 생산을 지도하는 관리는 없었으니 옹정제는 경험
많고 모범적인 농민들을 8품 벼슬에 임명하고, 농민들의 농사에 도움을 주게 했는데,
물론 금세 폐단이 나타나 가짜 농부들이 벼슬을 받고 행세하는 일도 있었지만,
이런 사람들을 탄압함과 동시에 자수하면 용서해주겠다고 말하여 가짜 농부들을 없앴습니다.
옹정제는 자신이 신임하던 삼총독 중 유일한 만주인인 시린기오로 오르타이를 운귀광총독에 기용하여
묘족의 반란을 제압하고 서남지역 지방 행정제도 전반에 걸쳐 일대 개혁을 단행했는데, 그것이
개토귀류 정책이니 서남지역에서는 토사제(土司制)가 실시되었는데 소수민족들의 우두머리로
대를 이어 세습되는 토사들이 지방세력을 키우고 군벌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할거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예로부터 남명 잔당이 할거하고 남명을 일소한 삼번왕에 의해 발발한 삼번의 난에서도 주요
전역이었으니 청나라의 통제력이 미약했음에도 서남지역이 갖는 가치는 막대했으니
풍부한 구리 광맥이었는데....... 은은 어디까지나 세금 납부의 편의성을 위한
고액권이었을뿐 일상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구리로 만든 동전이었기에 완전히 통제해야 했습니다.
동전의 유통량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하면 은과 동전의 교환비가 불안정하여 국민들의 납세부담이
커지거나 국가 재정이 불안정해지기 때문에 전 국토에 대한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실질적인
화폐인 동전의 주조에 필요한 구리가 많이 산출되는 서남 지역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청나라의 통치 체제는 하나의 중앙정부가 여러 세력들을 각 방식에 맞춰 통치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청나라
의 황제는 만주와 몽골의 지배자이자 한족의 천자이며 티베트 불교와의 관계를 통한 티베트의 보호자,
서남지역 토사들의 우두머리를 겸하는, 동군연합과 유사한 다중 지배 통치 체제의 최정점에 있었습니다.
만주와 몽골의 지배자 자리는 청나라 황실의 지지기반, 특히 무력기반인 팔기군을 제공했는데,
만주와 몽골 귀족들이 믿는 티베트 불교의 보호자라는 타이틀을 통해 정통성을 확보했고,
한족의 천자 자리는 재정적 기반을 제공받는 기반인데, 세금을 통해 만주와 몽골의
경제력을 보완하여 귀족들을 통제함과 동시에 그들이 제공하는 무력으로 한족을 통제했습니다.
티베트 보호자 자리는 제정일치체제 티베트의 상징적 통치자인 달라이 라마와 관계를 맺어 한족에게서 비롯
되는 경제력과 만주와 몽골에서 제공되는 무력으로 티베트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대가로 티베트 실질적
통치권, 그리고 티베트 불교를 믿는 만주-몽골의 귀족들에 대한 통치 정당성을 종교적으로 부여받았습니다.
수도에서 멀어 자치하던 서남지역 토사(土士) 들을 한족의 경제력과 만주와 몽골의 무력으로 통제해 반란세력을
통제함과 동시에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하여 경제의 혈액과 같은 화폐, 그것도 실질적으로 많이 쓰이는 동전의
주조에 필요한 구리를 안정적으로 수급하는 유기적이고 다원적으로 작동되는 통치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옹정제는 서남지역의 토착 소수민족 세력을 견제하고, 이들을 중국화시키기 위해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관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고 조정이 파견한 군대로 지방군을 대체하게
했으며 토지를 측량하고 세수표준을 통일시켰으며 세습인 토사제를
폐지하고 부역제도를 개혁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취한 것을 개토귀류(改土歸流) 라고 합니다.
강희 말년에 강희제의 건강 악화와 노쇠함으로 국정이 해이해지고 폐단이 발생했으며 국고가 부족했으니
옹정제는 국고 지출을 최소한으로 줄이는데, 옹정 원년(1723) 9월 염친왕 윤사 등의 총리왕
사무 대신들이 절민총독을 대신하여 제방을 쌓아야 한다고 주청하니 옹정제는 돈낭비라고 질책합니다.
옹정 2년 7월, 해일로 인해 강소성, 절강성 등의 제방이 범람하고 5만명에 달하는 인명이 사망했으며 대부분
민전이 침수되니 옹정제는 지방관리들과 백성들이 귀신을 존중하지 않아 천벌을 받았다고 말하긴
했지만 피해를 입은 지역에 다시 제방을 쌓고 세를 면제해주었으며 이후 제방 공사를 위한 예산을 배정합니다.
옹정제는 1727년 러시아와 캬흐타 조약을 맺으며 바이칼호수의 영토를 제정 러시아에게 할양했으니 청나라
에게 손해인 조약이라 할수 있으나 준가르에 집중해야 했던 상황상 어쩔수 없었다는 평도 있는데
푸얼단에게 서북면 전선을 맡기니 결과는 청나라 최대의 패배 중 하나라고 불리는 호톤노르 전투 입니다.
청군은 준가르와 싸운 호톤노르 전투에서 병력의 80% 를 잃었고 귀환한 병력은 이천명
에 불과했는데, 다만 할하 몽골의 체렝이 준가르를 패퇴시키면서 옹정제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고, 옹정제의 군사적 실패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칩니다.
옹정제는 초기는 건강했지만 숙청 작업이 끝난후 건강이 나빠지자 도교에 관심을 보이며 오르타이가 추천한
도사에게 받은 단약을 섭취했는데 중금속 중독으로 건강이 악화되었으나 자신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몸이 회복되었다고 느꼈으며 그리고 심각한 일 중독자이다 보니 몸이 남아날리가 없었습니다.
말년엔 과로로 몸과 마음이 망가져 요양해야할 지경이 되었는데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으니 수명을 더욱 갉아
먹었고 1735년 8월 부터 상태가 나빠졌지만 21일에도 건천궁에서 평상시처럼 정사를 봤으나 다음날인
22일 건강이 나빠져 쓰러졌고 위독해져 23일에 원명원에서 사망하니 아들 홍력이 이어받으니 간륭제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