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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약 4년 9개월 전,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사방으로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있는 ‘연화마을요양원’에 입소했다. 그곳의 직원들은 자주적이고, 적극적으로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는 생기발랄한 능동인 들로서, 저의 어머니를 보듬어주고, 안아주며 약 3년 7개월을 잘 보살펴 주셨다. 그 고마움에 감사하여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리고 작년 ‘연화마을요양원’을 퇴소 할 때 신인주 과장님께 마음 상하게 한 점에 대하여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어머니는 ‘연화마을요양원’을 나와 본의 아니게, 두 번이나 요양원을 옮기게 되었다.
살을 애는 듯한 칼바람이 옷깃을 더 여미게 하고, 발걸음을 재촉하게 하고 있다. 지금,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를 뵈러 가는 길이다. 어머니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생활 한지도 벌써 5년이 다 되어 간다. 이제는 중증이 되어 말도 하지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한다. 식사를 콧 줄로 통하여 공급되며, 소변 줄도 달고 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만 있는 관계로 허리 뒤와 엉치에 커다란 욕창이 있어 체위변경을 2시간 마다 해 주어야 한다. 이런 생활을 한지 벌써 1 년이 다되어 간다. 어머니는 살이 완전히 빠져나가 양쪽 볼이 종자같이 움푹 파여 광대뼈가 튀어나와, 본래의 형체가 변함에 따라 어머니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다. 그리고 몸 전체도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내가 자식이니까 보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은 흉측함을 느낄 것이다. 이런 어머니를 보면 볼 수 록 가슴이 미어진다. 어머니는 2-3년 전부터 체력이 약해 진 탓으로 겨울만 되면 병이 발병하는 데, ‘올겨울도 아프지 않고 무사히 넘겨야 할 텐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요양원으로 들어가 어머니의 욕창치료를 보면서 아프지는 않는지 관찰했다. 그런데 욕창치료를 끝낸 후, 옆으로 눕히니 약간씩 앓는 소리를 해서 간호조무사와 요양보호사에게 물어 보았다. 그들은 괜찮다는 것이다. 전에도 가끔 앓는 소리를 해서 주의 깊게 지켜 본 결과, 체온이 변함없었고 별다른 이상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이다. 나는 요양원을 나오면서, 그들에게 어머니의 신체에 이상이 오는지 자주 살펴보도록 당부했다. 다음 날(1. 16. 토요일) 아침 9시경 휴대폰의 진동음이 울리기 시작하여 화면에 ‘요양원’의 표기가 뜨고 있었다. 그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듯 철렁했다.
“할머니가 간밤에 열이 37.4도 까지 오르고 땀을 많이 흘렸다고, 병원에 빨리 가봐야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때부터 그만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기 시작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요양원에 도착한 나는 어머니를 확인한 결과, 크게 아프지는 않아 보였다. 체온을 재보니 36.5도였다. 129응급차를 불러 가톨릭대학 인천성모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시각이 오전 11시경이었다. 각종 검사(엑스레이와 씨티 촬영 등)를 끝내고, 그 결과에 따라 오후 7시경에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응급실에 있는 동안 의료진들은 상태가 ‘좋다. 나쁘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고, 퇴원하게 되면 ‘병원에 자주 와야 되겠다.’는 말만
했다. 나는 ‘중환자실로 들어가지 않고, 일반병실에 입원하기에 10여일 고생하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침대에 누워 양손이 묶인 채, 소리 없이 아주 느리게 똑, 똑 떨어지는 한 방울, 한 방울의 약물을 흡수했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입을 오물오물 거리며 숨을 내 뿜고 있었다.
평소에도 그러한 행동을 자주해서 입술이 없어졌다. 이때부터 목에 가래가 끓기 시작했다. 나는 간호사실로 가서 병명과 상태를 물어보니, 폐렴과 요로감염이며, 상태는 모른다는 것이다. 알려면 내일 출근하는 교수님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참, 무책임한 말을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더 이상 물어 보지도 않았다. 오전부터 간병인을 구하려고 계속해서 여기저기 연락했으나, ‘없다’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작년 춘천 강원대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간병인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환자가 병실에 입원하면, 그 상태에 대하여 그들에게 정보가 가는 모양이었다. 특히 대, 소변을 받아내면서 일어나지 못하는 중환자는 간병인들이 오기를 아주 꺼려했다. 춘천에서도 두 사람이나 와서 어머니를 보더니 못하겠다고 하여, 나와 집사람이 약4일 간을 한 후, 옆 환자가 중환자실로 가는 바람에 그 간병인에게 사정하여 간병을 해결했다. 다음 날(1. 17.)아침 10시경에 한 간병인이 찾아와서 어머니를 보더니,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단 번에 거절했다. 나는 기를 쓰고 매달렸다. ‘매일 낮과 밤을 저와 교대로 간병하고 금액은 하루치를 계산하고, 낮 근무 시에는 식사를 제공하겠으며, 응분의 격려금을 제공하겠다.’고 사정했다.
그러자 그녀는 한 번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1. 18.) 오전 10시부터 간병에 들어간 나는 어머니를 계속 관찰해도 별다른 증상은 나타나지 않아 보였고, 목에 가래는 끓고 있었다. 그리고 코에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재작년(2014. 12.) 폐렴으로 입원 했을 때, 약 15일간을 가래가 끓어도 괜찮았고,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었는데.’ 라며 별로 걱정을 하지 안했다. 어머니 식사는 했느냐고, 간병인에게 물어보니 그녀는 “오늘 아침까지 식사를 했고, 9시경에 산소 호흡기를 달았다.”고 했다. 산소포화측정기 수치는 90-93, 심장박동 그래프는 115-120 수치 파동을 그려내고 있었다. 나는 2014. 12. 초순, ‘춘천강남병원에 어머니가 입원해 있을 때, 경험을 토대로 저 수치면 괜찮지’,라며 태연했다. 간호사들도 가끔 한 번씩 들러 수치를 확인하고 돌아갔다. 그럭저럭 별 이상 없이 시간은 흘러 오후 6시경 나는 간병인과 교대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8시경
간병인으로 부터 “할머니가 간호사실 옆 처치 실에 가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왜 처치 실에 있느냐.”고 물으니, 그녀는 “간호사들이 수치를 보려면 왔다 갔다 하는 데 불편하니까. 아마, 편하게 보기 위해 바로 옆으로 옮겼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냥, 그렇게 되었구나.’라고 만 생각했다.
그런데, 밤 10시경 간병인이 전화로 “할머니를 1인실로 옮겨야 된다.”고 했다. 그러고서 약 30-40분이 지났을까. 간호사가 전화로 “병원으로 속히 오라.”고 했다. “1인실로 안 가면 안 된다고 하며, 병실료는 1일 55만원이라고 했다. 보통 1인실은 33만원인데, 그기는 VIP실이라 가격이 비싸다고
했다.” 약 5분 지났을까. 의사가 또 전화로 “속히 간호사실로 오라.”고 했다. 급히 병원에 도착한 나는 5층 앨리베이트에서 내려 간호사실로 뛰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광경을 보고 그만, 그만 숨이 콱 막혔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넋을 잃고 말았다. 멍하니...!멍하니...!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그들이 하자는 대로........, 그리고 시키는
대로.........., 끌려갈 뿐이었다. 힘없이 말이다! 반항 한 번 하지 못 한 채....사람을 살해한 죄인처럼 고개를 떨 구였다. 바닥만 응시 한 채.........
어머니의 침대에 설치 된 링겔, 약물등은 모두 철수 되어 있었고,
산소호흡기와 심장박동 측정기 및 산소포화도측정기 뿐이었다. 이 기기들만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더 이상 치료는 할 수 없다는 것 이다. 회복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즉 ‘끝났다.’는 징표다.
의사는 “오늘 새벽을 잘 넘길까. 그렇지 않으면 이틀 넘기기 힘들 것 같다.”고 예상했다. 나는 머리가 텅 빈 채로, 그들이 가는대로 끌려만 갔다.
어머니는 대기실이 달린 1인실에 도착했다. 담당 간호사는 ‘심장박동그래프가 횡선으로 그어지면, 속히 연락하라.’고 하면서 나가 버렸다.
나는 어머니 침대 옆에 간이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서 쉴 사이 없이 표기되는 산소포화도의 측정수치와 심장박동 수치를 뚫어지게 주시하고만 있었다. 산소포화도 측정 수치 76-79, 심장박동 수치 135-140. 내가 의료 전문가가 아니지만, 계속해서 관찰하다 보니 이 수치의 원리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정상인 보다 몸속에 축적된 산소가 부족하기 때문에 심장의 펌프질을 많이 해야 혈액을 몸 전체에 보낼 수 있다고 본다. 쉽게 말해서 심장박동 수치는 산소포화도 측정 수치에 반비례한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심장이 장시간 빠르게 펌프질을 할 경우, 그 자체에 무리가 와 이로 인하여 심장 기능이 떨어져 박동수치가 낮아진다고도 본다.
어머니는 새벽 4시(4시간 동안)까지 산소포화도 측정 수치가 올라가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고
계속해서 이 수치대로 이어지다가 4시 30분경 산소포화도 측정수치 74-77. 심장박동수치 137-141로 약간 낮게 약 1시간가량 유지되다가 5시 30분경 원래대로 회복되면서, 심장박동그래프가 약15분마다 가끔 한 번씩 높고 짧게 파동을 그릴 때가 있었다. 내 생각에 ‘아마 심장에 무리가 오는 것이 아닌가.’ 라고 느껴졌다. 어머니 인생의 추는 死쪽으로 점점 기울어지고 있는 듯 같았다.
나는 산소포화도 측정기를 보면서 제발 80을 뚫어 라고, 두 손을 꼭 잡고 기도하고 기도했다.
어머니는 이때까지도 숨을 힘차게 내 뿜으며 입을 오물오물 거리고 있었고, 코에서 피를 흘러 얼굴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나는 물티슈를 가져와 피 범벅된 어머니의 얼굴을 닦아내면서 한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여태까지 두 손을 침대에 결박해 놓은 것을 풀어버렸다.
보통 때는 결박한 손을 풀면 어머니는 사정없이 콧 줄과 소변 줄 등 몸에 있는 줄은 잡아당겨 버린다. 그런데 어머니는 손을 침대 바닥에 놓인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몇 분이 흘렀을 까.
어머니는 가래가 끓어, 나는 간호사에게 가래를 뽑아 줄 것을 요청하여,
그녀는 즉시 가래를 뽑아냈다. 그 가래에서도 피가 나왔다. 나는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피가 나온 사유를 그녀에게 물으니, “입을 오물오물 거리는 바람에 코에 낀 호스가 그 내부를 건드려서 상처가 생겨 피가 흘렀다.”고 했다. 새벽 6시가 되어 산소포화도 측정 수치가 그렇게도 뚫리지도 않던 마의 80대를 뚫기 시작해서 77-80. 심장박동 수치도 131-134.
나는 안도의 한 숨을 휴~ 내 쉬며, 기적이 일어나기를......기대했다.
간간히 보이던 산소포화도 측정수치 마의 80숫자가 완전히 안착해,
계속해서 77,78 - 81,82를 찍어내고, 심장박동 수치도 129-132,133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머니 인생의 막이 내려와 있는 것을 모른 채,,,,,,
계속해서..... 기도하고 기도하며, 산소포화 측정 수치가 85숫자를 뚫어 라고 간절히, 애원했다. 산소포화도 측정 수치 85 숫자가 약 10분마다 아주 짧게 나타나다, 사라지고, 이어지는 공방전을 약 2시간 동안 벌이다가 8시 30분경 드디어 마의 85숫자를 탈환했다. 산소포화 측정 수치 81,82-84,85 심장박동 수치 125-128,129를 나타내고 있었다. 어머니 인생의 추는 生쪽으로 기우는 듯 했다.
인생의 막이 내려와 있는 것을 모른 채........ 9시 20분경 담당교수가 회진을 하면서 병실을 찾았다.
나는 그 교수에게 “어머니가 새벽 보다 많이 회복되어 아침 식사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으니, 그는 굳게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수액이나 나아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의사 몇 명을 대동하고 나가 버렸다. 그의 얼굴에는 ‘희망이 없다.’는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그래도 나는 ‘새벽에 많이 회복된 것으로 보아 낫지 않을까.’ 라는 일말의 기대를 저 버러지 않았다. 이때에 어머니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돌아가시기 전에 다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간병인을 다시 불러 10시에 인계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는 2015. 4. 13. 욕창이 심해 춘천노인전문병원에 입원하여 큰 고비를 넘기고, 2015. 7. 1.퇴원하여 부평에 소재하는 요양원에 입소했다. 욕창 때문에 나는 일주일 한 번씩 그 요양원을 방문하여 욕창 상태를 확인했다. 그런데 2015. 9. 26.(추석 전날) 그 요양원 시설장(여자)이 나를 부르더니, 어머니가 옴에 걸렸다고 즉시 나가라(퇴소)고 했다. 이 때문에 요양원 관계자들과 옥신각신 시비가 벌어졌다. 강하게 밀어 붙이면 내가 ‘을’의 위치라 어머니에게 무슨 제재를 가 할 것 같아, 할 수 없이 2015. 10. 20. 요양원을 옮겼다. 이는 어머니가 옴에 걸렸다고 의사에게 말하고, 약을 10일분 처방받아(피부병 약 3종류, 위장약 1 종류, 바르는 약 2종류)먹이고, 옴에 걸렸다고 뒤집어씌운 사건이다.
나는 이 사건을 고발하기 위해 내가 쌓은 지식과 행정에 대한 노하우, 경험을 토대로 직접 고발장을 썼다. 이는 피고발인들(5명)을 고발장으로 1차적으로 묶고, 2차로 진술서와 사실관계 확인서로 옭아매고, 3차는 입증서로 완전히 덮어 버렸다. 빠져나오려고 아무리 발버둥치도 빠져 나오지
못하게........이 사건을 2015. 11. 4. 인천지방검찰청에 가서 직접 접수했다.
그리고서 ‘인천지검 2015 형제 91134호’로 김소현 검사에게 배당(2015. 11. 6.)되어 2015. 11. 13. 인천삼산경찰서로 이첩 되었다. 나는 민사 건은 2번 작성해 보았으나(명도소송, 지급명령신청), 형사 건은 해 본 적이 없어 변호사한테 두 명, 법무사한테 상담 해 보았다. 상담 결과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사건은 소장 작성이 어렵고, 힘들다면서 못하겠다고, 다른 데 가라고 했다. 나는 변호사(2명), 법무사(1명) 상담하고 정말 실망했다.
내가 의문 나는 점을 질문하니 잘 모르고 있었다. 이 사건 피고발인 5명(요양원 4명, 의사 1명)은 용서해 달라고 아우성을 쳤지만, 나는 이들을 법정에 세우고, 그 결과로 행정적 조치를 밟아 요양원, 병원 폐쇄조치 하려고 결정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임종이 시시각각으로 닥아 오자 내 마음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피고발인 모두를 2016. 1. 19. 11시 40분에 고발 취하하고, 은행 일을 보고 오후 3시반경 병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내 눈을 의심했다. 잘 못 봤나 싶어 바짝 다가가 봐도 틀림없었다. 한 편으로 ‘기기가 고장 난 것이 아닌가.’ 라고 의심했고, 의아했다. 산소포화 측정 수치 49,48 - 51,52. 심장박동수치 111,112 - 114,115. 산소측정 수치가 정상인의 반 토막이었다.
어머니 인생의 추는 死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심장박동그래프가 파동을 그려 나가는 것이 힘이 떨어져 있는 느낌을 받았다. 푸푸하며 숨을 내 뿜고, 입을 오물오물 거렸던 어머니는 완전히 달라져 입을 벌린 채,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아마, 숨 쉬기 조차도 힘든 모양이었다. 나는 당황하기 시작해서 한 동안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병실 안을 몇 번이고 ‘왔다. 갔다.’ 를 반복 했다. 어머니 인생의 막은 반 이상이 내려와 있는 듯 했다. 몇 분간이 흘렀을 까. 내 몸속에서 기가 빠져나가는 듯, 이상한 증상이 오더니 힘이 없어 축 처져버렸다.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한참동안 소파에 누웠다. 식당의 아주머니가 저녁식사를 가지고 들어오는 바람에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5시 30분 이었고, 산소포화 측정 수치는 낮게 44 - 48. 심장박동수치는 108 - 111. 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 다시 병실에 들어오니 여섯시였다.
이상하게도 어머니 옆에 가서 있고 싶은 심정이었다. 눈을 감은 채, 입을 벌리며 가느다랗게 숨을 들이키는 어머니를 나는 침대 옆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소포화 측정 수치 와 심장박동수치도 더 이상 힘을 잃어 기진맥진 했는지, 때때로 그 수치가 각각 37,38이 나타나기도 했고, 97,98이 나타나기도 했다. 어머니 인생의 막은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듯 했다. 밖에서 칼바람 소리가 씽씽 들려올 뿐 너무나 조용했다. 입을 벌리며, 들이키는 어머니의 가느다란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방안에는 정적만 흐르고 있었다. 내 마음이 갑자기 초조해지기 시작하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어머니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따스한 손을 어머니의 이마에 갖다 대었다.
이때에 내 얼굴을 타고 따스한 방울이 뚝, 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계속해서......쉴 사이 없이...거칠 줄 모르고....그렁그렁 맺힌 방울은 힘없이 파동을 그려나가는 심장박동 그래프를 희미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맺힌 방울을 훔치고, 훔쳐내며 훌쩍였다.
그러고서 바늘이 떨어져도 들릴 정도로 조요함이 이어졌다. 나는 숨을 고르고 숨죽이며, 심장박동그래프의 파동에 시선을 꽂았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한참동안, 계속..........이어졌다.
그런데 일순간, 갑자기 심장박동그래프의 파동이 그려지지 않았다.
내 눈을 의심했다. 내 ‘머리에서는 아니다! 이것은 아니다!’라고 부정했다.
머리카락 순간, ‘혹시 기기가 고장 난 것 아닌가.’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몇 초 동안, 심장박동그래프는 파동이 없이 횡선이 그어져 있었다.
나는 순순히 어머니의 심장이 멈춰져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때에 어머니는 벌어진 입을 천천히 닫으며, 아주 미세하게 숨을 멈추고 있었다.
입이 굳게 닫히자. 윗입술이 알 수 없을 정도로 실낱같은 떨림 현상을 일으켰다.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내려다보니 그 모습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이렇게 어머니 인생의 막은 완전히 내려졌다.
나는 “어머니, 어머니 일어나라.”고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병실안의 정적을 깨고 밖으로 흘러 나갔다. 이 사실을 간호사실에 알리자.
몇 분이 흘렀을까. 의사 1명이 간호사 1명을 대동하고 병실로 들어와 어머니 침대 옆에 서서 하얀 A4 용지를 들고 이렇게 읽어 나갔다.
“조정순은 2016. 1. 19. 오후 6시38분 사망했다.”라고 선언했다.
그 소리는 평온하게 눈을 감고 누워있는 어머니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병실 안은 고요했다. 어둠이 내린 밖에서 낙엽을 떨 군 나무는 칼바람에
앙상한 가지를 심하게 흔들고 있어 슬픔을 더 자아내게 했다.
때때로 씽씽 불어대던 칼바람이 유리창문을 강하게 두들기고 지나갔다.
어머니가 떠나간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데도, 아직까지 뇌리에는 어머니가 살아있는 것처럼 뚜렷이 남아있다. 이 때문에 내 가슴에는 슬픔의 비가
한없이, 줄기차게 내리고 있다. 언제 그칠지...어머니가 보고 싶어 장롱 위에 놓아둔 영정 사진을 다시 꺼내어 들여다보며, 어루만져 본다.
그 위로 두 방울의 눈물이 뚝, 뚝 떨어져 퍼져 나가고 있다.
그 옛날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2016. 2. 10.
오일육
첫댓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글을 읽으면서 어르신의 모습과 아드님의 모습이
옆에서 보는듯 선명하게 그려졌고
아드님의 슬픔이 고스란히 저의 가슴에 와 박히어
슬펐습니다!
우리 어르신.... 꽤나 긴 시간동안 고생 많으셨는데
어르신 옆에서 노심초사 애닮파 하신 아드님께서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여 못내 아쉬운 마음임을
전해드리며 늘 건강 잘 지켜가시기를 기원드리겠습니다.
연화마을을 지지해 주시고 소중하게 기억해 주심에
다시한 번 감사드립니다.
한글자 한글자 어머니를 향한 아드님의 깊은 마음과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어머니'란 말 한마디를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눈물 짓게 되는 것이 자식된 사람의 마음이겠지요.
그동안 어르신의 곁에서 기도해주시고 사랑으로 아껴주셨던 만큼 어르신 또한 가시는 길 편안하셨을거라 믿습니다..
긴 시간 함께 했던 어르신과의 소중한 추억... 가슴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늘 아껴주시고 관심 가져주시는 보호자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올 한해 건강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기니긴 시간 고생 많이 하셨군요.
함께 하지 못함이 못내 가슴
이 애립니다.
고인과 함께 생활 했던 지나간 시간들이 뇌리을 스쳐갑니다.
이렇게나마 소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안하고 행복한 곳으로 가셨으리라‥
‥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새해에는 행복한 일만 계속 되시길 기원합니다.
ㅡ 요양 보호사 ㅡ
어르신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 조정순 어르신께서 저희들과 함께 생활 하실때가 생각이납니다. 그리고 맘이 아픕니다. 연화마을에서 마지막까지 같이 하셨으면 어땠을까 ~~?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좀 더 저희가 잘 모셨드라면~~~하는 생각에 더욱 더 맘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어르신께서 힘든 고생 안하시고 이젠 편안히 쉬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보호자님께서도 그 동안 맘 고생 많으셨을꺼라 미뤄 짐작해봅니다.
앞으로는 당신의 건강을 좀 더 살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무국장님, 은진님, 복지사님, 하늘을 우러러님, 일등항해사님" 댓글로 명복을 빌어주셔서 대단히 감사! 새해에 건강하고,
소원성취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