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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대조사회로서의 교회
18장에서 용서의 덕목을 제시하면서 수락 체험을 교회의 기본 질서로 내세운 마태오는 19장에서 가정 교회를 소개한 다음, 이제 20장에서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다룬다. 이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교회의 소명과 직결되는 것이다. 이를 ‘대조사회(對照社會)로서의 교회’로 부를 수 있다.
20,1-16에서는 경제적 측면을 다루고, 20,20-28에서는 정치적 측면을 다룬다. 그 사이에 있는 20,17-19에서는 수난과 부활에 관한 세 번째 예고를 다루고 있는데, 이는 교회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세상의 빛으로서 존재하자면 겪어야 하는 영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20,29-34에서는 눈먼 두 사람을 고쳐주시는 장면이 소개되는데, 앞서 제시한 바를 교회의 신앙인들이 깨닫기를 바라는 의도가 엿보인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20,1-16)
“포도밭은 온화함, 순결, 인내를 비롯한 무수한 덕을 기르는 장소이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하루 중 서로 다른 시간 - 이른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 - 에 불린 일꾼들은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나 의롭게 산 사람들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루’는 역사 전체를 뜻하며, 아담의 죄 이후 예수님께서는 그 ‘하루’의 저마다 다른 때 의로운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실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시며 그들을 훌륭한 일로 부르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주님은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서, 아담과 그와 함께 있던 이들을 부르셨다. 아침 아홉 시에는 노아와 그와 함께 있던 이들을 부르셨다. 열두 시에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오후 세 시에는 모세와 다윗을 부르셨다. 오후 다섯 시에는 다른 민족 사람들을 부르신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주님께서는 모두에게 공정하게 ‘한 데나리온’, 곧 성령의 은총을 주심으로써 성도들이 하느님과 온전하게 하나되게 하시고 그들의 영혼에 하늘 나라의 인장을 찍으시며 그들을 생명과 불멸로 인도하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어떤 사람들은 때를 채우지도 않았는데 하느님 나라에 들게 하시니 하느님의 정의가 잘못되었다고 투덜대는 이들도 있었다. 하느님 나라에서 꼴찌가 되는 것도 한량없는 선물이다. 조금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을 더 많이 일한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도록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관대함을 불평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편견에 빠져 자신이 불공평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선하심이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 선물은 아무도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대 그레고리우스). 하늘 나라에는 시기심도 샘도 없다. 어떤 이들은 가장 먼저 선물을 받는다는 점에서 남보다 큰 보상을 받고, 또 어떤 이들은 선물을 풍성히 받는다는 점에서 더욱 큰 영예를 받는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단지 일꾼의 끼니를 해결해 주려고 일꾼을 사는 사람은 없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단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라는 뜻이었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교회 안에는 양과 염소가 함께 섞여 있으며 그들은 장차 최후의 심판 때 갈라질 것이다. 심판자께서는 마지막 심판 날에 지금 자만심의 뿔 위에 서서 자신을 드높이는 자들과 겸손한 이들을 갈라놓으실 것이다. 자기가 부름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많으나 선택된 이들은 적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대 그레고리우스).
마태오는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신다고 보았다. 그것은 경제의 목적 및 노동의 동기와 관련된 경제 윤리이다. 경제는 인간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서 노동한다. 다시 말하면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노동한다. 인간의 노동을 통해 땅이 개간되고 제품이 생산되며 서비스가 발생한다. 이것이 삶의 효용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노동은 자본이라는 가치를 생산해 내게 되고, 생산된 자본은 또 다시 노동을 통해 자기 증식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치의 서열을 매기자면, 인간 〉 노동 〉 자본이 된다. 즉 자본보다 노동이 중요하고 노동보다 노동하는 인간이 중요하다. 노동과 자본으로 이루어진 경제는 인간에게 봉사해야 한다. 그런데도 만일 그 가치 서열이 뒤바뀐다면 그러한 경제는 사회악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만 노동하는 것은 아니다. 생계 유지와 가족 부양만이 노동의 동기라면 또 다른 동기로 노동하면서도 더 적은 소득을 감수하는 이들의 노동 동기를 이해하기 어렵다. 즉, 인간에게는 이를 넘어서는 또 다른 동기가 작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실현이다. 인간의 노동은 자신이 창조주를 대신하여 자연을 가공하고 물질을 변형하여 그리고 서비스를 개선함으로써 세상을 더 낫게 개선시키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 노동을 통한 인간의 자기 실현이야말로 생계 유지와 가족 부양이라는 동기를 넘어서는 강력한 노동의 동기가 된다. 돈이 되지 않는 작품을 붙들고 고독하게 온 정열을 쏟아 몰두하는 전업 예술가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만일 인간의 자기 실현이라는 이 동기가 부인되어야 한다면, 생계 유지와 가족 부양이라는 노동의 동기는 그야말로 노예의 노동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생계 유지와 가족 부양 그리고 자기 실현이라는 노동의 동기를 넘어서는 또 다른 그 무엇이 있을까? 있다! 그것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바, 경탄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생명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더라!” 하고 경탄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이러한 창조의 노동을 인간에게 위임하시며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 1,28ㄴ) 하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된 인간이 그분께서 창조하신 땅을 다스리라는 위임을 받은 것이다. 하느님을 닮음과 땅을 다스림, 이것이 인간의 소명이다. 그러므로 인간 노동의 가장 숭고한 동기는 이러한 인간의 소명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닮고 이를 위해 땅을 다스리는 것이며, 이것이 물질문명을 낳고 인간 문화를 창조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세상과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더라!” 하는 경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이로써 인간은 창조주 하느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하느님께 노동을 통해 영광을 드리는 것이며 그분을 찬미하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이 노동을 하게 되는 동기는, 첫째 생계 유지, 둘째 가족 부양, 셋째 자기 실현, 넷째 창조주를 닮음과 세상을 다스림이다. 그리고 이 모든 동기를 통해 인간은 노동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한다. 왜냐하면 모든 노동은 육체와 정신의 수고를 통해 십자가를 체험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노동의 수고를 통한 보람을 느낌으로써 부활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의 십자가와 부활이 노동을 하는 데 필수적인 영성이다. 동기가 어떻든 간에 어느 노동자도 보람 없이는 수고를 하려 하지 않는다. 만일 보람 없는 노동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또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만 노동하도록 강요하는 경제 체제와 질서가 있다면 그것은 명백한 사회악이다. 자기 실현의 동기가 부인되지 않아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창조주를 닮고 세상을 다스림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최고의 동기가 부여되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 노동의 존엄성이다.
하느님은 ‘선한 포도밭 주인’이시다. 그분은 당신 포도밭에 노동자들을 고용하셨다. 그들이 이른 아침에 왔건, 아홉 시에 왔건,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그리고 오후 다섯 시에 왔건, 똑같이 한 데나리온에 고용 계약을 맺었다. 이 임금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기도 하고 노동자 가족의 하루 생활비이기도 하다. 이것이 최저 임금이다. 이는 경제적인 원칙에 의해서 기본급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포도원 주인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품삯을 계산할 때, 가장 늦게 온 노동자부터 임금을 주었다. 애초의 계약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 이를 본 새벽 노동자는 내심 기대하였다. 노동 시간이 더 길었던 자기에게는 더 주겠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성과급이다. 이는 노동자가 기여한 생산성에 비례하여 주어질 수 있다. 그것이 노동의 정의이다. 그러나 기업의 지불능력이 없거나 이미 동종 업계 또는 노동계 전체의 공동선에 비추어 볼 때 고소득인 경우에는 형평성의 원칙에 따라서 제한될 수도 있다. 이러한 판단은 전적으로 고용주와 기업가의 몫이다. 물론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노동조합이 항의할 수는 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은 항의하는 새벽 노동자에게 말한 것이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에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서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20,13ㄴ-15)
이러한 경제윤리를 실현하는 경제질서는 참으로 복음적인 것이다. 교회는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가정 교회를 이룩하려는 노력만큼이나 중요하다. 노동을 통해서 경제윤리가 달성되지 못하면 가정은 위기에 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집단주의적 공산주의 경제체제이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경제체제이건, 이러한 경제윤리를 실현하지 못하는 경제질서에 대해서 교회는 저항하고 항의해야 마땅하다. 경제는 인간에게 봉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8세기에 교회 지식인들이 실험했던 협동조합 운동은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신앙적 저항이자 집단주의적 공산주의 질서를 넘어서고자 하는 복음적 실천이었다. 이후 이 운동은 프랑스에서는 생산 협동조합 운동으로, 독일에서는 신용 협동조합 운동으로 그리고 영국에서는 소비 협동조합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오늘날 협동조합은 그리스도 신앙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를 기둥으로 그리고 사회적 신용을 열매로 하여 믿음의 삼차원을 구현하는 사회적 창안이 되었다. 역대 교황들, 특히 비오 11세는 생산 협동조합 운동에 대해 회칙 「사십주년」(1931)으로 격려하였고, 요한 바오로 2세는 모든 분야의 협동조합 운동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수행한 선도적 역할에 대하여 회칙 「백주년」(1991)에서 종합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바 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자신의 지체인 노동자들의 처지와 상황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다. 인간은, 신자들은 물론이요 실은 성직자와 수도자들도, 노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노동의 상황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누구나 그러하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한 대로,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이다. 그러니까 교회에 들어오는 교무금과 헌금의 액수보다도 그 돈이 어떻게 얻어지는지 그리고 그 돈을 바치기 위해 노동자들이 어떠한 노동질서 속에서 노력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질서가 복음적이라면 마땅히 격려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복음적일 수 있도록 발언해야 한다. 아울러 노동질서가 복음적일 수 있도록 노력하려는 이들의 그 노력을 지지하고 격려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교회의 재정을 운용하는 데 있어서 신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어떻게 돈을 쓰고 나눔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맨 처음에 온 사람에게처럼 품삯을 주려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 담긴 메시지이다. 이를 경제 민주화라 한다. 경제 복음화를 위한 첫 걸음이라 할 수 있다.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시다(20,17-19)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 그 길을 갔지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가시면서 그들에게만 당신 죽음의 신비를 일러 주셨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에 대해 미리 알려 주신 것은, 이런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으면 수난의 날이 왔을 때 제자들이 덜 당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현 단계 한국 사회에서 교회가 앞선 비유의 메시지대로 행동한다면 정부와 기업의 항의는 물론 박해를 초래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왜냐하면 정부는 ‘기업 프렌드리’를 외치고 있는 기득권 세력의 대변자이고, 기업은 변함없이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종교의 신봉자들이기 때문이다.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기업의 자본권력은 정책을 시행하는 정부와 이를 구성하는 정치권력을 영향권 내에 둔 지 이미 오래이다. 정부의 고위 관료들과 자본권력의 상층부인 재벌가들이 혼맥으로 침묵의 카르텔을 구성하고 있으며, 정치권력을 생산해 내는 정당들도 적어도 유력 정당들은 자본권력이 제공하는 편의를 제공받지 않고서는 선거를 치루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당의 민주적 개혁이 요원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정당을 당원들이 구성하고 당원들의 뜻에 따라 정당 운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정치학 교과서에만 나오는 이야기일 뿐, 한국의 정치 현실은 전혀 다르다. 여야를 막론하고 기득권 세력들끼리의 함의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거기서 경제적 변동도 부산물처럼 나타나고 있다. 경제를 움직이는 힘이 정치에 있고 정치를 움직이는 힘이 자본권력의 영향권 하에 있다. 이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는 정당은 유감스럽게도 소수 정당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나마 이런 깨어있는 소수 정당들이 오히려 한국 정치의 희망이다. 이것이 한국 가톨릭 교회가 벌써 60년째 당면하고 있는 정치적 선교 지형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만을 예고하시지 않았다. ‘사흘만의 부활’도 함께 예고하셨다. 경제윤리를 실현할 수 있는 경제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이 대조사회로서의 교회에 주어진 소명이라면 교회가 해야 할 바는 명약관화하다. 경제 민주화를 이룩하기 위한 십자가를 짊어지고 하느님의 뜻을 채워야 하는 것이다.
‘사흘’은 72시간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예수님께 필요했던 72시간으로서의 ‘사흘’은 오늘날 우리 교회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이룩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뜻을 채우는’ 기간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경제를 정치가 움직이고 있는 시대의 징표를 보아야 한다. 정치를 자본권력이 움직이고 있는 시대의 징표를 보아야 한다. 한국 사회의 1%가 이 모두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냉엄한 현실을 엄중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이 1%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쉽지 않은 십자가임은 분명하다. 이미 교회의 상층부 안에도 그 세력은 침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모든 권력은 교회를 길들이기 위해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해 왔고 이 현실은 한국 교회에 있어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교회가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가난한 이들에게로 내려와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부유한 신자들이 제공하는 그 모든 혜택과 편의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교회는 결코 경제에 관한 예수님의 메시지를 에누리 없이 선포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의 살림이 지금보다 훨씬 단촐해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철저한 가난을 몸소 사시면서 제자들에게도 같은 삶의 방식을 명령하신 이유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복음 선포의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제자의 파견윤리가 철저하게 관철되지 못하는 한,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언제까지나 그저 한가한 강론 소재로만 남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이 교회로 하여금 가야할 길을 직접 가르치지는 못한다. 그들은 복음의 수혜자이지 교사가 아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의 처지와 상황은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일러줄 수 있다. 적어도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엄중히 경고할 수는 있다. 그래서 교회가 정치적 측면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지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다.
출세와 섬김(20,20-28)
“제자들이 특별한 은혜를 청하는 유익한 실수를 저질렀다. 이 실수는,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영예를 구하는 것은 하늘 나라와 어울리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었다. 제자들이 쉽사리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담대해서라기보다는 곧 다가올 시련에 대해 몰랐기 때문이다. 전쟁을 모르는 이들에게 전쟁은 신나는 일인 것처럼, 겪어 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죽음의 시련은 별것 아닌 일처럼 여겨진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교회의 역사는,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순교의 영이 내렸으며 야고보와 요한이 고백의 잔을 마셨음을 알려 준다(히에로니무스). 야고보와 요한이 영적 식별력을 지녔더라면 그런 청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열 제자도 그때 일어난 일의 영적 의미를 알았더라면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예수님께서는 열 제자의 시기심과 두 제자의 교만을 동시에 없애 주셨다. 이 공동체 안에서의 지위는 세상 지위와 같지 않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주님께서는 겸손을 추구하시는 바, 누구든지 자랑거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되비추는 사람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가난을 사랑하시는 바, 이승에서 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닮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다. 자기 스승을 본받지 않는 사람은 참된 제자가 아니며,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습과 다른 자는 참된 모상이 아니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그러니 영예를 거절당했다고 해서 불쾌해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아무리 낮아져도, 우리의 주님께서 낮아지신 만큼 낮아질 수 없다. 한 분이 아주 많이 낮아짐으로써 모든 이가 올라가게 되었다. 주님의 영광은 이처럼 아주 깊은 저 아래에서부터 비쳐 올라온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 세 번에 걸쳐 수난과 부활의 예고를 하시는 동안 제자들의 반응도 이에 대한 그분의 재반응도 똑같지 않았다. 첫 번째 예고는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한 직후에 나왔는데, 이는 아마도 신앙 고백의 진실성을 담보하시고자 하는 의도가 담겼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십자가를 모르는 신앙고백은 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첫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격렬한 반박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에 대한 예수님의 재반응 역시 신랄한 비판이었다. 두 번째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자 제자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수난에 대한 예고만이 그들의 귀에 들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직 부활은 그들에게 낯선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 번째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자 반응이 달라졌다. 부활의 영광에 대한 유혹이 제배대오의 아들들에게 일어난 것이다. 본시 ‘천둥의 아들’이라는 뜻의 제배대오에게서 태어나 자란 야고보와 요한은 몹시 성격이 급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이 대목에서는 난데없이 그들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급한 성격이면서도 직접 청하기에는 어딘가 면목이 없었는지, 예수님 일행을 뒤따르며 돕던 여인들 가운데 있던 자신들의 어머니를 대신 내세워 청했다. 치맛바람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재반응 태도가 전과 달랐다. 첫 번째 예고에서 추상같이 야단을 치시면서 당장이라도 내칠 듯이 베드로를 몰아 부치시던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 여성인 어머니가 나서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 다소곳하게 물으셨다.
“무엇을 원하느냐?” 예수님의 전매특허 같은 물음이시다. 그랬다. 무언가 청원할 것이 있어 아쉬운 약자들에게 그분은 늘 되물으셨다. 몰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얼굴도 세워주고 자존심도 배려해서였으리라. 예의 어머니는 대답을 올렸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20,21). 이로 미루어보면 제배대오의 어머니와 그 두 아들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 사이에서도 부활이란 영광의 현실로 여겨졌던 것 같다. 그것도 매우 현세적인 영광을 그들은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니 우의정과 좌의정 같은 벼슬 자리를 청한 것이 아니겠는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처했던 정치 상황을 감안해 보면 인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그 당시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시작된 하느님 백성의 역사가 250년에 걸친 판관 시대를 거쳐 겨우 사울과 다윗 그리고 솔로몬에 의해 반짝 하는가 싶더니, 곧 이어 열 지파로 구성된 북 이스라엘 왕국과 두 지파로 구성된 남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다가 경쟁적으로 타락하다가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하여 바빌론으로 두 번째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때가 기원전 518년 무렵이었다.
이른바 지도자 계층에 속하는 왕, 예언자, 지식인들은 모조리 살해당했음은 물론이다. 그 와중에 살아남은 이들은 가난한 이들과 세습 사제들뿐이었다. 그러기를 40 여년, 겨우 풀려나와 폐허가 된 고향 땅에 성전부터 세우고 나라꼴을 만들어나가는 중에 코스모폴리탄의 세계를 꿈꾸던 알렉산더가 일어나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를 중심으로 로마에서 이집트와 인도 등 3개 대륙에 이르는 대제국을 세우는 와중에 그 부하인 셀레우코스가 물려받은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더니 급기야 뒤이어 일어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제는 자기 땅에서 종살이를 하게 된 마당이었다. 그러니 유다 사람들의 바람이야 두 말할 것도 없이 군사력으로 억누르던 로마로부터의 독립이었고 로마는 물론 로마 세력에 빌붙어 버린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착취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그 바람이 예수님께 투사되었다. 백성은 예수님께서 밤낮없이 말씀하시던 하느님 나라가 그 결정판일 것으로 생각했다. 현실적으로 증거되지 못한 진리가 무슨 소용일 것인가 하는 생각이 그들 생각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0,22ㄱ) 여기서 ‘잔’이란 고난의 잔을 뜻한다. 그런데도 그 두 아들은 순순히 대답하기를, “할 수 있습니다.”(20,22ㄴ)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그대로 그들의 운명이 되었다. 나중에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첫 번째 지도자로서 순교하였고 요한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맡아 일하다가 파트모스섬에 갇혀 묵시록을 집필하고 나서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살면서 비록 백 여살의 많은 나이까지 살아남기는 했으나 고난으로 점철된 선교사의 삶을 살았다. 이것이 그 두 형제가 받은 고난의 잔이었다.
베드로가 수제자로서 인정을 받은 후부터 제자들 사이에서는 서열 다툼이 시작되었다. 야고보와 요한마저 그 다음 자리를 노린다는 것이 드러나자 베드로를 비롯한 나머지 열 제자가 이를 불쾌하게 여겼다. 그래서 이러한 분위기를 눈치 채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나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20,25-28).
섬김에 관한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교회는 정치 윤리로 가르친다. 정치 권력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공동선을 구현하는 데 있다. 국민 각자가 누려야 할 행복 추구권을 보호하고 인권을 증진시키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정치 권력은 국민 각자가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보조성 원리에 따라 지원해야 한다. 이 원리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음을 원칙으로 한다. 지원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간섭하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감독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연대성 원리에 따라 국민 각자가 단체를 결성하여 서로 도울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이 모든 의무에 우선적인 고려 대상은 가난한 이들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국민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가장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계층이기 때문이다.
경제 질서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정치 질서에 있어서도 교회는 대조사회로서 처신해야 한다. 사회의 질서에 있어서, 경제 윤리가 확립되어야 함은 물론 경제 민주화를 지향하되 궁극적으로는 경제 복음화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듯이, 정치 윤리도 확립되어야 하고 정치 민주화를 지향하되 궁극적으로 정치 복음화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이 두 가지 목표에 있어서 교회의 소명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경제 복음화는 나눔의 또 다른 이름이며, 정치 복음화는 섬김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질서는 정치적으로도 세상 정치의 빛이 되어야 한다. 섬김의 질서로써 모범이 되어야 한다. 가난한 이들, 그들이 신자이건 아니건 간에, 그들을 섬기는 기본 정신이 최고로 함양되어야 하고, 교구와 본당 등 교회 조직 안에서도 서로 섬기는 질서가 확고하게 자리잡아야 한다. 교회의 모든 직분과 신분은 벼슬이 아니라 섬김의 기회일 뿐이다. 경제적인 차원에서 협동조합이 나눔의 질서로서 제시된 세상의 빛이라면, 정치적인 차원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모든 조직이 섬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세상의 빛으로서 산 위의 마을처럼 드러나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면 어찌할 것인가? 아니라면 세상의 빛이 아니라 어둠의 한 구석으로 초라하게 자리잡을 수 밖에 없다. 그뿐이다. 세속적으로 영향력 있는 중산층 교회로서 자리잡을 수는 있겠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로서는 발언권이 약할 수 밖에 없고 더구나 복음적 활력은 줄어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유럽 가톨릭 교회가 걸어온 길이 그러하듯이.
예리코에서 눈먼 두 사람을 고치시다(20,29-34)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잘 보는 이 눈먼 두 사람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주님께서 그들 가까이 오셨을 때, 그들은 그분을 볼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그들을 인도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 가까이 가고자 애썼다. 뜻이 굳은 영혼의 본성은 이렇다. 뜻이 굳은 영혼은 그를 가로막는 것들에 의해 오히려 더욱 굳건해진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세상이 모두 그렇듯이(세상일은 금세 지나가는 바), 세상에 육화하여 육신으로 사시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아주 잠시 스쳐 지나가셨다. 주님께서는 육화를 통하여 인간 역사의 짧은 시간 동안만 우리 곁에 머무셨다. 지금 우리는 그것에 관해 읽고 믿는다”(아우구스티누스).
“눈먼 두 사람이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여, 사도가 다른 민족 사람들인 우리에게, 자랑하거나 우리의 뿌리인 옛 계약의 백성에게 오만하게 굴지 말라고 훈계한 것을 기억하자. 우리는 좋은 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진 야생 올리브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보다 먼저 계약의 백성이었던 유다인들의 구원을 시샘해서는 안 된다(히에로니무스). 주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신 것은 민족들의 마음의 눈에 손을 대시어 그들에게 성령의 은총을 주신 것이기도 하다. 눈을 뜬 그 민족들은 선행을 함으로써 그분을 따랐고, 그 후 완전히 그분을 버린 적이 한 번도 없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미사 시작 예식으로 바치는 자비송은 이 본문에 등장하는 소경들이 외친 소리에 기인한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20,31). 이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분의 출신 배경이 어느 정도는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을 포함한 유다인들에게 다윗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다. 그의 치세에 이스라엘은 통일을 이루어 주변 민족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비록 그가 부하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짓기는 했지만 나탄 예언자의 추궁에 그 즉시 뉘우친 것만 보아도 그는 거룩한 왕이기도 했다. 그런 다윗의 자손 역시 힘 있고 거룩한 분으로 지칭하는 호칭이었다.
눈먼 두 사람은 지난 날 소경으로서 남의 자선에 기대어 살아야 했던 과거 때문에 눈을 뜨고자 하는 마음이 그만큼 절박했다. 눈은 멀었어도 두 귀는 멀쩡했기에 들려오는 소문에 예민하게 귀를 기울였고 드디어 자신들이 살던 곳 근처 예리코에 그분이 오신다는 소식에 그들은 의기투합하여 길가에 앉아 그분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분을 만나 눈을 뜰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빌어먹지 않고 제 힘으로 일하여 먹고 살 수 있을 것이었다. 당당하게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드디어 예수님과 그분을 뒤따르는 군중이 떠드는 소리에 그들은 앞에서 말한 그 외침을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군중이 그들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주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두 번에 걸친 거듭된 청원에, 더군다나 있는 힘을 다해서 외치는 그 소리에 담긴 절실한 진심이 예수님께 전달되어, 그분이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이로 미루어 보자면, 우리가 진심을 다하여 부르짖으면 그분은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과연 우리가 그 두 눈먼 이들처럼 절박하게 청원하느냐 일 것이다. 절박함이 청원의 성패를 좌우하는 법이다.
청원 기도의 첫 단계가 진심으로 절박하게 부르짖는 것이라면 두 번째 단계는 그분의 물음에 자신이 청원하는 내용을 제대로 말씀드리는 일이다. 그분은 청원을 들으시고도 일단 본인에게 확인 물음을 던지시는 분이시다. 왜일까? 몰라서는 물론 아니다. 본인의 자존심을 배려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부들은 ‘지나가시는’ 그분의 짧은 시간에 초점을 맞추어 해설하였지만,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분은 우리가 부르짖을 때마다 응답하는 분이시기에 그리고 그 응답으로 우리를 부르는 분이시기에 정작 중요한 것은 그분의 물음에 우리가 제대로 우리의 청원을 다시 한번 제대로 말씀드리는 일이다.
무엇이 우리의 청원인가? 20장의 본문 맥락을 참조하건대 그 청원은 우리가 우리 사회의 대조사회로서 자임하는 교회답게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청원하는 것이다. 경제에 있어서나 정치에 있어서나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청원하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 저희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눈을 뜨게 해 주시면 우리는 시대의 징표를 올바로 바라보며 그분을 따를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사회의 질서에 있어서, 기본적인 경제 윤리의식과 정치 윤리의식이 전제되어야 경제 민주화 및 정치 민주화를 지향할 수 있으며 이 지향을 위하여 교회는
경제 복음화와 정치 복음화로 나아가야 하며 교회 소명인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한 의식과 행동을 통하여 경제적 과실인 나눔과 정치적 과실인 섬김이라는
열매를 맺을수 있다는 점을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비하시며 공정하신 주님~시대의 올바른 징표를 볼수 있도록 저희 눈을 뜨게 해주소서...아 ~ 멘.
모처럼 이 까페에서 제대로 된 댓글을 만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언제 한번 제가 밥 한끼 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