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李穎)은 경원군(慶源郡) 사람으로 수염이 아름답고 얼굴과 거동이 품위가 있고 고상하였다. 널리 사물을 보고 들어 잘 기억하며, 초서(草書)와 예서(隷書)를 잘 썼다.
고종(高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로 옮겼으며 늘 학사(學士) 김구(金坵)와 함께 승려 조영(祖英)의 처소에 놀러 다녔다. 충렬왕(忠烈王)이 세자가 되었을 때 〈이영의 명성을 듣고〉 손수 글을 지어 하사하였는데, ‘농서(隴西)의 풍월이 또 3,000일세’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사림(士林)이 매우 부러워하였다. 원종(元宗) 때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임명되었다. 원(元)의 선무사(宣撫使) 조양필(趙良弼)이 한번 보더니 서로 늦게 알게 된 것을 한탄하였다. 후에 시(詩)를 부쳐 이르기를, “부소산(扶蘇山) 아래 사는 수염 많은 이경(李卿)이여, 작별한 지 3년인데 어찌 살고 있는고. 두 번이나 사신을 만났는데 글자 하나 없으니, 누가 사람이 늙으면 더욱 정(情)이 깊어진다고 말했던가.”라고 하여 이와 같이 존중함을 보였다.
충렬왕이 즉위하자 추밀원부사 예부상서 한림학사승지(樞密院副使 禮部尙書 翰林學士承旨)로 승진시켜 치사(致仕)하게 하였으며, 〈충렬왕〉 4년(1278)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