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가수왕 조용필은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그런대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조용필은 유년기를 거치면서 모나지 않은 성격에 둥굴둥굴 잘 웃는다하여 그이 별명은 풀빵 이었다.
조용필은 가수로서의 인생은 고 3년때 부터 시작됐다.
탈랜트 안성기씨와 경동고등학교를 다니던 3학년 때 친구들은 대학 시험준비에 한창을 때 그는 가수가 되려고 가출을 결행한다.
미8군과 떠돌이 생활을 하던중 가족들이 찿아와 설득으로 공부해서 대학에 갈 것을 설득하자 그는 집으로 들어와서 대학입시 공부를 시작했지만 그건 잠시였고 다시 가출을 감행한다.
노래와 보컬리스트를 겸한 그의 가수 생활은 미8군에서 시작했다.
미8군에서 노래 하던중에 어느 미군이 노래를 잘하니 자기 생일날 님이여(영어원곡)을 불러주면 원 없이 술을 사준다하여
조용필은 영어로 된 원문의 노래를 몇칠을 거쳐서 외우고 외워서 그 미군 병사에게 불러줬다한다.
그 병사가 감동하여 눈물을 많이 흘렸고 몇칠동안 계속 술을 사줬다한다.
이때부터 조용필은 술꾼이라는 별명도 얻게 됐다.
70년도 조용필은 진정한 가수로 인정받기 위해서 어느 기획사에서 태스트를 받았으나 성공하기 어렵다하여 떨어진 경력도 있다.
그러던중 그당시 TBC시인가수 등용문에서 "하얀모래위에"의 노래로 당당히 대상을 받았다.
그때 그 프로그램에 전속으로 출연하는 가수가 바로 페티김 이였다.
그 후로 조용필은 방송을 많이 타게 됐고
세상속에 조용필을 알리게 되었고, 한때는 조영필로도 불리기도 했다.
하얀 모래위에와 님이여가 나올때 나는 중학교 시절이었다.
나는 조용필의 님이여 노래를 들으며 21살에 세상을 따난 작은형을 생각하며 많은 위안을 받고기도 했다.
조용필은 80년도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창밖의 여자를 불러서 세상을 흔들어 놨다.
벽지에 조용필 사진만 있어도 부둥켜 안고 우는 여고생들도 있었다.
그야말고 조용필의 시드롬 이었고 공연중에 실신하는 여고생들 땜에 순조롭게 공연을 할 수가 없었던 시절 이었다.
그 당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여러 가수가 불렀고 가사가 좀 달랐다.
그의 호소력있는 열창은 사람들의 심장을 움찔하게 했고 오빠부대를 만들어냈다
그 당시 조용필은 100만장의 레코드 판매 기록을 세웠고 단발머리 고추잠자리 꽃바람 비련등으로
3개월동안 국내 가요차트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토했다.
그 당시 조용필의 매니저는 왕년의 축구스타 이회택씨였고
조용필의 LP 레코드판은 상태가 좋으면 지금 150만원을 호가한다.
그후 조용필은 국회의원 딸인 박지숙씨와 결혼 하였으나 오랜 해외 생활과 별거중에 이혼하게 됐다.
조용필은 결혼이 뭔지도 모르고 했다 했고 자기 스스로 무 정자증 남자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후 조용필은 재미교포 사업가와 재혼을 하였으나 심장마비로 사별을 하게된다.
그 후로 조용필은 잠시 슬럼프에 빠지게된다.
조용필은 간혹 순회 공연과 콘서트로 그의 위상을 연맥하며 지냈으나 창작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위상은 나는 가수다라는 인기프로에서도 그의 노래만을 가수들이 기량을 펴보이는 특별 프로그램을 편성 할 정도였다.
그는 지금 10년이 넘는 긴여정을 멈춰세우고 춤꾼과 알아들을 수 없는 작금의 가수들에게 숨을 멋게하는 바운스와 헬로를 들고 나오자마자 각종 음악 차트에 모두 1위에 오르는 위력을 발휘하며 기존 가수들의 숨을 멎게 했다.
63세라는 그 나이에 호흡이 딸릴수도 있겠지만,
건안의 혼불을 지펴서 세상속에 맑음과 밝음의 음표로 지치고 고단한 그들에게 위안과 희망의 호소력을 우리의 영원한 가수왕 조용필에게 우리는 기대해 본다.
첫댓글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의 가창력에서 가수의 진정성이 느껴지고 음악에도 혼이 있다는 걸 어느 날 알게 되었습니다. 조용필 가수에 대한 좋은 자료의 글 감사합니다.
윤안선생님 감사합니다. 작은형 큰형을 잃은 아픔을 조용필 가수로 인해서 많은 위안을 받고 살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