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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당진부동산중개사 원문보기 글쓴이: 몽산(蒙山).송영환.010-2345-1234
서애 유성룡의 풍수지리 사상 (옮겨 온 글)
풍수에서 高, 胎, 岡, 正, 順, 低의 여섯가지 형세
퇴계 이황 선생의 제자이고 성리학의 대학자인 서애 유성룡은 ...마치 병이 난 부모를 돌팔이 의사에게 맡기는 것이 불효인것 처럼, 부모가 영구히 묻힐 곳을 졸렬한 풍수지사에게 맡겨서는 안된다며, 반듯이 집안에서 한사람 정도는 풍수지리를 공부하여야 한다고 후손들에게 당부하였고 그 자신도 풍수학을 공부하였다.
또 명당에 조상을 모셔 발복하려 해서는 안되며... 오로지 좋은 땅에 조상을 편안히 모시는 것을 효행으로 삼아야 하나... 조상의 체백이 편안하면 자손의 마음도 편안하지 않겠는 가...라고 하였다.
서애 유성룡은 임진왜란 당시의 재상으로써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하여 임란을 대비케 하였고, "이순신"이 감옥에 갇혔을때 적극적으로 구명을 하여 백의 종군케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최근까지도 "이순신"의 후손들이 서애의 제사때 잊지않고 찾아 왔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서애도 당쟁의 회오리에서 비켜 갈수는 없었기에 삭탈관직되고 재산을 국가에 헌납한뒤 경상북도 하회마을로 귀향케 된다.
귀향후에 초가삼간을 짓고 어려운 삶을 이어갈때 "학가산 서미동"에서 저술활동을 하였는데, 이때 "징비록"이 저술되었다.
현 서애의 묘자리는 號가 掘齊(굴제)이고 이름은 元之(원지)로 그의 손자가 정한 곳이다. 아들 "위"와 "여"가 있었으나, "위"가 일찍 죽었고, "여"의 외아들인 "원지"로 서애의 유일한 손자인 것이다.
서애의 풍수지리관은 朱子(주자)의 山陵議狀(산릉의장) 글들이 자신의 문집 여러 곳에서 발견 되듯이 당대의 유학자 다운 풍수지리관을 나타내었다.
특별히, 가짜 풍수들에게 속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집안의 한 사람 정도는 풍수지리의 대략이라도 알아 둘것을 권하였다.
마치 병이 난 부모를 돌팔이 의사에게 맡기는 것이 불효인 것 처럼, 부모가 영구히 묻힐 곳을 졸렬한 풍수에게 맡겨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장손자 원지는 조부의 뜻에 따라 상당한 풍수지리에 관한 식견을 쌓았으며, 더군다나 유학자 다운 학문적 실용성을 추구하는 풍수지리관을 세웠다.
서애의 묘자리는 경북, 안동시 풍산읍 관내인데, 이러한 곳을 점혈한 조선조 유학자 집안의 풍수지리관을 살펴보기로 한다.
高(고)
墓의 위치를 보면, 주변보다 확연히 높은 곳에 위치한다, 따라서, 수해의 위험이 없는 곳이고, 일사량이 많은 곳이다.
고려조는 전쟁을 통하여 수립된 나라로 무인들의 득세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 것으로 방어하기 좋은 곳, 안전을 우선으로 하였기 때문에 산속의 藏風局을 선호하여, 상대적으로 산의 높은 곳에 위치하는 풍수지리가 성행되었고, 조선조 때에는 마을의 뒷산으로, 주변보다 높은 곳이니 得水局을 선호한 풍수지리관이었다고 보여진다.
胎(태)
묘자리에 서서 뒷쪽을 바라보면, 병풍을 두른듯 금체형의 현무봉이 있고, 당판은 타원형의 20~30m의 혈장이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것을 후룡으로 부터 마을 뒷쪽으로 내려오다가 경사가 완만해지며, 단단한 穴土를 이루고 혓바닥을 내밀듯 타원형의 穴場이므로 이곳에 氣를 모아 드러난 穴針이 존재하는 것이다.
岡(강)
혈장을 이루기 전, 바로 뒤에서 둥글고, 단단하게 튀어나오거나, 뒤 후룡이 점차 낮아지고 난 후에 다시 올라서서 혈장을 이루는 경우도 있듯이, 이를 속기라 하여 사람의 목처럼 흘러오는 용보다 가늘었다 굵어지는 것을 좌우굴곡이라 하고,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는 형세를 기복이라 하여, 혈장의 뒷 모습이 언덕을 이룬 것을 말한다.
正(정)
혈장의 위치에서 주변을 돌아보면, 산세는 혈장을 둘러쌓아 있으며, 좌우의 균형이 잘 맞아 떨어진다. 특히, 案臺(안대)의 경우 꼭 존재하고 있으며, 案臺로 向을 한다고 보면, 좌우의 균세가 너무도 잘 들어 맞는 곳이다. 이것을 正이라 하는 것이다.
順(순)
순하고 부드러운 곳이 명당인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심미안으로 누가 보아도 아름답고 포근함을 느끼는 것이고, 그림으로 말하면 황금분할의 묘수에 해당되는 것이다. 더불어 양명한 태양 빛이 내려 쪼이는 곳이기도 하다.
低(저)
이는 좌우 양팔에 해당되는 靑虎砂에 비하여 穴場은 낮기 마련으로 주변으로 부터 불어오는 風殺을 막아내는 형세를 말하는 것으로 穴場보다 좌우 靑虎砂가 더 높은 것이다. 따라서, 안온하고 포근함을 느끼는 곳이다.
이경우 혈장과 청호사의 높이가 적절함을 지녀야 하는 것이 포인트인데, 청호사가 혈장보다 너무 높아 하늘만 빼꼼이 보이는 것을 賊嶽(적악) 또는 賊殺(적살)이라고도 하여 대단한 凶이되는 것이다.
이렇게 高, 胎, 岡, 正, 順, 低의 여섯가지 형세에 잘 부합되는 곳이라면, 일단은 陰宅으로써 손색이 없는 것이다. 형세에 의한 특징적 사항들은 부지기수로 많으나, 그 원칙인 근본에서는 이를 피할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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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덧붙히는 말씀.....
**여기서는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명당"이라는 용어를 풍수지리상 생기가 모여 있는 좋은 길지 또는 "생기처"라는 의미로 쓰겠습니다.**
풍수지리가 과연 미신일 까요?...
미신은 어떤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신의 영험함이나 능력에 의존하고 기대는 것인데... 풍수지리는 그런 신의 능력과는 무관하다고 볼수 있고 ..오히려 뜯어 보면 지극히 합리적으로 이론이 정립되어 있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또한 음택인 조상의 묘를 쓰는 데에는 "효사상'으로 좋은 땅에 조상을 모시고자 하는데 기반을 두고 있고.. 주택은 홍수나 산사태의 위험이 없고 취위나 더위를 피할수 있는 쾌적한 즉, 인간이 살기 좋은 장소를 선택한 것이며..시장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접근성이 좋은 장소를 선택하는 서양의 "입지론"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풍수지리에서는 음택 즉, 묘자리는 지하에서 생기가 분출되는 그 "생기 분출구"에 자리를 하여야 하는 것으로 생기분출구까지 파고 들어.. 거기에 맞추어 유골을 안치하는 방법으로 묘를 쓰도록 되어 있고 ..이에 반해 양택 즉, 건물의 터는 "생기 응집처"라고 하여..생기가 응집한 장소를 찾아 오히려 응집에 적합하도록 적당히 보토를 하거나 또는 바닥을 깎아 내고 그 위에 건물을 축조할수도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음택은 물과 바람을 피해 즉, 겨울에 불어 오는 북서풍등 차가운 바람(살풍)을 피하고자 뒤에서 주산이나 현무가 솟아나 뒤에서 바람을 막아주고..또한 거기에서 부터 출맥한 중출용맥이 아래를 향해 내려 오다가 비로소 물을 만나 멈춰 선 곳(그런 곳에 혈을 결지한다고 보는 것임)을 택하고 또한 물의 침범우려가 없는 평지보다는 다소 높은 산자락 또는 용맥상에 자리를 잡아 온 사실을 우리는 알수가 있습니다.
(한편 풍수지리에서는 산 즉, 용맥을 움직이지 않는 "정"이라 하여 "음"으로 보고 물은 움직이는 "동"이라 하여 "양"으로 분류하여 "음"인 용이 내려와 '양"인 물을 만나 "음양이 교배"되어 "혈"을 만든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주택이나 영업장소는 소위 풍수에서 말하는 양택으로 서양에서도 옛부터 이를 "입지론" 또는 "입지환경론"이라 하여.. 자연과학을 바탕으로 연구해 온 실용학문으로
즉, 주택은 자연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고 또한 아름다운 산하와 그에 따른 쾌적한 환경을 갖추어 거기서 살아감에 있어 몸이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안정감을 줄수 있는 그런 편안한 생활을 할수 있는 땅을 찾는 것으로 특히 쾌적성을 강조한다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시끌벅적한 시내 중심부의 위치보다는 그래도 조용한 외곽의 약간 2-3부 능선정도의 산자락의 남향을 중심으로 향한 곳이 적지일 것이며 ..
그에 비해 영업장소로 사용되는 건물에 있어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접근성이 용이하고 또한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줄수 있는 그런 장소라야 영업에 도움이 될 것임으로 다소 높은 곳 보다는 낮은 곳에 즉, 풍수에서 "부'를 상징화는 물이 모여드는 중심점에 가까운 곳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음택이던 양택이던 북서풍의 차가운 살풍을 피하고자 서양식 의자에서 등받이 역할 또는 우리의 전통 좌식생활에서 안정감을 주는 병풍역할을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음.양택에 있어서는 반드시 뒤에서 주산(혈을 보호하는 부모산)이 솟아 올라 앞의 주혈을 보호하는 걸 우선하였으며...
골짜기나 계곡에 있어서는 음.양택 불문하고 밤낮으로 골을 타고 오르내리는 곡풍 또는 살풍으로 (폭우시 급류의 침입 위험등) 건강과 재물을 잃는다고 하여 반드시 피해왔던 사실 역시 자연 환경학적인 관점에서 보면..바로 선조들의 지혜로움이 배어있는 학문이라는 사실이 실로 실감이 나는 것입니다.
또한 주혈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일단 용맥에 기운의 변화가 일어 나며.. 일정한 형태의 균형을 이루고 ..물고기가 물속에서 파문을 일고 그 중심에 숨어있듯..혈형의 분류인 와.겸.유.돌에서도.. 중심점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혈처"로서 즉, 와.겸의 형에서도 허한 밑의 부분에서 단단하게 대(토축)를 이루어 튼튼하게 받쳐주고.. 또한 그 중심부에 미돌처를 형성하여 시각적으로도 그 중심의 핵을 보여 주는 것이고..
유.돌형에서도 중심부에 미훈처를 형성하거나 또는 지각의 교차점을 이루어.. 중심의 핵을 가르쳐 주고 있고.. 그 자리가 지질학 또는 지층학적으로도 지하에서 주변에 비해 풍화가 일어나 일정한 중심적인 핵(비석비토가 나오는 혈처)이 되리라는 짐작이 가능할 것입니다.
또한 주혈에서 보아 눈에 들어오는 주변의 모든 사각의 유무..내외수의 유무와 들고 남의 형태, 그리고 사각의 수려함과 강약..미추등 여러가지를 분석하고 거기에 상징성에 관한 부분까지 더하여 시각적인 효과를 종합분석한 실로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임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풍수지리에서 아주 간단한 예로 보면 "풍즉기산"이라는 말이 있는 데.. 이는 즉, 좋은 기운은 바람을 타면 흩어진다는 것으로 고갯마루에는 스스로 기운을 다스리는 전파를 쏘는 방속국, 죄수를 다스리는 교도소, 기운이 강한 경찰서, 소방서, 종교시설인 교회나 사찰은 가능하지만...
만약 일반인들이 그런 장소에 영업장을 갖춘 걸 보면 과연 그곳이 현재도 장사등 영업이 거의 안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변에서 흔히 볼수가 있어 풍수지리의 실증적인 면이 증명이 되는 것으로..즉, 이런 사실과 풍수지리의 이치를 안다면.. 낮은 지대의 절반도 안되는 싼값이라도 그런 지대가 높은 곳에는 영업장을 마련해서는 안되는 사실을 알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풍수지리를 미신으로 알고 계시는 분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풍수지리는 말 그대로 지질학이고 지층학이며 자연과학이고 환경과학이며 정신과학(숭조와 효 사상 고취)이라고 볼 것입니다..
또한 진혈에 조상의 체백을 모시면 실제로 누런 황골로 변해 수백년 영구 보존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더라도 자연과학이고 효사상을 고취하는 정신문화이고 사상이기도 하며..숭조사상과 효심을 가지고 명당자리를 찾아 묘를 쓴 후손들이 부귀를 누리는 것을 보면..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인과응보라고 볼 것이고 또한 임상실험적으로 또한 실증적으로 증명이 된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풍수지리학이 과연 무엇인지 한번 공부해 보시고... 그때가서도 과연 미신인지 말씀하셔도 될 것입니다..따라서 정신적인 효 사상을 가지고 조상을 명당. 길지에 모시는 집안의 후손들이 잘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인데..이를 가지고 미신이 무엇인지...풍수지리학이 무엇인지...잘 알지도 못하는 분들이 괜히 나서..풍수가 미신이네...아니네 하고 ...설왕설래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지요...
서애 유성룡 선생같은 대 학자가 과연 우리만큼도 몰라서 ...풍수지리가 미신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가지고 후손들에게 까지 이를 공부하라고 당부했을 까요?..아마도 그 역시 산소를 명당에 쓴다고 하여 그 지기에 의한 발복이 후손에 미친다고 볼수 있는 증거는 없었겠지만...그래도 조상을 편안히 좋은 땅에 모시면.. 후손의 마음도 안정되고 또 편안할 것이니...그로서 발복을 받는 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또한 성현중에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 학자인 "주자"도 풍수지리에 능통하였고.. 그래서 "산릉의장"이라는 글을 써서 황제께 올리기도 하였으며 조상을 좋은 길지에 모시면 제사가 끊이지 아니하고 "신령"이 편안한 즉, 후손들도 편안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지요..그런데 여기서 "신령"을 거명했다고 하여 어떤 조상신 즉, 미신이라는 주장도 있을수 있으나.. 이 역시 조상의 신령이 편안한 즉, 후손도 편안할 것라는 뜻일뿐..신령이 편안하니 신령이 직접 후손에게 화복을 내려 준다는 그런 뜻으로 쓴 것은 아니지요.
(물론 신령이 있다면 ..그리고 후손이 좋은 길지를 찾아 효성스럽게 묘지를 마련해 모신다면..그 조상이나 또는 부모등 신령이 능력이 되는 한..그런 효성이 지극한 후손에게 화가 아닌 복을 내려 줄 것은 분명한 사실이겠지요..그런점에서 숭조사상과 효를 기본으로 중시하는 우리의 민족 문화로는 부모나 조상을 돌아가시면 곧바로 뜨거운 불속에 쳐 넣어 태워 없애는 화장문화는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점이 있지요..)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의 집안도 명당을 찾아 6~7번에 걸쳐 선조를 이장하고 나서야 비로소 현대그룹을 앞서게 되었고 위와 같이 수차에 걸쳐 길지와 명당을 찾아 이장한 사실은 묘역 비문에 기록하여..자기들 후손들은 물론 타인들도 누구나 현장에 가면 확인 가능하도록 하였지요...
사람은 아는 만큼만 보이는 법이라고 했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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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릉의장
옮겨 온 글
주자(朱子)의 山陵議狀(산릉의장)
[산능의장]은 주자(朱子)의 글로서 풍수의 고전 가운데 하나이다.
1130년에서 1200년 사이를 살다간 주희(朱熹)는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훗날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의 유학과 정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대학자이다.
성리학의 대가 주자(朱子)는 풍수지리에 많은 관심을 보여 자신의 풍수 지리적 견해를 단편적으로 피력한 글들이 도처에 보일 뿐만 아니라, 당시 송나라 황제 효종이 죽자 그 능 선정과 관련하여 황제에게 {산릉의장(山陵議狀)}을 보낼 정도로 수준 높은 풍수 실력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평소 그들 찾는 손님들과 즐겨 하는 이야기 소재가 풍수였다고 송나라 조여치(趙與 )가 지은 {빈퇴록(賓退錄)}에서 적고 있다("朱文公嘗與客談世俗風水").
주자와 같이 훌륭한 인물이 나오게 된 것이 바로 무원현( 源縣) 관갱령(官坑嶺)에 위치한 주자의 四代祖母인 程씨의 묘가 명당 덕분이라고 송나라 국사(國師)이자 집안 대대로 뛰어난 풍수였던 오경란(吳景鸞)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관갱(주자의 고조모 묘가 있는 산 이름)의 산세가 기이하고, 무덤이 쓰여진 혈장의 위치는 높은 산에 위치하고 있다. 뭇 산들이 남북으로 모여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멀리 뾰족한 문필봉이 솟아 있다. 이러한 명당에서 큰부자나 큰 벼슬을 할 인물은 안나오지만 공자만큼이나 총명한 현인이 배출될 것이다("官坑龍勢異穴高衆山聚坎離交 精筆峰天外起富不及陶朱貴不過五府當出一賢人聰明如孔子")
[산릉의장(山陵議狀)]
주자가 쓴 [산릉의장]은 후대 풍수 수용사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주자는 1194년 나이 예순 다섯 살 때에 당시 송나라 황제 영종(寧宗)에게 {산릉의장}이라는 글을 올린다. 이 글을 올리게 된 것은 6년 전인 1188년에 죽은 효종의 능을 그때까지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능을 정하지 못한 까닭은 理氣파 풍수이론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본 교수가 후일 자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주자(朱子)는 영종황제에게 올린 {산릉의장}에서 '풍수의 핵심은 산세의 아름답고 추함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성씨에 따라 들어갈 묏자리가 있고 들어가서는 안될 묏자리가 있다'는 오류를 반박한다. 주자의 [산릉의장]은 자주 인용되는 글일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중국과 조선 풍수지리에 관한 일종의 지침서가 된다. 심지어 조정에서조차 풍수를 논할 때마다 주자의 이 글이 언급될 정도로 중요한 글이 된다.

첫댓글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선생님 잘 계시지요? 항상 좋은 글 올려주셔서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