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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적 계보를 열어가라!
읽을말씀: 창38:1~30
주제말씀: 창49: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 실질적인 장자권자, 유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렵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리로다.”(창49:3~7)
야곱의 장자는 원래 누구였습니까? 르우벤입니다.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창35:22,23) 그러나 그는 해서는 안 될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즉 서모 빌하와의 통간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창35:22) 그는 이 때문에 장자권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대상5:1)
결국 이 예언대로 르우벤 지파에서는 어떠한 사사나 선지자도, 왕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비록 광야 시대 때 다단과 아비람 등이 등장하기는 했으나, 이들은 고라와 함께 모세를 대적하다가 멸망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땅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민16:1,2)
다음은 누구입니까? 시므온과 레위입니다. “...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창35:23) 하지만 이 두 사람 역시 세겜에서의 잔인한 복수극을 주동한 대가로 장자권을 상실했으며, 그 후손들마저 분리와 흩어짐을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로 협력하여 악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제 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창34:25,26) /“...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49:7)
향후 이 예언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즉 광야 여행 중 시므온 지파 수는 점점 줄었고, 모세의 마지막 축복에서도 제외되었을 뿐 아니라, 가나안 땅 분배 때에도 독자적인 기업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시므온 자손의 이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하였으니 이는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의 기업 중에서 받음이었더라.”(수19:9) 레위 지파 역시 일정한 기업이 없이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며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았습니다(수21:1~42).
결국 르우벤에게 돌아가야 할 장자권은 유다에게로, 상속되는 기업의 두 몫은 요셉에게로 각각 옮겨졌던 것입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내 앞에 절하리로다.”(창49:8)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이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창48:5,6)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조급한 성격이나 충동적이며 정욕적인 행동 때문에 스스로 화를 자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어떻습니까? 혹 폭력적이나 호전적인 행실로 인해 넝쿨째 들어온 복들을 스스로 차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 허물 많고 실수 잦은 사람, 유다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창37:26,27)
그러나 유다 역시 처음엔 다른 형제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동생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도 모자라, 그를 이방인에게 팔자고 제안하는 등 여전히 허물 많고 실수 잦은 사람 중 한 사람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창37:26,27)
그런데도 신기한 점은 그 리더십이 조금씩 통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창37:27)
이후 그는 자기 형제들로부터 떨어져 독자적인 생활권을 형성하면서 가나안 사람들과 교제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창38:1) 가나안 여인과 혼인, 슬하에 엘과 오난, 셀라 세 아들을 두었구요.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 하니라...”(창38:2~5)
그러다가 엘과 오난을 잃고 막내 셀라마저 잃을까봐 며느리 다말에 대한 계대 결혼의 의무를 이행치 않다가, 결국 자신이 속아 다말과 동침하여 쌍둥이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마1:3)
참고로, 계대결혼이란 무엇입니까? 가문과 혈통의 존속을 중요시 했던 고대 문화권에서, 후사 없이 죽은 형제의 대(代)를 잇기 위해 다른 형제가 그 죽은 형제의 부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주던 것으로, 이는 자식 없이 불쌍히 죽은 형제의 가문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가족과 이름을 기억하고 보존하고자 했던 풍습입니다. 따라서 형제들은 그 죽은 형제를 위해 긍휼과 희생, 형제애로써 이 의무를 준수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자신들의 혈통을 통해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그들로서는 더더욱 말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아들들은 어떠했습니까? 이 같은 형제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오난은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땅에 설정하다가 여호와의 치심을 받아 죽었고(9,10절), 막내 셀라는 그 형들처럼 죽을까 두려워 그 의무를 차일피일 미루었던 것입니다(11절). 유다 역시 막내 셀라마저 잃을까봐 다말에 대한 계대 결혼의 의무를 이행치 않고 있었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말은 어찌 하든지 이 의무를 이행하고자 했습니다. 창녀로 가장한 채 자신의 시아버지랑 동침함으로써 말입니다(창38:14~18). 물론 이 일 때문에 유다의 집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 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24절) 유다가 이 사건의 진상을 알고 이내 정리되었긴 하지만 말입니다(창38:25).
* 그런 유다가 바뀌기 시작하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 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창38:26)
아무튼, 그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는 깨달음과 함께 말입니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 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창38:26) 즉 이는 무슨 말입니까? 1차적으로 다말이 단순한 욕정에서가 아닌, 대를 이어야 한다는 거룩한 열망에서 그리 하였음을 깨달았다는 말이며, 궁극적으로는 비로소 남이 나보다 옳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는 말일 것입니다. 사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내 생각만이 옳고, 내 판단은 빗나가지 않으며, 내 방식이 모든 일의 최선’이라고 여기면서 살아왔는데, 난생 처음으로 남이 나보다 옳을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 그는 나보다 옳도다...” 이는 이내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에까지 적용되기 시작했구요.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내 생각만이 옳고, 내 판단이 최고이며, 내 방식이 모든 일의 최선이라고 여기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느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말입니다.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오히려 이타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지시길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성장의 기폭제이자, 성숙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또한 그는 철저히 자신의 잘못과 죄를 통회 자복합니다.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26절 하)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된 것입니다. 후일 (43장 이후) 그가 형제들 가운데서 실질적인 장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말입니다.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창43:8,9)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창44:32,33)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잘못과 죄를 철저히 통회 자복하고 있습니까? 명심하십시오. 철저히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기꺼이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6:5)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5:8)
* 이스라엘의 왕적 계보를 열어가라!
“유다는 사자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9,10)
우리는 본문을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비록 허물 많고 실수 잦은 유다할지라도, 하나님은 끝까지 붙드심으로써 결국 그를 변화시키사 실질적인 장자권자로 세워 나가셨습니다. 또한 그를 통해 이스라엘의 왕적 계보를 열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혈통을 통해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9,10)
참고로, 여기서 ‘규’나 ‘통치자의 지팡이’는 왕권이나 통치권을 상징하는 것들로써, 이는 모두 유다의 후손들이 정통적인 왕권을 계승해 나갈 것을, ‘실로’는 장차 유다 지파를 통해 오실 ‘메시야’,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각각 의미합니다.
혹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허물 많고 실수 잦은 불완전한 존재입니까? 그렇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용기를 가지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끝까지 붙드셔서 결국 변화시키시며 하나님의 멋진 사람들로 세워 나가실 그 하나님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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