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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사랑은 두 팔로!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이 있습니다. 드라마 전원일기로 전 국민의 어머니가 된 배우 김혜자씨가 쓴 책으로, 그녀는 이 책에서 지난 10여 년 동안 전쟁과 가난 속에서 고통 받는 세계의 수많은 나라의 아이들과의 만남을 기록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종은 누가 그걸 울리기 전에는 종이 아니다. 노래는 누가 그걸 부르기 전에는 노래가 아니다. 사랑은 주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이 꽤 인상 깊이 남습니다.
특히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복음을 묵상하면서 더더욱 “사랑은 주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과 굶주림에 지친 아이를 두 팔로 안고 있는 김혜자씨의 사진들이 떠오르며 ‘사랑은 저렇게 두 팔로 하는 거야’라는 생각과 함께 아직까지 머리에만 머물고, 입술에만 맴돌고 있는 사랑뿐인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고도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사제와 레위인은 모른 채 지나가 버리고,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받던 사마리아인은 정성을 다해 사랑을 베풀었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는 결국 사랑은 ‘아는 것,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함’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아무리 ‘사랑’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잘 이야기 한다하더라도 베풀기 전에는, 두 팔로 옮기기 전에는 그것을 진정 사랑이라고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성당에 열심히 다니던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천국문 앞에서 그를 맞이하며, ‘당신이 살 집으로 안내하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가는 길 양옆으로는 너무나 아름다운 집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기대에 차서 베드로 사도를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도 베드로사도가 멈출 기색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베드로 사도는 다 쓰러져가는 판자집 앞에 멈춰 서서 그 사람에게 말합니다. “이곳이 당신이 살 집입니다.” 그 사람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아니, 지나온 길에 아름다운 집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왜 나를 이런 곳에 살게 하는 거죠?” 그러자 베드로 사도가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뭔가를 오해하셨군요. 이곳 천국에서는 당신이 지상에 살 때 올려 보낸 재료만을 갖고 집을 짓는답니다.”
세례 받고 성당에 열심히 다녔다고 해서 무조건 하늘나라의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받아 하늘나라에서 행복할 수 있는 비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 27)
사랑이시며, 그 사랑을 몸소 실천하심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셨던 주님을 닮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복음에 나오는 사제, 레위인과 다를 게 뭐 있겠습니까?
어느 시인이 말했습니다. “서로를 안아주라고, 신은 우리에게 두 팔을 주었다.” 그렇게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안아줄 수 있는 두 팔이 있음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잊지 말고 실천하도록 합시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 37)
아멘.
영성체의 효과
(가톨릭 교회 교리서)
1391 영성체는 우리와 그리스도의 일치를 증진시켜 준다.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얻는 주요한 효과는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 6,56).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의 토대는 성찬의 잔치에 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57).
신자들이 주님의 축일에 성자의 몸을 받을 때, 그들은 천사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살아나셨다!” 하고 말했던 것처럼, 생명의 보증을 받았다는 기쁜 소식을 서로 선포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사람에게는 생명과 부활이 주어진다.229)
1392 물질적 양식이 육체에 효과를 가져오는 것처럼, 영성체는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의 영적인 생명에 그 효과를 가져온다. “성령 안에서 생명을 얻고, 또 성령 안에서 생명을 주는”230)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살을 받아 먹는 영성체는 세례성사 때 받은 은총의 생명을 보존하고 성장시키고 새롭게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죽을 때까지 나그넷길의 양식인 성체로 양분을 받아야 하며, 우리가 죽을 때에는 이 양식을 노자로 받게 된다.
1393 영성체는 우리를 죄에서 떼어 놓는다. 영성체로 받아 모시는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것이며, 우리가 마시는 피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는 동시에, 우리가 전에 지은 죄를 정화하고 앞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준다.
우리는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선포합니다.231) 우리가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은 곧 죄의 용서를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가 흐를 때마다 그것은 죄의 용서를 위하여 흐르는 것이니, 나는 그리스도께서 늘 내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언제나 그분을 받아 모셔야 합니다. 늘 죄를 짓는 나는 이 약을 언제나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232)
1394 육체의 음식이 잃어버린 기력을 회복시키듯이, 성체는 일상 생활에서 약해져 가는 사랑을 북돋아 준다. 그리고 이처럼 생기를 되찾은 사랑은 소죄를 없애 준다.23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의 사랑을 되살아나게 하시고, 피조물에 대한 그릇된 애착을 끊고 당신 안에 뿌리내리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미사 성제 중에 그분의 죽음을 기념할 때, 성령께서 오시어 우리 안에 사랑을 부어 넣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그 사랑으로, 우리가 성령의 은총을 받아, 우리에게는 세상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으로 되고, 우리도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기를 청합니다.……사랑의 선물을 받은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고 하느님을 위해서 삽시다.234)
1395 성체성사는 우리 안에서 불러일으키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미래의 죽을 죄에서 보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와 우정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죽을 죄를 지어 그분과 관계를 단절하기는 어렵게 된다. 그러나 성체성사는 죽을 죄를 용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죽을 죄의 용서는 오로지 고해성사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성체성사의 특징은 그것이 교회와 완전하게 일치되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성사라는 점이다.
1396 신비체의 일치: 성찬례는 교회를 이룬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더욱 긴밀하게 결합된다. 이로써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신자를 결합시켜 하나의 몸, 곧 교회를 이루신다. 영성체는 세례로써 이미 교회와 이룬 이 결합을 새롭게 하고, 굳건하게 하며, 깊게 한다. 세례 때 우리는 한 몸을 이루라는235) 부름을 받았다. 성찬례는 이 부름을 이행한다. “우리가 감사를 드리면서 그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1고린 10,16-17).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신비체이고 지체라면, 주님의 식탁에 놓여 있는 것은 여러분의 성사이므로 여러분의 성사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는 것에 대해 “아멘.”(“예, 그렇습니다.”)이라고 대답하고, 거기에 동의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에 “아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그대의 ‘아멘’이 진실한 것이 되게 하십시오.236)
1397 성체성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투신하게 한다.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참되게 받기 위해서는 그분의 형제들인 가장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아야 한다.237)
그대는 주님의 피를 맛보았으면서도 그대의 형제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이 식탁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그대의 음식을 함께 나눌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여, 바로 이 식탁 자체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대를 모든 죄에서 구해 주시고 이 식탁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더 자비로워지지 않았습니다.238)
1398 성체성사와 그리스도인의 일치. 이 신비의 위대함 앞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외친다. “오, 신앙의 성사여, 오, 일치의 표지여, 오, 사랑의 끈이여!”239) 주님의 식탁에 함께 참여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교회의 분열이 더 고통스럽게 느껴질수록,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날이 다시 오도록 주님께 드리는 기도는 더욱 간절해진다.
1399 가톨릭 교회와 온전하게 일치되어 있지 않은 동방 교회들도 크나큰 사랑으로 성찬례를 거행한다. “동방 교회들은 비록 (가톨릭 교회와) 갈라져 있지만 참된 성사들을 보존하고 있다. 특히 사도 계승의 힘으로 사제직과 성찬례를 지니고 있어 아직도 우리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240) 따라서 “적절한 기회에 교회 권위의 승인을 받아 이루어지는 어떤 성사 교류는 가능할 뿐만 아니라 권장되는 것이다.”241)
1400 종교 개혁으로 가톨릭 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교단들은 “특히 성품성사의 결여로 성찬 신비 본연의 완전한 실체를 보존하지 못하였다.”242) 이러한 이유로 가톨릭 교회는 이들 교단들과 성찬례 공동 거행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교단들도 “성찬식에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면서, 그리스도와 이루는 친교로 생명을 얻는다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243)
1401 교구장의 판단에 따라 절박한 필요성이 생겼을 때, 가톨릭 성직자들은 가톨릭 교회와 온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지 않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사(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를 베풀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진하여 성사를 청해야 한다. 곧 이 성사들에 대하여 가톨릭적 신앙을 표명하고 올바른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244)
주석
229. 「안티오키아의 시리아 성무일도」, 축일 성무일도 제1권(모술 1886), 237a-b면.
230. 사제 생활 교령, 5항 참조.
231. 1고린 11,26 참조.
232. 성 암브로시오, 「성사론」, 4, 28: CSEL 73, 57-58(PL 16, 446).
233. 트리엔트 공의회, 제13회기, 「성체성사 교령」, c. 2: DS 1638 참조.
234. 루스페의 성 풀젠시우스, 「파비아누스 행적 논박」, 28, 17: CCL 91A, 813-814(PL 65, 789).
235. 1고린 12,13 참조.
236. 성 아우구스티노, 「설교집」, 272: PL 38, 1247.
237. 마태 25,40 참조.
238.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고린토 1서 강론」, 27, 5: PG 61, 230.
239. 성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26, 13: CCL 36, 266(PL 35, 1613). 전례 헌장, 47항 참조.
240. 일치 교령, 15항.
241. 일치 교령, 15항. 교회법 제844조 3항 참조.
242. 일치 교령, 22항.
243. 일치 교령, 22항.
244. 교회법 제844조 4항 참조.
골고타에 오르시다
('성심의 메시지' 중에서, 가톨릭출판사)
사랑하는 영혼들아!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으로 가는 나를 따라 오너라. 영원한 멸망의 낭떠러지에 떨어진 유다 때문에 나의 마음은 근심과 아픔의 바다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악한 무리들은 이러한 나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미 으스러진 내 어깨 위에 그 무거운 십자가를 올려 놓았다. 동정심도 없는 그들이 어떻게 이 세상을 구속(救贖)하는 십자가의 신비한 이치를 알기야 하겠느냐?
천상의 천사들아! 나를 보아라.
신비한 우주와 삼라만상의 조물주이며, 너희 천사들이 끊임없이 흠숭하는 하느님의 아들이 마지막 숨을 거두실 이 거룩한 십자나무를 지고 골고타에 오르고 있는 나를 보아라.
나를 본받으려는 충실한 영혼들아!
너희들도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에 오르고 있는 나를 묵상하여라. 혹독한 고문을 받아, 깨어지고 찢어진 내 몸에서 피와 땀이 흐르고 있다. 기진 맥진하여 발걸음조차 옮기기 힘든 나를 바라보아라.
고통 중에 신음하는 나를 동정하는 영혼들이 하나도 보이질 않는구나. 이 악한 무리들은 나를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나를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리는 이리떼 같구나. 기력이 쇠진하여, 그 무거운 십자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넘어진 나를 난폭하게 일으켜 세우는 이 무정한 악도들을 보아라. 어떤 자는 내 팔을 잡아끌고, 어떤 자는 상처에 들어붙어 있던 내 옷을 잡아당기고, 어떤 자는 내 목을, 또 어떤 자는 나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뽑을 듯이 잡아당기는구나. 어디 그뿐이랴. 나에게 주먹질에다 발길질까지 한다.
무거운 십자가는 나를 심하게 찍어누르고.... 찢어지고 갈라진 내 얼굴, 흐르는 피는 모래먼지 바람에 섞여 내 얼굴과 눈 위에 말라붙는다. 이 몰골을 어찌 사람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느냐?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었다.
성모님을 만나시다
나를 따라오너라. 몇 걸음만 가면 조금 떨어진 곳에 나의 어머니께서 서 계실 것이다. 고통의 칼에 마음이 찔리신 나의 어머니께서 내 앞으로 다가오신다. 오시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느님께 인내하는 힘을 얻어 나에게 주시려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제지하는 악의 무리들을 뿌리치시고, 나에게로 오시어 당신 아들에게 구속 사업(救贖事業)을 완성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기 위해서였다.
내 어머니의 마음의 상처가 어떠하셨겠는지 상상해 보아라. 어느 누구보다도 나를 끔찍이 사랑하시는 어머니이시다. 어머니께서 내게 오셨어도, 나에게 위로의 말씀도 건네시지 못하시고, 도리어 내가 더 고통스러워 할 것을 잘 알고 계신 어머니이시다. 나 역시 어머니에게 위로 드리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과 똑같은 고통을 어머니께 드리고 있구나. 오! 나는 육신의 죽음을 당하지만, 나의 어머니께서는 마음의 죽음을 당하고 계신다.
나의 눈은 나의 어머니를 응시하고, 나의 어머니는 나를 응시하고 계신다.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이런 비참한 만남 중에, 나와 나의 어머니의 마음간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아느냐?
실제로 나의 어머니께서는 하느님께서 나의 어머니께 계시하셨던 나의 고난과 나에게 가해졌던 형벌에 함께 참여하셨다. 나에게 사형이 언도되자 나의 제자들 중 대부분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멀리 도망갔지만, 나의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나를 만나러 오셨으며, 내가 십자가에서 운명하여 무덤에 묻힐 때까지, 한시도 나를 떠나지 않으셨다.
파티마에서의 성체 기도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 성부, 성자, 성령이시여, 깊히 흠숭드리나이다. 전 세계의 모든 감실들 안에 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귀하신 몸과 피와 영혼과 신성을 주님께 대한 모욕과 독성과 무관심에 대한 보속으로 당신께 바쳐드리나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과 티없으신 성모 성심의 무한하신 공로에 의지하여 불쌍한 죄인들의 회개를 비나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여, 당신을 흠숭하나이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성체 성사 안에 계신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체 찬미가
엎디어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삽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
십자가 위에서는 신성을 감추시고
여기서는 인성마저 아니 보이시나
저는 신성, 인성을 둘 다 믿어 고백하며
뉘우치던 저 강도의 기도 올리나이다.
토마스처럼 그 상처를 보지는 못하여도
저의 하느님이심을 믿어 의심 않사오니
언제나 주님을 더욱더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사여.
사람에게 생명 주는 살아있는 빵이여,
제 영혼 당신으로 살아가고
언제나 그 단맛을 느끼게 하소서.
사랑 깊은 펠리칸, 주 예수님.
더러운 저, 당신 피로 씻어주소서.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해내시리이다.
예수님, 지금은 가려져 계시오나
이렇듯 애타게 간구하오니
언젠가 드러내실 주님 얼굴 마주 뵙고
주님 영광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아멘.
란치아노에서의 성체 기적
[신앙, 과학 그리고 신자들의 신심]
성체께 대한 신심이 깊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보고 싶은 곳이 바로 이태리의 란치아노일 것이다. 끼에띠 부근의 란치아노는 고대에는 안싸눔이라고 알려졌었다. 그 곳은 역사상 첫 번 째의 성체 기적이 일어난 곳이다. 다음은 그 기적에 대한 이야기이다.
성체 기적이 일어났던 다른 곳들, 즉 볼세나, 시에나, 페라라 등과 더불어 란치아노는 이태리 및 전 세계에서 아주 중요한 성지이다. 란치아노가 속해있는 아브루찌 지방은 지금까지 많은 성인들을 배출했으며 성지들도 많이 위치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 그러니까 8세기 중의 어느 날 아침, 성 바실리오회 소속의 한 수사 신부가 미사를 드리면서 예수님께서 성체성사에 실제로 현존하심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 신부가 막 빵과 포도주의 성변화를 위한 축성을 끝낸 순간, 그는 갑자기 면병이 살아있는 살로 변하며 포도주의 외양이 살아있는 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너무나 놀란 신부는 이 사실을 숨길 수 없어서 미사에 참석한 이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곧 뛰쳐나가서 이 소식을 란치아노시 전체와 인근 지방들에 알렸다.
이 기적이 일어난 성당은 성 론지누스에게 봉헌된 초라한 시골 성당이었다. 성 론지누스는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던 로마군의 백부장이었다. 이 곳에서 일어난 역사상 최대의 성체 기적은 성체 성사에서의 예수님의 현존에 대하여 한 수사 신부가 가졌던 의심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셨다.
역사상의 여건들에 따라 때로는 이 성체 기적에 대한 관심이 덜한 때도 있었지만, 란치아노의 신자들은 그 기적의 진실성에 대하여 굳게 믿어오고 있다. 외양이 변화된 성체를 너무나 조심하여 깊숙히 보관해온 것이 아마도 이렇게 오랫 동안 그 놀라운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주요 이유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동방 가톨릭 교회에 속하는 바실리오회의 수사들은 이 성당에서 1176년까지 봉사하였다. 그 후에는 분도회 수사들이 와있었고, 1252년에는 끼에띠의 란둘프 주교가 작은 꼰벤뚜알 회에 그 성당을 맡겼고 지금까지도 그 회가 맡고 있다. 1258년에 성당은 고틱식으로 완전히 재건되었으며 성 프란시스 성당이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다. 1700년에 다시 바로크 형식으로 개조되어서 오늘까지 유지되어오고 있다.
기적의 성체는 처음에는 성당 앞 부분의 큰 제대 옆에 위치한 소성당에 보존되었었으나, 1636년에 성당 가운데 옆에 있는 소성당으로 옮겨졌다. 1902년부터는 새로 만들어진 기념 제대 위에 보존되고 있다. 순례자들은 두 줄의 대리석 계단을 올라가서 이 기적의 성체를 공경할 수 있다.
12 세기가 지난 지금, 살 모양으로 변한 성체는 붉으스럼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오래된 수정 성작 안에 담겨있는 성혈은 다섯 개의 불규칙한 형상을 한 피덩이로 되어 있다. 전체 무게는 16.5 그램이다. 얼른 보면 빛이 바랜 것 같은데, 밝게 하여 보면 황토색 비슷한 자연적인 색갈을 볼 수 있다.
이 기적에 대한 소식은 널리 퍼져나갔으며, 1971년에는 과학적 검사에 이어 장엄한 공인이 있었다. 1574년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서 관할 주교들에 의한 인정이 있었으나, 1970년과 1971년에 해부학, 병리 조직학, 화학, 및 임상 현미경학 교수이며 아레쪼(Arezzo) 병원의 수석 의사였던 오도아르도 리놀리(Odoardo Linoli)가 성 프란시스 성당을 맡고 있던 프란치스꼬회 수사 신부들의 요청에 따라 기적의 성체와 성혈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조사를 시행하였다.
검사는 두 단계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리놀리 교수가 기적의 성체와 성혈의 샘플을 채취하여 아레쪼 병원의 실험실에서 검사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리놀리 교수가 완료된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과학적인 보고서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샘플이 채취된 것은 1970년 11월 18일이었는데, 란치아노의 페란또니 대주교가 참석하였다. 아브루찌 지방의 꼰벤뚜알회 및 성 프란시스 성당을 관리하는 수도회 전체가 페란또니 대주교의 관할 하에 있었다.
오전 10시 15분에 대주교는 그의 선임자였던 프란시스 페뜨라르까 주교에 의한 1886년의 봉합을 깨어 열었다. 교수는 성체로부터 20 밀리그램 정도의 아주 작은 두 개의 샘플을 채취했으며, 성혈로부터는 318 밀리그램을 채취하였다. 리놀리 교수는 거의 3 개월에 걸쳐서 그 샘플들을 조사하였다. 그는 검사 기간 동안 시에나 대학교의 인체 해부학 교수였던 유명한 로져 베르텔리 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1971년 3월 4일, 성체 기적이 일어났던 그 성당에 수많은 학자들이 모였으며, 그 곳에서 리놀리 교수는 그의 분석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의 구두 설명과 더불어 수많은 사진들과 문서들이 제시되었다. 다음이 그의 발표 내용의 요약이다.
1. 성체 기적의 피는 참으로 피이며, 살은 참으로 살이다.
2. 그 살은 심장 근육이다.
3. 그 살과 피는 인간의 살과 피이다.
4. 피와 살의 혈액형은 동일하다. 이것은 그 피와 살이 동일인으로부터 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혈액형이 같은 두 사람으로부터 왔을 수도 있다.
5. 피 안에는 정상적인 피에서와 같은 정상적인 비율의 단백질들이 발견되었다.
6. 피에서는 또한 다음의 무기물들이 발견되었다. 염화물, 인, 마그네시움, 칼륨, 정상보다 약간 적은 양의 나트륨, 그리고 정상보다 많은 양의 칼슘.
교수는 다음의 설명을 덧붙였다.
a. 이 살이 인간의 심장으로부터 해부적으로 잘라온 것일 가능성은 전무하다.
b. 그 살과 피를 보존하기 위하여 화학적인 방부 조처를 취한 흔적은 없다.
c. 그러므로, 그 살과 피 안의 단백질과 무기물들이 대기와 미생물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부패되지 않고 보존된 것은 절대적으로 예외적인 현상이다.
리놀리 교수의 과학적 조사는 여러 주요 의학 잡지들에 보도되었다. 그리고 성지, 즉 성 프란시스 성당에서 발간되는 책자에도 실렸다. 그리하여 이태리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과학자들 사이에 광범위한 지지를 계속하여 받고 있다.
1973년에 이태리의 의사이며 생물학자인 요셉 비온디니(Joseph Biondini) 교수는 그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세계 건강 기구(WHO: World Health Organization)에 리놀리 교수의 검사 결과를 제출하였다. 세계 건강 기구는 이 보고서의 특별한 중요성을 인식하여 일곱 나라들로부터의 전문가들로 하여금 리놀리 교수의 분석 결과를 조사하도록 위임하였다. 그것은 리놀리 교수의 정직성이라든가 과학자로서의 능력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그의 결론이 과학에 대하여 가지는 극히 중요한 의미 때문이었다.
핵의학 등 최첨단의 기술이 동원되었던 15 개월 간의 연구 끝에 그 국제적인 과학 위원회는 리놀리 교수의 결론들을 완전히 확인하였다. 그들의 보고서는 세계 건강 기구의 공식 출판물들에 실을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 UN 산하의 그 과학자들은 란치아노의 성체 기적이 "유레가 없는 케이스"이며,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단정적으로 선언하였다. 신앙의 신비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란치아노에서의 성체 기적에 대한 과학적 조사가 신학과 영성에 관하여 지니는 중요성은 별도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에 관한 요점들은 란치아노의 성지에 몰려드는 순례자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기적의 성체와 대면할 때, "깊은 경외의 감정과 신심"(교황 바오로 6세) 및 가장 편견을 가진 이들까지도 끌어당기는 힘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과학적 인증이 있은 이래, 더욱 많은 순례자들이 란치아노를 찾아왔다. 1978년에는 이태리에서만 700개 이상의 순례단이 방문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1,000개가 넘었으며, 매일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그리고 그 숫자는 증가하고 있다. 이태리 전부가 란치아노에 와있는 것 같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와 북미에서도 많은 순례자들이 오고 있다. "란치아노에서의 성체 기적" 책자는 거듭하여 재판되고 있으며, 이태리어 원본이 그 동안 영어, 불어, 독어, 스페인어, 폴튜갈어, 그리고 필리핀 섬들의 언어인 타가록어로 번역되었다.
란치아노의 기적의 성체 앞에서 온갖 민족과 문화와 사회적 신분의 사람들이 깊은 성체 신심을 표시하고 있다. 란치아노에서의 성체 기적은 주님께서 교회에 주시는 귀중한 선물이며,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신비의 징표이며, 우리 신앙 상태를 반성해보라고 하는 주님의 부르심이다.
1974년 11월 3일 오전에 폴랜드의 고위 성직자들이 란치아노의 성지를 방문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되신 와틸라 추기경도 있었다. 그는 오랜 기도 속의 순례 끝에 방명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Fac nos tibi semper magis credete, in te spem habere, te diligere"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더욱더 당신을 믿고, 당신 안에서 희망하고,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Adore Te Devote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다
('성심의 메시지' 중에서, 가톨릭출판사)
내가 바리빠 보다 더 악랄한 죄수로 취급받았을 때에, 순수하고 부드러운 나의 성심이 받은 치명적인 손상에 대해 잠시 묵상하여라.
나의 어머니께서 당신 가슴에 나를 포근하게 품어 주셨던 사랑과 나의 양아버지께서 나를 양육하시느라 고생하시고, 지쳐 기진맥진하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나에게 손가락질하며,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는 백성들에게 내가 베풀어주었던 은혜가 생각났다.
소경을 눈뜨게 하고, 병자를 낫게 해주었으며, 앉은뱅이를 다시 걸을 수 있게 해주었다. 어디 그 뿐이랴, 광야에 모인 수 천명의 군중에게 음식을 주었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다시 소생하게 해 주었는데.....
지금은 범죄자로 취급을 당하는 비천한 처지에 몰려, 이제껏 받아본 적이 없는 미움의 대상이 되었구나. 게다가 이름난 도둑과 함께 사형 당할 운명에 처하게 되다니! 드디어 빌라도는 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사랑하는 영혼들아!
너희들만이라도 내 마음의 찢어지는 고통을 깊이 헤아려 다오.
유다의 양심 가책과 죽음
유다는 나를 팔아 넘긴 후에, 그가 저지른 끔찍한 독성죄(瀆聖罪)를 꾸짖는 양심소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도망치듯 올리브 산에 물러 나와 이리저리 방황하였다. 그리고 내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다 못해,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나를 따라다니면서 사랑을 배우고 오랬동안 나와 함께 생활하던 유다! 나의 가르침을 듣고,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배운 유다! 극악무도한 죄인도 용서하겠다는 말을 내 입으로부터 직접 들은 유다의 영혼이 영원히 구제될 수 없는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죽는 것을 보았을 때, 나의 마음은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그 어느 누가 이 참담한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이냐?
아! 유다야, 왜 내 앞에 나타나 용서해 달라고 빌지 않았느냐?
광기에 미쳐 날뛰는 무리 속을 헤집고 나에게 다가오기가 무서웠다면, 나를 바라보기만 했어도 되지 않았느냐? 나의 눈길이 항상 너를 향하여 있었으므로, 네가 나를 쳐다보기만 했어도, 너는 내 자비와 용서의 눈길을 만날 수 있지 않았겠느냐?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불행한 영혼들아!
지은 죄 때문에 도피생활하며 방황하는 영혼들아!
너희가 지은 죄 때문에 영혼의 눈이 멀어, 나를 바라볼 수 없을지라도, 절대로 낙심하거나 자포 자기하지 말아라. 또 너희 성정(性情)이 연약하여 탈선하였을지라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너희를 죄악에 빠지도록 유도한 공범자가 너희를 버려 두고 떠나 버렸기 때문에, 너희들만이 그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을 때에도, 절대로 좌절하지 말아라.
이 세상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한, 언제든지 인자하신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한때 너희가 젊은 혈기로 올바르지 못하게 생활한 결과로 지금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을지라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라. 세상 사람들은 너희를 죄인 취급하여, 모욕하고 멀리하겠지만, 인자하신 하느님께서는 너희 영혼들이 지옥불의 밥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든지 너희들을 용서하시며, 너희들이 하느님께 가까이 오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신다.
너희들이 감희 하느님께 말씀드릴 용기가 나지 않으면, 너희들의 뉘우치는 한숨 소리라도 하느님께 올려드려라. 그러면 너희를 용서하시고, 너희를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접하게 될 것이다.
너희 영혼들 중 일부가 한 때의 반항심 때문에 고의적인 악행을 일삼다가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럴 때에 너희 영혼들은 절대로 자포 자기하여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스스로 포기한다면,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그르치는 일이 된다.
너희들 중 어느 한 영혼이 삶의 진정한 의미도 모른 채 타락한 생활로 일생을 허송 생활하다가, 이웃과 사회에 큰 화를 끼친 후에, 비로소 자기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 하자.
이럴 때 너희 영혼들은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미 저지른 죄이상으로 깊이 뉘우치고, 너희들이 뉘우치도록 배려하시며, 용서해 주시려고 대기하고 계시는 하느님께 굳은 신뢰심을 가지고 다가가거라.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초기에는 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다가, 점차 편한 생활의 타성에 빠져 나에게 냉정한 영혼들이 들으라고 한 소리이다.
사랑하는 영혼들아!
어서 분발하여라. 타성에 젖어 몽롱한 상태에 있는 영혼들을 깨워, 나에게 데리고 오너라. 그래야만 이 영혼들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들의 생활이 영원한 삶을 얻는데 헛되고 무익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악의 세력들은 너희 영혼을 시기 질투하여, 별의 별 수단을 다 동원하여 습격한다. 너희 영혼 속에 침투하여, 좌절과 공포와 혼란으로 너희 영혼을 쇠약하게 하고 병들게 한다. 또한 영혼들의 잘못을 과대 포장하여, 그들이 두려움과 실의에 빠지게 한다.
나의 슬하에 있는 영혼들아!
저 악랄한 악마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은총을 베풀어, 너희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 경보를 울려 줄 터이니, 악의 세력과 싸움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나의 성심 안으로 돌아오너라.
그리고 너희 영혼 위에 나의 성혈 한 방울 만이라도 떨어뜨려 달라고 나에게 간청하여라. 어서 나에게 달려오너라. 신앙의 장막으로 가려진 곳에 내가 있다는 것을 너희는 알고 있지 않느냐?
어서 나의 장막 안으로 들어와, 나를 완전히 신뢰하는 마음으로 너희들 허물과 가련함을 나에게 아뢰어라.
내가 너희들에게 하는 말을 겸허한 마음으로 경청할 것이며, 너희가 과거에 저지른 죄에 대하여 혹시 내가 문책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지마라. 나의 마음은 너희들의 잘못된 과거 삶을 내 사랑 바다에 잠기게 하겠으며, 너희는 너희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겸손해지고, 한층 더 노력하여 정진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너희 영혼들이 나를 더욱 사랑하려면, 나에게 용서를 빌고, 너희들의 지은 죄보다 나의 자비가 한량없이 넓다는 사실을 믿고 의지하여야 한다. 나의 자비는 너희 모든 영혼들의 허물을 모두 감싸 안고도 남을 만큼 무한히 넓다.
사랑하는 영혼들아!
너희들은 내 사랑의 바다 속에 너희 영혼을 담그고, 많은 영혼들이 나의 마음을 알수 있게 해달라고 아버지께 기도드려라.
감옥에 갇히신 예수
('성심의 메시지' 중에서, 가톨릭출판사)
감옥에 갇혀있는 나를 생각하여라.
나는 감옥 안에서 온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병사들은 말과 행동으로 나를 조롱하고, 번갈아 가며 나에게 매질을 가하였다. 그리고는 나를 묶여 있는 상태로 더럽고 악취 나는 구석으로 쳐밀었다. 차가운 돌 위에 몸을 기대고 있을 때 추위와 아픔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감옥에 갇혀 있던 상황과 지금 감실 안에 포로가 되어 있는 사정을 비교해 보자. 그리고 감옥에 있을 때 나를 학대하고 조롱하던 자들과, 나를 영하면서도 나를 냉대하는 영혼들을 비교해 보자. 감옥에 갇혀 있는 시간은 단 하루 밤이었다. 그러나 감실에 갇혀있는 시간은 성체성사를 세운 후 지금까지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감옥에 있을 때도 사악한 인간들로부터 온갖 조롱과 학대를 당하더니 지금은 나를 사랑한다고 자처하며, 나를 영하는 영혼들로부터 참기 어려운 냉대와 배신을 당하고 있다. 이런 일이 얼마나 비일 비재한 줄 아느냐?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는 추위와 상처의 통증, 허기와 갈증, 그들에게 당한 창피, 그리고 외로움과 망각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와 못지 않게 이 감실 안에서 여러 세기가 흐른 지금까지 수많은 영혼들로부터 사랑과 애정을 받지도 못한 채,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감실에 갇혀있다. 돌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얼음덩이 같은 마음을 가진 수많은 영혼들을 보았다.
내가 사랑을 받지 못하여 갈증을 느끼고, 사랑을 섭취하지 못하여 허기져 있던 때가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영혼들이 나를 찾아와 주기를 학수고대하며, 앞으로도 얼마나 긴 세월을 보내야 할까?
영혼들이 언제쯤 나를 찾아와, 이 목마름과 배고픔을 풀어줄 것인지.... 설사 영혼들이 나를 찾아왔더라도, 그들은 나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어떻게 해야 해결해 줄 수 있는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구나.
내가 괴로워할 때에, "당신의 고통과 근심을 덜어 드리기 위해 당신께 저희 희생과 노고를 바칩니다." 라고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내가 외로워할 때, "당신의 짝이 되어, 당신의 외로움을 덜어들이겠습니다."라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줄이나 알고 있는가?
너희 영혼들이 나와 결합하면, 평화로운 가운데 자신들의 고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으며, 용감하게 역경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너희 영혼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고통을 이겨낼수록, 나의 마음은 큰 위로를 받는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사악한 그들이 나에게 퍼부어 댄 악담과 조롱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으며, 훗날 내가 끔찍히 아끼고 사랑하는 영혼들의 입에서 그와 똑같은 악담이 흘러나올 것을 미리 내다보고 참혹한 심정이었다. 그 당시 병사들에게 계속 매질을 당하면서, 많은 영혼들이 통회하지 않고 나의 성체를 영하며, 상습적으로 죄를 범하여 나의 마음에 잔혹하게 매질하리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병사들이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자, 이미 기력이 다해 나뒹구는 나를 아무도 붙잡아 주지 않았다. 지금은 배은 망덕의 사슬로 나를 묶어 땅바닥에 패대기 쳐놓은 다음, 나를 외롭고 적적한 상태로 방치하는 영혼들을 본다. 그 창피함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느냐?
선택받은 영혼들아!
감옥에 있다가 지금은 감실에 갇혀 있는 너희 짝을 바라보아라. 외롭고 비참한 밤 사이에 내가 이 적막한 감실 안에서 너희들로부터 냉대를 받고 서러워하고 있다. 언제까지 나를 냉정하게 방치해 두려느냐? 값싼 동정이라도 주겠느냐?
어서 너희 마음의 문을 열고 나를 반갑게 맞이하여 다오. 어서 너희 마음 안에 나의 거처를 마련해 다오. 그리고, 너희 사랑의 사슬로 너와 나를 한데 묶어 다오. 너희 애정으로 나를 덮어 다오. 너희들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의 주린 배를 채워다오. 뜨거운 마음으로 나를 마셔다오. 끊임없이 나를 찾아와 근심과 고통에 젖어 있는 나를 위로해 다오.
사랑하는 영혼들아!
너희들의 정결과 올바른 의지로 내가 수많은 영혼들로부터 받은 수치를 없애다오. 내가 너희 안에 쉬고 싶어하면, 너희들의 거칠고 산란한 욕정을 눌러 제거하여라. 나는 고요해 진 너희 영혼 안에서 휴식을 취하겠다. 이 때에 너희 영혼들은 "나를 위해 너희 자신을 희생한 것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게 해주겠다. 너희가 나를 사랑으로 보살피고, 너희 마음 한 가운데 머물게 하였으니, 나도 너희에게 무한한 포상을 내려 주겠다. 너희가 나의 쉼터가 되어 주었으니, 나도 너희들이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쉼터가 되어 주겠다." 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성심의 메시지' 중에서, 가톨릭출판사)
우리 문제에 깔린 하느님의 뜻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우리를 쓰러뜨리거나 진보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우리가 문제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겪게 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선을 이루시는 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 문제들이 가져 온 유익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조차 갖지 못하고 단지 부딪힌 문제들에 대해서 만 화를 낼뿐이다.
여기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삶을 세우기 위해 문제들을 어떻게 이용하시는 지 다섯가지 대답이 있다.
1. 하느님께서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신다
때때로 하느님께서는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불을 밝혀주신다. 문제들은 종종 우리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고, 방향 전환의 계기를 제공한다. 하느님께서는 문제를 통해 당신의 주의를 끌려고 애쓰고 계실 것이다.
"깊은 상처는 악을 씻고 매질은 배 속 깊은 곳을 씻는다." (잠언 20,30)
2. 하느님께서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관찰하신다
사람들은 차봉지와 같다. 만약 당신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 지 알고 싶다면, 그냥 뜨거운 물에 넣어보면 된다. 하느님께서 문제를 통해 당신의 신앙을 시험하신 적이 있는가? 그때 당신은 어떤 모습을 드러내었는가?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야고보 1,2-3)
3. 하느님께서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교정하신다
어떤 교훈은 고통과 실패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어린 자녀가 뜨거운 난로는 만지면 안 된다는 부모님의 말을 듣고도 실제로 만져보고 데인 후에야 그 말의 뜻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때로 우리는 건강, 돈, 인간관계 등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깨닫는다.
"제가 고통을 겪은 것은 좋은 일이니 당신의 법령을 배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당신 입에서 나온 가르침이 좋습니다. 수천의 금과 은보다 좋습니다." (시편 119,71-72)
4. 하느님께서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만약 어떤 문제가 좀더 심각한 다른 문제 때문에 상처받는 것을 막아 준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될 수 있다. 지난 해에 한 친구는 그의 사장이 시킨 비윤리적인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 그의 실직은 분명히 하나의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일년 후에 비리를 통해 회사가 운영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에는, 그 일로 인해서 감옥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50,20)
5. 하느님께서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완전하게 만드신다
문제들이 올바로 대처되었을 때에는 우리의 인격과 삶을 더욱 아름답게 다듬어준다. 하느님은 당신의 안락보다는 당신의 인생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신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로마 5,3-4)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건 모르고 있건 간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에 함께 하신다는 것이며, 또 우리가 그분과 함께 모든 일을 행할 때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