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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소
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
17.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8.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 한 그룹은 이 끝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찌며
20.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 25:16-22)
속죄소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법궤 덮개(뚜껑)은 속죄소 또는 화해의 장소, 시은좌, 긍휼의 보좌(mercy seat)인 하나님의 보좌(사 6:1)이다. 이 법궤 뚜껑에는 그룹 둘이 마주보고 날개로서 법궤를 덮고 있다(출25:20). 속죄소는 죄를 용서하는 곳 혹은 은혜를 베푸는 자리이다. 즉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사람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어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이다. 히브리어로 속죄소는 “카포레트”라고 하는데, 덮다(cover over) 또는 죄를 사하다, 화해하다, 달래다(propitiate)라는 의미이다. 헬라어로 속죄소는 “힐라스테리온”라는 단어이다.
바울이 로마서 3장 25절에서 바울은 영광의 그룹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와 함께 힐라스테리온, 즉 화해의 덮개(속죄소)를 제시한다. 로마서 3:25절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속죄소(화해의 덮개)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속죄소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영광의 그룹이 있는 속죄소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다 (출 25:22). 하나님이 속죄소에서 우리와 만나고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록, 우리는 하나님으로 주입되고 빛 비춤을 받는다.
얼굴을 화해 덮개로 향한 영광의 두 그룹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으로 인해 만족되셨음을 상징한다. 화해 덮개 위에 뿌려진 화해의 피는(레 16:14-15) 덮개 아래 있는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와 덮개 위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요구를 만족케 하여 사람의 양심에 평강을 준다. 화해 덮개 아래 우리를 드러내고 우리를 정죄하며 그 요구들을 지닌 율법과 화해 덮개 위에는 모든 것을 주시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피로 인하여 요 조건이 모두 만족되었다. 이제 우리는 피 뿌려진 화해 덮개 위에서 영광가운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구속하는 피가 뿌려진 법궤의 뚜껑으로 인하여 죄인들 편에서의 모든 상황이 다 처리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의의 율법을 깨뜨린 사람과 만나실 수 있다. 그 요구를 지닌 율법이 덮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만족되므로 하나님은 죄인들과 말씀하실 수 있고 이 죄인들은 하나님과 평강을 유지하며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화해 덮개는 은혜의 보좌이다(히 4:16).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한다(히4:16). 이 보좌는 세 가지 속성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그것들은 법궤 안에 있는 증거의 율법으로 상징된 그분의 의와, 정금으로 만든 속죄소로 상징된 그분의 거룩과, 속죄소 두 끝에 금으로 쳐서 만든 두 그룹으로 상징된 그분의 영광이다.
오직 희생제물의 피가 뿌려질 때만 만남이 이루어지는 이 보좌는 의와 영광의 속성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그것들은 궤 안에 있는 증거의 율법으로 상징된 그분의 의와, 속죄소 두 끝에 금으로 쳐서 만든 두 그룹으로 상징된 그분의 영광이다.
의
시편 89편 14절은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의는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이다. 로마서 14장 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한다. 또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세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고 말한다(마5:20). 의는 하나님의 나라의 첫째 특징이며 천국의 실재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중요한 표시이다. 베드로 후서 3장 13절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라고 말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의는 행정의 중심이며 영원히 거할 것이다. 예레미아 33장 16절은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고 말한다. 즉 의는 하나님의 나라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의의 개념은 단순히 정의(Justice)보다 더 높은 것이다. 의는 단지 사법적인 의나 법리적인 통치의 문제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강과 조화와 화목의 상태(state)를 말한다. 단지 정죄함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 평강과 조화와 화목의 상태가 존재하는지에 중점이 있다. 그것은 사법적 판정보다 상호의 평강과 조화와 화목의 관계를 더욱 중요시한다. 마태복음 5-7장 왕국 헌법에서 새 왕이신 예수님은 상호 관계를 언급한다. 그것을 서기관과 바리세인보다 더 나은 의라고 부른다(5:20). 이러한 의는 천국에 들어가는 선결조건이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자신이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 로서 난 의라고 말한다(3:9). 히브리서에서는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라고 말한다(12:11). 의는 믿는 이들이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받는다(롬 4:3). 그리고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면서 이러한 의가 그들 안에 주관적으로 조성되고 연단이 된다(롬 4:22).
이와 같은 의는 보좌의 기초이며 하나님 나라의 근본이요 하나님의 본성이다. 고린도 후서 5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신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reconcile)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권면한다(5:20, 21).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한다. 그들은 이미 객관적인 그리스도의 의를 가진 자였지만(고전 1:30, 빌 3:9), 그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주관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의가 그들의 존재 안으로 조성된 의였다.
이렇게 믿는 이들에게 조성된 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강(peace)의 결과를 가져온다. 왕국의 표현인 교회 생활의 첫째 특성은 의이고 둘째 특성은 평강이다(롬14:17). 바울은 고린도 후서에서 자신의 사역은 모세가 가진 정죄의 사역보다 뛰어난 의의 사역이라고 말한다(3:7-9). 그리고 바울은 의의 사역의 삶과 역경에 대하여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기술한다. (고후 4:8-9). 이러한 의의 사역을 통하여 자신과 하나님과 모진 환경 모두에 평강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게 하여 하나님과 똑같은 평강과 화목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게 되었다 (5:20). 결국 영원 안에서 새 예루살렘은 의의 사역의 최종 완성이 될 것이며 만유가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강의 상태를 가져올 것이다.
영광: 빛의 영역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할때 “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한다 (골1:11-13). 여기에 두 영역, “흑암의 권세”와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를 말한다. 우리는 첫째 영역에서 구출되어 둘째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 흑암의 영역은 흑암이 군림하고 흑암의 권세가 우세하는 곳이다. 반면에 빛의 영역은 그분의 아들 왕국,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말한다. 구원은 우리를 흑암의 영역에서 구출하시어 빛의 영역으로 인도하며, 그 영역 안에서 우리는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기업의 부분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 안에서 자랄 때 우리는 이 빛의 영역 안에서 자란다. 이 영역은 왕국 생활의 실제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일할 영역인 좋은 땅의 할당된 몫을 각각 받은 것처럼, 성도들도 빛의 영역 안에서 분깃을 할당받았다. 즉 그들이 뿌리를 박을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를 받았다.
성막은 사람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영역이요 또한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거하는 영역이다. 더욱이 이 영역 안에는 자연적인 빛이 없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 영역을 비춰주는 바로 그 빛이다. 영원 안에서 새 예루살렘도 특별히 해나 달의 빛이 필요 없으며 하나님 자신이 그 빛이심을 언급한다(계21:23).
요한복음15장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한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고 말씀하신다(4-8). 하나님은 사람 안에서 거주하고 사람도 또한 하나님 안에 거주함을 발견한다. 이러한 포도나무에서 우리는 신성하고도 인간적인 영역으로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고 합병된 유기체를 본다. 이 영역에 들어가는 것은 공간적인 장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한 인격 안으로 연합되고 합병되는 것이다. 이 한 인격은 물질적인 장소나 건물이 아니라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의 인격이다.
두 그룹과 함께
출애굽기 25장 18-19절은 “금으로 그룹 들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한 그룹은 이 끝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덩이로 연하게 할지며”라고 말한다. 그리고 히브리서 9장 5절은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라고 말한다. 속죄소 두 끝에 있는그룹들은 쳐서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되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이 속죄소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고난을 통하여 나타나심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룹들의 날개가 속죄소를 덮었다(출25:20)는 것은 우리가 속죄소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보호를 체험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서 표현된다는 것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신성한 생명이 어떻게 속죄소를 덮고 있으며 거룩하고 하늘에 속한 능력이 덮고 있음을 말한다.
여기 20절에서 우리는 그룹의 머리보다 그룹의 날개에 강조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룹은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라고 말하고 있다.
예표론 에서 날개는 품는 은혜와 하늘에 속한 능력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새는 그들의 알을 품어서 부화시킨다. 마찬가지고 새 생명은 재 생산되고 다시 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날개를 펼치어서 공중을 날아 감으로 모든 것을 초월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룹의 날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에서 우리를 품으시고 우리에게 능력이 되심을 계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품으심으로 우리는 은혜를 받고 우리가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감싸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기 위하여 성육신을 통하여 고난을 받으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의 교통에 참예하며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다(빌 3:10). 베드로 전서 4장 12-14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말한다. 그룹은 그들의 날개를 피고 그들의 얼굴은 서로 마주봄으로 우리의 사역을 보살핀다. 즉 성도들을 돌보거나 하늘에 속한 생명을 살도록 성도들을 인도하고 돕는 것이 우리의 사역이다. 주님과 교통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시련을 당하고 욕을 먹고 불시험을 당한다면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의 영이 우리 위에 계시는 체험을 하게 된다.
우리는 세가지 체험 – 법궤, 속죄소, 그룹-을 하고 조성되어야 한다. 우리는 은혜의 근원이 아니라 단지 통로에 불과하다. 근원은 주님 자신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분의 영광이 머무는 장소이며 간증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영광은 오직 전적으로 주님께 있는 것이다.
영광의 하나님으로 주입되고 이상으로 통제 받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걸음은 윤리나 도덕이나 헌신이나 경건이나 종교로 인해 통제 받아서는 안된다. 심지어 우리의 일상 생활이 성경만으로도 통제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 생활은 무엇으로 통제 받아야 하는가? 우리가 속죄소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때 본 이상으로 통제 받아야 한다. 잠언 29장 18절은 이상이 없는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본 이상이 우리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이상을 어디에서 받는가? 속죄소에서 이상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피로 인해 우리는 속죄소에서 영광 가운데 하나님과 만나고 교통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으로 주입되고 계시와 이상을 받는다. 이러한 주입과 이상이 우리를 움직인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상에 사로잡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