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1)
히브리서 7:1~19
히브리서 7장 전체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변증하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편지를 받는 당시의 신자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으려 하고 유대교인들이 지키는 제사 제도를 의지하려는 유혹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돌아가려고 하는 율법 준수와 유대교의 제사 제도가 불완전한 것이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완전한 대제사장이심을 변증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을 끌어들여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 시대의 멜기세덱이 구약 시대의 레위 지파 중에 아론의 후손들로 구성된 제사장 직분보다 훨씬 탁월한 분임을 증거함으로써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이심을 입증하여 당시 성도들로 하여금 사도적 복음에서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돕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저자가 이 점을 어떻게 변증하였는지를 이번 주 수요일과 다음 주 수요일 두 번에 걸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 제사장에 대한 설명부터 하고 있습니다.
1절로부터 3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멜기세덱이 성경에 처음 등장한 대목은 창세기 14장입니다. 그 당시 동방 지역의 그돌라오멜 왕이 다른 왕들과 함께 소돔과 고모라 등 여러 도시를 공격하고 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는데, 그 포로 중에 소돔 성에 살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가족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헤브론에 살던 아브라함이 듣고 자기의 훈련된 종들과 그 지역의 동맹을 맺었던 헤브론의 마므레 형제들의 군사들과 함께 하여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추격하여 대 승리를 거두고 포로들과 많은 물품들을 노획물로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왕의 계곡이라는 곳에 아브라함이 돌아오자 전쟁에서 패전한 소돔 왕과 고모라 왕들이 아브라함을 맞이하였는데, 그 때에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맞이하여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아브라함의 종들과 그의 동맹이었던 마므레 병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4:18 말씀에서 멜기세덱을 소개하기를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세기 14:18~20)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세 절의 말씀과 시편 110편 4절에 기록된 바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라는 말씀이 성경의 유일한 멜기세덱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짧은 멜기세덱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설명하는 근거로 삼아 매우 자세한 해석을 하는 것이 히브리서의 특별한 점입니다. 하지만 멜기세덱에 대한 관심이 히브리서의 저자 한 사람만의 특별한 관심사는 아니었습니다. 이후에 오랜 세월이 흘러 목동들에 의하여 유대 광야에 있는 쿰란 동굴에서 유대인들의 글들이 담긴 항아리가 발견되었을 때에 그곳에서 발견된 글들 속에는 멜기세덱에 대한 글들이 적지않게 발견되었고 신비주의적으로 멜기세덱을 해석하는 이야기들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가 멜기세덱에 대한 성경의 두 구절에서 끄집어낸 적지 않은 확장된 해석들을 여기서 펼친다 해도 그것을 생뚱맞게 생각하는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들은 별로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에 대하여 히브리서 7장 서두에서 그를 ‘의의 왕’이라고 해석하니 곧 ‘멜기세덱’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그러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멜기’는 왕이라는 뜻이요 ‘세덱’은 의로움이라는 듯입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살렘의 왕이라고 했는데, 당시 멜기세덱은 예루살렘의 왕이었습니다. 그 ‘살렘’이라는 히브리어 뜻은 ‘평강’이라는 뜻이니, 살렘 왕이란 평강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은 역시 의로우신 왕이신 메시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이라는 이름 자체가 벌써 평강의 왕이시고 의의 왕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또한 3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에 대하여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14장에서 멜기세덱에 대하여 아무런 족보도 언급이 없고 그가 아브라함과 만난 후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는 점을 들어서 멜기세덱을 인간적인 점이 감추어진 신비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항상 존재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제사장 되심을 미리 보여준 예표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그의 모친 마리아도 분명히 알려져 있지만 그의 근본적인 출생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셨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기에 그 점에서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갈 것은 멜기세덱이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일 뿐이지, 그가 아브라함 당시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당시 그는 당시 예루살렘의 왕이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당시에 멜기세덱에게 자기를 계시하시어 그를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서 일하게 하신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고 그가 훗날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예표적 인물이지, 본체이신 그리스도와 동일 인물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유대인들 중이나 어떤 학자들 중에는 멜기세덱을 천사 중 하나라고 이해하기도 하고 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 시대에 종종 사람으로 나타난 존재라고 생각하기도 하기 때문에, 이 점은 분명히 밝혀두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예표적 존재이지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라는 점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3절에서 멜기세덱을 족보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과 닮은 자로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는 것은 그 멜기세덱이 실제로 계속 살아 있었다는 뜻은 아니요 다만 항상 제사장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예표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 이해하셔야 하겠습니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을 닮은 자이지, 하나님의 아들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을 통하여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탁월함을 당시 히브리인 성도들에게 설명해주려는 의도로 사용한 것이지, 멜기세덱을 예수 그리스도 이해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아론의 제사장직보다 탁월함을 말하는 히브리서 저자의 진술을 살펴봅시다.
4절로부터 10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논란의 여지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또 여기서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는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이 얼마나 존귀하고 위대한가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한 가지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는 것을 말합니다. 멜기세덱이 전쟁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을 맞아 축복하였을 때에 자기의 모든 전쟁 약탈물 중에서 십분의 일을 그에게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훗날 아브라함의 후손 중 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의 후손들이 그 백성들로부터 받은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린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을 때에 레위 지파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의 조상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것은 그 후손들 역시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에 그의 후손들인 우리들 모두가 범죄한 것과 같은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그 후손 제사장 가문보다 멜기세덱이 더 존귀한 제사장 직분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더 멜기세덱이 얼마나 존귀하고 위대한가에 대하여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한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장차 그 후손들이 번성할 것이고 그 땅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할 것이고 아브라함은 만민의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은 약속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보다 더 큰 자가 당시의 멜기세덱이었으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축복한다는 것은 축복해주는 그 사람이 축복을 받는 사람보다 더 높은 사람입니다. 7절 말씀이 그 뜻입니다.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그래서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야곱이 나이 130세의 노경에 아들 요셉의 초대를 받아 애굽에 들어가서 궁궐에서 애굽 왕 바로를 처음 만났을 때에 축복합니다. 그러자 애굽 왕 바로는 자기가 더 크고 위대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늙은 노인이 자기를 축복하니까 조금은 이상히 여겨서 이렇게 묻습니다.
“네 나이가 얼마냐”
그러자 야곱은 바로에게
“내 나그에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다시 궁궐을 나올 때 또 다시 바로를 축복해줍니다. 야곱이 이렇게 두 번이나 바로를 축복해준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로서 존귀한 영적 권세자로서 당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애굽 왕 바로보다 더 존귀함을 그렇게 축복함으로써 드러내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축복을 빌어주는 자는 축복을 받는 자보다 크고 존귀합니다. 그래서 복은 이렇게 영적 질서를 따라 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권위 질서 아래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래로 흘러내려갑니다.
이번에 미국의 대통령이 된 트럼프 당선자는 과거 백악관에 입성했을 때나 이번에 선거운동을 펼치는 시기에 기독교 목회자들에게 자주 안수받는 장면을 언론에 노출하곤 했습니다. 이것이 언론 플레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독실하고 성경적인 기독교인인지는 제가 확신할 수 없지만, 그가 지속적으로 기독교 목회자들의 안수 받기를 좋아하는 면이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안수받는 사진들을 보면 미국의 흑인 목회자들에게도 기꺼이 안수받곤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종종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논란에 많이 휩싸이곤 합니다만 그가 기독교 목회자들의 영적 권위만큼은 분명히 인정하고 목회자들의 축복 권세를 인정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 민주당의 바이든이 안수받는 장면이나 오바마가 안수받는 장면은 검색해보았는데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하나님의 축복보다 사람의 인기와 박수와 찬사를 더 의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우리는 축복이 위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합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영적 권위 질서를 따라 복을 빌어주는 것을 소중히 여깁시다. 예수님 당시 부모들이 자기의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서 만져주심과 안수해주심을 바라고 가까이 왔을 때에 주님의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장면을 보시고 노하시고 이르시기를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고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복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으니, 그 축복은 그대로 훗날 다 이루어졌을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명심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항상 영적 권세 앞에 겸손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멜기세덱은 이처럼 아브라함과 레위 지파의 제사장보다 더 존귀하니, 이 점은 아브라함과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그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과 아브라함과 레위 지파가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았다는 두 가지 점에서 볼 때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레위 지파의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들보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제사장이 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이 훨씬 더 위대하고 존귀한 것입니다.
또한 멜기세덱 반차를 따른 제사 직분이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보다 훨씬 더 온전하다는 점을 말합니다.
11절로부터 19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별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의 불완전성을 언급합니다.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 율법에서 세우신 레위 지파의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 직분이 왜 불완전하느냐면,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 대신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을 세우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율법에 의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 직분을 세우신 후 약 400년 지난 다윗 때에 다윗을 감당하시어 성령으로 말씀하신 시편 110편의 4절 말씀에서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아론의 반차 외에 멜기세덱의 서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난 제사장을 세우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곧 레위 계통을 따라 세워진 아론 반차의 제사 직분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과 다른 것 아닙니다. 만약 레위 계통의 제사장 반차가 온전한 것이라면 또 다른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단을 전혀 섬기지 않는 다른 지파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전혀 다른 제사장이 나올 수 있게 되었으니, 곧 유다 지파의 다윗의 후손의 혈통을 통하여 나오신 우리 구주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온전하지 못한 아론 지파의 제사 직분 대신에 더 온전하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나오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 직분은 더 온전한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이 더 온전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15절에서 설명하기를
“그는 육신에 속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제사장 되신 것은 구약 율법 규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새 생명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10:4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시고 이르신 바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이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는 말씀을 성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의 영원한 새 생명의 능력을 입었기 때문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이 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이 불완전한 까닭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하나님께서 후에 세우신 것이기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이 훨씬 더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구약 제사장 직분보다 더 위대한 것이 확실합니다. 또한 율법 자체도 역시 불완전하여 바뀔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니, 그 율법으로는 아무 것도 온전하게 할 수 없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율법과 구약 제사 직분은 누구도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 직분은 사람은 온전케 하므로 이로써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로써 더 좋은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19절 말씀에 ‘더 좋은 소망’이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가진 축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율법과 제사 직분도 소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소망은 아니었습니다. 그 율법 자체와 율법에 기초한 제사 직분은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가 살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따로 세우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세상에 오시사 죽으시고 부활하사 불멸의 생명의 능력으로 영원한 제사장이 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을 말하는 복음의 말씀은 더 좋은 소망을 듣고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더 좋은 소망의 도를 받았고 하나님께 온전히 가까이 나아길 길을 알게 되었으니 이 진리 위에 서서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뒤로 물러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으니, 이 진리만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사이비한 가르침이 다가올지라도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영원히 변치 아니하리라고 하나님이 맹세로써 인친 이 복음 진리를 굳게 붙들고 끝까지 주님을 섬기며 담대하게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