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출생 500주년에 시작된 ‘통일’
프라하를 떠나 루터의 도시들이 기다리는 옛 동독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전에 체코에서 한 곳 더 들를 곳이 있었다. 6월 11일, 테렌친(Terenzin) 국립 묘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에 요새로 구축된 이곳을 나치는 유대인들과 체코 민족 지도자들의 집단 수용소로 개조했다. 패전이 임박한 1944년 11월 어느 날 나치 친위대는 이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이들의 유골 2만 2000구를 공동 묘지에서 파내어 근처 오레 강에 버리고 도망갔다. 자신들의 만행을 감추기 위해 또 다시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루터의 나라 독일. 그가 태어나고 죽은 아이슬레벤, 그가 대학을 다녔고 또 수도사가 된 에르푸르트, 그가 대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친 비텐베르크, 이단자이자 국외자로 낙인찍힌 뒤에 숨어서 신약성경을 번역한 아이제나흐, 마르틴 루터의 삶과 개혁의 역사에 중요한 역사적 이정표가 되었던 이들 도시들이 몰려 있는 옛 동독 지역을 향하는 나의 심중에는 이 보다 더 깊이 박힌 인상이 ‘히틀러의 제국’이었다.
나에게 독일은 일본과 함께 ‘집단 광기’가 얼마나 악마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국가 지상주의, 국가 우상주의의 나라라는 인상이 더 강했다. ‘히틀러의 제국’, 그 히틀러와 야합하여 스스로 ‘제국의 교회’가 된 저 부끄러운 ‘독일 그리스도인’의 나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적 히틀러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던 디이트리히 본회퍼 목사와 지상의 어떤 제국도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님이라 고백한 수많은 그리스도인 양심들을 처형한 바빌론 제국과 같은 나라 독일.
테렌친 수용소에서 한층 더 깊어진 이 ‘편견’을, 절대 권력에 도전한 루터와 본회퍼, 그리고 수많은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다스리면서 옛 동독에 들어섰다.
‘루터슈타트 비텐베르크(Lutherstadt Wittenberg)’, 2001년 6월에 찾은 비텐베르크는 그렇게 스스로를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라 부르고 있었다. 비텐베르크 옛 시가지를 중심으로 루터의 역사를 간직한 건축물과 거리 곳곳에는 마치 구호처럼 ‘루터’가 붙어있었다. 마침 6월부터 9월까지는 ‘루터슈타트 비텐베르크’의 여름 문화 축제 기간. 루터를 테마로 한 연극과 오페라, 학술제 등 각종 문화 축제가 팜플렛들과 포스터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1517년 10월 31일 이곳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한쪽 문에 면죄부 교리에 반대하는 95개 조항을 내걸었던 그 루터는 2001년 6월, 비텐베르크의 ‘문화’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상품으로 ‘전락’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전부 떨쳐버릴 수는 없었지만, 루터는 그렇게 오늘의 비텐베르크에서 살아있었다.
비텐베르크에서 면죄부 교리에 반대하며 일어선 루터는 이제 면죄부 교리의 근거가 되는 교황권 교리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면죄부 교리를 건드릴 때는 그저 불쾌히 여길 뿐이었던 교황청은 이제 그 교회의 ‘절대 권력’이 공격을 받자 가차없이 그 공격자를 이단으로 모는 예의 그 못된 버릇을 드러내고 만다. 루터는 결국 1521년 교황과 제국에 의해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이단자’이자 ‘국외자’가 되었다. 이 두 가지는 이제 그는 교회로부터도, 국가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없음을 뜻했다.
종교와 세속을 관장하는 두 개의 절대 권력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루터는 작센 선제후의 도움으로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은신처를 얻게 된다. ‘융커 외르그’라는 가명을 쓰며 기사로 변장한 이 어거스틴파 수도사는 그러나 이곳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차라리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면 될 일이었다. 루터는 이 성의 작은 기사의 방에서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옮겨내고야 만다.
2001년 6월 13일, 산 정상 절벽에 간신히 올라앉아 있는 중세의 성, 바르트부르크는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들로 줄을 서서 입장을 해야 할 정도로 붐볐다. 하루에 보통 2000∼3000명이 찾는다고.
독일 통일은 이렇게 옛 동독 지역 루터의 자취들에 생기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독일 통일에 앞서 루터가 있었다 증언한다.
1983년 5월 4일, 아직은 동독 공산 정권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 이곳 바르트부르크성에서 당시로서도 동서 독일과 세상을 놀라게 한 일이었지만 훗날 그 역사적 의미가 더욱 돋보이게 되는 한 의식이 있었다.
동독 인민회의 의장 호르스트 진더만과 서베를린 시장이자 두달 뒤 서독 대통령이 되는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가 이곳에서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리고 이 날을 기점으로 루터의 유적들이 산재한 동독의 여러 도시들을 중심으로 독일 전역에서 루터 출생 500주년 기념 행사가 줄을 이었다.
‘마르틴 루터 위원회’를 구성해 공산당 서기장 호네크가 직접 그 위원장을 맡아 동독개신교연맹의 루터 출생 500주년 행사를 지원한 동독 공산 정권으로서는 그때 딴 계산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이 행사에 막대한 재정을 지원하고 있는 독일 개신교회의 그 ‘마르크’가 탐이 났을지도 모를 일이며, 서독과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을 동독 땅에 불러놓고는 자기네 정권의 건재를 과시하고 싶은 욕심이 앞섰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동독 인민들의 기억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루터’를, 아무리 무신론을 공식 이데올로기로 한다지만, 동독 공산당이라고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1483년 이제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리진 동독, 작센의 작은 마을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난 마르틴 루터는 500년이 지난 1983년 그렇게 동독 인민의 집합 기억으로 되살아났다.
동독을 휩쓴 민주화 개혁의 열풍 속에서 권좌에서 밀려난 호네크 동독 공산당 서기장은, 1983년 바르트부르크성에서의 그날의 의미를, 자신이 참석한 그날의 예배의 의미를, 훗날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를, 그때는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동독 민주화 운동의 심장 ‘노이에스 포룸’(새 광장)이 교회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움직일 수 있었던 힘은 이미 1983년 동독 인민들의 가슴에 ‘루터’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새겨지고, 채워지고 있었다. <끝>
□옛 동독은 지금 ‘보수공사중’
2001년 6월에 찾은 옛 동독은 거대한 공사 현장이었다.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외벽은 보수 공사를 위한 버팀대와 보호망이 덮고 있었다. 근처 루터 박물관은 ‘비텐베르크대학 500주년을 기념하여 2002년 10월 다시 문을 열 것’이라는 안내문과 함께 아예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루터가 대학을 다녔고 또 수도사가 된 에르푸르트는 도시 전체에서 보수와 신축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루터가 수도하며 그의 개혁 사상의 기초를 닦은 어거스틴파 수도원, 현재는 ‘개신교 어거스틴파 수도원’이 된 이 수도원의 마당에는 건축 자재가 가득 쌓여있었다. 바르트부르크성도 한쪽 외벽을 수리하고 있었다. 동서독 분단과 통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문은 거대한 휘장으로 가려진 채 새로운 모습으로 공개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통일 10년의 옛 동독은 공산 체제의 허물과 더께를 그렇게 벗겨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