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1월 11일 일요일. 아는애들과 문경새재에 가기로 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수락산역에 가서 서울지하철7호선(장암-온수)을 타고 건대입구역에서
서울지하철2호선(시청-잠실)을 갈아타고 강변역(동서울터미널)역에 도착했다.
그때시간 7:20분
강변역을 나와서 약속장소인 동서울터미널정문에 가니 아직 아무도 안왔군..
이른 아침시간이지만 휴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졀라 많다. (수천명 될듯)
7:30분쯤 되자 같이 가기로 한 친구놈들이 하나둘 등장했다.
원래 4명이상 가기로 했으나 나포함하여 3명만 가게 되었다. (남자2명,여자1명)
인원이 다 모이자 매표소로 가서 문경행 버스표를 구입한다.
동서울에서 문경까지는 직행버스가 30-50분간격으로 굴러다닌다.
운임은 10300원이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운행하는 직행노선은
의정부,운천,철원,인천,안산,성남,가평,춘천,양평,광주,이천,여주,용인,
평택,오산,안성,장호원,천안,아산,대전,유성,부여,공주,청주,충주(고속),
수안보,단양,제천,원주,꽃동네,구룡사,홍천,속초,강릉,동해,정동진,장평,
평창,진부,정선,태백,고한,상동,영월,구인사,영주,안동,봉화,울진,온정,
안동,의성,문경,점촌,은척,낙동,상주,통도사,울산,기장,부산(해운대),
함양,지리산,김제,익산,진안,성주,고령,현풍등이다.
버스표를 구입하고 좀 서성이다가 8:00에 버스타는곳으로 나갔다.
타는곳에는 승객 수백명이 버스를 타거나 기다리고 있다.
2. 버스타는곳 13번홈으로 나가니 우리가 탈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 문을 안열었다.
잠시뒤 운전사가 와서 문을 열고 승객을 태운다. 이번에 타는 버스는
8:20분에 출발하는 대원고속소속 문경,가은,농암경유 은척행(경북 상주시)
직행버스이다. 차종은 bh116이다.
8:20분되자 버스는 출발한다. 버스안에 승객은 20-30여명정도 되는군..
버스는 천호대교를 건너 88강변도로를 지나 중부고속도로로 진입하여
졀라게 달린다.
우리들은 배가 고픈지라 집에서 가져온 빼빼로와(그날이 소위말하는 빼빼로day였다.)
과자,김밥을 먹었다.. 맛있군..
그런와중에서도 버스는 졀라게 달려 동서울T.G를 지나 하남,곤지암을
지나 죽산에서 국도로 나온다.
충주방면으로 계속 달리다가 주덕못미쳐에 있는 대원휴게소에 잠깐 정차하여
휴식을 취한다.(대원,경기고속에서 운영하는 휴게소이다.)
우리는 여기서 음료수와 간단한 먹거리를 사와서 버스안에서 먹었다..
10여분뒤 버스는 출발하여 동쪽으로 달린다.
주덕을 지나 충주에 이르고 건대충주분교에서 승객 몇명 내리고
남쪽으로 좀 달리니 평지대신 산악지대가 나온다.
수안보를 지나 수옥리(3관문입구),연풍,이화령터널을 통과하여
11:00에 문경읍내에 있는 문경터미널에 도착하여 내린다.
3. 우리가 도착한 문경읍은 문경시의 주요읍중 하나이다.
문경시는 문경군과 점촌시가 합쳐진 도농통합시이다.
한때 석탄으로 배불리 먹고 살았으나 석탄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문경지역에 탄광들이 때지어서 폐업을 하면서 탄광에 종사했던
많은 사람들이 외지로 나가버려 인구가 많이 감소하고 수입이
줄어들어 침체기에 빠졌으나 요즘은 관광산업으로 다시 예전에
활기를 되찾고 있다.
문경시의 중심동네는 점촌이다. (예전 점촌시이다)
문경시는 북,서쪽으로 높은 산악지대가 펼쳐져있다.
이 산악지대는 태백산맥에서 분리된 소백산맥에 일부이다.
그에 비해 동,남쪽은 평야지대이다.
문경시의 대표적인 관광지는 아무래도 문경새재와 태조왕건촬영지이다.
요즘 모방송국에서 방영하는 '태조왕건'이 많은 인기를 얻는 관계로
촬영지가 있는 문경새재에 수백만명의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문경새재도 유명관광지중 한곳이다.
문경새재외에는 봉암사란 고찰이 있는데 보물급문화재를 5개나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일반관광객들의 출입이 금지되있다.(석가탄신일만 출입할 수 있다.)
그외에 내화리3층석탑,김룡사,선유동계곡등의 관광지가 있다.
5. 문경새재(聞慶鳥嶺[문경조령])는 산들이 높고 험준하여 새들도 날아 넘기
어려운곳이라서 새재, 억새가 많은 고개라는 새재,새로 닦은 길이라는 새재라고
불러졌다고 한다.
이곳은 조선초기부터 영남(경상도지역)에서 한양(서울)을 오가는 영남대로(嶺南大路)이다.
길 중턱에는 경상도감사가 서로 교체될시 서로 만나 업무와 직인을 인계인수한 장소인
교구정터가 있다.
임진왜란(쪽발이라는 쥐새끼들이 조선에 와서 행패부린 사건)이 일어난 1592년에
쪽발이우두머리인 소서행장이 부산에 불법 상륙하여(1592,4,14일)부산,동래,김해,대구,
경주,상주(1592,4,24)를 지나 이곳에 재를 넘었다. 이때 조선정부에서는 쪽발이들을
막기위해 여진족정벌에 큰공을 세운 신립장군을 보낸다.
그런데 신립장군은 무엇에 홀렸는지(이에 관련된 전설이 있지만. 그것은 신립을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문경새재협곡에서 쪽발이들과 맞짱뜨자는 부하들의
의견을 모두 묵살하고 충주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쪽발이들과 맞짱을 떴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신립장군은 자진하고 부하 상당수가 전사했다.
그중에서 부장인 홍계남은 극적으로 탈출하여 경기도 안성지역에서 이덕남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쪽발이들을 대거 때려잡는다.
1594년 조선정부는 새재협곡중간에 제2관문을 만든다.
만든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신립장군이 새재에서 왜적을 막았다면
쪽발이들이 쉽게 새재를 넘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만든것이다.
(그 이후 쪽발이들은 이쪽으로 오지도 않았다..)
1,3관문은 병자호란(1636-1637년[북쪽의 여진(만주)족들이 조선에 와서 난동부린 사건])
이후인 1708년에 만들고 석성을 쌓았다.
그리고 영남지역의 선비들이 큰꿈을 품고 과거를 보러 한양을 오르던 과거길로 이길을
많이 이용했다고 전해지는 유서깊은 고개이며 새로운길이 이화령(충북 괴산 연풍<->
경북 문경)에 개통됨에 따라 지금은 사적지겸 관광지로 남게 되었다.
문경새재의 3개의 관문은 1966년 3월에 사적 147호로 지정되었으며
1981년 6월에는 문경새재일원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 국립공원 - 국가에서 지정한 공원 (북한산,지리산,설악산..20개가 있음)
* 도립공원 - 도(道)에서 지정한 공원 (금오산,문경새재,대둔산,남한산성..)
* 군립공원 - 도에 속한 군(郡)에서 지정한 공원(순창의 강천산,가평의 명지산..)
6. 문경새재매표소를 지나 좀 가니 문경새재박물관이 있다.
나는 이곳을 관람하고자 했으나 일행들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그냥 지나쳐야 했다.
문경새재박물관은 문경시청homepage에 자세히 나와있다.
왼편에 계곡이 흐르고 있는 2차선도로를 따라 계속 올라가니
오른편길가에 오래된 비석이 하나 서있다.
그것이 무언가 보니 '신길원현감충렬비(申吉元縣監忠烈碑)'이다.
이 비석은 임진왜란당시 문경을 사수하다가 장렬히 전사한 문경현감 신길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706년에 나라에서 세운 비석이다.
1592년 4월13일 부산진에 불법상륙한 쪽발이군단들은 상주에서 이일을 패주시키고
어느덧 문경에 이르렀다. 그 당시 문경현감은 신길원이였다.
문경지역이 쪽발이들에게 포위되자 역졸들이 잠시 피할것을 권했으나 신길원은
듣지 않고 문경현을 사수할것을 명하고 관병 20여명과 함께 쪽발이 수백명을
베어죽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당하지 못하고 결국 부상당한 상태로 생포되고 말았다.
왜장은 그에게 항복을 권했으나 그는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쪽발이들에게 양팔이 잘리고 결국은 목까지 잘려 순국하고 말았다.
(여기서 섬나라쪽발이들이 얼마나 개짐승같은 놈들인지 알수 있다.)
이소식을 들은 그당시 조선국왕 선조는 그에게 좌승지를 증직(贈職)하여
그의 충절을 기렸다.
이비는 문경초등학교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 비석은 경북유형문화재 145호이다.
신길원현감충절비를 보고 계속 올라가니 어느덧 제1관문에 이른다.
1관문앞에는 사극 '태조왕건'의 전쟁장면을 찍을때 사용하는 나무로 만든
전쟁용기구들이 있다.
기구들을 보면 화살을 쏘는 노궁대?와 나무로 만든 망루,성문을 때려부실때 사용하는
검차비슷한것,성을 넘을때 사용하는 사다리기구들이 전시되있다.
이들 기구주위에는 수백명의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거나 망루에 올라가거나
만지거나 등등..
이들 물건은 전쟁장면을 찍을때 사용하는것들이다.
지금은 이런용도로 밖에 안쓰지만 옛날에는 이런것들을 이용하여 전쟁을 치렀다.
우리는 목조망루(보기와는 달리 오르락내리락하기 힘들다)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고
그밖에도 여러 기구들을 만져보았다. 기구들을 보고 좀 가니 옛날의상들이 전시되있군.
이 의상들은 태조왕건같은 사극에서 등장인물들이 입고나오는 의상들이다.
여자들이 입는 옷부터 해서 갑옷까지 다양하다.
의상대옆에는 의상을 지키는 사람이 대기하고 있군.
그 사람의 임무는 이 의상을 대여하는것이다. (물론 사진을 찍기위해 잠깐
대여하는것이다. 당연히 공짜가 아니다.)
의상들을 좀 만져보고 (입어볼까 하다가 그냥..)다리를 건너 제1관문앞에 이른다.
제1관문은 주흘관이라고 부른다.
주흘관의 뜻은 주흘산기슭에 위치해 있어서 주흘관이라 한것이다.
문경새재로 가는 첫관문으로 1708년에 만들었다.
가장 옛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관문앞에는 목책들이 세워져있는데 이것들도 '태조왕건'촬영때문에
만든것들이다. 목책은 적들의 공격을 막기위해 나무로 만든 방어용책(柵)이다.
새재1관문은 '태조왕건'에서 많이 나온 곳이다.
아마 모르는 사람은 없을듯 싶다.
관문주위에 성벽은 좀 검게 그슬려 있다. 이것들도 모두 '태조왕건'때문에 그렇게
된것이다. 전쟁신을 찍을때 불화살을 쏘고 불을 지르고 하면서 이렇게 된것이다.
이것도 문화재파손에 속하지 않을련지 쩝..
7. 목책을 지나 1관문앞에서 사진을 찍고 1관문안으로 들어갔다.
관문을 지나니 멀리 태조왕건촬영지인 고려마을이 보이는군.. 조만간 가겠지만..
성문위에는 깃발이 2개가 서있다.
이것들도 '태조왕건'에서 나오는 깃발들이다.
우리는 성문위로 올라갔다.
올라가서 깃발을 보니 흰색의 천위에 노란색으로 칠해진 원모양의 그림이 그려져있다.
이것은 후백제의 깃발이다.
태조왕건을 보면 많이 나오는 백제의 깃발이다.
나는 깃발을 들고 성밖을 향해 힘차게 흔들었다. 마치 성을 점령한 장군처럼..!
재밌군...
깃발오른편에는 나무로 만든 망루가 세워져있다.
아까전 그 망루와 비슷하다. 올라가지는 않았다.
깃발을 보고 문루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문이 잠겨져있군..
할수없이 성문에서 내려온다.
성문에서 내려오니 고려마을로 가는길과 오른편 여궁폭포,혜국사로 가는길이 있는데
우리는 그 유명한 여궁폭포를 보기위해 오른편 산길로 올라갔다.
가는도중 신길원현감을 모신 충열사(명칭이 맞는지 모르겠음)를 지나고
오른편에 계곡을 따라 부지런히 산길을 올라갔다.
그런데 계곡물이 거의 말라있네.. 그럼 폭포도 그렇지 않을까?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계속 올라갔다.
10여분 올라가니 물로 가득찬 계곡이 나타났다.
길이 좀 험해졌지만 불굴의 정신으로 계속 올라가니 마침내
그 웅장한 여궁폭포가 우리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8. 여궁폭포(女宮瀑布)는 제1관문에서 오른편길로 약 1km정도 올라가면 나온다.
폭포의 높이는 20m인데 가뭄인데도 불구하고 폭포수는 열심히 떨어지고 있었다.
여름에 오면 좋을듯 싶다.
폭포주위에는 관광객 서너명이 폭포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좀 찍고 폭포를 감상했다.
이 폭포는 밑에서 바라보면 생김새가 마치 여자의 하체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 때문에 이폭포를 여궁 또는 여심폭포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이 폭포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러나 여자의 하체와 같은 형상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
폭포를 바라보고 왼편길로 갔다. 그 길이 내려가는 길인거 같은데 아닌듯 싶다.
그 길은 혜국사로 올라가는 길이였다.
9. 혜국사(惠國寺)는 말그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혜국사로 명명했다.
이 절은 후기신라시대인 846년에 보조국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창건당시의 사명은 법흥사(法興寺)였는데, 고려말기 공민왕(고려31대왕 재위1351-1374)
이 홍건적의 난(1359,1361년에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른 중원대륙의 도적패거리들이
고려에 와서 난동부린 사건)을 피해 이곳에 행재소(行在所)를 정했을때 나라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사명을 혜국사로 바꾼것이다.
그때 공민왕은 복주(지금의 경북안동)까지 피난갔었다.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펴면서 쌍성을 점령하고 평북강계,함북길주지역까지
영토를 넓히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요서를 정벌하여 한때나마 다스렸던 왕이다.
요동,요서는 곧바로 명나라떨거지들이 들어와서 불법점령해 버리고 말았다.
혜국사는 최근에 다시 만든 만든 복원한 사찰로 볼것은 없다.
그래서 혜국사는 안가기로 하고 여궁폭포를 해서 다시 오던길로 경유하여
새재산장을 지나 제1관문으로 왔다.
10. 제1관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고려마을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갈래가 있는데 나는 제일 입구인 제1관문왼편길로
가기로 했다.
제1관문의 왼쪽성벽은 계곡건너 바위에 접해있지만. 그곳은 허물어진지 오래고
성과 계곡사이에는 길이 나 있다.
이곳은 예전 태조왕건에서 자주 나오는 길이다.
길왼편에 돌로 쌓여진 성이 있고 오른편에는 계곡과 바위가 있다.
그곳을 지나 계곡을 건너 고려촌으로 들어간다.
역시 관광객들로 미어터질지경이였다. (문경시청 수입짭짤하겠구먼..!)
좀 걸어가니 초가몇채가 보이고 왼편에는 오다련의 염전이라고 쓰인 곳이 있는데
이곳은 옛날에 소금을 만들던 염전을 재현한 곳이다.
태조왕건에서 오다련의 소금공장으로 나왔던 곳이다.
여기서 오다련은 태조왕건의 2째부인 장화왕후 오씨의 아빠이다.
염전앞에는 움집이 하나 있어서 거기서 사진을 찍고 고려촌으로 들어가는 성문을
지나갔다.
이 성문도 태조왕건에서 많이 나온다.
11. 성문을 지나 본격적으로 고려촌으로 들어왔다.
태조왕건을 찍기위해 만든 세트장이다.
고려시대 기와집과 초가집,궁궐등을 대충 복원하여 만든 곳이다.
초가는 민속촌에 그것과 별로 다를것이 없지만. 촬영을 위해 대충만든지라
좀 엉성하다. 집안에는 촬영도구들이 여기저기 방치되있고 심지어 화장실도 들어있다.
초가를 지내 내를 건너니 이제부터는 기와촌이다.
우리가 성문을 지나 들어온 지역은 초가촌이고 여기서 내를 건너면 기와촌과 고려궁이
나온다. 초가촌에 오른편에는 1층누각이 세워져있다.
사방은 내로 둘러싸인 섬이다. 연회장면을 찍을때 사용하는 곳이다.
기와촌으로 들어오니 정면에 고려궁이 보인다.
기와촌에는 유긍달의집,유장자의집등이 있다. 여기서 유장자는 고려태조의 원비
신혜왕후 유씨의 아빠이며, 유긍달은 충주지역호족으로 고려태조의 3비인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아빠이다. 신명순성왕후는 고려3,4대왕인 정종,광종의
생모이며 이들이 왕이 되자 태후(太后)로 높여졌다.
이들 기와집은 대충 만든지라 좀 엉성했다.
규모도 tv에서 보는거와는 달리 졀라게 작다.
집안에는 아까전 초가와 마찬가지로 촬영소품들이 여기저기 흩으러져있다.
깃발들과 창비슷한것들이 많았다.
기와집들을 둘러보고 고려촌 제일 북쪽끝에 위치한 고려궁으로 들어갔다.
12. 이 고려궁(高麗宮)은 태조왕건에서 고려왕과 문무대신들이 국정을 보는 장소로
나오는 곳이다.
이곳은 개성에 있는 고려궁을 대폭 축소하여 대충 만들어놓았다.
문과 집위에 얹힌 기와는 모두 가짜이다. 만져보면 알수 있다.
고려시대 왕궁은 지금은 북한땅인 개성에 있다.
고려왕궁이 있던 곳을 만월대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고려왕궁의 정문은 승평문(承平門)이다. 얼마전 방송한 역사스페셜에 의하면
엄청나게 큰 건물이라고 한다. 주춧돌의 폭이 1m가 넘는다니 대단히 큰것이다.
여기에 있는 승평문은 그 축소판이다.
승평문을 지나 고려궁에 들어서니 오른편에 전각이 하나 있다.
전각을 지나 문을 지나니 고려궁의 정전인 회경전(會慶展)이다.
중층구조로 이루어진 건물로 밖에서 보면 2층건물로 보인다.
이 역시 60%로 축소해서 만들었다.
회경전앞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우리들도 역시
열나게 사진을 찍었다.
회경전앞에 돌계단이 있는데 이것들은 돌로 된것이 아니다.
목재로 만든것 같다. 그리고 용머리도 역시 돌로 만든건이 아니고
재료명은 기억이 안나지만 그냥 폼만 나게 만들었다.
회경전오른편에는 3층석탑이 하나 서 있다.
이것은 '태조왕건'에서 궁예의 책사인 종간이 궁예의 병을 낫게 하기위해
도인(道人)을 불러 불공을 드린 장소로 나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석탑같지만 만져보니 돌이 아니였다.
역시 그랬었군...
회경전을 한바퀴돌고 회경전왼편에 있는 전각으로 갔다.
그곳은 황후전으로 불리는 곳이다.
고려태조의 왕비들이 머물던 건물이다.
건물은 1층건물로 겉보기에는 전혀 궁궐전각으로는 생각되지 않을정도이다.
건물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소품들만 널려 있을뿐이다.
황후전에서 앞에 계단을 지나 문을 지나니 건물이 하나 나온다.
여기는 후원으로 사용하는 듯 싶다.
이로써 고려궁을 모두 관람했다.. 좀 허전하고 썰렁했다.
13. 고려궁을 다 둘러보고 승평문을 나와서 서쪽 길로 갔다.
계속 가니 백제의 궁궐이 나왔다. '태조왕건'에서는 완산주궁으로 나온다.
백제궁은 돌로 만든 기단위에 세워져 있다.
백제의 완산주궁은 전북전주시에 있었다. 정확한 위치는 전주시남쪽에 있는
남고산성내(內)이다. 산성내에서 후백제시대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그 건물의 폭이 80m에 이르는 아주 큰 건물이였다.
건물의 모양은 이곳에 백제궁건물과 비슷하다.
다른것이 있다면 여기(문경새재)에 만든것은 그당시에 그것을 대폭 푹소해서 대충
만든것 뿐이다.
기단위에 문을 통해 들어가니 문이 하나 또 있고 그 문을 지나니
백제궁의 중심건물이 나온다.
이 건물도 중층구조의 건물로 되 있다.
tv에서 보면 좀 큰 건물같지만 실제로 보니 대개 작다.
건물위에 얹힌 기와는 진짜가 아니구 모구 가짜들이다.
백제궁은 고려궁보다 작았다. 고려궁은 회경전외에 건물이 몇동 더 만들어졌지만
백제궁은 중층구조의 건물 1동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그 건물을 둘러싸는
회랑(回廊)들뿐이다.
건물앞에서 사진 몇방찍고 백제궁을 나왔다.
14. 백제궁앞에는 고려궁과 똑같이 도로가 일직선으로 뻗어있고
양쪽에는 기와집들이 들어서 있다.
기와집촌을 지나 다리를 건너 문경새재등산로로 나왔다.
이로써 태조왕건문경새재 촬영지 속칭 고려촌을 모두 관람했다.
고려촌을 관람한 소감은 한마디로 아쉬움 그자체이다.
아무리 촬영때문에 대충 만들었다지만.. 좀 제대로 복원을 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날은 태조왕건촬영이 없었다. 촬영하는날에는 관광객들의 출입이 통제된다고
한다.
고려촌을 나와서 문경새재2관문으로 올라가는 길로 걸어갔다.
고려촌을 뒤로한 채...
왼편으로는 맑은 계곡이 흐르고 오른편에는 나무들로 울창한 길을 계속 올라가니
길 오른편에 무슨 돌담이 있다.
그곳은 무엇일까?
15. 그곳은 바로 조령원터(鳥領院址)이다.
조령원터는 1관문과 2관문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지금은 돌담만 남아있다.
원(院)은 옛날 출장가는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역과 역사이에 만든
지금의 여관과 같은 것으로 조선후기에는 일반 나그네들에게도 편의를 제공했다고
한다.
문경새재에는 조령원과 동화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조령원은 새재길을 오가던
관원과 나그네들이 숙식을 제공 받았을 뿐만 아니라 호서,영남지방의 물물교역장소로
사용되었던 유서깊은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태조왕건촬영지중 한곳이다.
태조왕건의 처음부분에 잠깐 나왔는데 이곳은 신라말기 죽주(경기도 안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기훤의 본부로 나온다.
돌담안에는 촬영때문에 만든 초가집과 나무로 만든 대(臺)가 있고 돌담위에는
병사들이 수비를 하기 위해 만든 목책같은 것이 그대로 있다.
초가앞에 있는 대는 장수들이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집합시킬때 사용하는것이다.
대위에 올라가서 사진좀 찍고 조령원터를 나왔다.
16. 조령원터를 지나서 몇백m올라가니 왼편에 맑고 아름다운 계곡과 바위,반석들이
우리를 반긴다. (용연[龍淵]이라고 부른다)
길가에 안내판이 있어서 보니 이곳이 바로 궁예의 최후장면을 찍었던 바로
그 계곡이다.
왕건의 쿠데타로 겨우 도망친 궁예는 결국 명성산(경기도 포천)에서
왕건의 수하군사들에게 포위되고 만다.
수하군사들은 궁예를 포박하여 철원으로 데리고오자 했으나 왕건은 이를
거부하고 직접가서 궁예를 알현하면서 같이 살자고 했다.
그러나 궁예는 그것을 거부하고 그를 수행했던 은부,금대와 함께 죽음을 택했다.
(이상 태조왕건에 나온내용)
그 장면을 찍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름없는 계곡,바위들이 이 '태조왕건'덕분에 뜬 것이다.
안내판을 보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계곡물은 졀라 깨끗했다. 그냥 먹어도 될 정도로..
바위들도 멋있다.
바위를 지나 좀 가니 교구정터(交龜亭터)가 나온다.
17. 교구정은 1484년 문경현감(현 문경시장) 신승명이 건립한 정자로서
경상도관찰사가 이곳에서 도장을 주고 받는 교인처(交印處)로 이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세월이 흐르는 동안 건물은 사라졌고, 터만 남은 자리에
최근에 정자를 복원했다.
교구정터는 비지정문화재이다.
교구정을 둘러보고 계속 올라갔다.
왼편에 맑은 계곡이 졸졸졸 흐르고.. 오른편에는 울창한 산림이 우리를 반긴다.
좀 올라가니 왼편에 막사같은것이 있다.
그곳으로 가니 막사 몇개가 설치되있다.
이 막사들은 역시 태조왕건촬영을 위해 만든 군사용막사들이다.
막사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막사를 지나 좀 올라가니 문경새재옛길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나온다.
지금은 이렇게 잘 포장된 도로로 가지만 옛날에는 오솔길같은
산길로 왕래했었다.
옛길은 현재길오른편에 숲속에 있다.
그쪽으로 들어가니 산장이 하나 나온다. 산장겸 식당이다.
그 식당에서 도토리묵과 라면을 사먹었다. (배가 고픈 관계로)
그런데로 먹을만 하다. 라면이 2000원 커헉~~(700원짜리가 2000원으로)
도토리묵이 5000원인가 그렇다...
18. 점심을 먹고 2관문을 향해 계속 올라가니 길 오른편에
비석이 하나 서 있다. 그것은 '산불됴심비'이다.
이 비석은 조선후기에 만든 것으로 산불됴심이라고 한글로 새겨져 있다.
높이는 1.83m, 폭 75cm정도 되는 자연석에 한 면만을 다듬어 음각했는데
일반 서민들이 잘 알아 볼 수 있도록 한글 비석을 만들어 세운것으로
보기 드문 한글 비이다. (서울 중계동에도 한글고비[古碑]가 있다.)
'조심'을 '됴심'으로 쓴것이 특이하다.
이 비석은 경남지방문화재자료 226호이다.
산불됴심비를 지나 좀 올라가니 오른편에 폭포가 하나 있다.
무슨 폭포인지는 모르겠으나 멋있게 생긴 폭포이다.
폭포를 지나 왼편 계곡건너에는 식당이 있다.
거기서 필름을 사와서 사진을 찍었다.
폭포를 지나 언덕 하나 오르니 드디어 문경새재 2관문인 조곡관에 이른다.
19. 조곡관(鳥谷關:嶺南第二關)은 1594년에 충주사람 신충원이 성을 쌓고
관을 설치한 뒤 1708년에 중창했는데 불타고 홍예만 남은 것을
1975년에 성과 누각을 복원한 것이다. 누각은 정면3간,측면2간으로
좌우에 협문이 있으며 팔작지붕형태이다.
조곡관도 역시 주흘관과 마찬가지로 태조왕건촬영지중 한곳이다.
이곳에서도 엄청난 전쟁장면을 찍었다.
문앞에는 이때 사용했던 목책들이 여러개 남아있다.
조곡관앞 계곡에는 조곡교라는 다리가 하나 걸려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조곡관을 넘을 수 있다.
조곡관을 넘어가니 계곡건너에 약수터가 하나 있다.
우리는 목이 마른지라 거기서 물을 좀 마셨다.
그 약수터의 이름은 영천약수라고 한다.
20. 조곡관을 넘어서 부터는 주흘관과 달리 완전 산림지역이다.
나무로 하늘이 안보일 정도로 수목이 울창한 곳이다.
길 오른편에는 계곡이 흐르고 있다. 아까전에는 왼편에 있었는데..
인적도 별로 없다.. (4:00경)
길을 따라 3관문으로 올라가면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여러가지 놀이를 했다.
올라가는 사이에 돌로 쌓여진 성황당이 하나 있어서 거기서 소원을 빌고
계속 올라갔다.
가는도중 새재옛길과 과거급제길이라 명명된 오솔길들이 나왔으나,
그냥 큰길로 갔다.
큰길로 3km정도 올라가니 넓은 공원이 하나 나오고
문경새재3관문인 조령관이 나온다.
21. 조령관(鳥領關:嶺南第三關)은 문경새재 3관문으로
문경새재 정상에 위치해 있다.
조령관은 1708년에 성을 쌓고 관을 만들었으나 불타 버리고 홍예문만
남아있던것을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제3관문은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데, 문을 지나면
충북 괴산군 연풍면이다.
제1관문에 시작된 문경새재는 제3관문에서 끝난다.
조령관도 역시 태조왕건촬영지중 한곳으로 여기서도 많은 전쟁장면을
찍었다. 그러나 이문은 다른 1,2관문과는 달리 목책이나 그런것들이
없다.
우리는 역사적인 문경새재3관문을 통과.. 이제부터는
경북 문경이 아닌 충북 괴산땅이다.
문경새재입구주차장에서 시작하여 신길원충렬비,주흘관,여궁폭포,
고려마을,교구정터,궁예계곡,조곡관,조령관을 거져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때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22. 조령관을 지나서 조령관을 배경으로 사진좀 찍고
계속 내려갔다. 이곳도 수목으로 울창하다.
계속 내려갔으나 인적이 거의 없었다.
적막감이 감도는 숲속길을 따라 약 2km정도 내려가니
마을이 나온다. 이마을은 수옥리이다.
부근에 수옥폭포라는 괜찮은 폭포하나가 있는데 시간관계상 통과...
계속 내려가니 문경새재 수옥리지구 주차장이 나온다.
우리는 부근 가게에 들어가서 버스시간을 물어보니
방금전 출발했다고.. 허걱~~ (5:20)
다음 버스는 7:00에 온다는 것이다. 커헉 언제 기다리나??
그래서 입구에 나가면 어떻겠냐고 물으니 수옥리입구(충주-문경간 국도)
에는 여기보다 버스가 좀 많다고.. (그래봐야 1,2시간에 한대꼴이다)
그래서 우리는 입구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수옥리주차장부터 수옥리입구까지는 2차선도로가 잘 포장되있다.
입구에 나가면 이놈 말고도 괴산-연풍-수안보를 운행하는 괴산군내버스가
2-3시간간격으로 굴러다닌다. (자세한것은 괴산터미널에 문의바람)
부지런히 내려가니 택시 한대가 수옥리로 올라가는군..
어느덧 수옥리입구에 도착했다.
수옥리입구는 문경-충주간 3번국도가 지나간다.
서울,충주에서 문경방면으로 갈때는 이곳을 지나간다.
그리고 3번국도를 쭉타면 우리집이 나온다.
3번국도가 남해에서 시작하여 ~김천-상주-함창-점촌-문경-조령-연풍-
수안보-충주-장호원-태평리-여주-이천-곤지암-광주-성남시-가락시장-잠실-
구의동-중곡동-면목동-상봉동-공릉동-중계동-상계동-우리집앞(수락산역)-
의정부-덕계리-신탄리~ 를 지나간다.
23. 수옥리입구 버스정류장에 도착은 했으나
버스가 언제 올지 아무도 몰랐다.
충주-문경간 3번국도에는 충주방면으로 수천대의 차들이 지나간다.
그러나 세워주는 차는 한놈도 없다. 이미 날은 어두워졌다.
몇분뒤 연풍방면으로 괴산군내버스가 지나갔다.
버스가 언제 올까? 여기서 하루 자고 갈까? 참 막막했으나.
아까전 수옥리로 들어간 택시가 아직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놈을
기다리기로 했다.
우리들은 문경새재입구부터 수옥리입구까지 40여리를 걸어왔다.
그래서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좀 기다리니 수옥리에서 택시가 한대 나왔다.
우리는 그놈을 잽싸게 잡아타고 수안보방면으로 갔다.
소조령이란 고개를 넘어 안보리를 지나 수안보시내로 진입하여
수안보터미널에 도착하여 내린다.
수옥리입구부터 수안보터미널까지 택시운임이 무려 8000원 커헉~~
8000원을 내고 택시에서 내려서 수안보터미널로 들어갔다.
24. 수안보터미널은 수안보시내 외곽에 위치해 있다.
수안보는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이곳에는 온천과 호텔,여관등의 숙박시설이 많이 갖추어져있다.
부근에 수옥폭포,문경새재,미륵원터,월악산등의 관광지가 있어서
놀러오기에 좋은 곳이다.
수안보에서 충주시내까지는 충주시내버스가 운행한다. 시외직행버스도 운행..
나는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타는곳을 물어보니 터미널에는 안온다고..
그래서 할수없이 직행버스로 충주에 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