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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세계명작전집이든 완역(完譯) 소설이든 영화든 TV 만화든, 어떤 매체를 통해서든 마크 트웨인의 작품을 한 번도 접하지 않기란 힘들다. ‘미국 문학의 링컨’, ‘미국 현대문학의 효시’로도 평가 받는 그다. 헤밍웨이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대해 ‘현대 미국 문학이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했다. 트웨인은 작가로서뿐 아니라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사회비평가로도 크게 활동했다.
1897년 한 저널리스트가 마크 트웨인의 건강 상태를 조사 추적했다. 그는 마크 트웨인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생각했다. 급기야 마크 트웨인 사망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당시 나이 61세. 그러나 그는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 그의 친척 한 사람이 심하게 앓고 있었던 것이 마크 트웨인 와병설과 사망설로 오인, 확대되어 버린 것.트웨인 자신도 자신의 사망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 소문이 무성하게 퍼져나갔지만 사망 기사가 언론에 실리지는 않았다. 트웨인은 1897년 6월 2일자 <뉴욕저널>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 죽음에 관한 보도는 대단히 과장된 것이다.”
트웨인은 이후에도 사망설, 정확히 말하면 실종사망설의 주인공이 됐다. 1907년 4월, 트웨인은 버지니아 제임스타운 박람회 개막식에 참석하러 증기선을 탔지만, 짙은 안개 탓에 증기선은 여러 날을 지체했다. 일행 가운데 일부는 열차 편으로 뉴욕으로 돌아왔지만, 트웨인은 기차 여행을 싫어해 더 기다리는 쪽을 택했고 뉴욕이 아닌 다른 곳에 기항했다. 기자들은 그가 탄 배의 소재와 항적을 파악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가 예정대로 돌아오지 않자 1907년 5월 4일 <뉴욕타임스>는 마크 트웨인이 ‘바다에서 실종된 듯하다’고 보도했다. 뉴욕에 도착하여 이 사실을 알게 된 트웨인은 다음 날 <뉴욕타임스>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바다에서 실종되었다는 설에 대해 부디 좀 더 철저히 조사해주시기를. 만일 문제의 보도에 그 어떤 근거라도 있다면, 나는 애도하는 시민 여러분께 즉시 알려드려야 하니 말이다.”
1884년에 출간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표지
마크 트웨인의 본명은 새무얼 랭혼 클레멘스다. 필명 ‘마크 트웨인’은 배가 지나가기에 안전한 수심, 정확히 말하면 ‘두 길(fathom) 물 속’을 뜻한다. ‘한 길’은 약 6피트(약 1.8m)에 해당하고 ‘트웨인’은 ‘둘’(two)의 고어체, 그러니까 ‘두 길’을 뜻하는 셈. 미시시피강 수로안내인들은 조타수를 향해 ‘마크 트웨인!’이라 외치곤 했는데, ‘배 밑으로 수심이 두 길이니까(약 3.7m) 지나가기 안전하다’는 뜻이다. ‘마크 트웨인’ 이전에는 조쉬(Josh), 토머스 제퍼슨 스노드그래스(Thomas Jefferson Snodgrass) 등의 필명을 사용했다.
1847년 트웨인이 11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그는 인쇄소 견습공이 됐다. 1851년부터 식자공으로 일하면서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18살 때부터 뉴욕, 필라델피아, 세인트루이스, 신시내티 등을 전전하며 인쇄공으로 일했다. 변변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공립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자학자습으로 지식을 쌓았다(그는 예일대 명예문학박사, 미주리주립대 명예법학박사, 옥스퍼드대 명예문학박사 등의 명예학위를 받았다).
22살 때 미시시피강을 따라 뉴올리언스로 가던 중 증기선 수로안내인 호레이스 E. 빅스비가 트웨인에게 수로안내인 일을 권했다. 월 250달러 수입이 보장되는, 당시로서는 고소득 직종이었다. 트웨인은 1861년까지 수로안내인으로 일했다.
어린 시절부터 미시시피강을 무대로 생활하고 뛰놀던 경험, 그리고 수로안내인 경험은 이후 트웨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67년 첫 단편집 [캘리베러스군(郡)의 명물 뛰어오르는 개구리]를 내놓았고,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각각 1876년과 1884년에, [왕자와 거지]는 1881년에 내놓았다. 트웨인의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종종 미국의 학교에서 금서로 지정됐다. 예컨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트웨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흑인을 비하하는 표현, 대표적으로 ‘Nigger’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하여 인종적 편견을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로 금서가 되기도 한다. 물론 트웨인에게 흑인을 비하할 의도는 없었고, 오히려 흑인들이 차별 받고 천대받는 현실을 여실하게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매체 기고와 작품 활동으로 트웨인은 많은 돈을 벌어들였지만, 수입의 상당 부분을 발명에 쏟아 부었고,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와 친하게 지내며 그의 연구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트웨인은 유아를 위한 침대 부속, 새로운 방식의 증기 엔진, 콜로타입 인쇄기, 개량 허리띠, 식자기계 등을 발명했지만 쓸모나 수익성 측면에서 성공적이지 못했다.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은 작품 [아더왕 궁정의 코네티컷 양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작품에서 미국인 시간 여행자는 아더왕 시대 영국에서 과학 지식을 활용한다. 이 작품 때문에 그를 과학소설(SF) 장르의 선구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발명에 많은 돈을 쓰고 출판사 경영, 기타 여러 투자에서도 실패해 트웨인은 재정적으로 큰 곤란에 빠졌지만 강연과 작품 활동을 통해, 그리고 1893년부터 우정을 쌓기 시작한 친구 스탠더드오일 회장 헨리 H. 로저스의 도움으로 점차 극복할 수 있었다. 로저스는 채권자들이 작품 저작권을 가져가는 걸 막기 위해 트웨인의 저작권을 아내 올리비아 소유로 해놓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트웨인은 헬렌 켈러와도 절친했다. 헬렌 켈러가 1903년에 내놓은 자서전을 읽고 크게 감명 받은 트웨인은 헬렌 켈러에게 편지를 보내 감동을 표현했고, 그녀가 래드클리프칼리지에 진학했을 때 로저스에게 그녀를 소개해 학비를 지원하게 했다.
마크 트웨인은 진보적인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제국주의에 강하게 반대했다. 1901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미국 반(反)제국주의연맹의 부의장이었다. 이 연맹은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는 데 반대했다. 1906년 미군이 필리핀에서 어린이와 부녀자들을 포함한 600여 명을 죽인 모로족 학살 사건을 규탄하는 내용의 [필리핀 사건]은 그의 사후인 1924년에 출간됐다. 그는 유럽의 제국주의에도 매우 비판적이어서, 대영제국의 판도를 확장시킨 세실 로드, 아프리카 식민지 확장을 꾀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1882년1월. <하퍼스 위클리>에 실린 마크 트웨인의 캐리커쳐
필리핀-미국 전쟁 당시 트웨인은 반전(反戰) 우화 [전쟁을 위한 기도]를 집필하여 <하퍼스 바자>에 투고했지만 <하퍼스 바자> 측은 “여성지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게재를 거부했다. 트웨인은 이 일이 있고 며칠 뒤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이 기도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출간될 수 없을 것 같군. 죽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려나.” 트웨인은 <하퍼스 바자>를 발행하는 하퍼앤브라더스 출판사와 독점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전쟁을 위한 기도]를 다른 곳에서 발표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사후 1923년에야 출간될 수 있었고, 이후 반전 문학의 고전으로 평가 받아왔다.
트웨인은 여성의 권리 신장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연을 통해 알리는 데 열심이었다. 노동 운동과 노조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지지 입장을 표명했고, 노예제도 철폐를 지지했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은 흑인 노예들은 물론, 백인들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는 흑인 학생이 예일대 법과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학비를 댔고, 역시 흑인 학생이 성직자가 되기 위해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지원했다. 그는 러시아 혁명가들을 지지했고, 그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러시아 황제를 비판했다. 기독교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던 그는 특히 기독교회의 해외 선교가 사실상 제국주의 침탈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 계시다면, 그 분께서는 기독교인이 되려 하지 않으실 것이다.” 트웨인이 세상을 떠난 뒤 가족들은 논란에 휘말리기 싫어서 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공개하지 않으려 했다. 트웨인은 프리메이슨 단원이기도 했다.
1896년 트웨인의 딸 수지가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904년에는 아내 올리비아가 세상을 떠났고 1909년에는 딸 진이 세상을 떠났다. 수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 트웨인은 의기소침과 우울에 시달렸다. 1909년 트웨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1835년 핼리 혜성과 함께 태어났다(1835년 핼리 혜성이 지구에 근접한 날로부터 2주 뒤에 태어남). 이제 내년에 핼리 혜성이 다시 온다. 나는 혜성과 함께 떠나고 싶다. 그렇지 못하다면 내 인생 최대의 실망을 느낄 것 같다.” 1910년 4월 21일, 핼리 혜성이 지구에 근접한 다음 날 마크 트웨인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한 당시 미국 대통령 윌리엄 태프트의 말이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 진정으로 지적인 즐거움을 주었다. 그의 작품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게 될 것이다. 그의 유머는 분명 미국적인 것이었지만, 그의 고국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높이 평가 받았다. 그와 그의 작품들은 미국 문학에서 영속적인 유산으로 지속될 것이다.”
[마크 트웨인 자서전] 트웨인은 자서전이 자신의 사후에 출간되기를 원했다. “무덤에서라야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에게 글을 쓰는 일은 “언제나 놀이였지 노동이었던 적이 없었고 그 일을 마치 당구처럼 즐겼다”고 말한다. 이 책에 대한 영문학자 고(故) 장영희 교수의 추천사는 다음과 같다. “대작가 마크 트웨인이기 전에 인간 마크 트웨인으로서 철저한 자기성찰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자상한 남편과 아버지, 이웃으로서의 모습과 쾌활하고 자유분방한 성격, 삶을 꿰뚫는 예리한 풍자 밑에 흐르는 슬픔과 페이소스가 담겨 있는 자서전 문학의 정수이다.”
[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게 사는 법] 마크 트웨인의 편지, 자전적 글, 연설문, 소설, 미발표 원고 등을 모아 엮은 책. 날카로우면서도 유머러스한, 진지하면서도 익살스런 그의 면모와 만날 수 있다. “모레 해도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일을 내일까지만 미루지 말라.” “잘 때는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고, 깨어 있을 때는 절대 삼가지 않는 것이 제 한결같은 원칙이었습니다.”
[살인, 미스터리 그리고 결혼] 마크 트웨인의 데뷔작을 포함한 중단편 5편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표제작 ‘살인, 미스터리 그리고 결혼’(1876년 발표)은 2001년 미국에서 원고가 발견되어 빛을 보게 된 작품이다. ‘귀신 이야기’는 1990년대에 원고가 발견되어 이후부터 나온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하나의 에피소드로 삽입되게 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