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후손은 어디서 살까
임병식rbs1144@daum.net
최근 유튜브를 통해서 100여 년 전 구한말의 모습을 시청했다.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갑신정변(1884년) 이후 1910년 어간에 한국을 네 차례 다녀간 것을 제작한 영상물이었다. 나는 이 영상물을 대하기 이전에, 그녀가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란 저서를 읽은 바가 있었다.
내용은 책의 부제에 달린 ‘백 년 전 한국의 모든 것’이란 것에서 말하듯 구한말의 모습을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쓴 기행문이었다. 어찌나 알차고 정밀한지 글을 읽으며 관찰력에 놀랐다. 그런데 이번에 카메라에 담은 영상물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구한말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나 특징, 삶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귀한 것들을 잘 담아놓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시장의 풍경, 일상적으로 입고 사는 의복, 아이를 키우는 모습과 농악놀이, 옹기 굽는 가마와 장례 풍속 등을 소상하게 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건 장례풍속 중 사람이 죽어서 염하는 모습, 상여 나가는 광경, 묘 쓰는 것까지 차례로 사료화 하여 담아놓은 것이었다.
그것을 쓰면서 말하길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3년 동안을 상중(喪中)에 있었는데, 기간이 너무 길어서 줄여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 것이 눈길이 갔다. 지금은 개선이 되어서 그보다도 훨씬 짧은 기간에 삼우제를 지내고 거의 마감을 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때도 이미 ‘장례의 간소화’가 논의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관련하여, 이보다 훨씬 전인 150여 년 전 , 조선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하멜이 쓴 표류기를 보면 사람이 죽어 경황없는 모습을 묘사해 놓은 대목이 이색적이다. 사람이 죽으면 자식들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며 울부짖는다고 기술해 놓았다.
그에 비해 비솝 여사가 담아놓은 영상물은 그렇게 과도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에 상중에는 검은 옷을 입지 않는다는 말이 보이는데, 내가 고향에 살적에 보면 사람들이 급한 일이 아니고서는 들일을 하지 않고, 바느질도 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그것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지 않는가 한다.
나는 영상물을 보면서 그간 사람들의 살아가는 형편, 풍속이 조금씩은 달라졌어도 삶의 원형은 크게 바뀌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살아가는 의식도 별반 바뀐 것은 없을 터이다.
그것을 떠올리면 나는 또 다른 측면에서 어떤 것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지금은 알려지지 않는 어떤 사람의 후손에 대한 관심이다. 한 사람은 네덜란드 사람으로 조선에 귀화한 박연의 후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정약용 선생이 뒤늦게 얻은 서녀에 관한 생각이다.
박연은 1627년에 조선에 들어왔다. 이 해는 청이 정묘호란을 일으킨 때로 동인도회사 소속의 상선이 표류해 온 것이었다. 그는 조선에 귀화해 무관이 되었고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이보다 26년 후, 똑같은 경위로 또 한 사람이 조선에 들어왔다. 하멜이란 사람으로 그는 한국에서 13년간 억류해 있다가 여수에서 탈출을 했다. 그는 강진 병영에 소속되어 있다가 청나라 외교관에게 탈출을 부탁한 것이 발각되어 여수로 전출된 상태였다. 그는 여수에서 3여 년를 보내다가 기어기 탈출에 성공했다.
그렇다면 그에게도 자녀가 있지 않았을까. 하나, 조선에서 산 세월이 결코 짧지 않았음에도 자녀를 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강진 병영성에 그들의 주거지를 복원해 놓았을 뿐이다. 그로 미루어 보아 가정생활을 했다면 자녀를 두지 않았을까 짐작이 될 뿐이다.
그렇지만 하멜과 달리 박연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있다. 박연이 귀화한 때는 인조 연간. 그는 화포 제조 등 많은 공을 세웠다. 이에 비하여 하멜은 나중 효종 때에 들어왔으나 신무기 개발 등은 이바지한 업적은 보이지 않고 단지 붙잡혀 신문을 받은 기록이 눈길을 끈다.
“너희는 서양의 길리시단(크리스천)이냐?” 묻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것을 吉利是段 (길리시단)으로 적어놓고 있다. 아무튼 하멜 가족은 모르지만 박연은 후손을 두었으니 그 후 어떻게 핏줄이 이어져 왔는지 궁금증이 인다.
또 한사람은 정약용 선생의 막내딸 홍임(紅任)이라는 서녀이다. 순조연간에 금릉(지금의 강진)으로 귀양 온 정약용 선생에게는 허드렛일을 돕던 노인이 있었다. 그 집에는 20대에 과수가 된 딸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아버지를 도와 의복과 음식을 시중 들었다. 그러는 사이 둘 사이에서 홍임이 태어났다. 아이는 매우 영특했다.
그 정황은 다산 선생이 지은 남당사(南塘詞)라는 시첩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어린 딸 총명함이 제 아비를 닮아서 / 아비 찾아 울면서 왜 안 오냐 묻는구나.’ 또 다른 글. ‘정씨 집에 버림받고 김씨 집에 수절하니 강포함이 어찌 원망 깊지 않을까.’ ‘까마귀 봉황배필 원래 짝이 아니거늘 천한 몸 과한 복이 재앙 될 줄 알았으리.’
다산선생은 해배가 되자 홍임(紅任) 모녀를 데리고 고향 마현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부인 홍씨는 받아주지 않고 바로 내쫓았다. 오라 해 놓고 바로 내쫓은 호래척거(呼來斥去)를 한 것은 아니지만 매정하게 외면했다. 그 바람에 홍임 모녀는 왔던 길을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딸은 서제(전양황)에게 맡겨져 양육이 되어 다산선생은 한시름을 놓았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의하면 홍임 모녀는 길안내를 한 박생과 내통한 장성부호 김씨에게 능욕을 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이때 그녀는 “나는 조관의 첩이다”라고 당당하게 꾸짖어 물리쳤다고 한다.
고향에 돌아온 그녀는 바로 남당 집으로 가지 않고 선생이 기거한 초당에 머물며 원망을 하면서도 차를 따서 보내며 그리워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런 여인의 소생인 홍임도 나중 어떻게 피를 이어갔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알고 보면 사연 있는 사람이 어찌 이들 뿐일까. 전쟁과 자연재해, 풍파 많은 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병란이 있었고, 전쟁과 폭정에 시달린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때마다 상처입고 찢겨진 가족사가 어찌 한둘이었을 것인가.
그래도 목숨들은 질기고 질겨서 신고의 삶을 이어온 것이다. 그런 중에도 기록의 귀퉁이에 남아 전해오는 행적에 대해서는 많은 궁금증이 인다. 그중에도 특히 떠오른 것이 박연의 자손과 홍임의 후손인데 그에 관한 소식이 퍽 궁금하다. (2022)
첫댓글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구한말 조선의 생활상이 적나라하게 기록되고 영상으로 보존된 점은 실로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하멜이 박연을 만난 시기를 보면, 박연은 73세까지 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그 후 몇 살까지 살았는지는 기록이 없다는군요.
다산의 서녀에 대한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네요 조선에서 여염집 아녀자들의 행적은 출가했다면 시가의 족보에 기록될 터인즉 의당 다산집안의 족보에 올라야 할 것인데 아마 그러지도 못했는가 봅니다.
서양인에 의해 구한말의 생활상이 그대로 자료로써 남아 있는 건 참으로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료가 없었다면 얼마나 실망이 크겠습니까.
박연은 1남1녀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고, 다산선생도 홍임이라는 서녀를 두었다는 기록과 시문이 있는데
그 후손들이 누구인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잘 핏줄이 어어져 내려오고 있기를 바라봅니다.
2023 수필세계 봄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