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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아함경(中阿含經)
「중아함경」은 총 60권으로 18품 222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구담승가제바가 한역했다. 구담승가제바는 인도 계빈국 출신으로 중국식 이름으로는 중천(衆天)이라고 하는데, 혜원(慧遠), 축불념 등과 함께 주로 논서를 번역했다. 그는 중국에 머물면서 불전을 강의하며 중국어를 공부하는 도중, 기존 아함경 번역이 미비한 점을 발견하고선 「중아함경」의 번역에 착수, 약 7개월에 걸쳐 끝냈다.
「중아함경」이란 이름은 「장아함경」에 나오는 경전처럼 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잡아함경」에 보이는 짧은 경전도 아닌, 중간 길이의 경전만 모아놓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상경」, 「세간경」, 「제법분경」 등과 같이 500자 미만으로 된 아주 짧은 경전도 들어 있고, 「전륜왕경」, 「식문경」, 「우담바라경」, 「비사경」처럼 긴 경전도 들어 있다. 이 「중아함경」에서 주로 설하고 있는 내용은 4제, 12인연을 비롯해서 부처님의 인연담과 여러 불제자들의 수행담이다.
그러면 「중아함경」에서 주목할 만한 경전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수유경(水喩經)
이 경은 제1권에 들어 있으며, 말 그대로 물에 비유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과 열반에 이른 사람을 일곱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항상 물 속에 누워 있는 사람. 이것은 번뇌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바른 법을 알지 못해 끝없이 육도를 윤회하는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둘째, 물에서 일단 나왔다가 다시 빠지는 사람. 한때 올바른 법을 배워 믿음을 가졌으나, 그것이 견고하지 못해 다시 번뇌의 세계로 빠져버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셋째, 물에서 이미 나와 머무르는 사람. 지계, 보시, 다문, 지혜의 선법을 닦아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 나중에라도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넷째, 물에서 이미 나와 머무르고 머무른 뒤에는 살펴보는 사람. 사성제를 깨닫고 삼결(三結)을 다한 사람으로, 삼결이란 몸이 있다는 생각과 계율에 대한 집착과 의심을 말한다. 삼결이 다하면 곧 수다원과를 얻어 천상과 인간 세상을 일곱 번 오간 뒤에 모든 괴로움을 떨친다.
다섯째, 물에서 나온 뒤 머무르고 머무른 뒤에는 살펴보고 살펴본 뒤에는 건너가는 사람. 삼결이 다한 후 삼독심마저 없어져 천상과 인간 세상을 한 번 왕래한 후에 모든 괴로움을 떨치게 되는 사람을 말한다.
여섯째, 물에서 나온 뒤 머무르고 머무른 뒤에는 살펴보고 살펴본 뒤에는 건너가고 건너간 뒤에는 저쪽 언덕에 이른 사람. 오하분결(五下分結), 즉 탐욕과 성냄, 몸이 있다는 소견, 계율에 대한 집착, 의심을 다한 바 천상에 나서 열반에 이르고 다시는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일곱째, 물에서 나온 뒤 머무르고 머무른 뒤에는 살펴보고 살펴본 뒤에는 건너가고 건너간 뒤에는 저쪽 언덕에 이르며 저쪽 언덕에 오른 뒤에 그곳에 머무르는 사람. 번뇌와 무명에서 해탈하여 다시는 후생의 몸을 받지 않는 마지막 단계에 이른 사람을 가리킨다.
이 경의 다른 번역으로는 「불설함수유경」과, 「증일아함경」 안에 있는 '등법품'이 있다.
도경(度經)
이 경은 제3권에 들어 있는데, 주의깊게 보아야 할 것은 바로 3종외도설이다. 부처님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외도의 견해를 크게 3종으로 분류해서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첫째, 사람이 행하는 바는 모두 숙명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모든 것이 숙명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일체의 생명을 다 죽이는 사람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숙명에 기인하는 것이기에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해서 도무지 의욕도 없고 방편도 없을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해탈의 세계로 넘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악행을 많이 했다고 해도 그것이 숙명적인 것이라면 그 악행을 저지른 인간에게 무슨 책임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부처님은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사람이 행하는 바는 모두 존우(尊祐, 창조주)에 기인하는 것이다.
만약 절대신인 창조주가 있어 세계와 인간을 창조했다고 하면, 인간은 결코 세상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신의 피조물로서 복종적인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길흉화복이 모두 신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하면, 도대체 인간이 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주체성과 자유의지가 없는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창조론 또한 부정하는 것이다.
셋째,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은 그 어떤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견해는 일종의 우연론으로서 인과응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연론은 도덕부정론이나 허무주의로 빠지기 십상이다. 또한 이 견해에 따르면 어떤 필연적 원리도 없게 되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고,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고 하는 어떤 노력도 소용없게 된다. 따라서 부처님은 우연론 또한 취할 바가 못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결국 3종외도설을 부정하는 부처님의 세계관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주체적인 노력과 실천을 통해 존재의 필연성, 즉 연기의 법칙을 통해 존재의 자성(自性)이 공함을 깨달아 해탈의 세계로 넘어가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경(思經)
이 경은 제3권에 들어 있으며, 부처님이 3업에 대해 설법한 내용을 싣고 있다. 3업이란 몸과 입과 마음, 즉 신구의(身口意)로 짓는 업을 말한다. 먼저 신업에는 다음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살생이고, 둘째는 도둑질이고, 셋째는 사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구업에는 거짓말, 이간하는 말, 추한 말, 아첨하는 말의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의업에는 탐욕심, 미워하고 성내는 것, 삿된 소견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이 모두를 합해 십업(十業)이라 부르기도 한다.
부처님은 일부러 짓는 업이 있으면 반드시 현세나 내세에 그 과보를 받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고의성이 없는 업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파라뢰경(波羅牢經)
이 경은 제4권에 들어 있다.
어느 날 파라뢰라는 천인(天人)이 부처님을 방문해서, 부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환영이라고 했으니 부처님 자신도 환영인가 하고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파라뢰에게 스스로 잘못해서 여래를 비방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부처님은 자신은 환영을 알고 그 과보를 알고 있으며, 환영을 끊을 줄 안다고 말하면서 여래를 모독하는 것은 아주 큰죄를 짓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에 파라뢰는 당장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면서, 자기가 만난 외도의 견해를 말하고 있다. 그 외도의 견해에 따르면 어리석고 무지해서 생물을 죽이거나 여자를 겁탈하고 술을 마시고 거짓말하며 도둑질을 해도 악업을 짓는 것이 아니며, 그 과보도 없다고 한다. 또 남을 칭찬하고 고운 말을 쓰며 보시를 해도 선업을 짓는 것이 아니며 그 과보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부처님은 선업과 악업에는 반드시 그 과보가 있으며, 항상 일체 세간을 사랑하고 자비심을 내서 중생과 더불어 다투지 않고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자 파라뢰는 삼보에 귀의하고 죽을 때까지 부처님을 따르는 재가신자가 되겠다고 맹세한다.
분별성제경(分別聖諦經)
이 경은 제7권에 들어 있으며, 사리불 존자가 부처님을 대신해서 사성제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사성제는 이미 살펴본 적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사리불 존자의 8정도에 관한 설법을 들어보도록 하자.
"어떤 것이 정견(正見)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苦)를 고라고 생각 할 때, 집(集)을 집이라고 할 때, 멸(滅)을 멸이라고 할 때, 도(道)를 도라고 생각할 때, 혹은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거나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거나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혹은 집착이 없는 착한 마음의 해탈을 생각하여 관찰할 때, 두루 가리어 가진 법을 결정하며 두루 보고 관찰하여 환히 안다. 이것을 정견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정사(正思)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를 고라고 생각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거나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혹은 모든 행의 재환을 보거나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혹은 집착이 없이 착한 마음의 해탈을 생각하여 관찰할 때, 그중에서 마음으로 살피고 두루 자세히 살피고 그것을 따라 살피어, 생각할 만한 것이면 생각하고 바랄만한 것이면 바란다. 이것을 정사라고 한다.
어떤 것이 정어(正語)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를 고라 생각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혹은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고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고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집착이 없이 마음의 해탈을 잘 생각하여 관찰할 때, 그중에서 입의 네 가지 묘행은 제하고 다른 모든 입의 악행은 멀리 떠나고 끊어 없애어, 행하지도 않고 짓지도 않으며, 합하지도 않고 모으지도 않는다. 이것을 정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정업(正業)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를 고라고 생각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혹은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고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혹은 모든 행의 재환을 보고 혹은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집착이 없이 마음의 해탈을 잘 생각하여 관찰할 때, 그중에서 몸의 세 가지 묘행은 제하고 다른 모든 몸의 악행은 멀리 떠나고 끊어 없애어 행하지도 않고 짓지도 않으며, 합하지도 않고 모으지도 않는다. 이것을 정업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정명(正命)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를 고라고 생각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고 혹은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고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집착이 없이 마음의 해탈을 잘 생각하여 관찰할 때, 그중에서 무리하게 구하지 않고 욕심이 적어 만족할 줄 알며 온갖 기술과 주술의 삿된 직업으로써 생활하지 않고 다만 법으로써 옷을 구하며, 법이 아닌 것을 쓰지 않으며, 또한 법으로써 음식과 자리를 구하며, 법이 아닌 것은 쓰지 않는다. 이것을 정명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정정진(正精進)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를 고라고 생각 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혹은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고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고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집착이 없이 마음의 해탈을 잘 생각하여 관찰할 때, 그중에서 만일 정진 방편이 있으면, 한결같이 꾸준히 힘써 구하고 힘차게 나아가 오로지 전념하여 버리지 않으며, 또한 지쳐 물러나지도 않고 바르게 그 마음을 항복받는다. 이것을 정정진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정념(正念)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를 고라고 생각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혹은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고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고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집착이 없이 마음의 해탈을 잘 생각하여 관찰할 때, 그중에서 만일 따르는 생각은 생각하고 향하지 않는 생각은 등지며, 두루 생각을 기억하여, 바르게 마음이 응하는 바를 잊지 않으면, 이것을 정념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정정(正定)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를 고라고 생각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혹은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고 혹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고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혹은 집착이 없이 마음의 해탈을 잘 생각하여 관찰할 때, 그중에서 만일 마음이 머무르고 선(禪)이 머무르고 순(順)함이 머물러, 어지럽지 않고 흩어지지 않아 바른 집중을 거두어 잡으면, 이것을 정정이라고 한다."
이 경전에서 부처님은 사성제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의 정행설법(正行設法)임을 강조하고는, 지혜제일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리불 존자에게 그 자세한 설명을 부촉하였다. 이에 사리불 존자는 사성제를 설명하고, 깨달음을 향한 실천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팔정도를 위와 같이 설명했던 것이다.
미증유법경(未曾有法經)
이 경은 제8권에 들어 있는데, 미증유법이란 지금까지 있어본 적이 없는 법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부처님의 시중을 들었던 아난이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측면을 말하고 있다. 그중 몇몇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처님은 탄생할 때 몸을 편 상태로 나왔으며, 피나 기타 부정한 것에 더럽혀지지 않았다.
둘째, 부처님이 나무 밑에서 선정에 들면 한낮이 지나도 나무는 그 그림자를 옮기지 않았다.
셋째, 부처님이 비사리 성에 계실 때 방석을 널어놓은 적이 있는데, 먹구름은 부처님이 방석을 거두기를 기다렸다가 큰비를 내렸다.
넷째, 부처님은 선정에 들면 바로 옆에 벼락이 떨어져도 듣지 못했다.
다섯째, 마왕 파순은 6년 동안이나 부처님의 허점을 찾아 쫓아다녔으나, 찾지 못하고 그만 지쳐 돌아갔다.
아난이 이처럼 부처님의 불가사의를 말하자, 부처님은 현상적인 불가사의를 넘어 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진짜 불가사의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수법경(受法經)
이 경은 제45권에 들어 있다. 이 경전에서 부처님은 네 가지의 받는 법에 관해서 설법한다. 그 첫째는 현재는 즐겁지만 미래에 괴로운 과보를 받는 것으로, 예를 들면 여색을 밝히다가 훗날 지옥에 떨어져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현재는 괴롭지만 미래에 즐거운 과보를 받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수행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돌이켜보며 절제하는 생활을 통해 나중에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현재도 괴롭고 미래에도 괴로운 과보를 받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잘못된 고행으로 심신을 괴롭히다가 나중에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넷째는 현재도 즐겁고 미래에도 즐거운 과보를 받는 것이다. 이것은 삼독심을 떨치고 청정하게 수행하다가 그 결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을 말한다.
바로 네 번째가 불교에서 추구하고 있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계경(多界經)
이 경은 제47권에 들어 있다. 부처님이 사위성 급고독원에 있을 때, 제자 아난은 혼자 명상에 잠겨 있다가 '모든 두려움은 지혜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에서 생긴다'는 생각이 들자 부처님을 찾아가 그 생각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아난의 견해가 옳다면서 이렇게 부연 설명을 한다.
"그렇다, 아난아. 그렇다, 아난아. 모든 두려움은 지혜에서 생기지 않고 어리석음에서 생긴다. 모든 사고와 재앙과 걱정과 슬픔은 지혜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아난아, 마치 갈대무더기나 풀무더기에서 불이 나 누각과 집을 태우는 것처럼, 그와 같이 모든 두려움은 지혜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부처님의 설명을 듣고 난 아난은 지혜로운 비구란 어떤 비구인지를 묻는다. 이에 부처님은 62계와 12처, 그리고 12인연을 잘 알고 있는 비구라야 지혜로운 비구라고 말한다.
다제경(嗏帝經)
이 경은 제54권에 들어 있다. 어느 날 다제라는 비구는 부처님이 열반의 세계에도 의식작용은 남아 있다고 말씀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말은 들은 다른 비구들은 다제에게 의식작용도 인연의 산물이므로 인연이 없어지면 자연히 소멸하는 것이라고 일깨워줬다. 그러나 다제는 자기 주장을 버리지 않았다.
이에 부처님은 의식작용은 인연에 의해 생기하는데, 그것은 마치 나무가 있어야만 불이 계속 타오를 수 있고 나무가 없어지면 불도 스스로 꺼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진리를 모르고 다제와 같은 주장을 하면 부처님을 모함하고 계율을 어겨 스스로 죄를 짓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부처님은 고통의 근원에 관해 설법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어리석음 때문에 무엇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있다는 생각에 연유하여 의식작용이 일어나며, 의식작용으로 말미암아 감각이 생기고, 감각 때문에 욕심이 생겨서 생에 대한 애착이 생겨난다고 한다. 생에 대한 애착은 생로병사와 슬픔, 걱정, 번민을 불러일으키는 근원이 된다고 한다. 부처님은 지금 다제가 불법을 오해하고 있는 것도 바로 애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며, 여러 비구들에게 애욕을 없애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전유경(箭喩經)
이 경은 제60권에 들어 있는데, 독화살의 비유로 매우 유명한 경전이다. 이 경은 「불설전유경」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번역되어 있기도 하다.
어느 날 만동자는 명상을 하다가 부처님이 세상 만물의 영원성 여부와 목숨의 영원성, 그리고 죽음의 유무 등 소위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관해서 설법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만동자는 세상이 영원한 것이라고 하면 계속 수행을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면 포기하겠다는 생각에서 부처님을 찾아가 앞에서 말한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대한 답을 요구한다.
만동자의 물음에 부처님은 그 어리석음은 마치 독화살을 맞은 사람이 화살을 뽑을 생각은 하지 않고, 활을 쏜 사람이 누구고 그 활의 재료는 무엇이며 등등을 알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독화살을 맞은 사람은 그런 사실들을 다 알기 전에 반드시 죽어버리듯이 만동자 역시 그런 생각만을 하다가는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부처님의 입장을 무기(無記)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질문에 가부를 대답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불교는 현실 세계의 고통을 벗어나 해탈을 추구하는 이른바 실천적이고도 현실적인 가르침이지, 결코 인간의 인식의 경계를 넘어서 있는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형이상학은 아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설법은 번뇌의 원인을 밝히고 그것을 없애는 방법을 위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이 대답하지 않았던 물음들을 정리해보자. 세계 및 나는 상주하는 것인가? 중생은 사후에 존재하는 것인가, 아닌가? 명(命)과 신(身)은 동일한 것인가, 아닌가 등이 그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아함경 [中阿含經] (한 권으로 읽는 팔만대장경, 2007.6.10, 들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