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중립론
통일 한국은 중립국이어야 한다.
임진왜란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에서 비롯된 조선의 현실을 잘 나타낸 전쟁이었다. 조선 건국 당시의 외교원칙이었던 사대교린은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의 약점을 극복하기위한 계책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이 건국할 무렵에 일본 열도에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 가끔 조선 해안 마을에 출몰하는 해적떼 정도로 치부하여 왜적이라고 불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열도를 통일하고 조선을 침범했을 때도 왜적이 출몰했다고 고집하고 임진왜란이라고 했다. 아마 사대의 대상인 명을 제외하고는 조선이 그 다음이니 일본을 국가로 인정하기 싫어서 였을 수도 있다. 아무튼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전쟁 즉 조일전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을 칠 터이니 조선은 명으로 가는 길을 내 달라고 조선에게 요구했다. 이를 거부하는 조선을 침략했다. 중국을 침략하려면 한반도를 먼저 점령해야 한다는 공식이 역사상 처음으로 현실화 된것이었다.
명은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면 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조선 파병을 망설였다. 결국 자국의 방어에 조선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명은 이여송을 대장으로 조일전쟁에 개입했다. 조선에 들어온 명군은 평양성을 탈환한 후 적극적으로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화회담에 몰두했다. 조선은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전쟁전의 국토를 회복하려고 헀지만 명은 그렇지 않았다. 필요이상으로 남의 나라 전쟁에 많은 전비와 병력을 소비하지 않으려 했다. 명을 섬기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일본과 명나라 사이에 존재하면 만족이었다. 말하자면 일본과 명나라 사이에 완충지대 확보가 최종 목표였다.
이순신은 남해와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육로로 북상한 일본군은 극심한 보급난에 허덕였다. 한마디로 군량미가 턱없이 부족했다. 평양까지 진격한 일본군은 의주로 도망가는 선조를 추격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명과 회담을 시작했다. 토요토미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일본에게 양도하면 전쟁을 그만 두겠다고 했다. 명도 이에 커다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 회담에 조선은 완전히 제외 되었다. 명과 일본의 암약이 거의 성사될 뻔했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명의 황제에게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하고 있어어서 도요토미와 명의 황제에게 회담 내용을 속이다가 도요토미가 알게 되어 평화협상은 결렬되고 격노한 토요토미가 정유재란을 일으키게 된다.
정유재란은 도요토미의 복수전이었다. 임진전쟁 때는 이순신의 완벽한 승리와 진주성 방어로 일본군이 곡창지대인 호남을 범하지 못했다. 명과 일본의 평화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전쟁이 수구러 들기 시작했는데 이때 선조가 이순신을 잡아들이고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에게 괴멸되었다. 일본지상군이 호남에 상륙했다. 임진왜란 때는 도요토미의 명령에 따라 조선 민간인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런데 정유재란 때는 모두 불태우고, 다 도둑질하고, 다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조선인들 코를 베어서 가져오면 그 수에 따라 포상했다. 수 많은 도공들이 잡혀갔다. 진수성과 남원성이 함락되고 민간인 군인 할 것없이 몰살했다. 이때부터 조선사람들은 일본사람들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전쟁은 전쟁의 원흉 도요토미가 사망하여 끝났다. 도요토미의 맡수였던 이순신도 노량진 전투에서 사망했다.
300여년 후 도요토미의 망령이 되 살아났다. 명치 유신으로 강국이 된 일본이 기지개를 켜기시작했다. 일본은 조선의 사대국이었던 청을 제압하고 부동항을 확보하여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을 차지했다. 일본은 중국 대륙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확보하였고 중국은 일본으로 부터의 침략을 막아주던 완충지대를 상실했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한 다음 중국을 침략했다. 한동안 도요토미의 꿈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중국은 너무나 크고 사람이 너무나 많고 그들의 저항은 너무나 거세었다. 미국에게 항복한 일본은 중국에게도 항복했다.
의지할때가 없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만주, 시베리아, 중국에서 일본군과 싸우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일본은 중국과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공동의 적이었다. 일본이 중국과 싸우는 동안 중국은 장제스(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중국을 대표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김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원조해 주었다. 만약 장제스의 원조가 없었다면 임시정부가 유지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하듯이 그가 그냥 윤봉길의사가 중국의 원수를 갚아준것이 고마워서 그랬을 리는 없다.
장제스는 김구의 임시정부가 일본 총독부로 부터 정권을 인계 받기를 원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한반도에 친중국 정부가 들어서서 중국과 일본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제스는 1945년-1949년 4년 동안의 중국내전에서 머우 재둥(모택동)에게 패하여 대만으로 피난했다. 그 동안에 한반도에는 인공과 한국이 38선을 경계로 북과 남에 생겼다. 인공은 소련이 후견국이고 한국은 미국이 후견국이었다.
인공이 소련의 허락을 받고1950년6월25일 한국을 침공했다. 미국은 남한이 일본방어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고 하며 전쟁에 개입했다.한국와 인공의 전쟁은 순식간에 미국과 인공의 전쟁으로 바뀌었다. 낙동강
유역까지 몰렸던 미군과 유엔군 그리고 국군은 인천 상륙적전을 계기로 반격하여 1950년 10월 38도선을 넘어
북진했다. 평양을 점령하고 남북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중공군이 북한에 들어왔다. 중공의 저우 엔라이는 개입하기 전 인공은 중공의 방위에 기장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미군이 38선을 넘어오면 중공군이 개입할 것이라고 수 차례 경고했다.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은 한국전쟁을 미국과 중공의 전쟁으로 바꾸었다. 중공은 인공의 통치지역에서 미군, 유엔군, 국군을 패퇴 시키고 인공을 바로 세웠다. 중공은 한반도에 친중공 국가를 존속하게 하여 종래의 완충지역을 확보했다.
러시아가 공산화 되어 소련이라는 거대한 공산국가의 등장은 미국에게 큰 위협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미국이 지원하던 국민당이 패퇴하고 공산국가 중국공화국(중공)이 등장했다. 거기다가 인공까지 태평양에 접하고 있는 공산국가였다. 미국은 패전국 일본을 강하게 만들어 중공과 소련의 태평양 진출을 막으려는 전략을 견지해 왔다.
한국은 일본의 방어에 없어서는 안될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한국은 미국 및 일본과 중공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통일 한국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결론 부터 말하면 어느편이 될 수도 없다. 적어도 중공과 미국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해야 만이 강대국이 인정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 친미 나라로 통일하려 하면 중공이 절대 반대할 것이고 친중공 나라로 통일하려 하면 미국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중립국이 되어야 하는데, 중립국을 주장하려면 국력과 남북 합의가 문제이다. 여간 국력이 강하지 않고는 미국과 중공이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남북 합의는 인공의 정부가 좀더 합리적인 통치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다고 인공이 현재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바뀔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반도는 강대국 간의 왼충지대이다. 이것이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의미한다. 한반도의 평화는 우리가 통일된 국가의 국민으로서 완충지대임을 선언 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