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오늘은 성탄 1주일이자 2023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나갑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지난 설교들을 꺼내 다시 한번 살펴보니, 2017년이 올해처럼 성탄 1주일과 12월 31일이 겹쳐 있었습니다. 2017년은 제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병이 처음으로 발병한 해였습니다. 그날 설교 서두에는 힘들었던 한 해를 보낸 감회가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것입니다. 정말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6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난 것입니다.
저에게는 시간이 일주일 단위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그 중심에는 주일이 있습니다. 주일에 여러분을 만나 예배를 드리고, 다른 날들은 주일을 준비하며, 수요일과 금요일에 밴드모임을 갖고, 또 매일 아침 그날의 성서정과 말씀과 정오에 정오의 찬양을 올립니다. 매일 그 일을 반복하고, 또 매 주일 여러분과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리다 보면 어느새 한 달이 가고 또 일 년이 훌쩍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양한 시간의 형태가 느껴집니다.
제가 좋아하는 러시아의 종교철학자 베르쟈예프라는 사람은 시간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원적인 시간입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시간인데, 우주와 자연의 시간이 그렇습니다. 사실 한 해라는 것도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는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것입니다. 아침이 오고 낮밤이 지나면, 또 새로운 아침이 옵니다. 그리고 일 년은 봄여름가을겨울 이 사계절이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반복하는 가운데 우리는 새로운 느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똑같은 하루와 똑같은 한 해가 반복되면 어느 순간 새로운 느낌을 잃어버리기 마련입니다. 수많은 사람의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것도 크게 보면 원적인 시간 구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시간 유형은 직선적인 시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시간 개념입니다. 즉, 과거 현재 미래로 진행되는 직선의 시간입니다. 한 번 지난 시간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한 번 시작된 시간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갑니다. 군대에 있을 때 고참들이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돌아간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는데,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탄생했으면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시간도 창조로부터 종말로 이어지는 긴 직선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시간은 점적인 시간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직선의 시간 개념을 초월한 시간 개념입니다. '지금 여기'라는 실존적 시간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초월의 시간입니다. 사람이 죽기 전에, 혹은 어떤 위기의 순간에 직면했을 때 종종 아주 짧은 찰나에 자신의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경험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때가 바로 이런 시간입니다. 시계로 측정되는 물리적인 시간은 일정한데, 개인적인 느낌에 따라서 순식간에 지나가기도 하고, 또 엄청나게 느리게 가는 현상도 이런 시간의 유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직선의 시간이 인간의 시간이라면, 점의 시간은 하느님의 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점의 시간은 바로 하느님이 개입하는 시간입니다. 혹자는 인간의 시간을 '크로노스'로 부르고, 하느님의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개입을 통해 순간은 영원으로 승화합니다. 다시 말해 한 순간의 점과 같은 시간이 모든 시공간을 관통하는 영원의 시간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말씀에는 크로노스의 시간에 카이로스의 시간이 개입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평범한 일상 가운데 하느님이 개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두 명의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시므온과 안나입니다. 이들은 모두 평생에 걸쳐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믿음을 지켜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인생의 말년에 드디어 탄생하신 아기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성탄이 거의 마지막 순간에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들이 경험한 성탄은 아주 평범해보이는 일상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성서 본문에 마리아와 요셉은 그 당시 아기를 출산한 여느 부모처럼 관례에 따라 정결 예식을 치르러 왔습니다. 그 당시 유대사회는 사내아이를 낳았을 경우 40일 후에 산모가 정결해졌음을 증명하는 예식을 치르는 규정이 있었습니다.(레위기 12장) 보통의 경우는 새끼 양 한 마리를 예물로 바쳤는데, 가난한 사람의 경우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두 마리로 바치곤 했습니다.(레위 12:8) 이를 통해 요셉과 마리아의 살림이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부모는 관례대로 예식을 치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때 예루살렘 성전은 비슷한 예식이나 이런저런 이유로 성전을 방문한 사람들로 북적였을 겁니다.
그때 성전에는 다른 많은 사람과 함께 시므온과 안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역시 꼭 이날만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성전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저 매일 그래왔듯이 성전에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서 본문에 시므온은 평생을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면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온 사람으로 그려지고, 여예언자 안나 역시 팔십여년 평생을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를 해 온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니 이들은 평생을 성전에서 살다시피 생활해온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과 마리아, 시므온과 안나 모두 아주 평범한 일상의 생활을 하던 중에 아주 특별한 만남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유독 이 두 사람만 알아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주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기다리며 자신의 삶을 성실히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시편에서 우리는 만물이 각자의 자리에서 창조주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5절과 6절입니다.
"야훼의 명령으로 생겨났으니, 그의 이름 찬양하여라. 지정해 주신 자리 길이 지키어라. 내리신 법은 어기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지정해주신 여러분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곳은 바로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일터, 그리고 이곳 계양교회입니다. 각자가 있는 자리에서 각자를 통해 이루실 하느님의 뜻을 기다리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여러분은 그 자리에서 여러분을 구원해주실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여러분의 삶이 가장 좋은 모습으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때는 반드시 오고야 맙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독일 시인이 있습니다. 20세기에 독일이 낳은 최고의 서정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입니다. 그의 작품 중에서 제가 대학생 때 열심히 읽었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가운데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예술가는 나무처럼 성장해가는 존재입니다. 수액을 재촉하지도 않고 봄 폭풍의 한가운데에 의연하게 서서 혹시 여름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일도 없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여름은 오니까요. 나는 날마다 그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오히려 내내 고맙기만 한 고통 속에서 그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인내가 모든 것이라고!” – 세 번째 편지 中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모든 신앙인은 시인 릴케가 말한 "나무처럼 성장해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겨울 추위가 혹독하고, 봄의 폭풍이 강력해도 반드시 올 여름을 기다리는 나무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인내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시므온과 안나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오늘 2독서로 읽은 갈라디아서에서도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카이로스의 때를 기다리며 오래 걸리고 길게 이어지는 크로노스의 시간, 때로는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것과 같은 원적인 시간들을 견뎌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아기의 부모는 주님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자기 고향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날로 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었다."(루가 2:39-40)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가신 예수님은 아주 작은 촌동네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로 30년을 사셨습니다. 이 무명의 30년 동안 주님은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행하시면서 자신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성탄은 우리에게 찾아온 카이로스, 즉 하느님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시간은 우리에게 언제나 감격으로 다가옵니다. 크나큰 은총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카이로스가 지나면, 곧 길고 지루하고 견디기 힘든 크로노스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이 시간은 우리가 참고 견뎌내야 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복음본문에서 아기 예수님을 향한 의인 시므온의 영광스런 예언에 마리아와 요셉은 감격했다고 나옵니다. 33절입니다.
"아기의 부모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을 듣고 감격하였다."
그런데 그 이후에 시므온은 마리아가 견뎌내야 할 인고의 시간들을 예고합니다. 34절과 35절입니다.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이 인고의 시간을 통해 우리 내부의 모든 것은 정제됩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의심과 불신앙과 거부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온전히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을, 오늘 2독서에서 말했듯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성장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내일이면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됩니다. 여러분 안에 심겨진 복된 성탄의 기운을 깊이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안에서 무언가 시작하시려는 하느님의 움직임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요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분주한 연말연시 틈틈이 조용히 하느님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맺혀질 열매로 성장할 생명의 씨앗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그 놀라운 기쁨을 느껴보시기를 이제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