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식의 지구촌여행' <제13회>
‘잃어버린 우리 땅’, 쓰시마(對馬島) 紀行
② 대마도 사람들은 대마국의 국민이다
시속 36노트, 273톤, 승선 인원 240명의 쾌속선 씨플라워호가 부산항을 완전히 벗어나자 대마도의 현황과 명소를 안내하는 비디오가 상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큐슈 북단, 동경 129도 북위 34도에 위치해 있으며, 거제도의 1.5배 크기(709평방km)이고, 한국 쪽으로 배를 깔고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는 새우 모양의 섬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제주도 다음이고, 일본에서는 사도가시마(佐渡島)와 아마미오오시마(蓉美大島)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섬입니다. 본섬 2개(上大馬, 下大馬)와 109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유인도는 5개입니다. 총인구 4만5천 명 중 2만 명이 외지인이라 하는데, 외지인들은 대체로 자위대 근무자, 공무원, 그리고 이즈하라에 국립의료원이 있어 은퇴한 연금생활자들이 이곳을 찾아와 여생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총인구의 3분의 1인 1만8천 명이 이즈하라에 삽니다. 주요 산업은 어업과 수산양식업인데, 취업 인구 30%가 여기에 종사합니다. 행정구역상으로 대마도는 나가사끼 현에 속해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관할 현청이 당연히 후꾸오까 현이어야 할 텐데, 당치도 않게 나가사끼 현에 속해 있는 것은 옛날 쇄국정책을 폈던 시절에 개항을 했던 곳이 이곳 대마도와 나가사끼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 두 곳을 한 곳에서 총괄 관리하기 위해 그랬다고 합니다. 대마도의 간선도로인 382번 국도가 나가사끼의 382번 국도의 끝에서 바다를 건너 이어져 왔다고 하는 것은 대마도가 나가사끼 현의 소속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행정 조직은 2군(카미아가타 군, 시모아가타 군), 6자치면(카미쯔시마쵸, 카미아가타쵸, 미네쵸, 토요타마쵸, 미쯔시마쵸, 이즈하라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2004년부터 6개의 쵸(町)를 하나의 쓰시마 시(市)로 통합할 예정이라 합니다. 섬 전체의 88%가 산악이며, 원시림에는 본토에서 볼 수 없는 코라이 키지(고려 꿩), 쓰시마 말, 쓰시마 사슴, 쓰시마 산고양이, 쯔나시마(綱島)의 흰 동백, 쓰시마 한란 등 대륙의 동식물이 서식합니다. 일본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대마도를 두고, ‘일본인이 한국으로 건너간 교류의 거점’이라며, 역사 왜곡의 주장을 펼칩니다. 그러나 대마도는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의 땅이었으며, 일본에 뿌리내린 우리 문화의 중간 기착지였습니다.
일본이 쇄국정책을 쓰고 있을 때에도 대마도에서는 학술과 문화가 활발히 전파되었고, 불교도 이곳을 경유하여 전래되었습니다. 유명한 미키와치, 히사미도자기도 이곳 대마도를 통하여 한반도로부터 전해졌습니다. 현대에 이르러는 1993년에 나가사끼 현 서울사무소가 이즈하라에 개설된 이후 우리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조선통신사가 쉬어 가는 곳으로서 한-일 간 인적, 물적, 문화적 교류의 창구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왜구의 조선 침략 근거지로서 우리와 악연이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신라의 박제상이 인질이 된 왕자를 탈출시키고 죽음을 당한 곳, 독도는 조선의 땅이라고 확인시킨 안용복이 감금당한 곳, 최익현 선생이 끌려가서 단식 분사한 곳이 이곳 대마도입니다. 3-4세기 또는 그 이전부터 대마도에 한반도인들이 살았다는 역사적 근거가 뚜렷하며, 오늘날에도 대마도에는 본토에 없는 성씨들이 많습니다. 그 성씨의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성이 신라계임을 밝힙니다. 대마도 정권의 소오(宗)가는 백제계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국시대 때 木出島라 불리웠던 대마도가 애초에 우리 땅이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조선 세종 때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로 기세가 눌린 왜인들은 왜구라는 약탈자에서 교역 중개자로 변신하여 생계를 도모하였는데, 그 당시에도 그들은 조선국에 소속되기를 원하였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대마도 주민들은 한국과의 교류에 큰 기대를 걸고 있으며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 대단한 호감을 보입니다. 대마 역사민속자료관 관장이며 대마도의 향토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나가도메 히사에(永留久惠)씨는 그의 저서 <고대 일본과 대마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초까지, 일본과 한국 사이의 해협에 ‘이승만 라인’이라고 불리던 경계선이 있어서, 이 선을 넘어간 일본 어선을 한국 경비정이 모두 잡아갔던 시대가 있었다. 당시에 어선을 갖고 있었던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마도 어선들도 가끔은 이 선을 넘어갔다가 한국 경비정에 들키는 일이 있었지만 나포돼 끌려간 적은 없었다고 한다. 한국 경비정이 와서는 ‘당신들은 일본 사람인가, 대마도 사람인가?’라고 물어서, ‘우리는 대마도 사람이요.’하면, ‘빨리 돌아가라.’고 손짓을 해서 돌아오곤 했다는 것이다. 나포돼 간 다른 일본 어선들은 수십 개월씩 부산항에 억류되고 있었지만, 일본 사람과 대마도 사람을 차별해서 대우했던 것만큼은 확실했다.”
친한적 성격이 강한 대마도 토박이들은 한국 전망대를 명소로 여깁니다. 그들은 ‘본토 주민들은 일본국 국민이고 대마도 사람들은 대마국 국민이다’라고 말합니다. 내심으로는 그들의 대마국이 한국에 편입되기를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이즈하라쵸의 면사무소 앞 정원에 무궁화 네 그루가 심어져 있고, 매일 낮 12시가 되면 정오를 알리는 신호음으로 ‘무궁화 무궁화 우리 나라 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 나라 꽃 ....’ 하는 ‘무궁화’ 노래가 경음악으로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지금은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고향의 봄)로 바뀌었지만....., 대마도에서 ‘무궁화’ 노래를 들었던 사람들은 말합니다. “대마도 사람들은 대마국 국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