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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 <잘 살아 보세>를 아십니까?
2005년 미국의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는 2025년에 한국이 1인당 GDP 세계 3위, 2050년에는 세계 2위에 오를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습니다. 2022년이면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4위의 수출대국으로 올라설 것이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제3세계 국가들에게 대한민국은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모범을 보여주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중남미의 많은 나라들이 새마을운동을 배우려 우리나라를 찾아오고 있습니다.
50년 전만 해도 아프리카의 가나나 에티오피아 수준이던 대한민국이 이렇게 성장하게 된 비결은 어디 있을까요? 박정희 대통령 시절 널리 불렸던 <잘 살아 보세>(한운사 작사 / 김희조 작곡)라는 노래의 가사 속에 그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1.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
금수강산 어여쁜 나라 한마음으로 가꿔가며 / 알뜰한 살림
재미도 절로 부귀영화 우리 것이다 /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 잘살아보세
2. 일을 해 보세 일을 해 보세 우리도 한번 일을 해 보세 /
태양너머에 잘 사는 나라 하루아침에 이루어졌나 / 티끌도
모아 태산이라면 우리의 피땀 아낄까보냐 / 일을 해 보세
일을 해 보세 우리도 한번 일을 해 보세 / 일을 해 보세
3. 뛰어가 보세 뛰어가 보세 우리도 한번 뛰어가 보세 /
굳게 닫혔던 나라의 창문 세계를 향해 활짝 열어 / 좋은 일일랑 모조리
배워 뒤질까보냐 뛰어가 보세 / 뛰어가 보세 뛰어가 보세
우리도 한번 뛰어가 보세 / 뛰어가 보세>
지난 50년간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사는 이 노래 가사 그대로였습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자”면서 한 마음으로 온 국민이 떨쳐 일어났습니다. 잘 사는 선진국들이 ‘태양너머의 나라’로 아득하게만 여겨지던 시절, “그들인들 하루아침에 잘 살게 됐느냐”면서도 그들을 따라잡겠다고 일어섰습니다. 남들이 걸어갈 때 우리는 뛰어갔고(압축성장), 나라의 창문을 활짝 여는 마음으로 해외로 나가 외국과 경쟁했으며 그들의 좋은 점을 받아들였습니다(개방).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의 부모님, 조부모님 세대의 피와 땀과 눈물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후손들에게 자유롭고 번영된 조국을 물려주기 위해 평생 노력하신 그 분께 이 책을 바치면서, 후손들에게 더 좋은 대한민국을 물려주기 위해 우리 세대 또한 열심히 분투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1. 대한민국 이전의 한국경제
- 6.25 전쟁으로 경제시스템 완전 붕괴
“상업에서의 화신(和信),공업에서 경성방직의 확장·발전은 결코 한낱 사실만이 아니요, 뒤에 오는 대군(大軍)의 척후(斥候)임이 확실하다.”
1935년 4월14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의 글 <실업과 정신수양>의 일부입니다. 최전선(最前線)에 나타난 한 무리의 척후병들이 그 뒤를 이어 대군이 나타날 것을 예고하듯이, 이제 막 조선 땅에 나타나기 시작한 소수의 민족기업들은 언젠가는 세상을 주름잡는 기업들의 등장과 융성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광수가 이 글을 쓴 지 10년 후, 우리 민족은 일제(日帝)로부터 해방됐습니다. 하지만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경제면에서는 엄청난 혼돈의 시작이었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경제는 철저하게 일본에게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식민지 말기 조선에 있는 주요 회사 자본금의 약 80%가 일본인 소유였고, 기술자의 약 81%가 일본인이었습니다. 1939년 기준으로 조선은 수출의 약 74%, 수입의 약 89%를 일본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해방과 함께 일본인들이 일본땅으로 돌아가면서 공장과 기업은 멈추어섰고, 일본과의 경제관계가 단절됐습니다.
일제가 폈던 ‘남농북공(南農北工)’의 경제정책은 혼란을 더했습니다. 해방 직후 남한은 쌀의 69.2%, 보리의 85.7%를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농사에 필요한 비료공업은 모두 38선 이북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북한은 화학공업의 82%, 금속공업의 90%, 발전(發電)량의 92%을 점하고 있었습니다. 지하자원도 북한이 훨씬 풍부해 금은광의 73%, 철광의 99.9%, 무연탄의 97.7%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1946년의 제조업 생산량은 식민지 시기 최고수준에 달했던 1939년 대비 25%수준으로, 농업생산량은 1940~1944년 평균생산량의 86.5%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발전을 위한 힘겨운 노력이 시작됐습니다. 1949년 정부는 ‘산업부흥 5개년계획’과 ‘5개년 물동(物動)계획’을 내놓았습니다. 이는 초보적이긴 해도 경제발전을 위한 최초의 정부차원의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생 대한민국의 경제가 막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공보처 조사에 의하면 한국전쟁 동안의 총 피해액은 4105억9000만환으로 1953년 국민총생산 4818억환의 85%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실물자산의 파괴만을 고려한 것으로 인명피해에 따른 노동력의 손실, 경제시스템의 붕괴에 따른 경제혼란 등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2. 1950년대의 한국경제
- 미래를 위해 착실하게 투자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군정기(美軍政期)나 1950년대에 한국경제는 미국 등 국제사회의 원조에 크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이 해방~6·25 발발 전까지 제공한 원조는 총 4억 3400만 달러, 1950년대 10년 동안 제공한 원조는 총 24억1000만 달러에 달했습니다. 1957년의 경우 이러한 원조액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3%나 됐습니다. 나라의 재정은 미국의 원조물자를 매각해서 충당한 자금인 대충(對充)자금으로 운영됐는데, 1954~1959년 정부 총세입의 44.8%나 차지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미래를 위한 착실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농지개혁입니다. 이승만 정권은 “농지개혁이야말로 공산당을 막는 최량(最良)의 길”이라는 인식 아래, 1950년 농지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농지개혁은 지주로부터 연간생산량의 1.5배의 가격으로 정부가 토지를 매수한 후 소작농들에게 5년에 걸쳐 상환토록 하는 유상(有償)몰수-유상분배의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전체 농지의 92.4%가 자작지(自作地)가 됐는데, 이는 전후(戰後) 맥아더사령부의 농지개혁으로 전체 농지의 90%가 자작지가 된 일본의 성과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농지개혁으로 전(前) 근대적인 지주제가 완전히 해체됐습니다. 농민들이 자기 땅을 갖게 되면서 농업생산성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농지개혁으로 자유롭고 자립적인 경제주체가 된 농민들은 가난 속에서도 자녀교육에 힘을 쏟았습니다. 정부가 농지를 수용하면서 지가(地價)증권의 형태로 지주에게 보상한 20억원의 대략 절반 가량이 지주의 손을 떠나 산업자본으로 전환됐습니다. 이 모든 것이 1960년대 이후 경제발전의 토양이 됐습니다.
지난 2004년 8월, 한 국내 신문이 룰라 당시 브라질 대통령을 인터뷰했습니다. 기자가 “브라질처럼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에 어째서 5000만명이 넘는 절대빈곤층이 존재하는 겁니까”라고 묻자, 룰라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한국은 과거 1950년대에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했고, 아직도 그것이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둘째, 교육혁명과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양성입니다. 1947년 15세 이상의 인구 가운데 중·고등학교 졸업자는 4.4%, 대학 졸업자는 0.6%, 정식 교육을 받은 자는 20%에 불과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의무교육제를 도입하고, 정부 예산의 10%이상을 교육에 투자했습니다. 이승만 정권 기간 중 초등학생은 2.6배, 중학생은 10배, 고등학생은 3.1배, 대학생은 12배가 늘어났습니다. 가난했던 시절이지만, 1950년대 매년 600명 이상이 미국 등 선진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와 함께 행정고시, 미국 연수 및 유학 등을 통해 새로운 전문기술관료(테크노크래트)들이 양성됐습니다. 이들은 이미 1950년대 후반에 3개년 경제계획안을 수립, 국가경제발전의 청사진을 마련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셋째, 원자력에 대한 투자입니다. 1956년 방한(訪韓)한 미국의 시슬리 박사로부터 원자력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가난한 나라 살림에도 불구하고 1959년 당시로서는 거액인 73만 달러를 들여 시험용 원자로를 도입했습니다. 미국으로 유학생을 파견했고,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정부에 원자력을 관장하는 장관급 부서인 원자력원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 등 세계 각국에 원자력발전소를 수출하는 ‘원자력 강국’ 대한민국의 출발이었습니다.
3. “번영의 터전을 닦읍시다”
- 함보른 탄광의 눈물, 근대화 씨앗이 되다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경제원조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이승만 정부와 그 뒤를 이은 장면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수립, 자립경제 건설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4·19 등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그러한 노력을 좀처럼 실천에 옮겨지지 못했습니다.
1961년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조국근대화’를 내걸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집권 초기에는 이승만 정부나 장면 정부, 그리고 당시 다른 제3세계 국가들처럼 수입대체산업 육성을 통한 자립경제건설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자본도 기술도 없는 처지에서 경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1963년이 되면서 예기치 않게 면직물·가발·합판 등 경공업 제품의 수출이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미국·일본 등 선진국에서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이 사양(斜陽)산업이 되면서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에 바탕을 둔 한국산 경공업 제품들이 경쟁력을 갖추게 됐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외지향적 수출주도형 경제로 일대 방향 전환을 단행했습니다. 1964년 수출이 1억 달러를 돌파하자 이에 자신감을 얻은 정부는 대통령이 주재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매월 개최하는 등 수출증대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파독(派獨) 광부·간호사들과 만나 눈물을 쏟은 것이 이때의 일입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일하려 해도 일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일손이 모자라는 서독에서 광부와 간호사를 모집한다고 하자 앞을 다투어 서독행(行)을 택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대학 재학생 이상의 고학력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광부들은 지하 1000m가 넘는 막장에서 땀을 흘렸고, 간호사들은 독일 오지의 보건소와 병원에서 시체를 닦고 노인들의 수발을 들었습니다.
1964년 12월 10일 함보른탄광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고국의 대통령과 영부인을 맞아 흐느끼는 광부와 간호사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광원 여러분, 간호원 여러분. 모국의 가족이나 고향 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박 대통령은 말을 끝맺지 못했습니다. 강당 안은 울음바다가 됐습니다. 광부와 간호사들도 울었습니다. 사진기자들도 카메라를 내려놓고 통곡했습니다. “각하, 손 한번 쥐게 해 주세요”라면서 몰려드는 광부들에게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이 해 줄 수 있는 선물은 국산 파고다 담배 500갑이 전부였습니다.
통역관으로 박 대통령을 수행했던 백영훈 박사는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광부, 간호사들과 함께 흘린 눈물이 조국근대화의 시발점이었다” 고 회고했습니다.
4. 현실이 된 정주영 회장의 꿈
- 육지에는 자동차, 바다에는 우리나라 배가
1967년 7월 1일, 제6대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박정희 대통령은 재미있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한복 저고리에 맨발을 한 농부 차림의 박정희 대통령이 우마차를 끌고 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우차금동상(牛車金銅像)’이었습니다. 우마차에는 ‘세멘트’라고 적힌 자루, ‘영농자금’이라고 적힌 돈주머니, 어선, ‘중소기업’이라고 적힌 공장 등의 모형이 실려 있었습니다.거기에는 내세울만한 산업이라고는 농수산물과 시멘트공업이 전부이던 이 나라의 초라한 현실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 10억 달러 수출목표를 달성한 후 정부는 1972년에 ‘1980년 수출 100억 불, 1인당 국민소득 1000불’을 새로운 목표로 제시했습니다. 이를 위해 1973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1월 ‘중화학공업 선언’을 했습니다. 이런 정부정책에 발맞추어 현대그룹 등 국내 대기업들은 철강·조선(造船)·자동차·석유화학·전자·기계산업에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워하는 임원들에게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말이야. 육지에는 우리나라의 자동차가, 바다에는 우리나라의 배가 떠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어.”
꿈은 컸지만, 배를 지을 조선소도, 돈도 없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끈질긴 협상 끝에 영국과 스위스에서 1억 달러의 차관을 얻어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 금융권에서 수주실적을 요구하자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와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만 들고 그리스로 날아가 리바노스 회장에게 260만 톤급 유조선 2척을 수주 받은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 후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를 건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배를 건조하기 시작했습니다. 1974년 현대가 만든 첫 번째 배가 인도됐습니다.
1967년 설립 이후 포드 자동차와 기술제휴를 맺고 ‘코티나’를 조립 생산하던 현대자동차가 고유모델 개발에 나선 것은 1972년이었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 GM사는 “현대자동차가 고유모델을 개발해 그 차를 수출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비웃었습니다. 현대자동차 기술책임자마저 “코티나 조립 도면조차 제대로 카피하지 못하는 실력으로 어떻게 고유모델을 설계해 만들겠느냐”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하지만 1975면 말 첫 국산모델 ‘포니’가 나왔습니다. 일본 미쓰비시사와 기술제휴하긴 했지만, 국산화율 90%인 최초의 국내 고유모델이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고유모델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1976년 7월에는 남미 에콰도르에 포니 5대가 수출됐습니다. 자동차의 첫 해외수출이었습니다.
2003년 한국은 일본을 누르고 세계 1위의 조선대국으로 우뚝 섰습니다. 오늘날 5대양을 누비는 배의 30~40%가 한국에서 만든 배입니다.
2009년 현대-기아차는 생산대수 기준으로 세계 5위의 자동차업체로 성장했습니다. 2010년도 한국 자동차의 해외 수출량은 230만대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2020년에는 현대-기아차가 일본의 도요타, 독일의 폴크스바겐, 미국의 포드와 함께 세계 4위권의 자동차회사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육지에는 우리나라의 자동차가, 바다에는 우리나라의 배가 떠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다”던 정주영 회장의 꿈은 오늘날 현실이 됐습니다.
5. ‘가난은 나의 적’
- 전설적 새마을운동 지도자 하사용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공업화와 함께 근면·자조·협동을 기치로 내건 새마을운동이 농촌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추진됐습니다. 정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도 있었지만, 새마을운동의 진정한 원동력은 5000년 찌든 가난에서 벗어나 보려는 이 나라 민초(民草)들의 처절한 염원에서부터 나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하사용씨입니다.
1930년 가난한 8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중퇴한 후 열 살 때부터는 고물수집, 엿장사, 나무장사, 채소장사 등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뭐든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농사라면 벼나 보리농사가 전부이던 시절, 하사용씨는 어려서부터 화교들이 하는 채소농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땅이 없었습니다. 1957년 그는 3년간 머슴살이를 해서 새경으로 받은 쌀 15가마로 밭 270평을 사고, 밭 한켠에 두 평 남짓한 움막을 지었습니다. 이 땅에서 그는 채소농사를 시작했습니다. “반드시 이 놈의 가난을 이겨내리라”고 결심한 그는 미친 듯이 일을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밭에 채소를 심은 후 콩기름을 바른 종이를 씌워서 보온을 하는 농법을 개발했습니다. 이 방법은 후일 우리 농촌 곳곳으로 전파(傳播)됩니다. 중간에 폐결핵에 걸리기도 했지만, 병마(病魔)도 그를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소유한 땅은 1970년에는 3100평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그는 1970년 전국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농특사업) 경진대회에서 1등을 했습니다. 경진대회가 끝난 후 그에게 1000만원의 포상금이 내려왔습니다. 2만평의 땅을 살 수 있는 큰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돈을 받기를 거부했습니다. “내 힘으로 가난을 극복하고 말겠다는 결심을 허물고 싶지 않았다”는 것과 “그런 돈을 받고서 어떻게 이웃들에게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1970년대 내내 하사용씨는 ‘새마을운동’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자신의 가난극복성공담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비닐하우스 영농기술을 선구적으로 도입, 전국에 확산시켰습니다. 박정희 시대가 저문 이후에도 그의 새마을운동은 계속됐습니다.
270평으로 시작된 하사용씨의 농토는 2000년대 초에는 1만2000여평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렇게 부자가 됐지만, 그는 길거리에 버려진 종이컵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종이컵을 주어다가 흙을 담아서 육묘(育苗)를 했습니다. 그래서 번 돈이 연간 1000만원에 달했습니다. 하사용씨가 가진 통장은 300여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8순의 하사용씨는 지금도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정신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6. 열사의 사막에 꽃핀 한국혼
- 사우디 국왕을 놀라게 한 ‘횃불신화’
1970년대 중반 우리나라 건설업체들은 오일달러가 넘쳐나는 중동(中東)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1960년대 중·후반 월남전이 한창이던 베트남에서 건설이나 운수업으로 기틀을 다진 회사들이었습니다. 중동으로 간 건설노동자들 가운데는 서독으로 파견됐던 광부나 월남전 참전용사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활약으로 한국은 제1차 오일쇼크의 충격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삼환기업이 1974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시(市) 미화(美化)공사를 진행할 때의 일입니다.사우디 내무부와 제다시에서는 150만 명의 이슬람 교도들이 몰리는 하지(성지순례)를 앞두고 성지(聖地) 메카 쪽으로 향하는 2㎞의 공항로 확장공사를 40일 내에 완공해달라고 삼환에 요구해 왔습니다. 공기(工期)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삼환은 촉박한 시간을 맞추기 위해 제조업체에서나 볼 수 있었던 8시간 3교대 작업시스템을 도입해 24시간 쉬지 않고 공사를 진행시켜 나갔습니다. 밤에는 수 백 개의 횃불을 세우고 야간작업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파이잘 사우디 국왕이 제다에 왔습니다. 그는 끝없이 이어진 횃불을 보고 “저게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한국의 삼환기업이 공기를 맞추기 위해 야간에도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대답을 들은 국왕은 크게 감동받았습니다. 파이잘 왕은 “후속공사인 제다시 미화 2차공사를 삼환에 주라”는 특명을 내렸습니다.
이후 삼환은 사우디 왕궁과 왕세자궁, 사우디 국립상업은행, 사우디 보험청, 사우디 알마말 상업센터, 사우디 메카-메디나 고속도로, 사우디 킹칼리드 군사도시, 사우디 메디나 공항 공사 등을 수수하면서 승승장구했습니다. 삼환에 대한 신뢰는 사우디에 진출하는 다른 한국 건설업체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면서 ‘중동특수(特需)’를 불러왔습니다.
2010년 11월, 한국의 해외건설 수주액수가 600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2010년 연말까지 700억 달러 돌파 예정). 해외건설의 성격도 과거와 많이 달라졌습니다.
단순 토목공사를 넘어 한국 건설업체들은 이제 담수(淡水)시설, 복합발전소, 산업단지 등 고급 플랜트 수출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2009년 12월에는 총 400억 달러(47조원) 규모의 원자력발전소를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에서 수주했습니다.
카타르에서는 2010년 11월 현재 현대건설이 47억 달러어치의 공사를 진행 중입니다. 현대건설 직원 350여명이 방글라데시, 인도, 네팔, 중국, 필리핀 등에서 온 2만3000여 명의 근로자들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7. 이병철의 반도체 투자
- “언제고 일본을 능가해야 할 것 아니가”
경제발전 과정에서 한국의 모델케이스는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의 성공을 모델로 삼고, 일본의 자본과 기술에 의지하면서도, 우리 기업인들에게는 “언젠가 일본을 뛰어넘고 말겠다”는 극일(克日)의 의지가 있었습니다.
1970년대 삼성전자가 수원에 공장을 짓기 시작할 때의 일입니다. 이병철 회장은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공장부지를 43만 평으로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계열사 사장들은 “규모에 비해 공장 부지가 너무 크다”며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본 히타치 공장이 40만 평이다. 우리가 사업을 했으면 언제고 일본과 일본기업을 능가해야 할 것 아니가. 그러니 저기보다 3만 편이라도 더 커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이가. 안 그렇노. 어디 내 말이 틀렸노.”
1988년 1월, 삼성전자는 4M D램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도시바와 히타치, 미국의 샤도사 등은 이미 이 제품의 양산(量産)을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공장으로 들이닥쳤습니다. 당시 이 회장은 폐렴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윤우 공장장(현 삼성전자 부회장), 연구소장, 진대제 박사 등이 이 회장을 맞이했습니다. 이 회장이 노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 봤제?
이윤우 공장장이 한참 만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네, 봤습니다.”
그날 아침 신문에는 “우리나라 반도체는 전부 일본 것을 베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후발주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의 노기는 가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일본 것을 베꼈다는 것이 사실이가? 기껏 남의 거 베끼려 평생을 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줄 아나? 영국은 증기기관 하나를 개발해서 세계를 제패했다. 우리 반도체도 그런 역할 하라고 시작한 거 아이가?”
진대제 박사가 “반드시 16M D램을 독자개발해서 다시는 모방했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한 후에야 이병철 회장의 노기가 가셨습니다. 한 달 후 이 회장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2010년 현재 삼성전자는 D램 반도체분야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2위는 우리나라의 하이닉스입니다. 삼성전자는 2009년 매출액 기준으로 세계 최대의 전자업체로 등극했습니다.
지금 40대 이상 세대가 어린 시절 ‘워크맨’이라고 통칭되는 휴대용 녹음기를 사러 용산전자상가에 가면, 매장에서는 일본의 소니 제품을 권했습니다. 그 시절 일본에 갔다 오는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사오는 것이 ‘코끼리 전자밥솥’이었습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오래 전에 일본 가전업체들을 추월했습니다. 삼성은 2006년 연속으로 미국TV시장에서 소니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습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소니의 하청업체에 불과했던 삼성이 이러한 역전극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과감한 선제적 투자와 기술혁신에 힘입은 바 컸습니다. 2000년 소니의 시가총액(주식 총수에다 주가를 곱한 것)은 삼성전자의 네 배였으나, 2006년에는 삼성전자가 소니의 두 배가 됐습니다. “언제고 일본과 일본기업을 능가해야 한다”던 이병철 회장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8. 민주화로 이어진 경제발전
- 3저 호황과 민주화의 완성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한국경제는 비약적인 성장을 했습니다. 1961년 89달러이던 1인당 GNP는 1979년에는 1510달러로 17배가 늘었습니다. 1961년 당시 1인당 GNP는 전세계 125개국 중 101번째로 방글라데시나 에티오피아 수준이었으나, 1979년에는 세계 49위 수준으로 올라섰습니다. 1965년 무렵 한국의 1인당 GNP는 필리핀의 1/2수준이었지만, 1979년에는 필리핀의 3배에 달하게 됐습니다. 수출은 1961년 4000만 달러였던 것이 151억 달러로 3775배나 늘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산업구조의 변화입니다. 1961년 당시 우리나라는 농림어업 등 1차 산업 종사자가 전체 인구의 39.1%를 차지하는 전형적인 농업국가였으나, 1979년에는 2차산업 인구가 38.8%를 차지하는 공업국가로 변모했습니다.
이러한 성장에 힘입어 1961년 48.2%에 달하던 절대빈곤층은 1980년에는 9.8%로 줄어들었습니다.
전두환 정부는 박정희 정권이 이룩한 성과를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전두환 정부는 물가안정에 힘쓰고,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줄이며, 시장을 개방했습니다. 산업합리화정책을 통해 중화학공업 중복 투자를 정리하고 사양산업을 퇴출시켰습니다.
1986~1988년 한국경제는 전에 없는 대호황을 누렸습니다. 이 기간 동안 연(年)평균 경제성장률은 12%를 넘었고, 경상수지 누적 적자는 292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이는 저(低)달러·저유가·저금리라는 국제적 3저 현상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지만, 박정희 정부 시절의 중화학공업 투자와 전두환 정부의 산업합리화 정책이 선행(先行)됐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경제발전은 민주화의 물적(物的) 토대가 됐습니다. 미국의 언론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애덤 쉐보르스키와 페르난도 리몽기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1인당 3000달러에서 6000달러의 소득 수준에서 민주주의 전환을 시도한다면 성공하리라는 결론이 나온다”면서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들어섰을 때, 무엇이 민주주의를 지속가능하게 하는가’에 대한 역사적으로 가장 간단하고 훌륭한 대답은 국가의 부(富)”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가 꼭 그렇습니다. 2·12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 약진하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도전이 격화되기 시작하던 1985년 한국의 1인당 GDP는 2229달러였습니다. 1987년 6월 사태의 결과 만들어진 직선제 헌법에 따라 선출된 노태우 정권이 점진적으로 민주화를 향해 가던 1990년 당시 한국의 1인당 GDP는 5886달러였습니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고 ‘문민(文民)’민주주의가 안착한 1995년 한국의 1인당 GDP는 1만823달러였습니다 (1995년 가격 기준). 참고로 말하면 영국에서 일반 국민 전체가 선거권을 갖게 된 1928년 영국의 1인당 GDP는 1990년 미국 달러 기준으로 5115달러였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은 영국과 비슷한 경제수준에 이르렀을 때 민주화를 이룬 셈입니다.
1988년 건국 40주년을 맞는 대한민국은 서울올림픽을 통해 그동안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성취를 세계에 자랑했습니다.
9. 경제위기를 넘어 세계로
- 2010년 수출 세계 7위, 경제규모 13위
1995년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섰고, 1996년에는 선진국 경제클럽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위험이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해마다 계속된 격렬한 노사분규는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투자감소로 이어졌습니다. 김영삼 정권이 추진한 설익은 세계화정책은 자본시장의 자유화로, 다시 단기외채의 급증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1997년 7월 태국의 바트화(貨) 폭락으로 촉발된 아시아 외환(外換)위기를 계기로 한국은 그해 11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IMF는 구제금융의 대가로 혹독한 구조조정을 요구했습니다. 그 결과 1998년말까지 기존의 30대 그룹 중 16개 그룹이 사라졌습니다. 1999년 초 한때 실업자는 180만 명, 실업률은 8.6%에 달했습니다. 전에 없는 위기 상황 속에서 국민들은 하나로 뭉쳤습니다. 전국적으로 ‘금(金)모으기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젊은 부부는 어린 아기의 돌반지를 들고 나왔고, 80노부부는 평생 간직했던 결혼반지를 내놓았습니다.
IMF의 긴급지원으로 외환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자 한국경제는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경제회생의 동력이 된 것은 수출, 그 중에서도 중화학공업 수출이었습니다. 2001년 우리나라는 IMF차입금을 전액 상환함으로써 IMF관리체제에서 벗어났습니다.
IMF사태는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경제가 한 단계 성숙해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1990년대 초반부터 기업체질 강화에 나섰던 삼성전자를 비롯해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LG전자 등 대기업들은 IMF 이후 세계를 무대로 하는 글로벌기업으로 급성장했습니다. 여기에는 오너 경영 특유의 신속한 의사결정과 과감한 선제(先制)투자가 큰 기여를 했습니다.
성장보다 분배를 앞세우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하에서 한국경제는 세계평균을 밑도는 낮은 성장률 때문에 고전(苦戰)하기도 했습니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쳤습니다. 하지만 IMF사태를 이겨낸 한국경제는 그 가운데서도 선전(善戰)하고 있습니다. 2009년에 글로벌 경제위기의 여파로 전 세계 교역량이 12.2% 감소하는 가운데도 한국의 수출은 0.04% 증가하면서 수출액 3635억 달러를 기록한 것이 그 예입니다 (세계 9위). 2010년 상반기에 한국의 수출순위는 세계 7위로 올라섰습니다.
IMF의 전망에 의하면 2010년 한국의 GDP는 9863억 달러로 세계 14위를 기록하고, 2011년에는 1조 달러를 넘어서면서 13위로 올라설 것이라고 합니다. 2010년 1인당 GDP는 2만264달러로 세계 29위에 오를 것으로 전망됐습니다.
대한민국은 물질적인 면에서만 선진국 수준에 도달한 것이 아닙니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국가별 국민소득과 교육수준, 평균수명 등을 종합 평가해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HDI) 순위에서 한국이 2010년 세계 12위를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성장의 결과 2009년 대한민국은 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들 가운데 유일하게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2010년 11월 우리나라는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의 세계경제질서를 재편하는 G20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 세계의 중심국가로 우뚝 섰습니다
|작성자 advance2012
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귀로 흘려 듣는 정보보다
이렇게 서면으로 쓰여진 것이 실질적인 도움이 되더군요
꼼꼼히..읽어 볼께요..감사합니다..행복한 주말되시구요~
제가 더 감사 합니다. 즐거운 주말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