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4일,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심장마비로 타계
2009년 8월 4일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1952-2009)씨가 세상을 떠났다. 조씨는 4일 오전 11시30분쯤
전남 해남군 계곡면 법곡리 자택 현관 앞에 쓰러진 채 부인 이성란(44)씨에게 발견됐다. 심장마비 증세를
보인 조씨는 119구조대에 의해 해남종합병원으로 옮겨져 심폐소생술을 받았으나 낮 12시45분쯤 세상을
떠났다.
2010년 8월 대한해협 횡단 30주년을 기념한 2차 횡단 도전을 앞두고였다. 대한해협 2차 횡단 계획을
추진하던 조씨는 지난 5월부터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의 한 펜션을 캠프 삼아 훈련을 계속하다가 최근
해남 자택으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
해남 시골뜨기 조씨가 수영과 인연을 맺은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다. 여름방학 때 집안 심부름으로
제주도에 갔다가 우연히 수영 경기를 본 것이 그를 수영 선수의 길로 이끌었다. 당시 경기에서 1등을
차지한 선수들이 자신보다 나을 게 없다는 느낌이 들 만큼 물속을 헤집는 데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조씨는 해남고 1학년 때인 1968년 말 자퇴서를 내고 무작정 상경했다. 오직 수영으로 이름을
떨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구두닦이, 간판집 점원 일 등을 하며 YMCA수영장에서 실력을 갈고 닦았다.
하지만 경력도 없고 억센 전라도 사투리의 시골 소년은 서울 선수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돈이 없어 회원증 유효기간을 위조해 다니다 적발돼 쫓겨날 뻔한 적도 있었다.
조씨의 데뷔 무대는 1969년 6월 전국체육대회 서울시 예선전이었다. 학교에 적(籍)이 없어
무소속으로 대학·일반부 자유형 400m와 1500m에 출전했다. 수영복이 없어 사각팬티 바람으로 나갔는데
두 종목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이를 계기로 양정고에 스카우트돼 본격적인 수영 선수로서 수업을
받았다. 국내무대를 주름잡으며 국가대표로 발탁됐고, 고려대 경영학과 입학추천장까지 거머쥐었다.
그가 처음으로 ‘아시아의 물개’에 등극한 것은 1970년 방콕 아시안 게임 때였다. 원래 서울에서 개최될 뻔
했으나 경제적 부담을 지지 않기 위해 개최권을 반납하고 사정사정하여 방콕으로 미뤄서 열린 대회였다.
한국 선수단이 입장할 때 방콕 시민들이 험악한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니 선수단 분위기도 그렇게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나이 열여덟, 양정고 2학년 그리고 정식으로 수영 시작한지 1년 된 선수
하나가 일을 냈다. 자유형 400미터와 1500미터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것이다. “수영만큼은 일본에 안 된다.”
는 슬픈 신화를 박살낸 쾌거였다.
1970년 방콕에서 개최된 제6회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50년 한국 수영사상 최초로 일본을 누르고
2개의 금메달(남자자유형 400m, 1,500m)을 따낸 조오련 선수가 2개의 금메달을 들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짖고 있다.
그런데 그가 첫 금메달을 딴 순간은 역사에 남아 있지 않다. 설마 조오련이 금메달을 딸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기자들이 아무도 경기장을 찾지 않았던 것이다. 뜻밖의 소식에 기절초풍을 한 기자들이 떼를 지어
호텔로 몰려왔고 조오련은 때아닌 수영복을 입고 호텔 복도에서 ‘영광의 순간’을 촬영해야 했다. 아직
앳된 표정이 가시지 않은 조오련은 그렇게 전 국민에게 이름을 알렸다
4년 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같은 종목 2연패를 달성했다. 그리고는 수영선수로서는 은퇴할
나이인 26세에 출전한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선 접영 200m 동메달을 따낸 뒤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접었다. 고인은 1970년 대한민국 체육상, 1980년 체육훈장 청룡장 등을 받았다.
1974년 제7회 테헤란 아시안게임 수영 자유형 1500m에서 우승한 후 환호하는 모습.
1500m 우승 후 시상대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조오련 선수
한국신기록만 50번 갈아치웠던 조씨는 현역 무대를 떠나고 나서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1980년 8월 11일
사상 최초로 대한해협, 부산 다대포에서 대마도 서쪽까지 55㎞ 바닷길을 13시간16분10초 만에 헤엄쳐
건넜고, 2년 뒤엔 도버 해협을 9시간35분 만에 건넜다.
1980년 대한해협 종단 성공
대한해협 종단 성공 후 환영 퍼레이드
조오련은 대한해협을 처음 건넜던 1980년 가수 송대관의 소개로 사별한 첫 번째 부인을 만나 결혼했고,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았다. 대한수영연맹 이사를 지냈고 ‘조오련 수영교실’을 열기도 했다. 방송 시트콤에
나와 코믹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는 둘째 아들 성모씨가 자유형
1500m에서 은메달을 따는 경기의 TV 해설자로 나오기도 했다. 2005년엔 두 아들 성웅, 성모씨와
울릉도부터 독도까지의 93㎞를 18시간 만에 횡단했다.
2005년 8월, 조오련 두 아들과 함께
2005년 8월, 독도까지 대장정 후 파이팅을 외치고 있는 모습
2008년 독도 33바퀴 헤엄쳐 돌기 프로젝트에 성공하는 등 잠시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수영
인생의 마지막 도전으로 2010년에 다시 대한해협을 건널 작정이었다. 최근까지 제주도에 캠프를 차리고
준비해 왔다. 하지만 훈련비 마련 등을 놓고 고민도 적지 않았다. 결국 "대한해협 횡단 30주년을 맞아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겠다. 한국인의 저력과 함께 60세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도 보여주겠다.
내 수영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온몸을 던지겠다"던 조오련의 생전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